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테렌스는 주말 내내 침실에서 나오지 않았다. 일요일 오후 햇살이 벌써 붉은빛을 띠는데도.
그 문 앞을 지키는 레이븐은 근심이 가득했다.
보통 테렌스는 특별한 일이 없으면 주말에도 공무를 봤다. 이렇게 이틀 연속으로 침실에 처박혀 있던 적은 없었다. 7년 전 황태자궁에 발령 난 이래 단 한 번도.
테렌스에게 일이란 인생의 반려자와도 같았으니까.
음식도 한두 숟갈 뜨고 마는 듯했다.
하인들이 가지고 나오는 접시 위의 잔반을 보면 알 수 있었다. 육류는 건드리지도 않았다. 수프 약간, 빵 쪼가리 몇 개만 사라졌다.
“이러시는 게 처음이라 적응이 안 되네. 그 아가씨도 참 대단해. 일하고 결혼했던 사람을 단번에 이혼시키다니.”
아무래도 상태를 직접 한번 봐야 할 것 같았다.
레이븐은 하인이 저녁 식사를 나르는 시간에 맞춰 테렌스의 침실에 입성했다. 노크해도 안 열어줄 게 뻔하니, 이런 꼼수라도 쓸 수밖에.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고 있던 테렌스는 음식 냄새를 맡고 얼굴을 내놨다. 테이블을 세팅하는 하인의 뒤편으로 웬 초록색 형상이 하나 보였다.
레이븐이었다.
테렌스는 단번에 싸늘하게 얼굴을 굳혔다. 꼴도 보기 싫다는 표정으로.
“네게 들어오라고 한 적 없는데.”
“일요일은 일을 하니까 일요일이라고 하시던 분이 아닙니까? 왜 태업하시죠?”
“쉬라고 있는 날에 쉬었을 뿐이다.”
테렌스가 상체를 일으켜 앉았다. 얼굴이 눈에 띄게 수척해져 있었다. 목소리 끄트머리도 살짝 갈라졌다. 이틀간 성대를 안 썼으니 그럴 만도 했다.
레이븐은 하인이 나갈 때까지 기다렸다가 느물거리며 입을 열었다.
“상사병입니까, 아니면 화병입니까?”
“둘 다 아니다.”
굳이 말하자면 전자에 가깝지만 테렌스는 모두 부정하고 싶었다.
“참 그 아가씨, 죄 많은 여자네요.”
“…넌 내가 인사권자라는 걸 항상 잊는 것 같군.”
“전하를 이렇게 아프게 하는데 죄가 아니면 뭐, 덕이 많다고 할까요?”
“자꾸 함부로 말하면 마력석 광산으로 발령 낼 줄 알아라.”
레이븐의 얼굴에서 장난기가 가셨다.
지금 여자 하나 때문에 7년을 함께한 사람을 내치려는 건가. 테렌스가 이렇게까지 심한 으름장을 놓은 적은 없었다.
“와… 방금 협박하신 겁니까? 마법 아카데미 수석 졸업생을 그런 오지로 보내려고 하시다니. 너무하시네요.”
“나가.”
나가. 이번 주 내내 레이븐이 가장 많이 들었던 단어였다.
레이븐은 이제 적응이 돼서 웬만하면 첫 번째 ‘나가’에는 움직이지도 않았다.
“너무 절망하진 마세요.”
“무슨 말이냐.”
“교제하기 싫다는 거지, 전하 자체가 싫다는 건 아니잖아요? 듣자 하니 키스도 하셨고, 그 아가씨도 하룻밤 정도는 보내줄 수 있다는 식이던데.”
레이븐의 말이 정확했다.
발레리가 거부한 건 테렌스와의 교제였지, 테렌스 그 자체는 아니었다.
아무리 그래도 싫은 사람에게 입술을 내주진 않았을 테니까.
“하룻밤으로 끝내고 싶지 않다.”
“…지금 욕망 고백하는 시간입니까? 그럼 여러 날 밤으로 합의 보시든가요.”
“그런 뜻 아니니 왜곡해서 받아들이지 마라.”
테렌스는 진지한 사람이었다. 그만큼 진지한 관계를 원하는 걸 레이븐은 이해할 수 있었다. 신분상 그걸 실현하는 건 또 별개의 문제라서 그렇지.
“전하, 제가 그 아가씨를 덮어놓고 반대하는 건 아닙니다.”
“네게 반대할 자격 같은 건 없는데.”
“도와드릴 수 있어요. 단 하나의 조건만 지키시면요.”
“조건?”
“결혼 생각일랑 좀 집어치우세요. 아마 그 아가씨도 전하께서 청혼하면 이럴걸요? ‘어우! 염병하지 마세요!’라고요.”
레이븐이 발레리의 말투를 엇비슷하게 흉내 냈다.
테렌스는 갑자기 두통이 밀려와 왼손으로 관자놀이를 받쳤다. 대차게 거절당한 기억이 트라우마를 남긴 모양이었다.
“…안 좋은 기억 떠올리게 해 드렸네요. 죄송합니다.”
“하나도 안 똑같으니까 하지 마라.”
“제가 전하의 패인이 뭔지 분석해 드릴까요?”
테렌스는 가만히 있었다. 어차피 레이븐이라면 그냥 놔둬도 얘기할 테니까.
“급발진입니다. 성급한 마부가 좋은 말 샀다고 마차를 너무 빨리 모는 거죠. 손님들 기함하게.”
“…무슨 비유가 그렇지.”
“생각해 보세요. 키스 좀 받아줬다고 마음이 다 넘어왔다고 생각하는 건 너무 급전개 아닙니까?”
“그런 착각한 적 없다. 첫 단추를 제대로 끼우고 시작하려 했을 뿐.”
레이븐은 갑갑한 마음에 훅하고 한숨을 내뱉었다.
“제발 양지바른 길로만 걸으려는 그 성격을 버리세요. 정도만 길이 아니라고요.”
“그럼 어쩌라는 거지.”
“안 진지한 관계로도 얼마든지 출발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만족도가 높으면 점점 진지해지지 않겠습니까?”
그때 레이븐의 눈에 포착된 게 하나 있었다.
이마를 덮은 부드러운 백금발. 탁하게 풀어진 연청색 눈동자. 탄탄한 근육질이 드러나는 매끄러운 실크 잠옷.
칼같이 세련된 평소와 다르게, 다소 흐트러져 있는 테렌스의 자태였다.
“전하, 방금 영감이 하나 떠올랐어요.”
또 무슨 헛소릴 하려는지. 테렌스는 권태로운 얼굴로 레이븐을 응시했다.
“영감?”
“퇴폐적으로 가시죠.”
퇴폐의 사전적 의미를 아는 테렌스는 코웃음을 쳤다.
“문란한 방법을 쓰자는 거냐. 입부터 맞춘 이상 또 선후 관계를 뒤집을 생각은 없다. 불순한 의도로 비치는 것도 싫고.”
레이븐은 갑자기 잰걸음으로 다가와 테렌스의 침대 위에 걸터앉았다.
“전하, 솔직히 본인이 유머 감각 없는 건 아시죠?”
“…그런 게 굳이 필요 있나?”
“인정이 빠르시군요.”
테렌스는 바짝 다가온 레이븐이 부담스러워서 눈 맞춤을 피했다.
“얼굴 잘생긴 거 오래 못 갑니다.”
“…….”
“재미있는 남자가 되셔야죠.”
“…….”
“유머 감각이 없으면 다른 감각을 키워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 재미라도 있어야 계속 만날 동기가 생긴단 말입니다. 그게 뭔지는… 다 크셨으니 잘 아실 테고요.”
레이븐이 야릇한 눈웃음을 흘리며 기다란 혀로 제 입술을 날름날름 훑었다.
테렌스는 자동으로 등 뒤에 있던 베개를 집어 그를 향해 힘껏 던졌다.
하지만 베개는 날아가다 말고 그대로 멈췄다. 레이븐이 잽싸게 마법을 부려 베개를 공중에 묶어놨기 때문이다.
“일단 다음 보고는 집무실 말고 침실에서 받으시죠. 제가 수를 써 놓겠습니다.”
“…제발 좀 나가라.”
“복장은 파자마보단 가운이 좋겠네요.”
***
발레리는 채플의 간이 목욕탕에서 멱을 감고 방으로 돌아왔다.
그녀는 개운한 기분으로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툭툭 두들겼다.
“특이해도 너무 특이해. 별로 길게 얘기하지도 않았는데 기가 쭉 빨리네. 그 가문 사람이라 그런가.”
에이바 볼드윈 공녀.
언젠가 정혼할 황태자에게 정을 붙일 수 있도록 매력을 대신 파악해달라는 여자.
직접 만나서 알아보면 될 것을, 얼마나 귀찮으면 돈 주고 남한테 시킬까.
그게 의문이었지만 한 번에 천 갈렌을 준다니 굳이 지적하진 않았다.
공녀의 말대로 테렌스는 목석같은 부분이 있긴 했다. 차가운 인상인 데다 일에만 파묻혀 살고, 시종일관 진지하니까.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발레리 또한 그런 테렌스가 참 어색하고 불편했었다.
“생각보다 잘 웃고 인간적인 사람이긴 한데. 공녀도 뭐 나중에 결혼해서 같이 살다 보면 알게 되겠지.”
테렌스와 에이바는 객관적으로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었다.
굳이 상상의 나래를 펼치지 않아도 뻔한 그림이었다.
제복을 입은 백금발 황태자와 풍성한 드레스 차림의 갈색 머리 공녀. 태생부터 외모까지 귀티가 흘러넘치는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입꼬리가 자꾸 처진다. 끌어올리려고 애쓰는데도.
“하, 내 기분이 후질 건 또 뭐냐. 그 인간이 누구랑 결혼하든 무슨 상관이라고.”
발레리는 이틀 전의 보고 시간을 떠올렸다.
그녀는 최대한 건조하게 핵심만 전달하려고 애썼다.
하지만 거의 집중하지 못했다.
일단 그의 입가에서 보조개가 실종됐다. 그런 와중에 입술이 자꾸 눈에 들어왔다.
묘하게 색정적인 테렌스의 연홍색 입술은 발레리의 시선을 흠뻑 빨아들였다.
“입술에 가림막이라도 쳐 버려야 되나. 이대로라면 내가 위험할 것 같은데.”
그래도 금요일은 작위 하사를 거부했던 수요일보단 견딜만한 분위기였다.
대충 식사도 하고 왔다. 음식이 어디로 들어가는지도 자각 못 할 정도로 정신이 없었지만.
애도 먹었다. 여느 때처럼 테렌스가 또 채플까지 바래다주려고 해서.
이제 바래다주지 말라고 딱 잘라 거절했을 때 그의 반응이 자꾸 생각났다.
“그 시무룩한 강아지 같은 표정이나 좀 집어치웠으면 좋겠다. 볼 때마다 가슴이 시큰해지니, 원.”
똑똑.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시간은 어느새 밤 아홉 시가 넘어있었다.
“누구세요?”
발레리가 소리 높여 묻자 문밖의 사람이 곧바로 대답했다.
“나야.”
문이 활짝 열렸다. 켄드릭이었다.
“뭐냐 너, 일요일인데 석실 출근했어?”
“보조 집사가 오늘 못 나와서 오늘도 내가 집사 했지.”
“오늘도 늦게까지 고생이네. 근데 여긴 왜 왔냐?”
“황녀님 야식 심부름이야. 너한테도 갖다 주라고 하셔서.”
켄드릭이 종이봉투 하나를 건넸다.
발레리는 냄새만 맡아도 내용물을 알 수 있었다.
“마늘빵?”
“응, 너도 마늘빵 좋아한다고 했더니 너한테도 나눠 주라고 하셨어.”
“황녀님은 정말 사랑이셔.”
발레리는 봉투를 받자마자 한 조각을 꺼내 입에 욱여넣었다.
따뜻하고 바삭한 마늘빵이 그녀의 양 볼 안에서 기분 좋게 바스러졌다.
“발레리, 목요일에 왜 저녁 안 먹고 갔어?”
“뭐 그냥 생각할 게 좀 있어서.”
“요즘 안정적으로 잘 지내잖아. 무슨 일이 따로 있는 거야?”
그렇게 묻는 켄드릭의 표정에 걱정이 잔뜩 어려 있었다.
발레리는 고개를 내저었다.
“그런 거 없어. 야, 마침 잘 왔다. 나 부탁할 거 있었는데.”
“부탁? 뭔데?”
“황실 도서관에 엘로이스 황제 관련 역사서가 있을까? 그 사람이 마왕 잡은 얘기가 보고 싶어서.”
“…역사서?”
“엉.”
켄드릭은 귀를 의심했다. 활자라면 학을 떼는 발레리의 입에서 역사서라는 단어가 나온 건 처음이었다.
“흠, 그 내용이라면 황조실록 1권 신화 편에 있을 텐데. 왜?”
“좀 빌려다 줘. 병사 신분으로는 책 못 빌리잖아. 맛있는 거 사 줄게. 아 그리고….”
발레리가 갑자기 책상 서랍을 뒤적거렸다. 그 안에서 누르스름한 양피지 한 장이 나왔다. 편지봉투였다.
그녀는 편지봉투 뒷면을 켄드릭의 눈앞에 내밀었다. 특이한 인장이 찍힌 검은색 실링 왁스였다.
“이 문장, 어디서 본 적 있어?”
“흠, 까마귀 문장이네. 난 처음 봐. 우리나라에선 흉조라 잘 안 쓸 것 같은데.”
“…어떤 가문인지 알아낼 방법이 있을까?”
“귀족 가문 문장만 따로 모아놓은 편람 같은 게 있긴 할 거야. 그것도 빌려서 갖다 줄게.”
“고마워, 켄디. 넌 역시 존재 자체가 유익한 애야.”
발레리가 켄드릭의 어깨를 툭툭 쳤다. 간혹 부르는 애칭까지 나왔다.
켄드릭은 미소를 지으면서도 고개를 갸웃했다.
‘책은 생전 안 읽는 앤데 별일이네. 빌려줘도 제대로 읽을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그 와중에 켄드릭의 시선을 잡아끄는 게 하나 있었다. 빵 부스러기로 범벅이 된 발레리의 입술이 반들거리고 있었다.
“발레리, 너 요즘 이상한 질문하고 다니더라.”
“내가?”
“키스해 봤냐고 물었다며. 황녀님한테.”
“…그걸 너한테 발설하시다니 조금 실망스러운데.”
발레리의 까만 눈동자가 갈 길을 잃고 이리저리 헤맸다. 아무리 절친이라고 해도 내밀한 관심사를 들킨 게 부끄러웠다.
그녀의 표정 변화를 멍하니 지켜보던 켄드릭은 갑자기 손가락으로 딱 소리를 냈다.
“발레리, 난 내가 여태 안 해본 줄 알았어.”
“뭘?”
“키스.”
“…내가 알기론 너 안 해본 게 맞을걸?”
“아냐, 방금 생각났어.”
“뭐가.”
“한 번 했었어.”
“누구랑?”
켄드릭은 거침없이 대답했다.
“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