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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자한테는 관심 없는데요 (62)화 (62/173)

62화

테렌스는 평소의 차분함을 되찾고 조용히 미소를 띠었다. 켄드릭은 그 의미를 파악하려 했으나 쉽지 않았다.

“자네가 어떤 마음으로 이러는지는 모르지만, 날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발레리가 결정할 사안이다. 적어도 자네가 친구라는 명목으로 관여할 일은 아닌 것 같군.”

“…….”

“경이 발레리를 친구로서 아끼는 마음까진 잘 알겠다. 그래도 방 출입은 자제할 수 있지 않나? 장소도 장소고, 보는 눈이 있으니.”

테렌스는 자신의 요점을 명확히 전달했다.

켄드릭은 아랫입술을 질끈 물었다. 잠시 망각했다. 눈앞의 남자가 자신에게 명령하는 위치이며, 앞으로의 출셋길을 쥐고 흔들 수도 있다는 사실을.

혼란스러웠다.

평소대로 위계를 생각한다면 어떻게든 숙이고 들어갔어야 했다. 하지만 감정 통제가 잘되지 않았다.

발레리의 천진한 얼굴을 생각할수록 더 그랬다.

“전하께서 굳이 명령하신다면…. 네, 드나들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저도 부탁 하나 드리겠습니다.”

테렌스는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일단 뭐라고 하는지는 들어보자 하고.

“위계를 이용해 강제로 밀어붙이지 마십시오. 걔가 싫다고 하면, 정말로 싫은 겁니다.”

“쓸데없는 걱정이 많군.”

“실례가 많았습니다.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켄드릭은 칼같이 경례한 뒤 몸을 돌려 곧장 숙소로 향했다.

“뭐예요? 왜 혼자 오세요?”

복도에서 기다리던 발레리가 다시 채플에 들어온 테렌스를 향해 물었다.

“그자는 숙소로 돌아갔다.”

“잉? 할 얘기 더 있었는데. 걔한테 왜 그러신 거예요? 뭐 잘못한 거라도 있어요?”

사실 발레리는 창문을 통해 후원을 엿보고 있었다. 아쉽게도 거리가 멀어 말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테렌스가 켄드릭을 나무라는 듯했는데, 켄드릭이 웬일로 고깝게 대꾸하면서 신경전이 일어났다.

켄드릭이 윗사람한테 대드는 모습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솔직히 낯설었다. 황태자가 대체 무슨 말을 했길래 그러지.

“네 방에 함부로 들어가지 말라 했다.”

“…제 방에 제 친구도 마음대로 못 들여요?”

“이 공간에 다른 남자가 드나든다고 생각하면 참기 어려워서.”

테렌스는 그냥 솔직한 심정을 말했다. 억지로 들린다 해도 상관없었다.

“와, 설마 질투라도 하시는 거예요? 걔한테?”

발레리는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테렌스를 올려다봤다.

“좋을 대로 생각해. 그런데 아직도 그의 집착…. 광팬인가?”

“아뇨.”

단호한 대답이 마음에 들었다. 테렌스는 보조개를 드러내며 그녀의 헝클어진 머리칼을 귀 뒤로 넘겼다.

발레리는 움찔했지만 물러나진 않았다. 그의 달콤한 미소와 부드러운 손길은 거부하기 힘들었다.

“…대낮에 복도에서 왜 만지시죠. 사제님들이 언제 출몰할 줄 알고.”

“밤에 방 안에선 이래도 되나? 사제들 없을 때.”

예고 없이 훅 들어오는 발언이었다.

발레리는 얼굴이 벌게져서 테렌스의 오른팔을 힘차게 강타했다.

찰싹, 하고 그의 팔뚝이 손바닥에 감겼다. 생각보다 훨씬 밀도 있는 팔 근육이었다.

“지금 내게 손찌검한 건가.”

“네. 어우 진짜, 원래 이렇게 능글맞으세요? 전하한테 문 열어드릴 생각 없는데요.”

톡 쏘는 말투였지만 전혀 가시가 느껴지지 않았다.

침실에서 그녀의 저돌적인 모습을 접한 이후 이런 모습은 그저 앙탈로 비쳤다.

“나도 지금은 들어갈 생각 없다. 조금 후에 건국제 조직위원회 회의가 있어서.”

“…아무튼 누가 제 방에 오든 상관 마세요. 쓸데없는 질투도 하지 마시고요.”

테렌스는 못 이기는 척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켄드릭 경은 이곳에 출입하지 않기로 했으니.

그는 발레리와 눈길을 섞으며 다시 입술을 뗐다.

“내 매력이 무엇이냐고 물었지.”

“…아, 그랬었죠.”

발레리는 이제야 떠올렸다. 에이바 볼드윈 공녀의 주문사항을. 외모 말고 황태자의 다른 매력이 뭔지 파악해달라고 했던.

테렌스는 짐짓 아쉬운 얼굴로 발레리의 오른뺨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그건 내가 몸소 보여주겠다.”

“무슨 소리시죠?”

발레리는 볼에서 그의 왼손을 떼어내며 물었다.

“다음 주부터는 황태자궁에 오지 않아도 괜찮아.”

“…잉? 갑자기요?”

“이젠 내가 찾아와서 보고를 받겠다.”

“그러니까 뭐야, 제 방에 오신다는 거예요? 아까 말씀드렸을 텐데요. 문 안 열어줄 거라고.”

“네가 원하는 걸 주려고 마음먹었다. 언제든 준비하고 있겠다.”

뭐야. 뭘 준다는 건데. 준비한다는 건 또 뭐고.

발레리가 뭐라 대꾸하기도 전에, 테렌스는 곧장 떠났다.

눈 깜짝할 새 콧잔등에 입술 도장도 찍혔다.

“아씨, 나 또 말렸네…. 근데 여길 와서 뭘 하겠다는 거야? 내가 원하는 거라면…. 설마?”

꿀꺽.

발레리는 마른세수를 하며 밭은 목에 침을 넘겼다.

골든 리트리버인 줄 알았는데.

같은 빛깔의 여우였다.

잊고 있었다. 여우도 갯과라는 걸.

***

켄드릭은 상념에 깊이 잠긴 채 숙소로 돌아왔다.

그의 널찍한 독방은 먼지 한 톨 없이 깔끔하게 치워져 있었다.

켄드릭은 얼른 창가에 다가가 커튼부터 쳤다. 따가운 햇볕이 들이치는 걸 보니 방금 본 황태자의 백금발이 떠올라 불쾌했다.

한결 어두워진 방 안에 불안한 기운이 서서히 물꼬를 텄다.

충격이었다.

황태자가 발레리에게 그런 마음을 품고 있었을 줄이야.

켄드릭은 책상에 엎드려 머리를 감싸 쥐었다. 어깨 위에 찰랑거리던 머리칼이 바스스 헝클어졌다.

“어떻게 발레리를….”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켄드릭은 황태자로서의 테렌스를 동경했었다.

테렌스는 냉철한 판단력과 깔끔한 업무 처리로 정평이 나 있었다.

그는 황제의 후계자이기에 앞서 신뢰받는 국정 파트너였고, 실제로 황제를 대신해 많은 일을 재가했다.

아랫사람에게는 엄격하면서도 너그럽기로 명성이 자자했다.

그야말로 완벽에 가까운 지도자감이라고 생각했었다.

몇 달 전, 그가 발레리의 방에 함부로 드나들지 말라고 잔소리하기 전까지는 그랬다. 당시 사건을 계기로 지나치게 깐깐한 사람이라는 인상이 박혀버렸으니.

“설마 그때부터였나.”

그때라면 발레리가 석방된 지 얼마 안 된 시점이었다. 그렇게 일찍부터 반해버렸다는 건가.

“발레리가…. 예쁘긴 하지.”

작은 얼굴에 오밀조밀 담긴 이목구비. 쭉 뻗은 건강한 몸매와 호탕한 웃음소리. 그에겐 어느 것 하나 매력적이지 않은 부분이 없었다.

문제는 발레리의 속마음이었다.

지난 10년간 그녀와 연애를 주제로 얘기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래서 관심이 없는 줄 알았다. 발레리는 길거리에 지나다니는 남자에게 한 번도 눈길을 준 적이 없었으니까.

켄드릭은 그녀의 도적단 동료 케빈을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그 또한 외모가 꽤 준수했으나, 발레리는 그를 정말 소 닭 보듯 했다.

하지만 황태자라면 얘기가 다를 수도 있었다. 외모나 지성이나 인성이나 흠잡을 데 하나 없는, 제국의 얼굴과도 같은 인물이니.

“아니야. 그래도 현실적으로 불가능해. 신분 차이가 일단 너무 심하잖아. 황태자도 그렇게까지 진지한 마음은 아닐 거야. 발레리가 그걸 모를 리 없지.”

켄드릭은 책상 서랍의 맨 아랫단을 열었다.

언젠가 그녀에게 선물하려던 목걸이가 들어 있었다.

기사 선발시험 합격 서신을 들고 발레리를 기다리던 날, 그는 이 목걸이를 그녀에게 주려 했었다.

주술이 걸려 희미하게 빛나는 이 목걸이를.

당시 켄드릭은 이것을 주며 이렇게 말할 계획이었다.

‘도적 일은 내가 말려도 계속하겠지? 그동안 어디 잡혀가지 말고 안전하게만 있어 줘.’

‘내가 목표를 이룬 뒤에는, 너를 꼭 곁에 두고 싶어.’

‘내 곁에 꼭 여자가 있어야 한다면, 그건 너였으면 해.’

그런데 지금은 그럴 수 없는 상황이다.

오랜 기간 간직한 마음은 아무에게도 내보일 수 없었다.

현재 교제 중인 프리다 황녀에게 예의가 아닌 일이니까.

켄드릭은 깊이 심호흡했다. 그리고 속으로 다짐했다.

“그래. 황태자 말이 맞아. 난 네 연애사에 관여할 명분이 없어. 난 이미 다른 걸 선택했으니까.”

그는 망연히 고개를 숙였다.

“그냥 믿고 기다리고 있을게. 모든 게 끝나고 너한테 가면…. 네가 날 선택할 거라고.”

***

낮의 불볕더위가 숙지근하게 식은 야심한 밤.

황제는 랜턴을 들고 어두컴컴한 중앙궁 지하 계단을 더듬어 내려갔다.

그의 발걸음이 다다른 곳은 군 기밀을 논의하는 안보회의실 앞이었다.

그는 곧장 문을 열고 들어갔다.

회의실 안에는 안보와는 전혀 관계없는 인사들이 착석해 있었다.

칼레바니아 최고 성직자인 대신관과 일부 고위 사제들. 이들은 국방대신과 사령관들의 명패가 놓인 자리에 서서 황제를 맞이했다.

황제가 가운데 의석에 좌정하자 모두가 따라 앉았다.

황제는 검지 손톱으로 테이블을 툭툭 건드렸다. 규칙적으로 똑딱이는 소리가 났다. 피아노 위에 메트로놈을 켜둔 것처럼.

그 소리가 반복될수록 음습한 지하 회의실의 긴장감은 서서히 증폭돼 갔다.

배석한 성직자들은 빳빳한 자세로 잠자코 기다렸다. 황제의 입이 트일 때까지.

황제는 한 번 고개를 끄덕이더니 목을 큼큼 가다듬었다. 이제야 말을 시작하려는 듯했다.

“늦은 시간에 와 주어 고맙소. 짐이 제안을 하나 할까 해서 이렇게 모셨소만….”

“말씀하시지요, 폐하.”

대신관이 곧바로 황제의 말을 받았다.

“사절단에 전투 병력을 추가하려고 하는데. 한 스무 명 정도로. 대신관의 생각은 어떻소?”

예상치 못한 발언에 대신관은 콧수염에 맺힌 땀방울을 천천히 쓸었다. 나머지 사제들은 서로 흘끗흘끗 눈빛을 주고받으며 곤란한 기색을 나눴다.

이들 가운데 유일한 여자 사제인 셀레스틴만이 평정심을 유지한 채 가만히 황제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별로 반기는 눈치는 아니군.”

“폐하, 저희 사제들이야 증인으로 따라간다고 하더라도, 기사와 마법사들은 명분이 없지 않겠사옵니까.”

대신관은 억지 미소를 지어 보이며 최대한 정중하게 대답했다.

황제는 뭐가 문제냐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명분이야 만들면 되는 것 아니겠소?”

“표면적으로는 경사에 해당하는 일인데, 어떻게 검과 지팡이를 든 자들을 대동하겠습니까. 처음부터 의심을 살 필요는 없지 않겠습니까.”

예상했던 반응이었다. 황제는 호쾌하게 너털웃음을 지으며 곤란해하는 사제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훑었다.

“허허, 황실 혼례 전통이란 게 있지 않소. 예도(禮刀) 명목으로 보내려 하니 걱정하지 마시오. 신부의 나라 전통 정도는 존중해 주지 않겠소?”

예도란 행진하는 신랑 신부의 머리 위로 기사와 마법사들이 검과 지팡이를 높이 들어 관문을 만드는 칼레바니아 황실의 전통이었다.

통상 황실 결혼식 예도단은 근위대 기사와 황궁 마법사들이 반반씩 나눠 맡았다. 보통은 좌열에 기사들이 서고, 우열에 마법사들이 서서 검과 지팡이 끝을 높이 맞댔다.

칼레바니아 황실이 추구하는, 무력과 마력의 균형을 상징하는 의식이었다.

“흠, 그들에게 예복을 입혀놓으면 검과 지팡이쯤은 장식으로 보이지 않겠소? 거동은 좀 불편하겠지만 싸우러 온 사람들로 보이진 않을 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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