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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자한테는 관심 없는데요 (55)화 (55/173)

55화

“어디서 개뼈다귀 같은 소릴 하고 있어. 너랑 내가 언제?”

발레리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기대했던 반응이었다. 켄드릭의 잇새에서 장난기 섞인 웃음이 실실 새어 나왔다.

“얼마 안 됐어. 작년 여름이니까.”

“작년 여름이고 자시고 난 너랑 그런 종류의 접촉을 한 기억이 없는데?”

“왜 그래, 서운하게. 나만 기억하는 거야?”

켄드릭은 짐짓 아쉬워하며 입꼬리를 씰룩였다. 물론 도발이었다. 그의 예상대로 발레리의 눈이 화르륵 타올랐다.

“미쳤어? 너 어디 마법사한테 잡혀가서 기억 조작당했냐?”

“아직도 생각 안 나? 실망이네, 정말.”

“아 쫌! 염병하지 말고 설명을 해봐. 내가 언제 어디서 너랑 그걸 했는데?”

“작년 8월이었나? 에버렛 강에서 했잖아. 수영하고 나서.”

에버렛 강이라고 하니 짚이는 게 하나 있긴 했다.

“너 설마….”

발레리는 손등으로 이마를 짚으며 눈을 내리감았다.

***

작년 여름은 유달리 더웠다.

칼레반 타임스에 이런 기사가 나올 정도였다.

「제국 700년 역사상 가장 기록적인 더위…가축들도 픽픽 쓰러져」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검술 대련에 몰두하던 발레리와 켄드릭도 이때만큼은 체력에 한계를 느꼈다.

그나마 강바람이 부는 에버렛 강 근처에서 겨뤘지만 후텁지근한 건 마찬가지였다. 검을 쥔 손바닥에도 땀 폭탄이 터졌다.

따뜻한 남부에서 나고 자란 켄드릭도 이 수준의 더위는 견디기 힘들었다.

─어떻게 강바람마저 안 시원할 수가 있지.

─그러게나 말이다.

─발레리, 나 더위 먹을 것 같아. 좀만 쉬었다 하자.

─난 이미 먹었어. 물에 몸 좀 담갔다가 올게.

발레리는 바닥에 검을 내려놓고 척척해진 튜닉을 벗어 던졌다. 금세 단출한 캐미솔 차림이 됐다. 켄드릭은 그녀의 갑작스러운 탈의 과정을 보고 얼이 빠졌다.

─너 수영할 줄 알아?

─난 몸 쓰는 건 웬만하면 다 해. 다녀온다.

─야! 같이 가!

발레리는 신발까지 벗어놓고 강물을 향해 냅다 뛰었다. 켄드릭 또한 상의를 급히 탈의한 뒤 그녀를 뒤따랐다.

물이 허리까지 찰 때쯤 발레리는 뒤를 돌아봤다. 그제야 등 뒤의 인기척이 느껴져서다.

─뭐야, 언제 쫓아왔어. 웃통은 언제 벗었대.

─나도 더워서 들어왔어.

─나 저기 건너편 찍고 올 건데?

─거기까지 누가 더 빨리 가나 내기하자. 진 사람이 맥주.

─접수.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물속에 텀벙 뛰어들었다.

발레리는 튼튼한 팔다리를 동력 삼아 힘차게 물살을 갈랐다. 그녀의 거센 발장구에 잔잔했던 물결이 찰싹이며 하얗게 부서졌다. 멀찍이 있는 물고기들도 겁먹고 도망칠 정도였다.

헤엄치다 보니 강물 깊이가 점차 얕아졌다. 수온이 올라가고, 질퍽이는 흙바닥이 보이자 발레리는 반대편 바닥에 발을 디뎠다.

생각보다 빨리 목적지에 다다른 그녀는 승리감에 흠뻑 도취했다.

─후, 칼싸움은 좀 밀리는 추세지만 수영만큼은 안 꿀린다고.

그녀는 뒤를 돌아보며 시원스럽게 미소했다.

하지만 경쟁자는 온데간데없었다.

─뭐야, 얘. 어디 갔어. 중간에 포기하고 돌아갔나?

몇 초가 지나서야 발레리의 눈에 한 물체가 잡혔다. 중간 지점쯤에서 무언가가 퍼덕거리고 있었다.

물새인가 싶었는데 아니었다.

자세히 보니 사람의 팔이었다. 그 움직임은 서서히 약해지다 이내 뚝 그쳤다.

켄드릭이 물속에 가라앉고 있었다.

사색이 된 발레리는 지체 없이 다시 강물로 뛰어들었다.

그가 사라진 지점까지는 금방이었다.

발레리는 탁한 물속에서 눈을 번쩍 떴다. 눈 속의 이물감을 참으려 미간을 찌푸린 채 아래를 내려다봤다.

커다랗고 긴 물체 하나가 서서히 침잠하고 있었다.

발레리는 어둠을 뚫고 더 깊이 잠수했다.

검은 물체는 가까이 갈수록 켄드릭의 형상에 가까워졌다. 드디어 얼굴이 보였다.

발레리는 거품을 꾸르륵 뱉어내는 그의 목을 팔로 감고 재빨리 수면으로 떠올랐다.

─푸하…!

그녀는 켄드릭의 얼굴이 물 밖으로 향하도록 팔꿈치로 고정하고 강변을 향해 빠르게 헤엄쳤다.

드디어 뭍에 다다랐다.

발레리는 정신을 잃은 켄드릭을 무릎 위에 눕혔다. 그의 창백한 뺨을 좌우를 번갈아 찹찹 후려쳤다.

─야, 일어나 봐. 야!

반응은 없었다.

어깨를 마구 흔들어도 켄드릭의 몸은 흐느적거리기만 했다. 얼굴빛도 생기를 잃어갔다.

발레리는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후, 정신 똑띠 차리자. 일단 심장 마사지부터.

그녀는 두 손을 모아 켄드릭의 가슴을 힘껏 압박했다. 온몸의 체중을 실어 꾹꾹 눌러봐도 켄드릭은 미동조차 없었다.

발레리의 흔들리는 눈동자 위로 조금씩 이슬이 맺혔다.

이마에는 진땀이, 등줄기에는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야… 흐흑, 너 진짜 겁나게 왜 이래. 빨리 일어나!

닭똥 같은 눈물방울이 켄드릭의 얼굴 위에 후둑후둑 떨어졌다.

생각이 극단으로 치달았다.

켄드릭이 정녕 이대로 죽는 건가.

애먼 놈을 괜히 물속에 끌어들여서 죽음에 이르게 하다니. 이게 살인이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발레리의 얼굴은 어느새 눈물 콧물 범벅이 됐다. 그에게 조심스레 품었던 연심도 방울방울 솟아올랐다.

─흐윽… 너 절대 이대로 못 죽어! 빨리 안 일어나? 아직 못한 말도 있는데….

그녀는 눈물을 훔치다 말고 켄드릭의 머리를 바닥에 살포시 내려놓았다.

그리고 조심스레 그의 맨가슴에 귀를 댔다.

박동이….

있다.

그제야 마음이 진정된 발레리는 벌떡거리는 제 가슴에 손을 얹고 숨을 골랐다.

─뭐야. 살아는 있는데… 뭐가 문제지?

발레리는 깊은 고민에 잠겼다.

그러다 뭔가 결심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켄드릭의 다물린 입술을 양손으로 살짝 열어젖혔다. 왼손으로는 그의 콧날을, 오른손으로는 그의 턱을 그러쥐었다.

그다음 배꼽 부근까지 숨을 깊숙이 들이마셨다. 가능한 한 많은 공기를 빨아들이기 위해.

켄드릭의 벌어진 입술 틈새 위로, 발레리는 자신의 입술을 덮었다. 한 치 망설임도 없이.

발레리는 몸속 깊이 머금은 공기를 켄드릭의 숨구멍에 한꺼번에 토해냈다.

납작한 풍선에 바람을 불어 넣듯이.

그렇게 수 초가 지났다.

─푸후훗.

웃음기 가득한 바람이 발레리의 입안을 급습했다.

발레리는 소스라치게 놀라 뒤로 주저앉았다.

그녀의 입안에 들어온 건, 켄드릭의 입에서 뿜어 나온 날숨이었다.

─어우 씨, 뭐야! 퉤!

─발레리 너, 힘 진짜 세다. 가슴에 피멍 들 것 같아. 웃음 참느라 혼났네.

─웃음을…. 참아?

지금까지 한 게 연극이라는 건가. 눈을 감은 발레리의 몸이 미세하게 파들거렸다.

그녀는 뜨거운 콧김을 내뿜으며 양 주먹의 손가락 관절을 우두둑 꺾었다.

─푸하하핫!

켄드릭은 분노에 찬 그녀의 표정을 바라보며 거의 오열할 듯이 폭소했다.

발레리의 이마 위에 굵은 핏줄이 부풀어 올랐다.

─하, 너 지금 목숨 걸고 사람 놀렸다 이거지?

─미안해. 진짜로 속을 줄은 몰랐어.

켄드릭이 가슴 앞으로 두 손을 모았다. 얼굴에선 여전히 웃음기가 비쭉 새어 나왔다.

─됐고, 가슴 말고 다른 데도 피멍들 준비해.

─내가 잘못했어. 근데 못한 말이 뭐야? 너 나한테 말 안 가리잖아. 네가 나한테 못 하는 말이 있어?

─어, 아까 못 죽었으니까 지금 내 손에 죽어 보라고.

그날 오후 내내 켄드릭은 한바탕 호되게 얻어터졌다.

다음 날 몸살이 나서 침대 밖으로 못 나갈 정도로.

***

회상을 마친 발레리는 문간에 서 있는 남자를 매섭게 쏘아봤다.

‘…이 새끼 지금, 그때 인공호흡 몇 초 해준 걸 키스라고 지껄이는 건가.’

“이거 미친놈이네 아주. 그때 그게 무슨 키스야. 돌았냐?”

“푸훗, 이제야 기억났구나.”

“한 번만 더 그딴 소리 지껄여봐. 입술을 10등분으로 썰어서 미디움 웰던으로 구워버릴 테니까.”

“발레리, 입이 그새 더 험해졌네.”

발레리는 느물거리는 켄드릭의 가슴팍을 주먹으로 힘껏 쳤다.

쿵, 하고 둔탁한 소리가 났다. 그녀의 매운 손을 오랜만에 맛본 켄드릭은 흠칫하며 반 발짝 물러났다.

“손도 험하구나. 존재 자체가 유익한 켄디한테.”

발레리는 대뜸 고개를 푹 숙이더니 뭔가를 집어 들었다.

문간에 세워둔 검이었다.

“야, 칼 뽑아. 결투다.”

켄드릭은 곧바로 양손을 들고 항복을 표시했다.

그녀와 싸울 생각까지는 없었다.

“미안해. 방금 발언 취소할게.”

“하, 썩 꺼져!”

켄드릭이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발레리는 문을 거칠게 닫아 버렸다.

쾅 소리가 채플 1층 복도에 쩌렁쩌렁 울렸다.

켄드릭은 닫힌 문을 앞에 두고 또다시 폭소를 터뜨렸다.

당연히 그 웃음소리는 방 안에서도 고스란히 들렸다.

“아오, 저 미친놈 가끔 장난기 폭주하는 걸 까먹고 있었네. 평소에 착하다고 봐주면 안 된다니까.”

발레리는 절대로 인정할 수 없었다. 인공호흡 따위가 무슨 키스란 말인가.

당시 발레리는 켄드릭을 좋아하긴 했지만, 그런 접촉에 이성적인 의미를 부여할 생각까진 못했다.

상황이 긴박하기도 했고, 이쪽으로 눈을 뜨기 전이었으니까.

“저게 진정한 키스의 맛을 몰라서 저딴 소리가 나오는 거지.”

이렇게 발레리는 또다시 테렌스와의 기억에 지배당하기 시작했다.

일찍 잠들기는 또 글렀다.

“하필이면 왜 이 방에서 했을까…. 잊을 만하면 자꾸 떠오르게.”

마침 발레리는 테렌스와 입을 맞췄던 지점에 서 있었다.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아직 졸리려면 한참 멀었는데도.

***

“마법사님, 열 권 이상은 안 됩니다. 두 권은 빼셔야 해요.”

황실 도서관 사서는 레이븐이 카운터에 산더미처럼 쌓은 책을 일일이 세어본 뒤 말했다.

“그럼 이거랑 이거 빼 주시죠.”

“네, 대여 기간은 한 달이니 꼭 지켜 주세요.”

사서는 책 제목을 대여 장부에 차례대로 옮겨 썼다.

그러다 주근깨투성이 볼에 홍조가 물들었다. 적으면 적을수록 낯 뜨거운 제목이 등장해서다.

이런 종류의 책을 한꺼번에 열 권씩이나 빌려 가는 사람은 사서 경력 20년 만에 처음이었다.

‘첫 거사를 이렇게까지 준비하는 사람도 있군.’

사서는 호기심을 못 이기고 레이븐의 얼굴을 힐끔 올려다봤다.

레이븐은 그 시선을 애써 무시하며 휘파람을 불다가, 괜히 민망해져서 아예 뒤를 돌아 딴청을 피웠다.

그러다 아는 얼굴을 마주했다.

아주 익숙한 잘생긴 얼굴이었다. 레이븐이 반가운 기색을 드러냈다.

“어, 켄드릭 프레이저 경 아니세요? 안녕하세요!”

“아…. 황태자궁 수석 마법사님이시죠. 안녕하십니까.”

“도서관에는 웬일로 오셨어요?”

“책 빌리러 왔습니다.”

켄드릭은 품 안에 책 두 권을 들고 있었다.

“레이븐 마법사님, 대여 처리 완료됐습니다. 가져가세요.”

사서의 호명에 레이븐은 다시 뒤를 돌았다. 그는 지팡이를 겨드랑이에 끼운 뒤 카운터 위의 책을 주섬주섬 집어 들었다.

‘족히 열 권은 돼 보이는데, 혼자 저걸 들고 황태자궁까지 가야 하는 건가.’

그의 모습을 지켜보던 켄드릭의 오지랖이 발동했다.

“책을 많이 빌리셨네요. 같이 들어드릴까요?”

“아, 아뇨 괜찮습니다.”

방금까지만 해도 빤빤하던 레이븐의 얼굴이 금세 불긋불긋 달아올랐다.

“그러지 마시고 잠시만 계세요. 제가 짐 나르는 데는 일가견이 있습니다.”

레이븐은 한 번 더 거절할까 하다가 모처럼의 호의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이 푹 찌는 날씨에 광장을 가로질러 책 열 권을 들고 황태자궁까지 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염력을 써볼까 했지만 2~3분 이상은 무리였다.

책 대여를 마친 켄드릭은 레이븐의 겨드랑이에 끼인 지팡이부터 빼 들어주며 미소를 지었다.

레이븐은 그 모습에 넋이 나간 채 책 네 권을 넘겨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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