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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자한테는 관심 없는데요 (63)화 (63/173)

63화

황제는 이렇게 주장하고 있었다. 와이어 숲으로 가는 사절단에 기사와 마법사들을 합류시키자고. 예도라는 황실 혼례 전통을 들먹이면서.

대신관은 여전히 곤란해하며 뒷덜미를 긁적였다.

“폐하, 명분이 있더라도 효용이 없지 않겠습니까?”

“효용이 왜 없겠소. 일단 와이어 숲은 사람의 발길이 한참 못 미쳤던 곳이오. 수풀이 엄청나게 우거져 있을 텐데, 험한 길을 헤치고 아공간에 이르려면 마법사의 마법이나 기사들의 완력이 긴요할 거요.”

대신관은 들릴 듯 말 듯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효용을 말한 게 아니었다.

“폐하, 아공간에 들어가고 나서가 문제입니다. 어차피 인간계 무기로는 그들을 상처 입힐 수 없습니다. 전투 병력이 가더라도 아무것도 못 할 공산이 큽니다.”

옆에 있던 사제 조너선도 얼른 거들었다.

“저희 사제들이야 지하세계가 어떤 곳인지 알고 있으니, 그곳에 다녀오는 게 신앙적인 경험이자 간증 거리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이들에겐 그저 지옥 앞마당일 뿐입니다. 인력 모집 자체가 힘들 줄로 사료됩니다.”

그러나 황제의 표정은 여전히 여유만만했다.

이들의 우려 사항은 이미 헤아리고 있던 바였다. 모험심이 출중하고, 배경지식이 있는 이들을 비밀리에 불러 모아 며칠 전 면접까지 마친 상태였다. 사절단의 결성 목적은 알리지 않았지만.

10년이 지났어도 금단의 숲은 여전히 전사와 마법사들의 도전정신을 자극하는 마력이 있었다.

“후보군은 미리 뽑아 두었소. 칼레바니아 용사들이 그냥 용사들이오? 10년 전 프레이저 후작이 그렇게 막아서도 숲에 불나방처럼 달려들던 이들이오. 지하세계의 존재들을 직접 눈으로 볼 기회인데, 가진 건 용기밖에 없는 자들이 어찌 마다하겠소?”

이제야 사제들은 황제의 목적을 눈치챘다.

의향을 물으려는 게 아니었다. 정해진 답을 들으려는 거였다.

대신관은 양손을 갈퀴로 만들어 거친 은발을 쓸어 넘겼다. 그의 깊은 속에서 텁텁한 날숨이 새어 나왔다.

“폐하, 황녀님께서 혼자 전투를 치르는 것이 그리 신경이 쓰이십니까.”

대신관이 프리다를 언급하자 황제의 얼굴에 초조한 빛이 뚜렷해졌다.

황제는 자신이 독단적으로 행동하고 있다는 걸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다.

“벌레 한 마리조차 못 죽이던 아이요. 혼자 싸우려니 얼마나 외롭고 중압감이 심하겠소. 지원군은 존재만으로 큰 도움이 될 거요. 어차피 집행관들은 살아있는 자들의 생사에 관여할 수 없으니 용사들이 다치는 일은 없을 거요.”

그때였다. 여태 미동도 하지 않던 셀레스틴이 까만 눈동자를 번뜩이며 황제를 바라봤다.

“폐하.”

“셀레스틴, 자네는 이제야 짐의 말에 반응하는군.”

“실패할 가능성을 한 치도 고려하지 않으시는군요. 사제들은 거기서 영원히 못 나올 각오로 가는 겁니다. 기사와 마법사들이 따라와 봤자 자칫하면 실종자만 많아질 수도 있습니다.”

셀레스틴의 말은 황제의 심기를 제대로 건드렸다.

사제들의 우려를 넉살 좋게 받아치던 황제의 얼굴이 단번에 일그러졌다.

“지금…. 실패라 했소? 그것이 진정 여신의 신탁을 직접 받은 사제의 입에서 나올 소리요?”

황제의 언성이 높아졌는데도 셀레스틴은 마냥 덤덤한 얼굴이었다.

기가 찬 황제는 목청을 더 키웠다.

“셀레스틴. 프리다가 그자를 처단할 운명을 타고났다고, 분명 자네 입으로 신탁을 전하지 않았소? 그 말을 지금 번복하겠다는 것이오?”

“번복한 적 없사옵니다, 폐하.”

“내 딸을 정해진 운명의 길로 보내겠다는데 왜 초를 치는 거요, 셀레스틴?”

“그 운명이라는 것은 언제 어디서 발현할지 아무도 모릅니다. 인간이 아무리 철저히 계획한다 한들, 그 뜻대로 이뤄질지는 알 수 없는 일이지요. 그뿐입니까. 당사자의 노력 여하에도 달린 일입니다.”

─쾅.

황제가 테이블을 내리치자 사제들은 어깨를 흠칫 움츠렸다.

그래도 내심 긴장은 풀렸다. 황제에게 하고 싶었던 말을 셀레스틴이 방금 다 쏟아냈기 때문이었다.

사제들은 현재 프리다가 어디서 뭘 하고 있는지 전혀 몰랐다.

황제가 석실의 존재를 이들에게조차 비밀에 부쳐놨기 때문이다.

사제들의 기억에 프리다는 그저 바람 불면 날아갈 듯 허약한 유리온실 속 황녀였다.

전투를 치르기는커녕 숲에서 제 몸 하나 못 건사할 인상이었다.

제아무리 운명을 타고났다 해도, 주어진 기회를 활용해 적시에 실현하는 건 인간의 능력과 의지가 필요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걸 증명해야 할 황녀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황제는 사제들에게서 느껴지는 불신의 기운에 아래턱을 부르르 떨었다.

“자네들이 걱정하는 바가 무엇인지는 잘 알겠소. 하지만 눈에 안 보인답시고 프리다의 노력을 무시하지는 마시오. 내 딸은 과거와 전혀 다른 모습이 되었으니까. 시에나 여신 축일 때 보면 알 수 있을 거요. 얼마나 변했는지는 기대해도 좋소.”

황제가 그렇다니 뭐 어쩌겠나.

사제들은 말을 잃고 일동 침묵했다.

그중 셀레스틴만이 황제를 또렷이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폐하께서 아직 말씀 주지 않으신 게 있습니다.”

“무엇이오?”

“실패하면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감히 집행관들을 기만한 이 나라를, 그들이 가만히 둔답니까?”

셀레스틴은 여전히 실패 이후의 시나리오를 얘기하고 있었다. 황제는 눈을 부릅떴다. 힘껏 쥔 주먹 안 손바닥에 손톱자국이 깊게 팼다.

“셀레스틴, 자네가 이렇게 실패를 좋아하는 줄은 오늘 처음 알았소. 실패하더라도 이 나라엔 아무 일 없을 거요. 프리다를 거기 보내는 것만으로 황실은 그쪽과 약속을 지키는 거니까.”

“…….”

“실패라, 그래, 그럼 어떻게 되는지 말해주겠소. 하나는 확실하오. 내 딸이 마왕비가 되면, 지하세계에 영원히 묶여 돌아오지 못할 거요. 이 정도면 만족하겠소?”

황제의 말을 듣는 사제들의 얼굴이 점점 흙빛이 됐다. 셀레스틴도 그제야 눈을 깔떴다.

“하지만 혹시 모르지. 사제들만큼은 그자들이 무사히 돌려보내 주지 않겠소? 같은 신을 모시는 이들에게 자비를 베풀어 줄지 누가 알겠소. 기만은 황실이 했지, 자네들이 한 건 아니니까 말이오.”

황제는 지끈거리는 이마를 부여잡으며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소. 앞날을 여러 각도로 생각하자니 머리가 영 복잡해서.”

먼저 일어난 황제는 얼어붙은 성직자들을 뒤로하고 층계를 다시 올라 침실로 향했다.

창문 틈새로 들어온 희미한 귀뚜라미 소리만이 심야의 적막을 메웠다.

그의 침실이 위치한 3층 복도에는 역대 황제들의 초상화가 순서대로 걸려 있었다.

황제의 발걸음은 증조부인 던컨의 초상화 앞에 멈춰 섰다.

오색찬란한 보관을 쓴 초로의 사나이. 붉은 망토를 둘러메고 기세등등한 승자의 미소를 짓고 있었다. 황제는 자신과 똑 닮아있는 증조부의 시선을 애써 무시하며 이를 악물고 중얼거렸다.

“얼굴도 모르는 손녀를 팔아 나라를 구하셨으니 속이 참 편하시겠습니다.”

***

발레리는 프리다의 검술 동작을 평소보다 유심히 지켜보고 있었다.

오늘따라 모든 움직임이 유쾌하고 가벼웠다.

무슨 날개라도 단 것처럼.

저번 주까지만 해도 비장하고 무거운 느낌이 강했다. 어깨에 힘 좀 빼라고 아무리 잔소리를 해도 통하지 않았다. 해법을 고심하던 발레리는 검집으로 황녀의 어깨를 툭툭 두들겨 가며 자세를 교정시켜야 했다.

지금은 그럴 필요가 없을 정도로 상태가 좋아졌다. 무슨 계기로 이런 변화가 생겼는지 발레리는 궁금했다.

“황녀님, 뭐 좋은 일 있으세요? 동작이 경쾌하고 좋네요.”

“이제 내 동작만 봐도 심리상태를 알아요?”

“동작만 그런 게 아니에요. 아까 점심 드시면서 콧노래도 부르시던데.”

“헤헤, 들켰다.”

프리다는 상큼하게 웃어 보였다.

발레리도 미소로 화답하며 투구를 벗었다. 그녀의 이마엔 젖은 머리카락이 불규칙하게 붙어 있었다. 급소를 노리는 프리다의 동작에 일일이 반격하다 보니 땀이 많이 났다.

날씨가 뜨거워지는 만큼 프리다의 검술 실력도 무르익어 갔다. 점점 빨라지는 프리다의 급습에 대비하기 위해 발레리는 요즘 중무장을 하고 그녀를 상대했다.

“투구 쓰고 하니까 육수가 폭발하네요. 잠시 쉬었다 해도 될까요?”

“그래요.”

두 여인은 소파에 나란히 앉았다. 발레리는 탁자에 놓인 물통을 집어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프리다는 평소보다 한 톤 높은 목소리로 발레리에게 말을 건넸다.

“발레리, 건국제 얼마 안 남은 거 알죠?”

“아 네, 그러고 보니 여름도 이제 막바지네요.”

“이렇게 몸도 가뿐해지고 체력도 좋아졌는데, 무도회 못 가는 게 너무 아쉬워요. 이젠 중간에 한 번도 안 쉬고 계속 춤출 수 있을 텐데 말이에요.”

프리다는 잠시 눈을 감았다. 복작복작했던 지난날의 무도회 풍경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흠, 못 가시는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유감이에요. 황녀님도 춤추는 걸 좋아하시나 봐요.”

“좋아하지만 체력이 달려서 한두 곡밖에 못 췄어요. 그래서 말인데요, 발레리.”

프리다가 눈망울을 반짝이며 발레리의 손을 정답게 감싸 쥐었다. 뭔가 바라는 게 있는 눈치였다. 벌써 부담을 느낀 발레리는 떨떠름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네, 황녀님. 말씀하세요.”

“올해 건국제 무도회, 날 대신해서 참석해 줄 수 있어요?”

“…예에?”

발레리의 아래턱이 뚝 떨어졌다.

무도회라니. 그것도 황궁에서 열리는.

평생 근처에도 안 가본 종류의 행사였다.

“제가요? 무도회에 가라고요? 거기 아무나 못 들어갈 텐데요?”

“초청장은 걱정하지 말아요. 내 명의로 발행해 줄 거예요.”

초청장이 문제가 아니었다.

거기가 어디라고 발을 들인단 말인가.

게다가 황녀를 대신해서 가라니, 말도 안 되는 제안이었다.

발레리는 한참을 뻐끔거린 뒤에야 대답할 목소리가 나왔다.

“그, 초청장이 문제가 아니라요. 거긴 온통 귀족들뿐이잖아요. 저 같은 신분이 어떻게….”

“그런 건 상관없어요. 내가 대리인으로 임명할 거니까. 그리고 귀족들만 오는 것도 아니에요. 평민도 일정한 공이 있으면 돼요.”

발레리는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건국제 무도회는 웬만한 공으로는 못 비볐다. 평민이라면 무술대회나 체육대회, 예술제, 요리대회 등에서 메달권 안에 들어야만 초청장이 주어졌다. 특정 분야에서 누구나 고개를 끄덕일 만한 실력자여야 했다.

아무 명성도 없이 발을 들이밀었다간 따가운 시선을 받을 게 눈에 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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