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화
몇 날 며칠의 숙고 끝에 프레이저 후작은 황성 켄트웰로 직접 찾아갔다.
황제 엘리엇을 설득하기 위해서였다.
“폐하, 와이어 숲을 벌목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죄 없는 용사들이 실종되고 있습니다.”
황제는 난처한 기색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허락하지 못해 유감일세. 와이어 숲을 지키는 것은 던컨 황제께서 내리신 임무라는 것을 알잖나.”
던컨 황제는 크세니아와의 전쟁 당시, 미개척지이자 암흑의 땅이었던 와이어 숲까지 영토를 넓힌 인물이었다.
이후 숲을 둘러싼 마력석 광산 덕에 칼레바니아는 전쟁에서 승리했고, 단시간에 강대국으로 부상할 수 있었다.
“아무리 그분의 유훈이라도, 실종자가 너무 많이 발생했습니다. 대책 없이 가만히 있을 순 없는 노릇입니다, 폐하.”
“드와이트. 그래도 벌목은 안 될 일일세. 지금보다 경비를 강화하도록 병력을 보내주겠네.”
그렇게 황제의 지시로 와이어 숲을 지키는 경비대가 두 배로 확충됐다.
숲의 경비를 돕는다는 명목으로 후작령에는 황실 기사들이 파견됐다. 이들은 후작이 무단으로 벌목에 나설 가능성에 대비해 감시하는 역할도 했다.
이렇게 엄중한 상황에서 황제는 왜 와이어 숲을 감싸고도는 것일까. 프레이저 후작은 알 길이 없어 막막했다.
숲을 지키는 병력이 늘어나자, 마물에 도전하는 용사의 수는 확연히 줄어들긴 했다.
하지만 포기를 모르는 용사들이 여전히 존재했다. 경비대의 눈을 피해서라도 숲에 잠입해 마물을 소탕했다는 명성을 얻고 싶어 했다.
“아까운 목숨을 왜 버리려 할꼬….”
프레이저 후작의 시름은 깊어져만 갔다.
애꿎은 용사들의 실종사건이 계속되자, 프레이저 후작가를 둘러싸고 해괴한 풍문이 돌기 시작했다.
─후작이 사라진 용사들을 뒤로 빼돌려 반란군을 조직하고 있다.
허무맹랑한 내용의 모함이었다. 믿는 이들은 극히 적었지만, 프레이저 가문의 명예가 실추되고 있음은 분명했다.
분명 볼드윈 공작가에서 퍼뜨린 소문이리라. 황제의 신임을 한 몸에 받는 프레이저 후작을, 볼드윈 공작은 늘 눈엣가시로 여겼다.
참다못한 후작의 장남 패트릭이 직접 나섰다.
“반란군이라니요. 기가 차서 정말…. 제가 직접 가서 시신이라도 수습해 오겠습니다.”
후작은 반대했지만, 패트릭의 고집을 꺾을 순 없었다.
패트릭은 칼레바니아의 어떤 기사보다도 실력이 출중한 인물이었다. 황태자의 검술 스승이기도 한 그는 제국의 촉망받는 검사였다.
후작은 장남의 굳건한 의지를 믿어보기로 했다.
패트릭은 300명 규모의 수색대를 꾸려 숲으로 떠났다.
2주 후.
대부분이 생존하긴 했다. 300명 중에서 268명이 돌아왔으니.
복귀한 수색대 기사들은 후작 앞에 이르자마자 엎드려 울부짖었다.
“흐흑…. 패트릭 경이 밤늦게 숲 깊숙이 들어갔다가….”
“함께 들어갔던 이들과 뒤따라갔던 대원들도 변을 당했습니다….”
“면목이 없습니다…. 유해는 못 찾았습니다. 남은 건 이런 무기뿐입니다.”
이들이 품에 안고 돌아온 건 수많은 검과 방패, 활, 마법 지팡이였다.
패트릭과 함께 출정했던 기사들의 무기.
마물에 도전했던 용사들의 무기.
사냥하러 숲속에 갔던 민간인들의 무기였다.
사라진 이들의 몸은 온데간데없고, 이렇게 무기들만 덩그러니 남아버렸다.
“남겨진 무기가 너무 많아서…. 극히 일부만 가져왔습니다.”
그 순간 후작의 눈에 포착된 건, 프레이저 가문의 문양이 아로새겨진 패트릭의 검이었다. 충격 속에 목이 멘 프레이저 후작은 패트릭의 검을 끌어안고 끅끅거리며 울기 시작했다.
그 옆에 서 있던 후작의 차남 프레데릭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아버지, 이번에는 제가 가 보겠습니다.”
기사 서임식을 막 치른 프레데릭 또한 실력이 좋기로 유명한 검사였다.
“안 된다, 프레데릭. 너까지 잃고 싶지 않다.”
“시신이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분명 형님도 어딘가 살아있을 겁니다.”
후작이 강한 만류에도 불구하고, 결국 프레데릭은 야심한 밤에 몰래 숲으로 떠났다.
***
프레데릭의 소식마저 끊긴 지 3개월째.
두 아들을 잃은 후작이 드디어 미쳐버렸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후작은 울지도 웃지도 않았다. 표정을 잃어버린 것뿐인가. 말수도 심각하게 줄어들었다. 허공에 대고 혼잣말을 하는가 하면, 숲에 직접 가봐야겠다며 난동을 부렸다.
가신들은 반쯤 정신이 나간 후작을 만류하느라 곤욕을 치렀다. 한때 제국 최고의 사령관이었던 후작과의 몸싸움에서 이기기란 쉽지 않았다.
후작의 늦둥이 막내아들 켄드릭도 이런 비극을 고스란히 지켜봤다.
“유모, 사람들이 그러더라.”
“네?”
“아버지가 미쳐버렸대. 정말 그런 거야?”
“무, 무슨 그런 말씀을 하세요, 도련님. 후작님께선 말짱하세요.”
이토록 참담한 광경이라니. 그 비극은 열두 살 어린아이의 마음에 복수심의 씨앗을 심기에 충분했다.
켄드릭의 검이 허공을 가르는 소리에는 이전과 다른 서늘한 기운이 감돌았다.
“꼭 와이어 숲에 가서 마물들을 물리칠 거야.”
어딘가 살아있을지 모를 두 형을 구해 오리라는 집념.
각성한 켄드릭은 이전보다 검술에 더더욱 정진했다.
켄드릭의 고사리 같았던 손바닥은 얼마 지나지 않아 굳은살투성이가 됐다.
밤낮없이 연습에 몰두한 결과였다.
그는 두 형을 능가할 만큼 성장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사라진 형들을 되찾고, 와이어 숲의 마물들에게 복수하기 위해서.
얼마 후.
제 실력이 일취월장했다고 생각한 켄드릭은 후작의 집무실로 쪼르르 달려갔다.
그는 긴장했는지 두 주먹을 꽉 쥐고 있었다.
손바닥 안이 온통 땀으로 축축했다.
“아버지, 저 있잖아요….”
용기를 내서 아버지에게 결심을 이야기하려는 순간이었다.
무슨 말이 나올지 후작은 직감했다.
“안 된다, 켄드릭.”
아이는 이내 시무룩해졌다.
풀 죽은 막내아들이 터덜터덜 물러갔다.
후작은 켄드릭의 뒷모습을 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시종들을 따로 불러 이런 명령을 내렸다.
“켄드릭을 철저히 감시해라. 저택 밖으로 나갈 수 없도록.”
***
후작의 차남 프레데릭이 실종된 즈음부터였다.
와이어 숲 이곳저곳에 널려있던 실종자들의 무기가 눈에 띄게 적어졌다.
위험수당을 받고 물건 수습에 나선 기사들은 혀를 내둘렀다.
“아니, 분명 무기가 더 있어야 하는데…. 왜 없지?”
“어제 그 지팡이 너도 봤잖아. 너무 무거워서 오늘 주우려고 했는데 없네. 귀신이 곡할 노릇이야.”
“마물들이 이제 무기까지 가져가는 건가?”
실종자들의 유일한 흔적인 무기마저 증발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그 배후에는 악명 높은 도적단 ‘펠런’이 있었다.
실종된 사람들이 값비싼 무기들을 남기고 사라진다는 소문에, 이 도적단이 숲에 정기적으로 드나들며 물건을 취해간 것이다.
용사들은 늘 새롭고 강한 무기로 무장했다. 그들이 사라진 숲속은 값비싼 신무기 전용 창고나 다름없었다.
숲속의 무기들을 가져오자고 단원들에게 제안한 사람은 두목 피어스였다.
“우리 부업 하나만 하자.”
“뭔데요, 두목?”
“와이어 숲에 버려진 무기가 많단다.”
“와이어 숲이요? 그거 실종자들이 남긴 거 아니에요? 설마 그걸 주워오잔 말씀은 아니겠죠.”
“듣자 하니 숲에서 살아 나온 사람들이 공통점이 있어. 밤늦게 깊은 곳에 안 들어갔다고 한다. 해 떠 있을 때는 그래도 안전하단 소리 아니겠어?”
“에이 두목, 아무리 그래도 와이어 숲은 아니죠.”
“귀족들 저택 경비 뚫는 것보단, 버려진 무기 주워오는 게 편할 텐데.”
“거기 갔다가 우리도 무기만 남기고 사라지면 어떡합니까. 시체가 없으면 가족들이 장례식도 못 해줄 텐데, 그런 개죽음이 어디 있어요.”
당연하다. 처음엔 아무도 따라나서지 않았다.
사람이 온데간데없이 증발한다는 와이어 숲인데, 아무리 겁이 없다지만 어떻게 그런 위험을 무릅쓴단 말인가.
단원들의 마음이 조금씩 바뀐 건 다음 날 오후의 일이었다.
피어스는 아침 일찍 홀로 숲에 다녀와서, 아지트 한가운데 무기를 우르르 쏟아냈다.
무려 30여 점이었다.
대부분 값깨나 나갈 명검들. 마력석이 수십 개씩 박혀있는 마법 지팡이도 있었다.
은촉이 붙은 화살과 단검, 화려한 방패도 이목을 끌었다.
단원들은 입을 쩍 벌리며 감탄했다. 피어스는 기세등등하게 어깨를 으쓱댔다.
“어휴, 무거워서 들고 오느라 겁나 힘들었다. 내일은 도와주는 녀석들이 좀 있겠지?”
“와…. 두목. 이게 다 정말 와이어 숲에서 가져온 겁니까?”
“그래. 너희는 뒤로 빠져서 무기 수습반 기사들 오는지 감시만 해. 물건은 내가 쓸어 담을 테니까.”
피어스의 믿음직한 한 마디에, 다음 날부터는 한두 명씩 그를 따라나서기 시작했다.
경비대의 시선이 닿지 않는 진입 경로는 피어스가 이미 뚫어놓은 상태였다.
아무리 금단의 숲이라지만, 유서 깊은 도적단 펠런에 이 정도 잠입은 쉬운 축에 속했다.
머지않아 단원 전체가 이 일에 뛰어들었다.
이들은 무기 수습반 기사들을 귀신같이 피해 재빨리 물건을 입수해냈다.
진귀한 무기를 팔아 부수입을 올리기 시작한 것이다.
***
어느 날 무기 수거 작업을 마치고 아지트로 돌아온 두목 피어스.
그는 창고에 들어가 그동안 입수한 물건들을 찬찬히 살펴봤다.
“아, 이게 좋겠다.”
오랫동안 고민하던 피어스는 가장 값져 보이는 검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는 옆에 서 있던 작은 여자아이에게 내밀었다.
“와…. 두목, 이 검 진짜 진짜 멋있어요.”
피어스가 2년 전부터 데려다 기르기 시작한 고아 여자아이.
발레리였다.
“네 열두 살 생일선물이다.”
“우와 정말요? 허리에 차 봐도 돼요?”
“그래. 네 키에 좀 길긴 하구나. 땅에 끌리지 않게만 조심하고.”
발레리는 펠런 도적단의 보배였다.
성인 남성은 들어가기 힘든 작은 틈을 보기 좋게 비집고 들어갔다.
삼엄한 볼드윈 공작가의 경비를 뚫고, 공작의 침실에서 ‘세이렌의 피리’를 훔쳐낸 비결은 이 여자아이였다.
세이렌의 피리는 연주를 듣는 이들을 모두 잠재운다는 악기로, 볼드윈 공작이 한 무역상에게서 세금 명목으로 무단 갈취한 것이었다.
펠런은 억울해하는 무역상의 의뢰를 받고 이 물건을 훔쳐 다시 주인의 품에 안겨줬다. 대가는 짭짤했다.
그 일등공신은 발레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