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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자한테는 관심 없는데요 (65)화 (65/173)

65화

때가 왔다.

켄드릭의 목울대가 한 번 묵직하게 오르내렸다.

솔직히 망설여졌다. 아직은 적당한 시기가 아니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어렵사리 찾아온 발언 기회를 놓치긴 싫었다.

실종된 두 형의 모습이 꿈속에 아른거릴 때마다 켄드릭은 조바심이 들었다.

‘그래, 지금이야. 계단을 충분히 밟고 올라섰을 땐 이미 늦었을지도 몰라.’

켄드릭은 잠시 내려놨던 시선을 다시 들어 올렸다. 그는 황제의 푸른 눈동자를 직시하며 천천히 입술을 뗐다.

“제 아버지가 듣지 못한 답을 들으러 왔습니다.”

적막이 흘렀다.

침침한 눈을 끔뻑이는 황제의 이마에 깊은 주름이 잡혔다.

그는 고개를 푹 떨군 채 눈을 감고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느릿느릿 얼굴을 들었다.

“…와이어 숲 이야기를 하려는 건가.”

“그렇습니다.”

“말해보게.”

“왜 저희 가문에 그런 임무가 주어졌는지 아직도 모르겠습니다. 그 숲을 왜 지켜야 하는 겁니까?”

“알다시피 던컨 황제의….”

“폐하, 별세한 지 백 년도 넘은 분의 유훈이, 아직 살아있을지도 모르는 수백 명의 목숨보다 중하단 말씀입니까.”

켄드릭은 날 선 질문으로 말허리를 끊어먹었다. 황제는 등골이 서늘해졌다. 반대로 얼굴은 화끈거렸다. 황제는 켄드릭의 분노가 어디서 기인했는지 생각했다.

‘10년 전 이자는 어린애에 불과했다. 두 형을 잃고 아버지까지 한동안 제정신이 아니었으니 상처가 컸겠지. 숲을 지키는 데 급급했던 황실에 앙금이 남아있는 게 당연할 거야.’

하지만 황제는 당장 해줄 수 있는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숲을 봉쇄한 건 추가 실종을 막으려는 조치였다.”

“이미 실종된 사람들은 포기하신 거라고 보면 되겠습니까?”

황제는 손을 거세게 내저으며 역정을 냈다.

“허, 그렇게 단정하다니. 나라고 손 놓고 가만히 있고 싶겠는가. 이번엔 내가 묻겠네. 자네는 내가 어떻게 하길 바라나?”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습니다. 대군을 출정시켜 실종자들을 구해 주십시오.”

“뭐? 출정?”

못 들을 말이라도 들은 것처럼 황제는 팍 인상을 썼다.

“제국 전역의 기사와 마법사들을 총동원해서라도 그렇게 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실종자들이 죽었다 해도 시신이라도 수습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자네 지금, 그자들과 전투를 치르자고 하는 건가.”

“그렇습니다. 마물들과의 싸움에 저도 미력하나마 힘을 보태겠습니다.”

켄드릭이 결연한 표정으로 주장을 이어갔다. 그러나 황제는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부터 혀를 쯧쯧 찼다. 눈썹까지 찡그린 걸 보니 영 못마땅하다는 반응이었다.

켄드릭의 목에 핏대가 불거졌다. 그럼 어쩌겠다는 말인가. 이대로 가만히 있겠다는 말인가.

“그건 해법이 될 수 없네.”

“왜입니까?”

“난 그자들을 마물이라고 부르지 않네. 그렇게 칭하는 것조차 미안할 정도의 존재니까.”

“저도 압니다. 그들이 사후세계의 집행관이란 걸.”

켄드릭의 말에 황제가 주먹으로 소파 팔걸이를 쿵 내리쳤다. 그 충격에 쿠션이 먼지를 허공에 쿨럭 뱉어냈다.

“허, 알고도 그런 말을 하는가? 그자들은 병력을 총동원한다고 어찌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닐세. 전투 자체가 성립이 안 된다는 말이네.”

“해보시지도 않고 어찌 그리 단정하십니까.”

“하, 자네 아버지도 기사들을 보낸 적이 있지 않은가. 결과는 뻔히 알 테고. 숫자가 많아도 마찬가지일 것이야. 누구는 잡혀 들어가고, 누구는 접근조차 못 하고 돌아오겠지.”

켄드릭의 목덜미에 싸늘한 절망감이 파고들었다.

사실 뾰족한 대안을 갖고 들어온 건 아니었다.

혼자 전략을 세우기엔 한계가 뚜렷했다. 와이어 숲에 대한 자료라면 닥치는 대로 찾아 읽었으나, 대부분은 수백 년이 지난 이야기였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상상인지 구별조차 되지 않았다.

마물이라 불리는 그곳의 집행관들을 어떻게 상대해야 하는지는 알 길이 없었다.

켄드릭은 인정해야 했다.

그저 10년 전 비극에 침묵한 황실에 울분을 터뜨리러 왔다는 것을.

“…달리 방법이 있기는 한 겁니까?”

창백해진 황제는 낯빛이 사색에 가까워질 때쯤 입을 열었다.

“그 핵심을 도려내야 하네.”

“핵심…. 이라고 하셨습니까.”

황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안개가 자욱해진 푸른 눈동자에선 침통함이 느껴졌다.

“최근에야 적임자를 찾았네. 나도 나름대로 준비하고 있다는 것만 알아주겠나.”

“…….”

“조금만 기다려주게. 내년이면 될 걸세.”

내년이라고.

10년 동안 가만히 있던 사람을 어떻게 믿으란 건가.

켄드릭의 눈 밑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웠다.

그는 황제를 설득해 와이어 숲으로 출정하겠다는 원대한 포부를 안고 기사단에 입단했다.

그러나 황제는 그 방법 자체가 틀려먹었단다. 그 나름대로 준비한다는 게 뭔지도 알려주지 않는다.

“안 그래도 영지를 이어받아야 할 자네가 황실 기사로 들어온 이유가 궁금했네만. 원수를 갚을 기회가 필요했나?”

황제의 말에 정곡을 찔린 켄드릭은 흔들리는 녹안을 아래로 떨궜다.

그리고 다시 눈을 치켜떴다.

어떤 방법으로든 기회를 잡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폐하께서 지금 준비하시는 일, 저도 합류하면 안 되겠습니까.”

“마음만 고맙게 받겠네. 자네가 지금 하는 일만으로도 충분히 도움이 되고 있으니.”

거절이었다. 켄드릭은 또다시 목청을 세웠다.

“재고해 주십시오, 폐하. 저만큼 그 일에 동기부여가 돼 있는 사람은 없을 것으로 확신합니다.”

“동기만 가지고 되는 일이 아닐세.”

“실력 또한 꾸준히 쌓아왔습니다.”

황제는 바짝 마르는 입술을 혀로 축였다. 미안한 기색이었다.

“그걸 몰라서 이러는 게 아니라는 걸 알아주게. 아쉽지만 다음 일정이 있어서. 이만 물러가 주겠나.”

더는 할 말도, 들을 말도 없다는 의사표시였다.

이제야 켄드릭은 속에서 회오리치던 앙금이 조금씩 가라앉는 걸 느꼈다.

자신의 언행이 부적절했다는 자각도 슬슬 들었다. 일국의 황제 앞에서 지나치게 격앙된 태도를 보였다. 아무리 억울한 감정이 복받쳤다고 해도 말이다.

“…나중에 생각이 바뀌시면 언제든 말씀해 주십시오.”

“알았으니 어서 가보게.”

켄드릭은 식은땀이 흥건한 목덜미를 옷소매로 문질러 닦았다.

“오늘 저의 치기에 많이 당황하셨을 줄 압니다. 저의 무례를 부디 너그럽게….”

차마 입에서 용서해달란 말까진 나오지 않았다. 언성을 높인 게 불과 몇 분 전이었으니까.

“무례는 무슨. 내가 자네였다면 처음부터 문을 걷어차고 들어왔을 걸세. 괘념치 말고 가봐. 프리다가 기다릴 테니.”

황제의 말투는 너그러웠다. 켄드릭은 못내 착잡한 얼굴로 경례를 하고 나갔다.

서재 문이 닫혔다.

황제는 천천히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는 터덜터덜 창가로 걸어가 하늘의 뭉게구름을 올려다봤다.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참 무심하게도 청명한 날씨다.

“드와이트의 마지막 남은 아들을 어떻게 그 숲에 보내겠나. 염치도 없이.”

벌써 중앙궁을 나서는 켄드릭의 뒷모습이 창문으로 내려다보였다.

켄드릭의 발걸음은 느릿하고 묵직했다. 양 발목에 모래주머니라도 차고 있는 것처럼.

“자네가 어떤 마음으로 황궁에 들어왔는지…. 내가 미처 파악하지 못했군.”

황제는 서재 책꽂이의 한구석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그는 그곳에서 두꺼운 서류철을 꺼내 책상으로 가져왔다.

그 표지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와이어 숲, 프레이저 후작령, 제국력 665년’

황제는 서류철에 쌓인 먼지를 툭툭 털어낸 뒤, 깊은 한숨을 쉬며 내용물을 펼쳤다.

***

10년 전, 제국력 665년

칼레바니아 제국 최남단에 위치한 와이어 숲.

이곳은 한때 제국의 총사령관을 지냈던 프레이저 후작의 영지에 속한다.

거대한 수목이 울창한 이 숲에는 오랫동안 내려오는 전설이 있었다.

「와이어 숲에는 지하세계로 통하는 문이 있다.」

건국신화에나 나오는 얘기였다. 믿는 사람은 얼마 없었다.

인적 드문 이 숲을 둘러싸고 괴상한 소문이 돌기 전까지는.

─숲에 마물이 나온대.

─깊숙이 들어가면 음산한 목소리가 들린다지? 사람 목소리 같지가 않다던데.

─밤에 들어가면 누가 막 나가라고 소리친다더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조용하던 숲이, 갑자기 왜 그런다니.

더 불가사의한 현상이 발생했다.

숲 심장부에 접근한 이들 중 몇몇 사람들이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아주 오랫동안.

─버섯 따러 간 윌리스네 마누라가 한 달째 안 돌아오고 있대.

─루크네 아들이 사냥 갔다 행방불명이 됐다던데. 마물이 잡아간 게 틀림없어.

도무지 이유를 알 수 없는 실종이었다. 벌써 자취를 감춘 이들만 열 명이 넘었다.

결국 마물 출몰설은 기정사실화됐다.

시신이라도 발견되면 모를까. 숲속 어느 곳을 찾아봐도 사라진 이들은 없었다. 급기야 실종자를 찾아 나선 가족들 중에서도 실종자가 나왔다. 연쇄 실종사건이었다.

숲이 사람을 통째로 집어삼키는 듯했다.

자연스럽게 이곳은 금단의 숲이 돼가고 있었다. 일반 사람들은 숲을 쳐다보는 것조차 두려워했다.

하지만 칼레바니아 각지 용사들의 도전의식을 불러일으키기에는 충분했다.

─사람을 납치하는 마물이 있는 게 틀림없다. 실종자들을 구출해 내야 한다.

이런 고매한 목표를 지닌 용사 수백 명이 숲에 도전했다. 칼레바니아는 용기 있는 자를 가장 명예롭다고 여기는 나라였으므로.

숲에 도전하는 용사들의 결말은 딱 두 갈래로 나뉘었다.

무사히 살아 돌아온 용사들의 후일담은 이랬다.

─마물은 무슨. 모기만 물렸는데요?

─있기는 뭐가 있어. 고라니 울음소리가 제일 무섭더라.

─어디서 나가란 소리가 들리긴 했는데. 얼른 뛰어나왔습죠.

나머지 용사들은 침묵했다.

숲에 들어간 뒤 소식이 완전히 끊겼기 때문이다. 사라진 용사들의 목소리는 그 어디에서도 들을 수 없었다.

용사들은 열 명 중 세 명꼴로 종적을 감췄다. 시간이 지나며 이들은 숲속에서 사망한 것으로 여겨졌다.

사건이 발생하는 동안 프레이저 후작은 기사들을 숲에 보내 실종자 수색에 힘썼다.

안타깝게도 성과는 없었다.

뒤늦게나마 통행금지령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아무도 숲에 접근할 수 없도록 막아라.”

그렇게 숲 입구에 경비대가 설치됐다. 용사들의 진입을 막아 세우려는 목적이었다.

후작은 숲을 아예 벌목해버릴까 생각도 했지만, 어려운 일이었다.

「프레이저 가문의 가주는 대를 이어 와이어 숲을 수호한다.」

120여 년 전 칼레바니아 황실이 가문에 내린, 대대로 내려오는 임무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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