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화
“황후와 오붓한 시간을 보내려 하니 다들 물러가게.”
저녁 식사를 마친 황제는 이런 핑계를 대며 보좌진을 전부 물렸다.
그는 제일 먼저 옷을 갈아입었다. 치렁치렁한 사제복으로. 찬란한 보관이 벗겨진 자리에는 동글납작한 사제 모자가 씌워졌다.
순식간에 사제로 둔갑한 황제는 문지기 수장 루퍼트만 대동한 채 채플로 입성했다.
황궁 내에서 최대한 눈에 띄지 않게 움직이려면 변장 밖에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
“루퍼트. 정말 프리다에게 별고가 없는 게 맞느냐? 짐이 아무리 생각해도 평일에 부르는 게 이상하단 말이지.”
“제가 보기엔 어느 때보다도 의욕이 넘치십니다. 걱정 붙들어 매시지요, 폐하.”
석실 관리 총책임자인 테렌스도 별다른 일이 없다고 했었다.
그래도 황제는 불안했다.
프리다는 검술 수련을 받기 전까지만 해도 우울감과 무력감을 꽤 자주 호소했다.
햇빛 한 줄기 안 드는 석실에서 장장 4년을 지냈다. 만나는 사람도 극히 한정적이었다. 마음의 병이 생길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다.
프리다는 서서히 생기를 잃어갔다. 척박한 땅에 억지로 심긴 묘목처럼.
가끔은 이성을 잃고 처지를 비관했다.
─이렇게 숨어서 목숨만 부지하는 삶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다고요!
─시간 지체할 핑계도 이젠 없잖아요. 어차피 팔려갈 거, 지금 나가나 나중에 나가나 똑같은 거 아니에요?
황제는 음울한 과거를 상기하며 제 턱수염을 매만졌다.
‘매일같이 울부짖던 프리다를 황후와 눈물 콧물 쏟으며 말리던 게 엊그제 같은데….’
그래도 지금의 프리다는 분위기가 사뭇 달라지긴 했다. 무기력하게 갇혀 지내던 과거와 달리, 뚜렷한 목표를 향해 씩씩하게 나아가고 있었으니까.
황제는 루퍼트와 함께 한마디 말도 없이 나선형 계단을 타고 내려갔다.
그리고 석실 앞에 도착한 순간.
군주가 성직자 차림으로 등장하자 문지기들이 술렁술렁 동요했다. 혼란에 빠진 이들의 거수경례 자세에서는 절도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다행히 황제는 이들의 군기에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드르릉거리는 소리와 함께 석실 문이 활짝 열렸다.
프리다는 테이블에 앉아 계피차를 마시고 있었다. 찻잔 바로 앞에는 반 정도가 사라진 생크림 케이크 조각이 놓여 있었다.
황제는 석실에 누가 또 있는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아무도 없었다. 혹시나 있을까 했던 인물은 먼저 퇴근한 뒤였다.
“…오셨어요, 아버지.”
프리다는 자리에서 일어나 아비에게 눈꼬리를 휘며 인사했다.
“잘 있었느냐, 프리다. 네가 밤에 간식을 먹다니, 별일이로구나. 어서 앉거라.”
“요즘은 야식을 안 먹으면 배고파서 잠 못 자요.”
“그래, 잘 먹어서 보기 좋구나.”
황제는 의자에 앉자마자 테이블 위로 손을 뻗어 딸의 손을 쥐었다.
예전의 그 가느다랬던 손이 아니었다.
딸의 손을 가만히 쓰다듬던 황제의 낯빛이 점차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살이 제법 붙은 건 반가웠으나 손바닥과 손가락 마디마디가 너무 딱딱하고 까끌까끌했다.
“프리다. 이렇게 굳은살이 배길 정도로 연습을 하다니. 너무 무리하는 건 아닌지 걱정되는구나.”
“아니에요. 이제 체력 문제는 거의 없어요. 굳은살은 연습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생기던걸요.”
“그래도 여자 손이 이렇게 거칠어져서야….”
“이게 다 저 살자고 하는 일인데, 여자 손 남자 손이 따로 있나요. 이게 다 열심히 했다는 증거라고 생각하면 뿌듯해요.”
귓가에 잔잔히 깔리는 차분한 목소리였다.
말씨에도 굳은살이 박여버린 걸까. 한 차원 성숙해진 딸을 보니 황제는 콧잔등이 시큰해졌다.
“네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다행이지만…. 갑자기 무슨 일로 날 불렀느냐?”
“아버지께서 긴히 만나주셨으면 하는 사람이 있어서요.”
“흠, 누구지?”
“아버지도 아는 사람이에요.”
기어이 올 것이 온 건가.
황제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떴다.
그리고 짐작 가는 사람의 이름을 꺼냈다.
“켄드릭 프레이저 말이냐.”
“어떻게 알고 계셨어요?”
“…뭐, 그래. 후작에게 단 하나 남은 아들이니, 언젠가 한 번쯤 볼 생각은 있었다. 늦지 않게 일정 잡아서 부르도록 하마.”
못 들어줄 부탁은 아니었다.
가장 아끼는 제후이자 오랜 친구의 아들이었다. 황실의 촉망받는 기사이기도 했고, 석실 집사로서 딸의 일거수일투족을 챙기고 있었다.
“그 사람, 독대를 원한대요. 주변 사람은 다 물려주셨으면 좋겠어요.”
“독대? 나와 일대일로 만나길 원한다는 것이냐?”
“네, 아버지.”
황제는 턱수염 끝을 문지르며 켄드릭의 얼굴을 기억해내려 애썼다.
어릴 적엔 꽤 똘똘하게 생긴 소년이었다. 몇 달 전 지나가다 얼핏 본 바로는 풍채가 당당했고 머리가 길었다.
“흠, 알겠다. 알현실이 아니라 서재로 불러야겠군.”
“네, 그리고 아버지.”
“음? 또 다른 부탁이 있느냐?”
“…웬만하면 다 들어 주셨으면 해요. 켄드릭 경이 무슨 부탁을 하든지요.”
프리다의 태도는 자못 간곡했다.
황제는 그저 얼떨떨하기만 했다. 딸이 이렇게까지 무언가를 요구해오는 건 처음이었다.
“글쎄, 일단 들어보고 결정해야겠지. 네 부탁이니 최대한 긍정적인 방향으로 생각해 보마.”
“정말 감사해요, 아버지.”
만나면 만나는 거지, 대체 독대까지 요청할 이유가 뭐란 말인가.
‘남들 듣는 데서 하지 못할 말이라면….’
황제는 자신이 예상했던 시나리오가 계속 적중하자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어쩌면 진짜로 프리다의 일흔여덟 번째 구혼자가 될지도 모르겠군.’
켄드릭 유진 프레이저.
황제는 소문으로 익히 알았다. 그가 유능하고 야망 넘치는 청년이라는 걸.
프리다가 먼저 이렇게 챙겨주는 걸 보니, 이미 딸의 마음을 얻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지금은 받아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입술을 잘근잘근 씹던 황제는 갑자기 다른 게 떠오른 듯 화제를 돌렸다.
“아 참, 프리다. 건국제가 얼마 안 남았단다. 답답했을 텐데 오랜만에 밖으로 나오겠구나.”
“그러네요. 곧 9월이네요.”
“그날을 대비해서 사제들과 문지기들이 따로 훈련하고 있다. 네 동선을 따라 잘 보필해야 하니 말이다.”
칼레바니아 건국제는 9월 내내 성대하게 개최됐다. 황실 주관으로 무술대회와 체육대회, 예술제와 요리대회 등 여러 가지 경연이 펼쳐졌다.
여기서 입상하면 신분과 관계없이 출셋길이 뚫렸으므로, 여러 분야의 실력자들이 이때만을 위해 칼을 갈았다. 다방면에 걸쳐 볼거리가 어찌나 많은지, 다른 나라 귀족들도 수 주에 걸쳐 마차를 타고 와서 구경할 정도였다.
아쉽게도 프리다가 채플 바깥으로 나갈 수 있는 날은 단 하루였다.
시에나 여신의 성스러운 축일이자, 건국제 폐막일인 30일.
제국의 황녀로서 온 백성들에게 생존을 신고하는 날이었다. 신변 이상설이나 실종·사망설 등 여러 헛소문을 불식시키기 위한 최소한의 증명작업이었다.
수만 명의 백성이 모인 광장을 향해, 프리다는 발코니에 서서 웃으며 손을 흔들어야 했다.
‘나 여기 살아있어요’ 하는 그녀의 손짓에, 모두가 안도하며 열띤 함성으로 화답했다.
어느 때보다 삼엄한 경비에 둘러싸인 채 움직여야 했으나, 청명한 가을 하늘 아래서 바깥공기를 들이마실 수 있다는 것만으로 프리다는 만족했다.
그게 올해로 다섯 해째.
이제 그마저도 할 수 없는 날이 오겠지.
프리다는 초점 흐린 눈을 천천히 깜빡였다.
“어쩌면 올해가 마지막이 될 수도 있으니까, 최대한 신경 써서 입고 싶어요. 작년보다 살이 많이 올랐는데, 치수를 다시 재서 알려드릴게요.”
황제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후…. 프리다, 지금 마지막이라고 했느냐? 왜 멋대로 그렇게 단정하는 것이냐.”
의연해 보이는 딸이 아직도 미래를 비관하고 있을 줄이야.
황제는 미어지는 가슴을 부여잡고 깊은 한숨을 토해냈다.
“아버지, 단정하는 게 아니라 대비하는 거예요. 어떻게 되든 후회하고 싶지 않아서요. 이해해 주셨으면 해요.”
“후우….”
“그러고 보니 무도회도 열리겠네요. 열아홉 살 때가 마지막이 될 줄은 몰랐는데.”
“그 마지막이라는 말, 아비 속 긁고 싶은 게 아니라면 다시는 꺼내지 마라. 무도회는 나중에 얼마든지 열어줄 수 있으니까.”
황제는 북받치는 감정을 꾹꾹 눌러 담으며 딸을 애써 타일렀다.
“저, 아버지.”
“…그래.”
“올해 무도회는 누구라도 대신 보내고 싶어요. 바깥세상 얘기도 전해 듣고 싶고. 안부 편지 보내주는 귀족 자제들에게 감사 인사라도 전하려고요.”
건국제 무도회에 대리인을 보내겠다는 말이었다.
황제는 흔쾌히 승낙했다. 딸이 직접 가는 게 아니라면 별문제가 없을 것이란 생각이었다.
“그래, 따로 생각해둔 대리인은 있느냐?”
프리다는 문득 한 사람의 얼굴을 떠올리며 밝게 웃었다.
“네, 지금 막 생각났어요. 응해줄지는 모르겠지만, 잘 준비해서 보내도록 할게요.”
“…알았다.”
“아 그리고, 아버지.”
“또 뭐냐.”
“연습량이 많다 보니까 검날이 좀 무뎌지는 것 같아서요. 여분으로 좀 더 주문해 주실 수 있을까요?”
“그래. 그러지 않아도 추가 주문을 생각하고 있었다. 완성되면 바로 보내마.”
***
똑똑.
“흐아암…. 누구세요.”
“나야, 켄드릭.”
토요일 정오까지 늦잠을 자던 발레리는 대충 마른세수를 한 뒤 방문을 열었다.
마침 켄드릭에게 맡겨둔 일이 있긴 했다.
“어, 왔냐.”
“네가 보여준 까마귀 문장 말인데. 일단 칼레바니아 귀족 가문은 아니야. 자작가랑 남작가까지 뒤졌는데도 없었어.”
“에휴, 그럴 줄 알았다. 나도 독수리나 비둘기 문장은 많이 봤는데 까마귀는 한 번도 못 봤다니까.”
의뢰인의 서신에 찍혀있던 까마귀 인장. 발레리는 그 정체를 찾기 위해 켄드릭에게 도움을 요청했었다.
그저 황실 도서관에서 책만 빌려달라고 했었는데, 켄드릭은 직접 내용을 들여다보기까지 한 모양이었다.
“그래서 다른 책을 더 빌려왔어. 혹시 외국 귀족 가문에는 있지 않을까 싶어서.”
켄드릭이 묵직한 책 두 권을 발레리의 품에 안겨줬다. 모두 황실 도서관 인장이 찍혀있었다.
“이게 다 뭐야?”
“크세니아랑 이스티아 쪽 귀족 가문 정보를 모아놓은 편람이야. 문장은 어차피 그림으로 수록돼 있으니까, 찾기에 어렵진 않을 거야.”
“아이고, 무거웠을 텐데 고맙다.”
“…미안해, 발레리. 너 활자랑 안 친한 건 알지만, 내가 이걸 다 찾아볼 시간은 없어서.”
발레리는 겸연쩍게 씩 웃었다.
오히려 미안한 쪽은 본인이었다.
“야, 난 책만 빌려 달라고 했어. 내용 찾아보라고 시킨 적도 없는데 뭐가 미안해. 일단 들어와.”
“…아니야, 방에 들어가는 건 좀 그래.”
“왜? 안 더러워. 어젯밤에 청소했는데.”
“음….”
켄드릭이 멈칫하는 건 다른 게 아니라 황태자 때문이었다.
비록 몇 달 전 얘기지만, 발레리와 함께 술을 마시고 나온 그에게 다그치듯 말했었다. 여자 방에 함부로 드나들지 말라는 식으로.
“꾸물대지 말고 빨리 들어와. 더 얘기할 거 있으니까.”
발레리의 재촉에 켄드릭은 결국 방문턱을 넘어버렸다.
‘뭐 괜찮겠지. 황태자는 건국제 준비니 뭐니 바빠서 요즘 채플에 잘 안 오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