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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자한테는 관심 없는데요 (67)화 (67/173)

67화

발레리는 사뿐사뿐 움직임도 날래고 영특한 아이였다. 도적단 기술을 배우는 족족 스펀지처럼 흡수해냈다. 단원들은 그 특출난 재능을 보며 언제나 박수를 아끼지 않았다.

─와, 이렇게 타고난 도둑이 있을까요.

─웬 구걸하던 여자애를 데려왔나 싶었는데, 이런 쓸모가 있었네요.

─두목은 다 계획이 있었군요.

피어스는 처음부터 발레리를 도적질에 끌어들이고 싶었던 건 아니었다.

아무래도 어린 여자아이가 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래도 밥값은 하고 싶어요.

도적단에 도움이 되고 싶다며, 발레리는 뭐든 적극적으로 하려고 했다.

결국 피어스는 이 아이에게 도적단 기술을 가르치고, 종종 실전에도 투입했다.

어린 발레리는 이 일을 시작하며 난생처음으로 자부심을 느꼈다. 거리에서 행인들의 적선을 기대하는 것보다 훨씬 보람된 일이라고 생각했다.

도둑질은 분명히 죄악에 속하는 일이나, 어린 발레리에겐 자존감을 채우는 수단이 됐다.

─나도 이제 쓸모 있는 사람이 된 거야. 나도 잘하는 게 있다구.

두목 피어스가 세운 펠런의 신조는 이랬다.

「약자들의 재산은 탐내지 않는다.」

「정당하게 쌓은 부는 건드리지 않는다.」

「물건은 훔치되 사람은 죽이지 않는다. 우린 도적단이지 암살단이 아니니까.」

펠런은 주로 귀족들의 부정축재 재산을 노렸다. 평범하게 살아가는 이들의 재물은 건드리지 않는다는 원칙이 있었다.

덕분에 발레리는 마음 한구석의 죄책감을 제쳐두고 도적단원들을 부모처럼 따를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신조는 언제 어디서나 적용되는 절대적인 원칙이 되지는 못했다.

와이어 숲에서만큼은 이 신조가 빛을 잃었다.

실종자들이 남긴 무기는 사라진 사람들이 정당하게 쌓은 부에 속했다.

그들이 사라졌다고 해서, 마음대로 가져가도 되는 물건이 되는 건 아니었다.

***

피어스에게 멋진 검을 선물 받은 뒤, 발레리는 부쩍 무기 수거 작전에 합류하고 싶어 했다.

마물들이 나온다는 그 유명한 와이어 숲도 구경하고 싶었고, 달밤이 아니라 날 밝을 때 일할 수 있다는 데 끌렸다. 멋진 무기들을 더 많이 가져올 수 있다는 기대도 컸다.

“두목, 나도 갈래요!”

“안 된다, 발레리.”

피어스는 발레리를 단호하게 막아섰다.

아무리 2년 동안 도적단의 기술을 갈고닦았다지만, 와이어 숲은 열두 살 어린아이에게는 너무 위험한 장소였다.

“치이, 혼자 있으면 심심한데.”

“지금까지 배운 기술 복습하고 있어라.”

피어스는 입을 비쭉 내민 발레리를 뒤로하고 단원들과 함께 숲으로 나섰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발레리의 호기심은 누를 수 없는 수준이었다.

잠시 망설이던 발레리는 피어스에게 선물 받은 장검을 차고, 숲으로 향하는 단원들의 뒤를 밟기 시작했다.

은신 기술을 어느 정도 익혔기에 들키지 않고 바짝 따라붙을 수 있었다.

피어스가 뚫어 놓은 사각지대로 발레리도 같이 숨어들었다. 마력석 광산을 빙 돌면 나오는, 와이어 숲의 옆구리 쪽이었다.

“우와, 여기가 그 유명한 와이어 숲이구나.”

숲속에 다다른 발레리는 제자리에서 한 바퀴 빙 돌아봤다.

“다른 숲이랑 별로 다른 건 없는 것 같지만…. 오, 이제 시작하나 본데?”

단원들이 조를 나눠서 본격적으로 수거 작업을 시작했다.

발레리는 바람 소리를 따라 움직이며 인기척을 숨겼다.

그러다 꾸르륵, 하고 배가 고파왔다. 마침 눈앞에 보이는 건 개암나무였다. 거기서 열매를 한가득 따 주머니에 넣었다.

“어디 올라가서 편하게 구경해야지.”

발레리는 근처에 있던 호두나무에 올라 단원들의 작업 현장을 구경했다. 개암을 한 개씩 까먹으면서.

가득 불러온 배를 문지르며 꾸벅꾸벅 졸다, 발레리는 저도 모르게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수 시간 후.

나무 위에서 곤히 잠든 발레리의 뺨 위로 어둠이 드리웠다.

어느덧 해가 지기 시작했다.

펠런 도적단은 당연히 철수한 지 오래였다. 무기 수거반 기사들도 방금 전 고개를 내저으며 빈손으로 퇴근했다.

고요한 숲속.

사람이라곤 발레리밖에 남지 않은 것 같았다.

“나와! 나오라고!”

누군가에 외침에 소스라치게 놀란 발레리가 발작하듯 깨어나 중심을 잃었다.

쿵, 하고 몸이 풀숲으로 떨어졌다.

덤불이 완충장치가 돼주긴 했지만, 꽤 높은 데서 엉덩방아를 찧은 데다가 나뭇가지에 다리가 긁혀 쓰라렸다.

“으으, 아파…. 언제 잠들었지? 헉, 왜 이렇게 어두워?”

“나 너 소리 들었어! 거기 누구 있지! 빨리 나와!”

발레리가 떨어지면서 난 소리에, 아까 들리던 목소리의 주인공이 크게 반응했다.

‘이건 분명 어린애 목소리인데….’

발레리는 풀숲 밖으로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사람이 있었다. 열 살쯤 됐으려나, 남자아이였다. 갑옷을 입은 채 검을 들고 전투태세를 취하고 있었다.

‘아니 이런 위험한 숲에 어린애가 혼자 저러고 왔다고?’

물론 발레리도 어린애에 속하지만, 저 아이는 좀 더 앳되고 몸집이 작았다.

아이는 발레리와 눈이 마주치자, 검 자루를 꽉 움켜쥐며 위협적인 자세를 취했다.

발레리는 엉덩방아를 찧은 자리를 문지르며 덤불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당황한 꼬맹이는 전투태세를 유지한 채 발레리에게 물었다.

“너, 넌 뭐야? 마물이야?”

“참 나, 마물은 무슨. 꼬맹아, 이 시간에 여긴 왜 온 거야?”

이내 남자아이의 시선이 발레리의 허리춤으로 확 몰렸다.

발레리도 아이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숙여 아래쪽을 봤다.

땅에 질질 끌릴 만큼 기다랗고 화려한 검.

피어스에게서 얼마 전 받은 열두 살 생일선물이었다.

그 순간, 무슨 이유에선지 꼬맹이의 눈이 적의로 가득해졌다.

“너! 네가 왜 그걸 가지고 있어!”

“잉? 우리 두목이 준 건데 왜?”

“그거 우리 둘째 형 건데! 왜 네가 가지고 있어!”

아까부터 느꼈지만 참 목청 좋은 아이였다. 그렇게 악쓰지 않아도 충분히 알아들을 말인데.

“아니야, 두목이 나한테 줬으니까 내 거야.”

발레리는 일부러 뻔뻔한 말투로 대답했다. 어찌 됐든 본인 수중에 들어온 물건인데, 대뜸 남의 것이라고 하니 기분이 좋지 않았다.

실제로 남의 것은 맞겠지만.

검 자루를 꽉 쥔 아이는 발레리의 대답이 끝나자마자 쏜살처럼 돌진했다.

─챙.

발레리가 재빨리 긴 검을 뽑아 아이의 공격을 차단했다.

‘전투는 도적단에서 연습만 했지 실전은 처음인데. 이런 애송이와 하게 될 줄이야.’

하지만 아이는 보통 애송이가 아니었다. 의외로 검술 실력이 제법이었다.

동작이 이렇게 절도 있다니. 불필요한 움직임이라곤 하나도 없었다.

아이는 발레리가 대비돼 있지 않은 각도를 귀신같이 찾아 베려 했다.

단원들에게서 회피 훈련을 받지 않았다면 분명 제대로 베였을 테다.

숲이 점점 어두워지는 가운데 아이들의 싸움은 오랫동안 이어졌다.

발레리는 정면승부로는 안 되겠다 싶었다.

일단 손에 들고 있는 장검이 너무 무거웠다. 계속 이걸 들고 싸웠다간 손목에 무리가 갈 게 뻔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쓰던 검을 가져오는 건데.’

반면 남자아이는 자신의 몸에 맞는 길이의 검을 갖고 있었다. 지칠 줄도 모르는 것 같았다.

“꼬맹아, 제발 왜 이러는지 좀 알려 줄래?”

“그 검 돌려줘. 우리 형 거니까.”

이렇게 집요하게 달려드는 걸 보니 아이의 주장은 사실인 듯했다.

‘하지만 이 검은 두목이 숲에서 가져왔다고 했는데. 가만있자…. 그럼 얘네 형이 여기서? 설마 얘, 형들을 구하러 온 거야? 이런 조그만 애가 무슨 수로?’

생각할수록 혼란스러웠고, 발레리에겐 빨리 끝내고 싶은 싸움이었다.

그러다 남자아이가 눈물을 흘리고 있음을 알아챘다.

‘우는구나. 얘네 형이 여기서 사라진 게 맞긴 하는가 보네.’

그제야 안 보이던 약점이 보이기 시작했다. 남자아이의 시선은 온통 검에만 쏠려 있었다.

발레리는 기민한 동작으로 몸을 숙인 뒤 아이의 발목을 툭 걷어찼다.

중심을 잃은 남자아이는 휘청거리다 넘어졌다. 그런데도 검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이를 악물며 재빨리 일어서려 했다. 대단한 의지였다.

그 순간.

발레리가 눈을 질끈 감고 무거운 검을 들어 올려 아이의 목 앞을 겨눴다.

칼날에 위협을 느낀 아이는 오금에 힘이 풀렸는지 다시 털썩 주저앉았다.

“휴….”

발레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내 검을 검집에 집어넣고 아이의 눈앞에 내밀었다.

“자, 받아. 그런 사연이 있는데 어떻게 안 돌려주겠어.”

“으엉…. 으어어엉. 혀엉…. 끅끅.”

땅바닥에 앉은 아이가 무작정 오열하기 시작했다. 발레리의 손이 무안해졌다.

“꼬맹아, 빨리 안 받으면 내가 도로 가져간다?”

그제야 아이는 검을 받아들었다.

[나가라. 지금 당장.]

불현듯 두 아이의 동작이 얼어붙은 듯 완전히 멈췄다.

이 세상의 것이 아닌 듯한 이질적인 목소리가 귓가를 스쳤기 때문이다.

숲속의 두 아이는 도망쳐야 한다는 것을 직감했다.

아까 왔던 길을 기억한 발레리는 도망갈 방향을 파악하고 재빨리 움직이려 했지만, 남자아이는 자기가 어디서 온 줄도 모르고 혼란스러워하는 눈치였다.

결국 발레리는 남자아이의 손을 낚아채고 달리기 시작했다. 워낙 발레리가 기세 좋게 잡아당겨서 아이는 또 넘어질 뻔했으나 이내 중심을 잡았다.

발레리와 함께 전력으로 뛰면서도, 남자아이는 필사적으로 뒤를 돌아봤다.

‘형들을 잡아간 원수의 얼굴은 알아둬야 해.’

아이는 뒤로 꺾은 목이 아파질 때쯤 하나의 시선을 발견했다.

섬뜩한 빛을 내는 진홍색 눈동자 두 개.

아이는 별안간 공포에 질려 다시 앞으로 고개를 돌렸다.

***

한참을 달려 두 아이는 마력석 광산 뒤편에 도착했다.

“헉…. 헉….”

숨을 고른 두 아이는 이제 각자의 길로 돌아가야 할 터였다. 문득 발레리는 이 남자아이가 어디서 왔는지 궁금했다.

“너 어디서 왔니?”

“프레이저 후작가.”

프레이저 후작이라면 이 지역을 다스리는 영주였다.

“잉? 프레이저 후작가? 너, 거기서 일해?”

후작가에서 잔심부름을 하는 시동이겠거니 싶었다.

“일은 안 해.”

“그냥 얹혀사는구나. 나처럼 일을 하면 좋을 텐데. 몇 살이야?”

“열두 살.”

“뭐? 동갑? 거짓말하지 말고.”

“진짠데. 3월에 열두 살 생일 지났거든.” 

“나보다 생일이 빠르다고? 나보다 머리통 하나는 작구만.”

‘키 크면 뭐 해. 나한테 싸움도 질 뻔했으면서.’

남자아이는 뾰로통한 표정을 지었다.

“후작가 가는 길은 내가 알아. 데려다줄게.”

발레리가 오지랖을 부리며 또 앞장섰다. 프레이저 후작의 저택까지는 꽤나 먼 거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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