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화
서너 시간쯤 지났을까.
발레리는 야심한 시각이 돼서야 남자아이를 데리고 목적지 근처에 다다랐다. 후작가 인근은 소란스러웠다. 횃불을 든 기사들과 하인들이 총동원돼서 누군가를 애타게 찾고 있었다.
아이는 면목 없는 표정으로 분주한 그들을 바라봤다.
그리고 발레리에게 시선을 돌렸다.
“검 돌려줘서 고마워. 그리고 미안해. 싸움부터 걸어서.”
“그 말 언제 하나 했다. 오늘 내가 너 구한 거다? 나 없었으면 너 큰일 났을 수도 있었어. 그러니까 대가를 받아야겠어.”
“뭔데?”
“나한테도 알려줘. 네가 하는 그 검술.”
“그거야 나도 그러고 싶은데. 나 이제 성 밖으로 못 나올 것 같아.”
“내가 들어가면 되지. 그럼 잘 들어가 꼬맹이.”
“켄드릭이야.”
이미 뒤돌아서 가고 있는 발레리는 그에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켄드릭은 이내 기사들에게 발견됐다. 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가신들과 함께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눈이 새빨갛게 충혈된 유모는 켄드릭을 발견하자마자 품에 끌어안으며 울먹였다.
“도련님…. 흑흑…. 대체 어딜 다녀오신 거예요? 갑옷까지 갖춰 입고서. 저택은 또 어떻게 빠져나가신 거고요? 네?”
“음, 그게 어떻게 된 거냐면….”
켄드릭은 자신이 어떻게 탈출했는지 떠올려 봤다.
일단 아침부터 몸이 안 좋은 척을 했다. 유모에게 뜨끈한 닭고기 수프를 대령해오라고 생떼를 부리고, 가죽 갑옷을 재빨리 덧입은 뒤 검을 챙겨 2층 창문에서 뛰어내렸다.
프레이저 후작에게 중간보고를 마친 와이어 숲 경비대가 다시 근무지로 복귀하기 직전이었다.
켄드릭은 재빨리 그들의 짐말에 실린 상자에 숨어들었다.
실종 용사들의 무기를 수거할 때 쓰이는, 요즘 따라 매번 비어 있는 그 상자였다.
몸집이 또래에 비해 작은 덕에 상자에 쏙 들어가는 데 문제가 없었다.
기사들은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텅 빈 무기 상자 속에 후작의 막내아들이 숨어들었을 줄은.
닭고기 수프를 가져온 유모는 텅 빈 침대를 보고 당황했다. 그러다 활짝 열려 있는 창문을 보고 그릇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쨍그랑, 그릇 깨지는 소리와 함께 후작가가 발칵 뒤집혔다.
***
늦은 밤이 됐다.
켄드릭은 결국 후작 앞에 불려갔다.
후작의 방은 온통 난장판이었다. 그의 정신 상태를 고스란히 내비치고 있는 것처럼.
─짝.
그는 켄드릭이 다가서자마자 뺨을 매섭게 후려쳤다.
─짝.
반대쪽으로 한 대가 더 날아왔다.
두 뺨이 벌겋게 부어올랐지만, 켄드릭은 울지 않았다.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다.
모를 리 없었다. 자신의 오늘 행동이, 이미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두 개나 지닌 아비에게 용서받지 못할 행동이라는 걸.
그는 반성하는 얼굴로 눈을 내리깔았다.
그리고 잠시 뜸을 들였다.
켄드릭은 등 뒤에 숨겨뒀던 검을 마침내 후작 앞에 내보였다.
순간 다리에 힘이 풀린 후작은 바닥에 주저앉았다.
실종된 차남, 프레데릭의 검이었다.
막내둥이가 그 위험한 숲에 왜 갔나 했더니, 형의 물건을 되찾아오려 했던 건가.
후작은 검과 함께 켄드릭을 품에 꽉 끌어안았다. 아비의 손이 부어오른 두 뺨을 어루만진 뒤에야 켄드릭은 닭똥 같은 눈물을 쏟았다. 후작도 소리를 내어 울기 시작했다.
“아가야…. 너마저 잃으면, 소피아를 볼 낯이 없어….”
소피아. 막내아들을 낳은 지 얼마 안 돼 숨진 후작의 아내.
켄드릭에겐 초상화 속에서만 봐온 어머니의 이름이었다.
그렇게 부자는 깊은 슬픔 속에서 한동안 헤어 나오지 못했다.
***
프레이저 후작은 막내아들의 외출을 다시 허용하기로 했다. 예상외의 조치였다.
“프레데릭 형의 검을 되찾았으니 더 이상 숲에 가지 않을 거예요.”
켄드릭은 결연한 표정으로 약속했다. 후작은 믿어보기로 했다.
덕분에 켄드릭은 자유롭게 나가서 발레리를 만날 수 있었다.
외출할 때마다 기사 한 명을 대동해야 하긴 했지만.
발레리는 후작저 인근 공터에서 켄드릭을 기다리고 있었다. 마침 멀리서 그가 걸어오고 있는 게 보였다. 혼자가 아니었다. 웬 어른 남자가 뒤에 따라붙어 있었다.
“저 사람은 누구야?”
발레리가 켄드릭 뒤에 멀뚱히 서 있는 남자를 가리키며 물었다.
“아버지 밑에서 일하는 사람이야.”
“아버지? 네 아버지가 누군데.”
“드와이트 윈스턴 프레이저.”
“그럼 우리 아버지는 엘리엇 황제야.”
발레리는 칼레바니아 황제의 이름을 들먹였다. 켄드릭이 영주의 이름을 말한 게 장난인 줄로만 알았다.
그때였다.
뒤에 서 있던 남자가 갑자기 엉거주춤한 자세를 취하더니 켄드릭 쪽을 보며 이렇게 말했다.
“도련님, 저 잠시 변소에 좀….”
“그래, 다녀와.”
켄드릭의 하대에 발레리의 표정이 얼어붙었다.
어쩐지 오늘 입고 온 옷이랑 허리에 찬 검이 심상치가 않더라니.
“그, 그동안 실례 많았습니다, 도련님….”
발레리가 급히 고개를 떨어뜨리자 켄드릭은 손사래를 쳤다.
“됐어, 하던 대로 해.”
켄드릭의 스스럼없는 태도 덕에, 둘은 신분을 뛰어넘은 친구 사이가 될 수 있었다.
이 무렵, 황제는 전국의 마법사들을 동원해 와이어 숲에 진입금지 결계를 쳤다.
결국 이 숲에 대한 용사들의 도전은 완전히 끝났다.
펠런 도적단은 본업으로 복귀했다.
이들은 칼레바니아 제국 전체를 누비는 도적이었다.
발레리가 남부 프레이저 후작령의 아지트를 찾아오는 건 장물을 처리하기 위해서였다.
그나마 초여름엔 길게 머물렀고, 나머지 시기엔 한 달에 한두 번꼴로 찾아왔다.
“난 펠런이라는 도적단 소속이야. 이건 비밀로 해줘.”
다행히 프레이저 후작은 부정축재와는 거리가 멀었기에 그들의 표적이 될 일은 없었다. 덕분에 발레리는 켄드릭에게 정체를 당당히 밝힐 수 있었다.
“음, 펠런? 나 들어봤어. 못된 귀족들만 노린다는 그 도적단 맞지? 뭔가 재미있을 것 같은데.”
이미 켄드릭은 펠런에 꽤 흥미가 있었다. 그의 눈에는 나름대로 정의로운 집단으로 비쳤다.
이후 발레리와 켄드릭은 만날 때마다 서로의 기술을 나눴다.
발레리는 프레이저 가문의 검술을 열심히 체득했다.
켄드릭은 은신과 잠행, 줄타기, 자물쇠 따기 등의 도적단 기술을 재미 삼아 익혔다.
그러면서 켄드릭은 도적이라는 직업이 꽤 괜찮다고 느꼈다. 도둑질을 한 번도 당해본 적 없는 고위 귀족 영식이기에 가능한 사고였다.
두 아이가 가까워지기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
현재, 제국력 675년.
황제와의 독대를 마친 켄드릭은 석실로 곧장 돌아왔다.
어느덧 두 여인의 저녁 식사를 마련해 줄 시간이 됐기 때문이다.
석실 안 분위기는 평소와 달랐다. 검끼리 부딪칠 때 나는 금속음이 전혀 없었다. 리듬을 타는 듯 규칙적인 발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켄드릭은 입꼬리를 애써 올렸다. 황제와의 대화 후 착잡해진 속내를 덮어 감추려고.
그는 두리번거리며 연무장 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황녀가 누군가와 릴을 추고 있었다. 갑자기 웬 춤일까.
파트너는 진녹색 드레스 차림의 여성이었다. 일단 흑발인 걸 보니 황후는 아니었다. 그럼 석실에 들어올 수 있는 여자가 황후 말고 또 누가 있었던가. 켄드릭은 호기심에 두 여인 쪽으로 더 가까이 다가갔다.
“황녀님, 지금 누구랑….”
여자가 뒤를 휙 돌아봤다.
켄드릭은 그 얼굴을 확인하려고 눈을 끔뻑이며 초점을 바로잡았다.
“…발레리?”
어쩐지 바지 차림인 황녀보다 키가 훌쩍 컸다.
처음 봤다. 드레스 차림은. 아니, 발레리가 치마를 두른 모습 그 자체를.
“때맞춰 잘 왔네요, 켄드릭.”
프리다는 청아한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다.
하지만 켄드릭의 귀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프리다는 켄드릭의 놀란 반응을 보고 싱긋 웃었다.
“발레리 드레스 입은 거 너무 잘 어울리죠? 키가 커서 더 멋있는 것 같아요.”
“아 네…. 그러네요.”
켄드릭이 발레리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대답했다.
여성복을 입으니 그간 숨어 있던 체형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미끈한 목선과 일자형 쇄골, 근육 붙은 직각 어깨와 살짝 봉긋한 상체, 군살 하나 없는 허리까지 매혹적인 곡선이 이어져 있었다.
“야, 억지로 맞장구쳐 드리지 마라. 아, 춤추니까 더 배고프네. 난 평소의 1.5배로 부탁할게.”
“나는 딱 1인분이면 될 것 같아요.”
두 여인은 춤 연습을 매듭짓고 테이블로 향했다.
아직 드레스 차림이 어색한 발레리는 의자에 엉거주춤 걸터앉았다.
켄드릭은 할 말이 남았는지 아직 주방으로 떠나지 않고 있었다.
“두 분, 갑자기 웬 춤바람이 나셨습니까?”
“아, 건국제 무도회, 발레리가 대신 가주기로 했거든요. 내 대리인으로요. 그때 대비해서 연습한 거예요.”
“대리인이요? 발레리가 황녀님을 대리한단 말입니까?”
켄드릭은 화들짝 놀라며 되물었다.
무도회를 가면 가는 거지, 황녀를 대리할 일이 뭐가 있단 말인가.
“날 대리만족시켜줄 사람이란 뜻이에요. 발레리가 제대로 꾸민 모습을 한번 보고 싶기도 하고요.”
“아…. 네.”
프리다는 서신에 관한 내용을 생략하고 간단히만 설명했다.
켄드릭은 고개를 갸웃했다.
‘발레리를 가지고 인형 놀이를 하고 싶으신 건가. 발레리가 별로 안 좋아할 것 같은데.’
“켄드릭도 가죠? 건국제 무도회.”
“아뇨, 그날은 석실을 지킬 예정입니다.”
“아니, 그날은 강제 휴가예요.”
“네? 그럼 집사 일은….”
“게일이 있잖아요.”
마법사 게일은 황녀의 보조 집사였다. 켄드릭이 없는 주말이나 휴일에 시중을 들었다. 이 일에 지원하는 문지기가 아무도 없어서 결국 제비뽑기로 당첨됐다.
“무도회 참석을 명목으로 휴가를 주신다는 겁니까?”
”응, 켄드릭한테도 부탁할 게 있어서요.”
“무슨 부탁 말입니까?”
“발레리의 에스코트를 부탁해요. 첫 춤도 같이 추고요.”
켄드릭과 발레리가 동시에 얼어붙었다.
“커헉.”
방금은 발레리가 물을 마시다 사레가 들리는 소리였다.
“네? 콜록콜록. 에스코트요? 쿨럭쿨럭. 쟤가, 쿨럭, 저를요?”
“응, 아마 발레리가 혼자 가기엔 낯선 장소일 텐데. 켄드릭이 잘 챙겨줬으면 좋겠어요.”
켄드릭에겐 연신 기침을 해대는 발레리를 빤히 쳐다봤다.
본인도 당황한 건 맞지만 발레리의 반응은 거의 알레르기에 가까웠다.
사실 켄드릭은 사교계 이벤트를 선호하는 편은 아니었다. 그래도 상전이 시키는 일이니 기꺼이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네, 그럼 그렇게 하겠습니다.”
“황녀님, 제 의사도 물어보셔야죠. 저 어린애 아니에요. 혼자 갔다 와도 괜찮아요.”
“…발레리, 넌 내가 동행하는 게 싫어?”
“아니 싫은 건 아닌데….”
발레리는 속에 든 것도 없는데 괜히 메슥거렸다. 호불호와는 별개로 적응이 안 돼서. 에스코트가 대충 뭔지는 알고 있었다. 여자가 남자 팔짱 끼고 다니는 그걸 말하는 거겠지.
켄드릭에 대한 마음이 삭기 전이였다면, 이 상황이 조금은 다르게 와닿았을까.
프리다는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발레리가 외로울까 봐 그래요.”
“네? 외롭다뇨?”
“군중 속에 덩그러니 있으면 고독해지잖아요. 잘 아는 사람이 곁에 있으면 조금이나마 마음이 편할 거예요.”
깊은 배려심이 배어 나오는 말씨였다.
황녀가 이렇게까지 생각해 주는데, 끝까지 싫다고 버틸 순 없었다. 켄드릭도 기꺼이 그러겠다고 하니.
“…네, 알겠어요. 황녀님.”
그렇게 발레리는 동행인까지 얻게 됐다.
체크리스트를 완성한 프리다는 만면에 미소를 띠었다.
세 사람은 평소처럼 두런두런 저녁 식사를 마쳤다.
프리다가 평소보다 밝게 식사하는 모습을 보며, 발레리는 제안을 수락하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불안한 마음은 가시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