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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자한테는 관심 없는데요 (61)화 (61/173)

61화

방 안에 들어선 켄드릭은 발레리의 책상 의자에 자리 잡았다.

발레리는 책을 내려놓은 뒤 침대맡에 걸터앉았다.

켄드릭은 뭔가 잊은 게 떠올랐다는 듯 제 무릎을 탁 쳤다.

“아 참, 엘로이스 황제 실록 1권은 못 빌렸어. 장기대여 중이더라고.”

“흠, 장기대여 중이면 한동안은 못 보겠네.”

발레리는 아쉬운 입맛을 다셨다.

어느덧 8월이었다. 주어진 시간은 7개월 남짓. 마냥 여유 부릴 수만은 없는 상황이다.

‘당장 입수하긴 어렵겠지만 위치, 아니 하다못해 생긴 것만이라도 알면 좀 좋아? 애초에 존재는 하는 물건이냐고.’

지금까지처럼 무식하게 무기고를 뒤지는 방법밖에 없는 걸까. 발레리는 또 새벽잠을 줄일 생각을 하니 막막했다.

“아무래도 그럴 거야. 근데 발레리,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어서 역사에 관심을 가지는 거야? 그것도 건국 초기 역사를.”

“그냥…. 초대 황제의 행적이 궁금했어. 뭘 남기고 갔나 해서.”

“남긴 거라면…. 유언? 유품? 너 내가 건국신화 얘기하면 귓등으로 듣던 애 맞냐.”

“사람 관심사는 언제든 바뀔 수 있는 거야.”

“…잠깐.”

켄드릭이 발레리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슬며시 다가왔다.

뭔가 이상한 기색을 눈치챈 건가? 발레리는 괜한 불안감에 목덜미를 움츠렸다.

“…뭔데.”

“너 눈곱 꼈어. 잠깐만 있어 봐.”

켄드릭은 발레리의 오른쪽 눈에서 눈곱을 살살 떼 줬다.

그녀의 반응은 덤덤했다.

언제나 그는 이런 식으로 다정했다. 이전이라면 조금은 쑥스러웠겠지만, 지금은 별생각이 안 들었다.

똑똑.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발레리는 촉각을 잔뜩 곤두세웠다.

“뭐지, 내 방에 올 사람 없는데.”

“흠, 근위대 동료 아니야?”

“여기 놀러 올 만큼 친한 놈 하나도 없어.”

“그래도 일단 나가봐. 중요한 일일 수도 있잖아.”

발레리가 망설임 끝에 문을 슬쩍 열었다.

인기척을 확인하기도 전에, 열린 틈새로 뭔가가 불쑥 비집고 들어왔다.

묵직한 꽃다발 한 아름이었다.

연보랏빛 스타티세였다. 적어도 백 개는 될 것 같은 꽃송이가 발레리의 시야를 불쑥 가렸다.

발레리는 움찔하며 고개를 뒤로 뺐다.

꽃다발 위로 따가운 여름 햇살이 방 안을 급습했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소맷자락을 들어 눈을 가렸다.

“안 받고 뭐 하지.”

테렌스의 목소리였다.

그제야 발레리는 팔을 치우고 그를 게슴츠레 응시했다.

“예고도 없이 뭔 일이세요? 이 꽃은 다 뭐고요.”

“잠시 짬 내서 왔다. 어서 받아.”

발레리는 얼떨떨해하며 꽃다발을 두 손으로 안아 들었다.

이 더운 날 밖을 얼마나 쏘다녔는지, 테렌스의 이마엔 땀줄기가 여럿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 위로는 포마드를 발라 넘긴 백금발이 등 뒤 햇빛을 찬연히 반사했다.

가쁜 숨을 몰아쉬던 테렌스는 셔츠 칼라를 감싼 크라바트를 풀어 헤쳤다.

맨 위 단추가 툭, 풀려 목선이 쇄골까지 내려갔다. 눈에 익은 상아색 살빛이 드러나자 발레리는 못 본 척 딴전을 피웠다.

“제가 선물 거절하는 취미는 없어서. 고맙게 잘 받을게요.”

“선물 아닌데.”

“그럼 뭔데요?”

“그때 그 꽃목걸이. 내가 다른 꽃으로 갚는다고 했으니까.”

기억력도 참 좋네. 발레리는 그의 연청색 눈동자를 힐끔거리며 입꼬리를 꾹꾹 눌렀다.

테렌스는 그녀의 묘한 표정을 제 좋을 대로 해석하며 보조개 꽃을 피웠다.

부담스러워서 거절할까 걱정했는데, 의외로 잘 받아주니 뿌듯했다.

발레리가 꽃을 받아드는 장면을 켄드릭은 뒤에서 유심히 지켜보고 있었다.

그는 호기심을 못 이기고 문간으로 따라 나왔다.

“뭐야, 발레리? 누군데 너한테 꽃다발을 줘?”

테렌스의 낯빛이 급속도로 얼어붙었다. 발레리의 등 뒤에서 웬 남자 목소리가 들렸기 때문이다.

마침내 두 남자의 시선이 문틈 사이로 부딪혔다.

켄드릭의 시야에 들어온 건 지극히 높으신 분의 굳은 얼굴이었다.

호기심은 바로 증발했다. 간담이 서늘해지고 목이 턱 막혔다. 인사말조차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저, 전하….”

목소리의 정체를 확인한 테렌스는 표정이 싸늘하게 식었다.

“자네가 이 방엔 어쩐 일이지.”

“얘요? 제가 볼일이 있어서 불렀는데요.”

“발레리, 나는 켄드릭 경에게 물었다.”

테렌스는 켄드릭에게 직접 해명을 요구하고 있었다.

발레리는 어리둥절했다. 그냥 놀러 왔다고 해도 되는걸, 켄드릭은 좀체 입을 열지 못하고 머뭇대기만 했다.

그의 암묵이 길어지자 테렌스는 냉기를 뿜으며 나직이 명령했다.

“켄드릭 경, 잠깐 후원에서 보세.”

발레리는 두 남자 사이에 흐르는 심상찮은 기류를 감지했다. 

“그럼 저도 같이 가요.”

그녀는 이들을 따라나서려 발걸음을 뗐다. 그러나 바로 멈춰 섰다. 켄드릭이 그녀의 어깨를 붙잡고 제지했기 때문이다. 그는 귀엣말로 이렇게 속삭였다.

‘괜찮으니까 여기 있어.’

테렌스의 눈에 핏발이 섰다. 발레리의 어깨에 자연스레 올라붙은 손. 귓가에 들이민 입술. 피가 거꾸로 솟구치는 느낌이었다.

***

떨떠름한 발레리를 뒤로하고, 두 사내는 채플 후원으로 나왔다.

빠른 걸음으로 앞장선 테렌스는 나무 그늘에 멈춰 섰다.

그리고 바로 뒤를 돌아 켄드릭을 직시했다.

어지럽게 작열하는 햇살과 서릿발 선 테렌스의 냉담한 표정이 묘한 대조를 이뤘다.

침묵이 흐르는 가운데 요란한 매미 소리가 켄드릭의 신경을 긁어댔다.

“켄드릭 경, 내 기억상 이번이 처음은 아닌 것 같은데.”

테렌스의 날카로운 시선이 켄드릭의 녹안을 깊이 파고들었다.

켄드릭은 끓어오르는 억울함을 누르려 등 뒤로 주먹을 쥐었다 폈다. 그래도 좀처럼 표정 관리가 되지 않았다.

지난번에는 부적절한 측면이 없진 않았다. 발레리의 방에서 밤늦게까지 술을 마셨으니. 하지만 지금은 백주 대낮이다. 술은커녕 물 한 모금 마시지 않았다.

게다가 황태자 본인도 그녀의 방문을 두드리지 않았는가. 속에서 신물이 울컥 올라올 정도로 분했다.

꽉 다문 켄드릭의 턱에 근육이 바짝 올랐다. 테렌스도 그의 반항기를 금방 읽어냈다.

“…대답하기 싫은가.”

“아닙니다. 기억하고 있습니다.”

“다시 한번 묻겠다. 여자 혼자 지내는 숙소에 드나드는 건 다소 부적절하다고 생각하지 않나?”

켄드릭은 또다시 턱을 악물었다.

“그러시는 전하께서도 찾아오시지 않으셨습니까? 여자가 혼자 사는 방에.”

그 힘이 목청까지 도달한 걸까. 생각보다 굵직한 음성이 올라왔다.

“나는 안에 들어갈 생각은 없었다. 전해줄 게 있었을 뿐.”

테렌스는 켄드릭의 시선을 살짝 회피하며 대답했다.

그는 빤빤한 성격이 못 됐다. 상대방의 눈을 쳐다보며 거짓을 말하긴 어려웠다.

사실 들어갈 의사는 충만했다. 켄드릭만 없었다면 물 흐르듯 자연스레 입성하려 했다. 발레리와 첫 입맞춤을 나눴던 그 공간에.

“전하, 이미 들으셨듯이 저는 발레리의 부름을 받고 들어간 겁니다.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켄드릭은 울화를 억누르며 또박또박 설명했다.

문득 그의 뇌리에 한 가닥 찝찝한 기억이 스쳤다.

얼마 전, 마법사 레이븐과 함께 황태자궁 집무실로 날랐던 책의 제목들.

하나같이 입 밖에 내기 버거울 정도로 노골적이었다. 굳이 펼쳐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남녀 사이의 육체적 결합에 대한 방법론을 담았다는 걸.

황태자가 발레리에게 내민 꽃다발 또한 켄드릭의 머리를 복잡하게 했다. 통상 상대방의 마음을 얻으려 할 때 건네는 선물이었으니까.

지금 황태자의 눈빛에서도 뚜렷한 단서가 잡혔다. 서슬 퍼런 적의가 투명하게 들여다보이고 있었다.

“누가 불렀든 간에 그 방 문턱을 넘은 건 자네 의지였을 텐데.”

낮게 깔린 목소리에도 오싹한 한기가 감돌았다.

왜 자꾸 내 잘못이라는 거지. 그를 마주한 켄드릭의 시선에는 불만과 분노가 그득 담겼다.

“…그러시는 전하야말로 다른 목적이 있으신 게 아닙니까?”

“다른 목적?”

켄드릭이 갑자기 따지듯 묻자 테렌스는 이맛살을 구겼다. 

“발레리에게 흑심을 품고 계신 것 같아 여쭙는 겁니다.”

“…흑심이라고 했나.”

“네. 아무것도 모르는 애한테 접근해서 뭘 취하려 하시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이쯤에서 그만두셨으면 합니다.”

테렌스의 한쪽 입가가 비틀려 올라갔다. 주의를 시키려고 불러낸 자가 도리어 일갈하듯 열을 올리고 있으니.

“내 접근 목적이 뭐든 자네가 무슨 상관인지 모르겠군.”

“걔 친구로서 걱정하는 겁니다.”

“친구로서라…. 내가 발레리를 해치기라도 할까 봐 그러나? 그런 걱정은 붙들어 매도 좋은데.”

“발레리는 고작 흑심 따위로 접근할 만한 대상이 아닙니다.”

켄드릭은 어느새 도끼눈을 뜨고 있었다.

테렌스는 그의 시선을 싸늘하게 직시하며 이렇게 생각했다.

‘흑심이라면…. 오히려 발레리가 내게 품고 있는 것 같은데. 내 몸에만 관심 있는 것 같으니.’

“자네가 뭔가를 착각하고 있는 것 같아 말해두겠는데.”

“…….”

“내가 발레리에게 품은 건, 흑심이 아니라 연심이다.”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지.

켄드릭의 눈이 뻥하게 휘둥그레졌다.

“전하께서…. 발레리를 진심으로 좋아하기라도 한단 말씀입니까?”

“내가 그러면 안 되는 이유라도 있나?”

“…그러지 마시죠.”

“같은 질문을 또 하게 하는군. 자네가 무슨 주제로 내 개인사에 뛰어든다는 거지.”

“지금 허튼짓하고 계신 겁니다.”

테렌스는 미간을 있는 대로 좁혔다.

“근거를 대라.”

“발레리는 남자에 관심 없습니다. 아직은요.”

켄드릭의 섣부른 주장에 테렌스는 비소를 머금었다.

아무리 십년지기라 해도 친구의 모든 걸 속속들이 알 순 없는 법인가. 발레리는 일단 아무것도 모르는 애가 아니었다.

조금 서투를지언정 알 건 다 아는 성인 여성이었다.

─자고 갈 거죠?

생각지도 않았던 파격적인 질문까지 먼저 했었다. 보고하랍시고 들인 침실에선 그녀의 주도로 거의 끝까지 갈 뻔했다. 이성에 눈뜨지 않았다면 그런 행동을 했을 리가.

“자네는 친구에 대해 너무 섣불리 단정하는군.”

“섣부르다니요. 적어도 걔에 대한 거라면 전하보다는 잘 압니다.”

켄드릭의 관점에선 사실이었다. 그는 발레리의 진짜 직업과 신분을 모두 아는 황궁 내 유일한 인물이었으니까.

발레리에 대해 두 남자가 보유한 정보는 판이한 비대칭이었다.

켄드릭은 그녀의 과거를 알았고, 테렌스는 여성으로 발현한 그녀의 모습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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