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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자한테는 관심 없는데요 (57)화 (57/173)

57화

발레리의 시선은 의지와 상관없이 그의 움푹한 가운데 골짜기를 타고 내려갔다.

등판이 큰 것까진 알았지만 가슴도 생각보다 볼륨이 있었다.

빚어놓은 듯한 상복부 근육 또한 어슴푸레 내비쳤다.

공들여 만든 몸이 분명했다.

‘책상 일만 하는 샌님인 줄 알았는데 운동도 꽤 열심인가 보네. 생각해 보니 검술을 왼손으로도 꽤 잘했었지. 그만큼 수련도 하긴 했겠구나.’

그러던 중 발레리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들어오자마자 황태자의 흉부만 하염없이 쳐다보고 있었다는 걸 자각해서다.

설마 눈치채진 않았겠지. 일단 무슨 말이라도 꺼내야겠다.

“사, 사람이 아프면 쉬어야지 뭘 굳이 보고를 받겠다고 그러세요?”

“마침 쉬고 있었다. 보다시피.”

발레리는 카트를 침대 옆까지 쭉 끌고 갔다. 그리고 테렌스의 곁에 털썩 앉았다.

그녀가 별안간 침대 위로 올라오자 테렌스는 쭈뼛하며 굳었다.

“일단 이것부터 드시고 하자고요. 마법사님이 시켜서요.”

발레리가 카트에서 수프 한 그릇을 번쩍 집어 들었다.

거기서 한 숟가락을 푹 떠 테렌스의 입 앞에 내밀었다. 닭고기가 한 점 얹혀 있었다.

테렌스는 의아했다.

몸이 안 좋긴 했지만 거동에는 문제가 없었고, 당연히 식사는 테이블에서 하려 했었다.

왜 굳이 떠먹여 주려고 하지. 아무리 레이븐이 시켰다고 해도 그 말을 순순히 듣는 게 이상했다.

지금 딱히 원만한 관계도 아닌데.

그래도 발레리의 손길을 거부할 이유는 없었다.

테렌스는 어정쩡한 자세로 입을 벌렸다.

누가 숟가락으로 뭘 먹여주는 건 서너 살 때 이후 처음이었다.

익숙하지 않아서일까. 숟가락 위 내용물을 알뜰하게 다 받아먹질 못했다.

그의 발그스름한 입술 밑으로 걸쭉한 수프 한 방울이 대롱대롱 매달렸다.

테렌스는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눈앞의 여인만 계속 쳐다보고 있었다.

마침 창으로 들어오는 석양빛이 그의 얼굴을 정면으로 비췄다. 동공이 쪼그라들고, 세세한 홍채 무늬가 드러났다. 맑은 호수 표면에 잔물결이 치는 듯한 아름다운 눈동자였다.

발레리는 테렌스의 눈을 제대로 마주했다.

동공이 바늘구멍만큼 좁아진 홍채는 잘 벼린 칼처럼 날카로우면서도 깊고 고혹적인 빛을 냈다.

그의 턱 아래로는 아찔한 광경이 내보였다. 

그걸 감상하는 사이 수프 방울은 줄줄 흘러내렸다.

눈으로 그 궤적을 좇던 발레리의 귀밑이 화끈하게 달궈졌다.

그녀는 눈을 감았다. 머릿속에 단단히 묶어둔 끈 하나가 탁 풀리는 듯했다. 목 뒤로 뜨거운 침이 넘어갔다.

“…….”

“왜 그러고 가만히 있지.”

“흘리셨어요. 닦아드릴게요.”

발레리는 카트에서 집어 든 냅킨을 테렌스의 아랫입술에 가져다 댔다. 그리고 열과 성을 다해 문질렀다.

‘아 씨, 왜 이렇게 정신이 혼미해지는 거야.’

그녀의 손에 무의식적으로 점점 힘이 실렸다. 그 압력에 테렌스의 입술은 마구잡이로 짓이겨졌다.

이젠 거의 벅벅 긁는 수준이 됐다. 얼룩진 천을 손빨래하듯 격한 손놀림이 계속됐다.

테렌스는 웬만하면 참으려고 했으나 통증이 한계치에 다다랐다. 아랫입술이 벌겋게 부풀었다. 함께 천에 쓸려나간 아래턱도 쓰라렸다.

“으읍, 그렇게 세게 닦으면 아픈데.”

“아, 네, 죄송합니다. 살살할게요.”

테렌스는 눈을 눌러 감고 윗입술을 달싹였다. 고통 속에 일그러진 그의 눈꼬리 또한 발레리의 시각을 자극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발레리, 왜 계속 누르고 있는 거야.”

“아, 뗄게요.”

발레리는 그제야 냅킨을 거둬들였다.

그녀는 다시 그릇과 숟가락을 집어 들고 그의 섭식을 도왔다.

테렌스는 남은 수프를 아기 새처럼 덥석덥석 받아먹었다.

발레리는 본인이 평소에 먹는 습관대로 수프를 푹푹 떠냈다. 숟가락 위 수북한 내용물이 테렌스의 입안에 가득 밀려들었다.

그러다 보니 문제가 생겼다. 테렌스의 입가에 자꾸 희끄무레한 잔흔이 묻어났다.

사실 깔끔하게 받아먹을 방법은 있었다. ‘와앙’ 하고 입을 쩍 벌리면 된다.

하지만 테렌스는 웬만하면 체통을 지키고 싶었다. 그는 입을 점잖게 벌리는 길을 선택했다.

동시에 칠칠치 못한 모습은 보이는 것도 싫었다.

그래서 수프가 묻어날 때마다 제 혀로 입술 근처를 싹싹 핥아냈다.

발레리는 한때 제 입안을 들락이던 선홍색 살덩이의 움직임을 멍하니 바라봤다.

그게 지나간 자리가 타액으로 번들거렸다.

촉촉이 젖은 입술이 상대방을 얼마나 미혹하는지, 테렌스는 전혀 알지 못했다.

숟가락을 든 발레리의 손이 미세하게 후들거렸다. 테렌스의 턱 밑에 그릇을 받치는 것도 깜빡 잊었다.

후두둑.

또다시 사고가 났다.

이번 방울의 낙하지점은 테렌스의 가슴 골짜기 한가운데였다. 당황한 발레리의 어깨가 크게 들썩였다.

“…으억, 죄송해요. 뜨겁지 않으세요?”

하마터면 침대에 쏟을 뻔한 그릇을, 그녀는 카트 위에 덜커덕 내려놨다.

테렌스는 말없이 제 가슴팍과 발레리를 번갈아 쳐다봤다.

수프는 미지근하게 식어 있어서 문제가 없었다.

그건 그렇고 냅킨을 달라고 해야 하는데.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그새 미지근한 액체 덩어리는 테렌스의 상복부까지 늘어졌다.

발레리는 얼른 냅킨을 들어 벌어진 틈새 사이로 손을 뻗었다. 덕분에 수프가 옷 속 감춰진 곳까지 흘러내리는 건 막을 수 있었다.

이날 발레리는 살면서 처음 보는 살색을 접했다. 결이 촘촘하고 우아한 광택이 흐르는 특상품 상아 조각 같았다.

촉감도 그랬다. 견고하면서도 매끈한 감촉이 천 한 꺼풀 너머로 손끝에 고스란히 전해졌다.

최대한 손에 힘을 빼려고 애쓰면서, 발레리는 속으로 주문을 외웠다.

‘이것은 통나무다. 통나무에 기름이 묻은 것이다.’

어느덧 모양이 이상해지고 있었다.

테렌스의 상체에 딱 붙어서 맨가슴 한가운데를 쓰다듬는 꼴이었다. 천 한 장을 사이에 두고서.

“하아….”

테렌스는 진작부터 혼이 쏙 빠져 있었다.

눈앞이 팽팽 돌았다. 끌어당겨 안으면 당장 그녀에게 입 맞출 수 있는 거리였다.

충동을 참고 있는 왼팔 근육에 부르르 경련이 일었다. 목울대도 제멋대로 벌렁거렸다.

절제심을 극한까지 끌어올려도 시선이 발레리로 향하는 걸 멈출 순 없었다.

그의 초점은 그녀의 얼굴을 시야 한가운데에 고정해둔 채 움직이지 않았다.

시각만 지배당하는 게 아니었다. 달큼하면서도 시원한 그녀의 체향이 그의 코끝을 어지럽혔다.

싱그러운 풀 냄새 같기도 하고, 은은한 박하 향도 내풍겼다.

이러다간 신체상의 변화가 올까 두려웠다. 테렌스는 이불을 끌어당겨 배 위까지 덮었다.

그의 흉곽은 어느새 불규칙하게 오르내리고 있었다.

쌔근거리는 거친 숨소리가 발레리의 귓가에 들려왔다. 그녀는 손끝에 곤두선 촉각을 잠재우고 동작을 멈췄다.

호흡이 가빠진 테렌스의 상태가 심상치 않아 보여서다.

“왜 그러세요? 많이 아파요?”

“발레리….”

신음에 가까운 호명이었다.

“왜요? 열나요?”

발레리는 그의 이마를 덮은 부드러운 백금발을 쓸어 넘긴 뒤 손바닥으로 온도를 가늠했다.

“…하아.”

이마 정중앙에 와 닿는 서늘한 촉감에, 테렌스는 금빛 속눈썹을 파르르 떨며 안타까운 날숨을 내뱉었다.

“뜨겁네요.”

발레리는 체온 비교를 위해 자신의 이마를 짚으려 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탁.

순간 테렌스가 손목을 확 낚아챘기 때문이다.

테렌스도 스스로 당황했다. 무심코 저지른 일이었다. 그녀의 손길이 떨어져 나가는 게 싫어서.

발레리의 까만 눈동자가 초점을 잃었다. 이미 그녀는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맑고 깊은 호수 한가운데 까마득히 뚫린 그의 동공 속으로.

“…놔요.”

그녀의 말엔 진심이 전혀 묻어나지 않았다.

손목은 여전히 테렌스의 손아귀에 갇혀 있었다.

“놓으라니까, 거참 말 더럽게 안 들으시네.”

테렌스의 귀에는 아무 말도 들어오지 않았다. 온몸의 신경이 한 지점에 사로잡혀 있어서다.

발레리의 오른뺨 위 가느다란 흉터. 프리다의 검이 베고 지나간 흔적이었다.

테렌스는 발레리의 손목을 풀어준 뒤 그녀의 뺨을 천천히 어루만졌다.

어두운 곳에선 잘 보이지 않았던 희미한 상흔이었지만, 이렇게 밝은 데서 들여다보니 눈에 참 아프게 밟혔다.

“…겁이 난다.”

그의 커다란 손바닥이 발레리의 오른쪽 얼굴을 뭉근하게 데웠다.

“무슨 겁이요?”

“이런 게 또 생길까 봐.”

테렌스는 엄지로 발레리의 흉터를 살살 쓸어내렸다.

“…참 나, 이게 누구 때문에 생긴 건데.”

발레리는 입을 비쭉 내밀며 뾰로통하게 대꾸했다.

그러나 테렌스는 그녀의 속뜻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프리다에게 주의하라고 단단히 일러두었으니 앞으로는….”

“황녀님 탓하는 거 아닌데요.”

발레리는 그의 말허리를 끊고 오해를 정정했다.

“…그럼?”

새벽이슬을 머금은 듯 청초한 눈동자가 시계추처럼 좌우를 오가며 그녀의 심기를 살폈다.

정말 몰라서 묻는 건가. 테렌스를 쏘아보는 발레리의 눈빛엔 원망이 짙게 서렸다.

답답해서 참을 수 없었다. 발레리는 제 볼에 붙어 있던 남자의 손을 확 떼어냈다.

그리고 머리와 입을 잇는 여과 장치를 과감하게 빼 버렸다.

“하, 너 인마 너. 지금 너 얘기하는 거잖아.”

생소한 호칭.

댕강 잘라먹은 말끄트머리.

발레리의 폭탄선언에 테렌스는 그대로 얼어붙은 채 어물거렸다. 이유는 세 가지였다.

일단 외간 여자에게 반말을 들은 건 처음이었다. 또 여동생이 그은 흉터가 본인 때문에 생겼다는 주장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리고 애정을 담은 말에 왜 분기탱천하는지 알 수 없었다.

발레리는 숨을 크게 한 번 들이마시더니 또다시 날카로운 물음을 뱉어냈다.

“왜 그렇게 사람 머릿속을 어지럽히는데?”

“…내가?”

테렌스가 미간을 좁히며 되물었다.

발레리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복받쳐 올라오는 무언가를 누르려 제 가슴을 꽉 부여잡을 뿐이었다.

이 남자는 사람을 정말 미치게 한다.

안개 자욱한 호수처럼 처연한 시선. 딴딴하게 부푼 아랫입술. 들어올 때부터 존재감을 훤히 과시하는 두툼한 가슴팍.

원망이 욕망으로 돌변하는 건 한순간이었다.

“환장하겠네, 진짜.”

땀으로 눅진해진 발레리의 손아귀에서 이성의 끈이 미끄러져 빠져나갔다.

눈 깜짝할 새 그녀의 손은 테렌스의 뒤통수를 움켜잡았다.

“지금부터 무슨 일 생겨도 내 책임 아니에요.”

발레리가 알 수 없는 소릴 하며 이마를 부딪쳐왔다. 쇠붙이가 자석에 철썩 달라붙듯이.

테렌스는 예고 없이 달려든 그녀의 허리를 가까스로 부여잡았다.

상황 파악은 금방 끝났다.

이마를 맞댄 그녀는 무거워진 눈꺼풀을 들썩이며 더운 숨결을 흘리고 있었다.

본능에 먼저 굴복하겠다는 신호였다.

그녀가 무엇을 원하는지 명백해지자, 테렌스의 입가에 희미한 보조개가 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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