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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자한테는 관심 없는데요 (56)화 (56/173)

56화

두 남자는 책을 나눠 들고 황태자궁까지 걷기 시작했다.

따가운 여름 햇살 아래 매미 울음소리가 고막을 찔렀다. 광장 잔디밭에선 비린 풀 냄새가 물씬 올라왔다.

‘무슨 책을 이렇게나 많이 빌리셨을까.’

켄드릭은 호기심에 자신의 손에 들린 책 제목들을 쓱 훑었다.

입에서 ‘엥?’ 소리가 절로 나왔다.

그의 놀란 기색을 눈치챈 레이븐은 고개를 푹 숙였다.

더운 공기에 어색함까지 감돌았다.

무슨 말이라도 꺼내야 한단 압박감에 켄드릭은 정말 아무 말이나 꺼냈다.

“여, 연인분께서 좋아하시겠습니다.”

“켄드릭 경, 전 독신이에요.”

“아….”

“그냥 아무것도 묻지 말아 주세요.”

두 남자는 동시에 땀을 뻘뻘 흘렸다.

민망해서 흘리는 땀과 더워서 흘리는 땀이 한데 섞여 굵은 줄기를 이뤘다.

발걸음을 재촉하다 보니 어느새 황태자궁 집무실 앞이었다.

***

그 시각 테렌스는 집무실에서 커피를 마시며 업무를 보고 있었다.

의외로 블랙커피는 그의 취향이 아니었다.

황태자의 입맛을 꿰고 있는 베테랑 시종들은 늘 같은 음료를 대령했다.

우유를 담뿍 붓고 위에 흰 거품을 소복이 올린 밀크커피.

우유의 비중이 대부분이라 커피 맛이 나는 우유에 가까웠다.

보통은 하루에 한 잔씩만 마시지만, 이날은 좀 더 필요했다.

요즘 잠을 통 못 자는 데다 한 시간에 한두 번씩 딴생각에 잠기기 때문이다.

딴생각의 주제는 언제나 그녀였다.

커피라도 연거푸 들이켜야 업무 효율이 그나마 나아지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테렌스는 벌써 세 번째 잔을 입에 가져가고 있었다.

그의 입가에 크림색 거품이 묻어나는 순간 노크 소리가 들렸다.

“누구지.”

“레이븐입니다.”

문이 열렸다.

레이븐은 혼자가 아니었다. 웬 커다란 남자가 따라 들어왔다.

뜻밖의 손님은 썩 반갑진 않은 얼굴이었다.

“켄드릭 경? 자네가 여긴 웬일로….”

켄드릭은 바로 거수경례하려 했으나 책 때문에 손이 자유롭지 않았다. 그래서 가볍게 목례만 했다.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레이븐 님을 도서관에서 우연히 마주쳤습니다. 짐이 많아 보이기에 함께 나눠 들고 왔습니다.”

그의 차분한 상황 설명에 테렌스는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새 레이븐은 빌려온 책을 테이블 위에 하나하나 내려놓고 있었다.

켄드릭 또한 그의 곁에 서서 작업에 합류했다.

책 제목이 모두 드러나자 켄드릭은 민망한지 고개를 움츠렸다.

테렌스는 손수건으로 입가의 거품을 닦은 뒤 몸을 일으켜 천천히 다가왔다.

“무슨 책을 그렇게 많이 빌렸지?”

“아, 그게….”

레이븐은 대답을 얼버무리며 켄드릭을 향해 눈짓했다.

출입문을 번갈아 쳐다보는 걸 보니, 이제 그만 나가라는 메시지였다.

“저는 이만 석실로 복귀하겠습니다, 전하.”

“그래.”

손님이 사라지자 테렌스는 가만히 서서 책 표지를 슬슬 훑었다.

모두 칼레바니아 황실 도서관의 인장이 찍혀 있긴 했으나 표지가 상당히 요란했다.

일단 업무 관련 서적은 아니었다. 

<처음이지만 그녀를 만족시키고 싶어>, <여자를 녹이는 방법: 무조건 천천히>, <몸으로 하는 대화의 시작>, <사랑의 시작은 입맞춤에서부터>, <분위기 안 깨면서 피임하기> 등.

책 제목을 읽는 테렌스의 낯빛이 극적으로 바뀌었다.

급속도로 창백해졌다가 아래서부터 불긋불긋 물들었다.

표지만 봐도 내용이 가늠되는 초보용 방중술 서적이었다.

이런 종류의 도서가 황실 도서관에 비치돼 있었다는 걸 테렌스는 이날 처음 알았다.

“…이게 다 뭐지.”

“제가 도와드린다고 했잖아요.”

“허….”

테렌스가 왼손으로 두 눈을 감추고 한숨을 삼켰다.

목덜미를 타고 올라온 뜨끈한 기운이 어느새 이마까지 도달했다.

그의 반응을 살피는 레이븐의 눈이 슬며시 휘었다.

이렇게까지 민망해하는 상전의 얼굴이라니.

이 주제로 그를 더 놀려먹을 생각에 벌써 장난기가 근질거렸다.

“레이븐, 이걸 설마 내 대리인 자격으로 빌리진 않았겠지.”

“에이, 절 뭘로 보고 그러십니까. 다 제 이름으로 빌렸지요. 사서가 정말 남우세스럽다는 눈으로 쳐다보는데 전하를 위해 참았습니다. 제 평판 따위 뭐 중요한가요.”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난 이런 걸 시킨 적이 없다. 퇴폐고 뭐고 네 계략에 동의한 적도 없고.”

“동의는 안 하셨지만 반대도 안 하셨잖아요? 아 그리고 원래 두 권 더 빌리려고 했는데, 사서가 열 권까지밖에 안 된다고 해서 시각자료 없는 애들은 뺐습니다.”

하지만 책 내용보다 중요한 게 있었다. 테렌스 본인의 사회적 위신이었다.

“저자가 날 어떻게 볼지….”

“켄드릭 경이요? 글쎄요. 준비성 있는 사람으로 보겠죠?”

“아무래도 내 독서 취향을 단단히 오해할 것 같은데.”

“음, 지금 빨리 뛰어가서 전하가 시킨 게 아니고 제가 자발적으로 빌린 거라고 할까요?”

“…됐다.”

공연히 쓸데없는 변명을 했다간 모양이 더 이상해질 게 뻔했다.

“레이븐. 난 아직 발레리와 아무 관계도 아니야. 그리고 기본적인 교육은 이미 받았다.”

“실전은 또 다릅니다. 그리고 언제 어떤 관계가 될지 어떻게 알겠어요. 평소에 준비를 많이 해두셔야죠.”

“하아….”

“그 한숨, 고맙다는 말씀으로 알아듣겠습니다.”

테렌스는 콧잔등을 부여잡았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온갖 잡념들을 가라앉혀야만 했다.

하지만 커피를 마셔서 그런 건지, 더 정신이 산란해지기만 했다.

“솔직히 별로 응원하고 싶지 않았는데, 전하께서 너무 진심이시라. 저도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고 싶네요.”

“…….”

“아, 그리고 이 책, 제일 열심히 보셔야 하는 거 아시죠?”

레이븐이 서적 하나를 가리켰다. 피임 관련 서적이었다.

테렌스의 얼굴은 폭발 직전이었다. 표정엔 부끄러움과 민망함, 수치심이 뒤범벅됐다.

레이븐은 그의 정수리에서 수증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상상을 하며 쿡쿡거렸다.

“구체적인 조언은 못 해드려요. 제가 전하랑은 지향점이 좀 달라서요.”

“…이런 주제로 조언 구할 생각 없다.”

“아시다시피 저는 누구보다 전하의 행복을 바라는 사람이에요. 이번 연애, 분명 전하께 좋은 경험이 될 거라고 전 확신합니다.”

레이븐은 쉽게 단정하고 있었다.

만에 하나 테렌스가 발레리와 연애를 시작한다고 해도, 그저 경험으로 끝나버릴 거라고.

그 속뜻을 아는 테렌스는 나지막이 명령했다.

“이만 나가봐라.”

***

“아가씨 왔어요? 근데 오늘 전하께선 좀 아프시다네요.”

“아 그래요? 그럼 금요일에 다시 올게요.”

황태자궁 집무실 앞. 열심히 걸어서 기껏 보고하러 왔는데 황태자께서 편찮으시단다.

어쩌겠나. 채플로 다시 돌아가야지.

발레리는 곧장 뒤를 돌아 지나온 길을 되밟았다.

이참에 일찍 자고 새벽에 일어나 황실 무기고나 다시 뒤져야겠다고 생각했다.

아직 뒤지지 못한 상자가 적지 않았다.

이번엔 그 수수께끼의 보검을 발견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아 아가씨, 거기 서 봐요!”

레이븐이 발레리를 다급하게 불러 세웠다.

그러나 발레리는 무슨 생각에 잠겼는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결국 레이븐은 지팡이를 품에서 꺼냈다. 

그의 지팡이가 발레리 쪽을 가리키자, 발레리의 오른쪽 발목에 푸른빛 족쇄가 채워졌다.

포박술은 레이븐의 전문 분야였다.

덕분에 발레리는 양팔을 허우적거리다 하마터면 뒤통수로 자빠질 뻔했다.

운동신경 덕에 가까스로 균형을 잡을 수 있었다.

우스꽝스러운 자세로 착지한 발레리는 뒤로 홱 돌아 레이븐에게 눈총을 쐈다.

“아오, 지금 뭐 하는 거예요! 갑자기 마법을 왜 걸어요?”

“아가씨가 내 말 안 끝났는데 가려고 했잖아요.”

“진작에 하지. 할 말이 뭔데요?”

“땡땡이치지 말고 전하 침실로 가세요. 거기서 보고받으시겠대요.”

침실에서 보고받기.

이건 테렌스를 위해 레이븐이 짜놓은 계획이었다.

마침 테렌스는 컨디션이 어제보다 더 떨어져서 침실에서 업무를 보고 있었다.

“후. 알았어요. 근데 전하는 어디가 아프신 거예요? 감기 걸렸어요?”

발레리가 걱정스러운 빛으로 물었다.

레이븐은 그녀의 표정을 가만히 살폈다. 이렇게 보면 테렌스를 나름대로 신경 쓰는 것 같기는 했다.

“아뇨, 그냥 과로 때문에 컨디션이 좀….”

“과로? 피곤하면 자야지 무슨 보고를 받아요.”

“아, 당연히 받으셔야지요. 황녀님의 검술 교육은 황실의 최대 중요 사안입니다.”

그때 갑자기 멀리서 드르륵하고 바퀴 구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시종 하나가 카트를 끌고 왔다.

그 위에는 뚜껑이 덮인 그릇 두 개가 놓여있었다.

시종은 카트를 레이븐의 곁에 두고 인사한 뒤 1층으로 내려갔다.

“그건 뭐예요?”

“아, 보다시피 닭고기 수프인데요. 아가씨도 드시고, 전하도 좀 챙겨 주세요. 직접 먹여드리면 더 좋고요.”

“숟가락 뜰 힘도 없으시대요? 참 나, 손이 없어 발이 없어….”

“손 하나를 못 쓰시는 거 알잖아요. 침대 위에서 음식 드시려면 버거울 텐데 좀 도와주세요.”

레이븐의 말이 맞았다.

황태자는 오른손을 못 쓰니까.

그런 사람한테 손이 없냐고 하다니 실언이었다.

발레리는 겸연쩍은지 뒤통수를 쓱 만졌다.

“아, 그렇긴 하겠네요….”

“그럼 부탁 좀 할게요, 아가씨.”

결국 발레리는 테렌스의 침실 앞까지 와 버렸다. 수프 두 그릇이 놓인 카트를 질질 끌고서.

집무실 외에 테렌스의 개인 공간에 들어가는 건 처음이었다.

게다가 남자가 혼자 쓰는 침실이다. 그냥 남자도 아니고, 몇 차례 키스까지 나눴던 남자다.

발레리는 입안에 고인 침을 꿀떡 넘기며 문을 두드렸다.

똑똑.

“누구지.”

몸 상태가 안 좋다더니 목소리에 힘이 약간 빠져 있긴 했다.

“저예요.”

“…들어와.”

발레리가 무거운 문을 철컥 열고 그의 영역에 조심스레 발을 들였다.

황태자의 침실은 무미건조한 집무실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일단 여기저기 장식이 많았다. 벽면은 모서리마다 금장 테두리가 둘러져 있었다.

침대 뒤편으로는 화려한 액자에 담긴 칼레바니아 전도가 보였다.

창에 걸린 은색 실크 커튼에는 찬란하게 수놓은 사자가 웅크리고 있었다.

큼지막한 가구들은 광택이 흐르는 체리목 소재였다.

탁 트인 유리창으로는 석양빛이 그대로 내비쳤다.

방 안의 모든 금장 장식이 그 빛을 찬연히 반사했다. 발레리의 눈은 자연히 게슴츠레해졌다.

침실 한가운데 놓인 침대는 성인 다섯 명이 나란히 누울 수 있을 만큼 널찍했다.

그 광활한 공간을 차지한 건 단 한 사람, 침실의 주인이었다.

발레리는 침대 주변에 드리운 커튼을 열어젖혔다. 상체를 일으켜 앉아있는 테렌스가 보였다.

그녀는 바로 이상함을 감지했다. 테렌스의 복장이 평소와 너무 달랐다.

그는 실크 소재의 회백색 가운을 입고 있었다. 허리끈을 느슨하게 묶어서 그런지 앞섶이 반쯤 풀려 있었다.

가슴 아래 상복부 부근까지 맨살이 그대로 드러났다.

‘요즘 가슴팍 노출하는 게 남녀 안 가리고 유행인가. 에이바 볼드윈 공녀도 저러던데.’

가까이 갈수록 발레리는 그 벌어진 틈새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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