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화
“제가 공이 어딨어요. 말도 안 돼요. 그것도 황녀님을 대리하라뇨. 그런 건 평소에 친하게 지내시던 귀족 가문 영애한테 맡기세요.”
“…글쎄요, 막상 떠오르는 사람이 없는걸요.”
“에이,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저 같은 사람한테…. 말도 안 돼요.”
프리다는 눈을 피하는 발레리의 손목을 세게 움켜잡았다. 근육이 제법 붙었지만 여전히 가느다란 팔뚝에 힘줄이 불뚝 섰다. 어떻게든 설득해 보려는 의지가 엿보였다.
“발레리가 어떤 사람인지 내가 말해줄게요. 덕분에 나 정말 많이 변했어요. 많이 건강해졌고, 의지도 생겼고, 희망도 품게 됐는걸요. 알잖아요. 내 실력 얼마나 늘었는지. 이게 다 발레리 공이에요.”
“좋게 봐주시는 점은 감사한데요. 그건 황녀님께서 직접 노력하신 결과예요. 제가 아니었더라도 충분히 훌륭한 검사가 되셨을 거예요.”
발레리는 프리다의 손아귀에서 손목을 슬쩍 뺐다. 그러자 프리다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서서히 빠져나갔다.
“발레리.”
“네?”
“…내 마지막 부탁이라면 들어줄 건가요.”
물기 어린 사파이어색 눈동자가 처량하게 흔들렸다. 마지막이란 단어가 발레리의 폐부를 찔러왔다. 가끔 황녀는 이렇게 수명을 다한 사람 같은 화법을 썼다. 듣는 사람 가슴 철렁해지게.
언젠가 이름 모를 의뢰인에게 데려가야 할 그녀.
의뢰인은 황녀를 해칠 수 없는 몸이라 주장했지만, 발레리에겐 완전한 확신이 없었다. 그래서 더 괴로웠다.
“후….”
발레리의 기다란 날숨에서 초조한 기운이 올라왔다. 어떻게든 지키고 싶은 사람의 부탁이니 웬만하면 들어주고 싶었다.
그러나 발레리는 유명세를 치르기 싫었다. 이미 한 번 위장 입대로 체포돼 화제를 몰았던 터라 더 조심스러웠다.
건국제 무도회에 황녀를 대신해 나간다면, 정말 얼굴이 대대적으로 팔릴 테니까.
발레리의 한숨과 긴 침묵에 프리다는 눈동자를 내리깔았다.
“그렇게 싫다면 어쩔 수 없지만요.”
프리다의 어깨가 축 늘어졌다. 그 모습에 심장이 철렁 내려앉은 발레리는 황녀의 두 손을 덥석 잡았다.
“저, 황녀님, 그게….”
“혹시 걸리는 게 있어서 그래요?”
“…네.”
“뭔가요?”
“좀 부담스러워요. 얼굴 알려지는 게.”
프리다는 금방 화색을 되찾았다. ‘뭐 그런 걸 걱정하냐’는 듯이.
“문제없어요. 평소와 다르게 꾸며줄게요. 아무도 못 알아볼 만큼.”
자신감이 묻어나는 확고한 말투였다. 발레리는 여전한 불안감에 식은땀을 한 바가지 흘리고 있었다.
“황녀님, 그게 가능할까요?”
“방법은 많아요. 머리엔 가발 쓰고, 얼굴엔 화장하고, 옷은 평소와 다르게 입으면 되니까.”
“그런다고 아예 다른 사람이 되진 않을 텐데요.”
고작 그 정도로 정체를 감출 수 있을까. 발레리는 회의적이었다. 도적처럼 복면으로 이목구비를 가리는 것도 아니고.
발레리는 한숨을 삼키며 소파 등받이에 허리를 붙였다.
그러고 있자니 프리다가 얼굴을 훅 밀착해왔다. 기습 입맞춤이라도 할 것처럼 가까이.
테렌스를 빼다 박은 얼굴이 다가오자 발레리는 흠칫했다.
귀밑이 확 달아올랐다.
프리다의 짙푸른 눈동자는 한 뼘 거리에서 발레리의 생김새를 찬찬히 내리훑었다. 숨이 막힐 정도로 집요한 관찰이었다. 입꼬리엔 절로 경련이 일어났다.
“하하, 왜 이러세요, 황녀님.”
“아마 발레리라면 가능할 것 같아요. 평소에 자연스럽게 다니니까, 꾸미면 달라 보일 여지가 많을 거예요.”
발레리는 머릿속이 띵했다. 뭘 어떻게 꾸며준다는 건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거의 변장이 필요할 것 같은데요.”
“음, 평소랑은 180도 달라 보이게 해줄 거예요. 원한다면 본명은 안 밝혀도 괜찮아요. 가명을 써도 좋고요.”
“…그래도 누가 알아보면 어떡하죠? 근위대 장교들은 대부분 제 얼굴 알아요.”
“그 사람들은 군인 발레리만 기억하겠죠. 레이디 발레리는 초면일걸요.”
‘레이디’라는 단어에 살짝 거북해진 발레리는 깍짓손을 만들어 이마에 갖다 댔다.
프리다의 잇새에서 웃음이 새어 나왔다. 어쩔 줄 몰라 하는 발레리의 모습이 귀엽기만 했다.
“…벌써부터 적응이 안 돼요.”
“왜 그래요, 발레리. 그나마 알아볼 만한 사람이 있다면 오빠 정도일 거예요.”
“하아….”
“지레 겁먹을 필요 없어요. 우리 한번 철저히 준비해 봐요. 십년지기 켄드릭도 못 알아볼 정도로.”
발레리는 뒤통수를 긁으며 천천히 끄덕였다.
하지만 여전히 불안했다. 황녀가 말하는 정도의 변장과 가명으로 신원을 숨기는 게 가능할까.
아무튼 이제부턴 본론이다. 황녀의 대리인으로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가 관건이니까.
“제가 가서 뭘 하면 될까요?”
“내가 사람들한테 전해주고 싶은 말이 있어요.”
“무슨 말인데요?”
“편지로 써 줄게요. 모두 앞에서 읽어줬으면 해요.”
서신 낭독.
활자와 친하지 않은 발레리에겐 다소 난도가 있는 과제였다.
“저, 황녀님. 제가 글을 읽을 줄은 아는데요. 배움이 짧아서 어려운 건 잘 못 읽어요.”
“아, 어려운 말 하려는 건 아니니까, 최대한 쉽게 쓰도록 노력할게요.”
“편지만 읽으면 되는 거예요?”
“아뇨.”
“그럼요?”
“춤도 열심히 추다 와요. 오빠한테 듣자 하니 발레리도 춤추는 거 좋아한다던데.”
“아하하, 네.”
테렌스가 언급되자 발레리는 앞니로 입술 각질을 뜯었다. 생각보다 그는 여동생과 많은 이야길 공유하는 모양이었다.
그러나저러나 이건 춤을 좋아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무도회에선 맥주 축제 때처럼 마음 놓고 둠칫거리지 못할 텐데. 왠지 악단도 경건한 곡만 연주할 것 같아.’
“저 근데, 귀족들이 추는 그런 고급진 춤은 잘 몰라요.”
“아 그렇겠구나. 그럼 수업 끝나고 나랑 한 시간씩 추는 거 어때요? 기분 전환할 겸.”
“…이젠 제가 황녀님께 한 수 배우겠네요.”
늘 선생이었던 자에게 가르쳐줄 게 생겼다니. 프리다는 기대에 차 눈을 반짝였다.
“아 참, 발레리. 드레스 없죠?”
“하나 있긴 해요. 그, 어, 오빠분께서 예전에 하나 마련해 주셔서요.”
“좋네요. 이따가 방에서 그거 입고 내려와요. 그러고 같이 춤추면 되겠다.”
“당장 오늘부터요?”
프리다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발레리는 내키지 않았지만 알았다고 대답했다.
이렇게 프리다는 주춤하던 발레리를 설득하는 데 성공했다.
체크리스트가 거의 마무리되긴 했는데, 중요한 게 하나가 남아있었다.
‘발레리한테 동행인을 구해 줘야 하는데.’
여성이 혼자 무도회를 가는 건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다. 발레리가 아무리 무던한 성격이라도, 군중 속에 덩그러니 놓이면 소외감을 느낄 수 있었다. 그녀와 첫 춤도 함께 추고, 곁에서 챙겨줄 파트너가 필요하다는 게 프리다의 생각이었다.
제일 먼저 생각난 사람은 테렌스였다.
하지만 최적의 선택지는 아니었다. 일단 황태자와 함께 입장하면 주목도가 너무 높아진다. 칼레반 타임스 등 유명 언론사 기자들도 와 있을 텐데, 쓸데없는 염문설이 날 위험도 있었다.
‘아 그리고 오빠는…. 내가 발표할 내용에 대해 몰랐으면 좋겠어. 어머니 아버지 귀에 들어가면 못 하게 하실 수도 있으니까….’
그렇다면 발레리 곁에서 편하게 있어 줄 만한 사람이 누가 있을까.
하나를 소거하니, 하나가 남긴 한다.
***
“폐하, 프레이저 소후작이 뵙기를 청합니다.”
“어어, 들어오라고 해라.”
황제는 서재 소파에 푹 파묻혀 있었다. 그 상태로 온종일 청혼 거절 멘트를 고민했다. 보좌진은 이미 한참 전에 문밖으로 물려놨다.
프레이저 소후작, 즉 켄드릭 경을 일대일로 만나 달라는 건 딸의 부탁이기도 했으니까.
사실 좀 더 일찍 불렀어야 했다. 그러나 건국제 준비 등 여러 사안이 산적해 있던 터라 약속이 늦게 잡혔다.
‘프리다가 먼저 관심을 보인 사내는 처음이니 자존심은 지켜줘야겠지. 드와이트의 아들이기도 하고.’
문이 열리고 절도 있는 발소리가 들렸다. 황제가 비스듬히 누워있던 상체를 천천히 일으켰다. 군데군데 희끗희끗한 백금발이 벨벳 소파와 마찰하며 헝클어졌다.
“제국의 지존이신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어, 왔는가.”
엘리엇은 켄드릭을 대놓고 위아래로 살폈다. 허우대가 크고 튼튼한 장발 미남이었다. 근위기사 제복이 날 때부터 입은 것처럼 잘 받았다. 프리다에게 청혼한답시고 자신 있게 초상화부터 보내오던 외국 왕족이나 귀족들보단 훨씬 용모가 수려했다.
“이렇게 독대할 기회를 주신 점, 제게 무한한 영광입니다.”
“뭐 영광씩이나. 안 그래도 언제 한번 부르려 했었는데, 앉게.”
황제가 맞은편 소파를 가리켰다. 켄드릭은 그 위에 곧은 자세로 자리 잡았다.
“드와이트도 젊었을 적에 머리를 길렀었지. 자네가 훨씬 더 잘 어울리는군. 인물이 좋아 그런가.”
“감사합니다.”
“프리다에게서 얘기는 많이 들었네. 수업 마치고 야간까지 검술 연습을 도와준다고.”
“네, 그렇습니다.”
“정말 고맙게 생각하고 있네.”
“별말씀을요.”
황제는 어딘가 맥이 풀리고 지쳐 있는 모습이었다. 푹 잠긴 목소리에서 권태감이 물씬 풍겼다. 어깨 길이의 백금발은 전혀 정돈돼 있지 않았다. 술 냄새도 나는 것 같았다. 아주 약하게.
“…자네가 무슨 용건으로 왔는지 얼추 짐작하고는 있네.”
“예?”
“일단은 거절해야 할 것 같아서 미안하네. 지금은 뭘 약속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서 말이지.”
켄드릭은 구겨지려는 미간을 애써 펴내며 억지 미소를 만들어 보였다.
“…제가 무엇을 얘기할 줄 알고 거절부터 하시는 겁니까.”
황제는 턱수염을 만지작거리며 켄드릭에게 물었다.
“당연히… 우리 프리다에게 청혼하려는 게 아닌가?”
“아닙니다.”
단 1초의 망설임도 없는 대답이었다. 황제가 콧잔등을 찌푸리며 팔짱을 꼈다. 그럴 리 없는데, 하는 표정이다.
“아니라고? 우리 딸하고 결혼하고 싶은 게?”
“예, 아닙니다.”
“정말?”
“단연코 아닙니다.”
황제는 의아한 얼굴로 구레나룻을 긁적였다.
청혼한다 해도 허락해 줄 계획은 없었다. 그게 가능한 상황이 아니기도 했고.
그래도 자존심이 상했다. 대양을 건너 서대륙에서도 청혼하러 오는 마당에, 정작 딸이 마음에 들어 하는 듯한 이자는 아무 욕심이 없어 보였다.
“뭐야, 그럼 내 딸하곤 무슨 사이인가?”
“절 많이 아껴주십니다.”
“난 또 별 사이라고. 청혼 예고하러 온 줄 알았지.”
결혼은 약속하지 않았으나 굳이 따지자면 별 사이였다.
그래도 아무것도 모르는 듯한 황제에게 교제 사실을 알릴 순 없었다. 황녀의 허락도 없이.
“그래, 그 용무가 아니라면 내게 무슨 볼일이 있는 거지.”
황제가 차게 식은 표정으로 용건을 요구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