69화
드디어 찾아온 퇴근 시간.
석실을 나온 발레리는 드레스 앞자락을 움켜쥔 채 나선형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켄드릭 또한 빈 접시가 놓인 쟁반을 들고 그녀의 뒤를 따랐다.
“무도회 분위기, 아무래도 너는 질색할 것 같은데…. 발레리, 왜 가기로 한 거야?”
켄드릭의 걱정 어린 질문에, 발레리는 허공에 한숨을 푹 내쉬었다.
“또 그 수명 다한 사람처럼 간곡히 부탁하시길래. 직접 가고 싶은데 못 가서 답답하신가 봐. 왜 굳이 나인지는 묻지 마라. 나도 모르니까.”
황녀님께서 또 ‘마지막’ 타령을 하신 걸까. 그런 거라면 발레리는 은근히 마음이 약하니 수락했을 만도 했다.
“…많이 주목받을 수도 있는데 괜찮겠어?”
“빡세게 꾸며주신다는 것 같아. 아무도 못 알아보게.”
“응? 꾸민다고 그게 될까?”
“나도 걱정돼. 화장하고 드레스 입어도 어차피 나인데, 근위대 장교들 중에 누군가는 알아보지 않을까….”
켄드릭은 대충 짐작이 갔다. 발레리의 불안감이 어디서 기인했는지.
아마 건국제 무도회엔 지방 곳곳의 귀족들이 참석할 거고, 개중에는 펠런의 표적이었던 이들도 분명히 있을 터다.
그런 장소에서 발레리의 얼굴이 불특정 다수에게 알려지는 건 마뜩잖은 일이었다.
도적이라면 본능적으로 찝찝할 것 같았다. 아직 정체가 드러나지 않았고, 아무리 가짜 신분으로 위장하고 있다 하더라도.
더 걸리는 게 있다면, 그녀의 외모였다.
‘발레리는 안 꾸며도 눈에 띄는데, 꾸미면 더 주목받지 않을까…. 키 때문이라도 한 번씩 다 쳐다볼 텐데 걱정이네.’
“…뭘 그렇게 골똘히 생각하냐? 그러다 접시 깨겠다.”
발레리는 생각에 잠긴 채 계단을 오르는 켄드릭을 향해 물었다. 그가 든 쟁반에는 저녁식사 후 남은 접시들이 산처럼 쌓여 있었다.
“아…. 아니야. 발레리, 우리 파트너 된 기념으로 합 좀 맞춰 볼까?”
“뭐야, 춤 연습하자고? 지금 당장?”
“응. 채플 후원에서 기다려. 접시 주방에 빨리 갖다 주고 올게.”
켄드릭은 속도를 내서 나선형 계단을 먼저 올라갔다. 접시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채플에서 빠져나온 발레리는 후원의 나무 벤치에 앉아 그를 기다렸다.
비가 한동안 오지 않아서 그런가.
푹 찌던 오전에 비해 저녁 날씨는 쾌적했다. 노을빛이 빠져나간 보랏빛 하늘에도 별이 총총히 박혀 있었다.
주방에 다녀온 켄드릭은 전속력으로 뛰어 벤치 앞에 다다랐다. 그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턱끝에 매달린 땀방울을 훔쳐냈다.
“뭘 그렇게 빨빨거리면서 뛰어와?”
“…네가 오래 기다릴까 봐.”
켄드릭은 발레리의 손을 잡고 후원 잔디밭 한가운데로 이끌었다.
그리고 그녀와 반 발짝 거리에 우뚝 섰다.
그는 발레리의 드레스 차림에 다시 한번 경탄했다. 귀밑에서 어깨로 이어지는 곡선이 언제부터 이렇게 아름다웠던 걸까.
키는 훌쩍 컸어도 여전히 개구진 소녀 같다고 생각했는데, 어느샌가 건강하고 수려한 자태를 뽐내는 성숙한 여인이 되어 있었다.
‘아까도 석실 나올 때 문지기들이 수군거리면서 쳐다봤었는데…. 남들 눈에도 예쁜 건 매한가지겠지.’
“허리… 잡아도 괜찮을까?”
“당연한 거 아니야? 춤추려면 어차피 잡아야 하잖아.”
평소엔 어깨동무도 스스럼없이 하면서, 갑자기 숙맥처럼 구는 켄드릭이 조금은 우습게 느껴졌다. 고작 치마 한 겹 둘렀다고 여자 취급이라도 해 주려는 건가 해서.
켄드릭은 멋쩍게 웃으며 그녀의 허리와 손을 잡았다. 발레리는 그가 준비 자세를 갖추자마자 바로 배운 대로 스텝을 밟기 시작했다.
얼마 안 가 켄드릭의 입에선 감탄사가 나왔다.
“와, 발레리. 오늘 처음 배운 거 아니야? 어떻게 동작이 하나도 안 틀리지.”
“나 원래 몸으로 하는 건 빨리 배우는 거 알잖아. 검술도 가르쳐 봤으면서.”
그녀는 오늘 프리다에게서 배운 춤 동작을 하나하나 정확히 재현하고 있었다. 춤선이 부드럽지는 않았지만, 음악 없이도 박자가 딱딱 들어맞는 게 산뜻하고 경쾌했다.
발레리는 어딘가 멍해 보이는 켄드릭의 녹안을 쳐다보며 다음 연결 동작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러다 화들짝 놀라 움직임을 멈췄다.
켄드릭의 눈가에 점점 습기가 들어차더니 물방울 하나가 툭 떨어져 내렸다.
“…뭐야? 너 울어?”
“응?”
켄드릭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제 눈가를 훔쳐냈다. 눈물이 흐르는 걸 자각하지 못하고 있던 모양이었다.
“…무슨 일 있는 거야? 왜 그래?”
발레리는 충격에 휩싸인 얼굴로 그의 심기를 살폈다.
10년 전 와이어 숲에서 처음 만났을 땐 울보 꼬맹이였지만, 그 이후론 눈물을 보인 적이 거의 없었다. 가끔 실종된 형들 이야기를 할 때나 눈시울을 붉혔을 뿐.
“아흑…. 미안해. 하아….”
그의 울음보가 터지고 말았다.
켄드릭은 하염없이 눈물을 쏟아냈다.
발레리는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 하다가, 그를 안고 등을 살살 토닥였다.
“너 요즘 뭐가 이렇게 힘든 거야? 저번에는 술 먹고 새벽에 쳐들어오더니….”
“흑…. 나 이제 다 포기하고 싶어.”
갑자기 이게 무슨 소릴까. 발레리는 흠뻑 젖은 그의 눈꼬리를 드레스 소매로 슥 닦아줬다.
“뭐야. 뭘 포기한다는 건데?”
“…발레리, 난 어차피 안 될 거였나 봐.”
“알아듣게 좀 말해. 뭐가 안 되는데?”
“제국 총사령관이고 뭐고…. 이젠 그런 욕심은 다 버려야 할 것 같아.”
정말 어찌 된 영문인지 알 수 없었다.
총사령관 등극을 목표로 10년 동안 정진해서 황실 기사가 된 녀석이었다. 지금까지 쌓아 올린 걸 다 무너뜨리겠다는 건가. 대체 무슨 계기로….
“그 야심만만하던 켄드릭 프레이저 경은 어디 간 거야? 너 정말 무슨 일인지 말 안 할 거야?”
“그냥…. 여태까지 했던 게 다 부질없는 것 같아서.”
“야, 너 안 되겠다. 휴가 내서 좀 쉬고 와. 그동안 너무 앞만 보고 달려와서 지친 것 같네.”
아직 그를 토닥이고 있는 발레리의 눈빛엔 걱정이 가득했다.
켄드릭은 눈물을 그치고 그녀의 어깨 위에 팔을 둘렀다.
“발레리, 우리…. 영지로 다시 내려갈까?”
“…뭐야, 너 기사 그만두게?”
“같이 내려가자. 우리 거기서 예전처럼….”
“아니.”
발레리는 그의 가슴을 살짝 밀어내며 품에서 빠져나왔다.
“나는 여기 황궁에 있을 거야.”
“…왜?”
물론 임무 때문이지만, 그건 말할 수 없었다.
“그냥…. 황궁 좋잖아. 안정적으로 돈도 벌고.”
“그게 문제라면 우리 가문 기사로 들어오면 되잖아. 이제 신분도 생겼으니까….”
“아니야. 난 여기 있을래.”
발레리의 태도는 더없이 확고했다.
켄드릭은 여전히 젖은 눈으로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는 얼마 전부터 묵혀두었던 질문 하나를 꺼냈다.
“너 혹시…. 황태자 때문에 그래?”
켄드릭이 불쑥 황태자를 거론했다.
영지에 안 내려가고 황궁에 머무르려는 이유가 테렌스 때문인지, 그걸 묻고 있었다.
“야, 여기서 황태자 얘기가 왜 나와….”
발레리의 등줄기에 마른땀이 흘러내렸다.
모처럼 바람이 선선하게 부는 저녁인데, 몸속 어딘가에서 자꾸 열감이 올라오는 느낌이었다.
그나마 밤이 찾아온 덕에 얼굴이 달아오른 건 티가 나지 않았다.
“…그 사람한테 관심 있는 거 아니야?”
켄드릭이 그녀의 심기를 살피며 조심스레 되물었다.
아니었다.
정말 아니라고 확실히 대답할 수 있는 질문이었다.
불과 넉 달 전으로 시간을 돌린다면 말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발레리는 장담할 수 있었다. 황태자한테는 관심이 없다고. 정말 쥐뿔만큼도, 털끝만큼도, 눈곱만큼도 없다고. 황궁에 들어오기 전에는 어떻게 생겨먹었는지도 몰랐고, 심지어 이름조차 모르는 사람이었다고. 그에 대해선 궁금한 게 조금도 없었다고.
황궁 병사로 입대하고 나서도 분명 그는 미미한 존재였다. 재수 없게 찬바람 날리는, 까마득한 윗사람에 불과했다. 관심의 영역에서 한참 벗어나 있었다. 그녀가 황궁에 들어온 목적은 오로지 그의 여동생인 황녀와 황실의 보검이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관심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아니야. 그런 거.”
발레리는 켄드릭에게 대답하며 작게 흠칫했다.
곧바로 대답할 수 있었던 질문에, 너무 오래 뜸 들였다는 걸 자각해서다.
왠지 켄드릭을 똑바로 바라보기도 힘들었다. 마치 거짓말이라도 하고 있는 양.
정말 황태자에게는 볼일이 없는데.
황궁에 남아 있어야 할 이유로 단 한 번도 꼽아본 적이 없는 사람인데.
그걸 부정하는 게 뭐라고 이렇게 오래 걸렸는지.
“그래, 그게 아니라면 다행이고.”
“…다행? 다행일 건 또 뭔데.”
“그냥, 혹시나 해서.”
켄드릭도 그녀의 눈길을 피했다.
솔직히 그는 궁금했다. 황태자가 발레리와 어느 정도로 엮여 있는 사이인지.
하지만 막상 더 깊은 질문을 하려니 내키지 않았다. 생각보다 둘 사이가 더 깊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었다. 기쁨을 감추며 꽃다발을 받아들던 발레리의 모습이 자꾸만 눈에 선했다.
‘아…. 이러면 안 돼. 난 정말 둘 사이에 끼어들 명분이 없어. 궁금해하지 말자.’
얼마간의 침묵이 흘렀다.
발레리는 고개를 돌려 시계탑을 쳐다봤다. 곧 있으면 여덟 시를 알리는 종이 친다.
켄드릭을 다시 석실로 내려보낼 때가 됐다.
‘아마 황녀님께서 기다리고 계실 것 같네. 오늘도 얘랑 밤늦게까지 더 연습하실 테니까.’
그녀는 가만히 서 있는 켄드릭의 어깨를 툭툭 두들겼다.
“켄드릭, 내가 오래 지켜본 친구로서 얘기하는 건데.”
“…응?”
“포기한다는 말, 그렇게 쉽게 하지 말아.”
“…….”
“지금까지 네가 들인 노력이 아까워서 그래. 목표까지 너무 멀게 느껴질 순 있겠지만…. 조금만 더 버텨보자. 계속 가다 보면 지름길이 나올 수도 있는 거잖아.”
그녀의 까만 눈동자가 별빛을 받아 영롱하게 빛났다. 그 속에는 진심이 가득 담겨 있었다.
하지만 켄드릭은 그녀가 건넨 위로의 말을 덥석 받아들일 수 없었다.
‘발레리, 난 이미 너에 대한 마음까지 거스르고 지름길을 선택했어. 그런데…. 그게 막다른 길이었어.’
황녀에게 부탁해 어렵사리 독대한 황제는 그를 가차 없이 돌려세웠다.
대군을 이끌고 와이어 숲으로 출정하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라며. 다른 방법을 계획하고 있지만, 네가 끼어들 일은 아니라며.
과연 형들을 구할 다른 길이 있을지. 가다 보면 또 다른 지름길이 나오기는 할지. 정말 이대로 버티기만 하면 뭐라도 할 수 있는 건지.
‘여기서 벌써 무너지면, 발레리 네가 나한테 실망할 수도 있겠지. 황제가 마음을 바꿔서 그 계획에 날 써줄 가능성…. 거기에라도 걸어봐야 하는 걸까.’
“그래…. 버텨볼게. 어떻게든.”
“잘 생각했어.”
둘은 서로를 향해 웃어 보였다. 각자의 복잡한 속내를 최대한 감추며.
이렇게 둘의 첫 춤 연습에 마침표가 찍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