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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자한테는 관심 없는데요 (53)화 (53/173)

53화

볼드윈은 발레리에게 익숙한 이름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펠런이 10여 년 전에 한 번 털었던 집안이니까.

당시 열 살을 갓 넘겼던 발레리 또한 그 작전에 투입됐었다.

오래전 일이지만 아직도 기억은 생생하게 남아있었다.

작전 목표는 이랬다.

─볼드윈 공작의 침실에 들어가면 머리맡에 작은 피리가 하나 놓여있을 거야. 그걸 들고나오면 돼.

공작의 침실 창문엔 쇠창살이 설치돼 있었다.

펠런에서 그걸 통과할 수 있는 몸은 어린아이인 발레리밖에 없었다.

두목 피어스는 내키지 않았지만, 밥값은 하게 해 달라는 발레리의 생떼에 못 이겨 그녀를 작전에 기용했다.

경비가 삼엄한 공작저를 몰래 뚫을 방법은 하나밖에 없기도 했고.

발레리는 날랜 몸으로 침실에 숨어들어 피리를 집어 드는 데까진 성공했다.

그러나 잠에서 깨어난 공작에게 목덜미를 붙잡히고 말았다. 온 힘을 다해 버둥거렸지만, 공작의 손아귀는 점점 숨통을 옥죄어 왔다.

발레리는 온 힘을 다해 공작의 손을 깨물었다. 치아가 살갗을 파고들어 으드득 소리가 날 정도로. 입에서 비릿한 피 맛이 느껴질 즈음에야 공작은 비명을 지르며 손을 거뒀다.

공작에게서 가까스로 벗어난 발레리는 얼른 창살 사이로 몸을 던졌다.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공작의 퀭한 눈동자에서 뿜어 나오던 그 살기 어린 눈빛이. 입안에서 좀처럼 가시지 않던 그 피비린내가.

‘그 집안 딸이구나.’

발레리는 침을 삼켰다. 희미하게 피 맛이 나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네, 에이바 공녀님. 성함을 기억해두겠습니다.”

“질문 좀 할게. 황태자궁은 왜 자꾸 드나드는 거야?”

“전하께서 부르셔서요.”

“기껏해야 병사 신분인 널 왜 부르는데? 그것도 매주 두 번씩이나.”

에이바는 부담스럽게 자꾸 가까이 다가왔다. 발레리는 식은땀을 흘리며 뒷걸음질 쳤다.

‘주간 보고 횟수까지 아네. 이 사람, 대체 어디까지 파악한 거지? 여기 정말 무서운 곳이구나. 벽에 눈이라도 달린 건가.’

발레리는 딱히 갖다 댈 이유가 떠오르지 않았다. 지금 상황을 타개하자고 석실 속 황녀 이야기를 발설할 순 없는 일이었다.

비밀유지 서약까지 한 마당에.

“하, 여기서 이럴 게 아니야. 일단 들어가서 얘기하자.”

에이바는 발레리의 손목을 잡아끌고 침실 안으로 들어갔다.

쿵. 문이 세차게 닫혔다. 이제 공녀와 단둘이었다.

발레리의 이마에선 진땀이 내솟았다. 자꾸 볼드윈 공작이 떠오르기도 했고, 애써 잊고 있던 테렌스 이야기까지 나와서 착잡했다.

“너 그분이랑 무슨 사이니?”

핵심 질문부터 나왔다. 발레리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떴다.

‘이거 물어보려고 부른 거네.’

발레리는 당당했다.

입을 맞추고 나서 테렌스와의 관계는 더 명확해졌으니까.

아무것도 아닌 사이.

“황태자와 병사 사이인데요?”

“그럼 설명이 안 되잖아. 왜 그렇게 정기적으로 만나는지.”

“그냥 말동무라고 보시면 될걸요.”

에이바는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다.

“흠, 만나서 무슨 얘길 하는데?”

“검술 얘기요.”

“…검술?”

“네.”

검술이라. 테렌스는 평소 무예에 관심이 많긴 했다. 업무를 보거나 공부하는 시간 외에는 검술 연습을 한다고 했었으니.

그래도 에이바는 아직 납득이 가지 않았다. 제국에 뛰어난 검사가 얼마나 많은데, 왜 굳이 이 여자랑?

“검술 얘기를 굳이 너랑 할 필요가 있니?”

“제가 검술을 오지게 잘하거든요.”

에이바의 입에서 피식 소리가 새어 나왔다.

“…뭐야, 지금 자기 자랑하는 거야?”

“위장 입대 걸려서 감방까지 갔는데 어떻게 복직됐겠어요. 그만큼 실력이 있으니까 다시 써주신 거죠.”

발레리의 말에는 틀린 부분이 딱히 없었다. 핵심적인 사항은 모두 빠져 있었지만.

“흠, 그거야 내가 다시 알아보면 될 일이고….”

이제야 에이바의 눈에 발레리의 얼굴이 제대로 들어왔다.

데니스에게서 들은 대로 키가 정말 컸다. 에이바 본인도 장신인데, 굽 있는 구두를 신어야만 이렇게 눈높이가 맞을 정도였다.

눈동자는 흑단같이 새카맣고 또렷했다. 그 위의 갈매기 모양 눈썹은 야무지고 날렵한 인상을 줬다.

잡티 하나 없는 구릿빛 얼굴에 적당히 오뚝한 버선코.

붉은 벽돌색 입술은 한가운데가 살짝 패어 있어서 은근한 색기가 흘렀다. 뭘 바른 것 같지도 않은데.

몸매는 녹갈색 군복에 가려져 있었으나 근육질인 것만큼은 확실했다.

벌어진 어깨에 늘씬 탄탄한 팔다리. 분명 운동으로 빚어진 몸매였다.

‘처음 봤을 땐 미소년인 줄 알았는데, 자세히 보니까 시원시원한 건강 미인이네. 황태자가 이런 취향인가?’

하지만 이렇게 감상만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에이바는 다시 입술을 뗐다.

“내가 조언을 하나 할까 하는데.”

“하세요.”

“알다시피 황실은 일부일처제를 고수한 지 오래됐어. 후궁 제도는 거의 사문화됐고.”

“그래서요?”

“정부가 되더라도, 정식으로 지위를 인정받는 일은 없을 거야.”

“…관심 없는데요. 그런 거.”

발레리는 퉁명스럽게 말대답을 했다.

기시감 때문이었다.

몇 년 전, 켄드릭의 정혼자였던 어디 후작 영애가 했던 말과 너무 비슷했다.

─너, 발레리라고 했었지. 프레이저 후작가에 정부로 들어올 생각은 안 하는 게 좋을 거야.

─정부? 그게 뭐 하는 직업인데요?

─첩 말하는 거잖아 첩! 꼭 이렇게 저급하게 말해야 알아듣니?

과거를 회상하던 발레리는 질렸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또 정부 타령이네. 귀족 영애들은 원래 레퍼토리가 다 이런가. 두 명째 이러니까 편견 생길 것 같아. 하, 너희 남자들이랑 더 엮일 생각 없다고요.’

“휴…. 그럼 그렇지. 그 목석같은 황태자가 무슨 연애를 하나 했네.”

에이바는 양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중얼거렸다.

발레리는 이게 무슨 반응인가 싶어 멀뚱거리기만 했다.

에이바는 다시 입을 열었다.

“친해?”

“네?”

“그분이랑 친하냐고.”

“글쎄요. 뭐 그럭저럭….”

안 친하다기엔 애매했다.

최근 함께 있는 시간이 많아지며 테렌스와 부쩍 가까워진 건 사실이니까.

그러다 보니 정말 불필요한 신체 접촉까지 생긴 거고.

이젠 발레리의 머리에 물음표가 떠올랐다.

다짜고짜 불려와서 이런 공격적인 질문 세례를 받을 이유는 무엇인지.

“저도 하나 여쭐게요. 그러는 공녀님은 전하랑 무슨 사이신데요?”

“반지 끼울 것 같아. 내년 말쯤에.”

“…정혼자예요?”

뭐지? 황태자 그 새끼…. 결혼할 사람이 있으면서 정식 교제 운운하며 작위를 준다고 했던 건가.

테렌스에게 괘씸한 마음이 들려 할 때쯤 에이바가 대답했다.

“아직은 계획 단계야.”

“계획? 그분을 좋아하기라도 하세요?”

“흠, 그것도 아직은 아니야.”

아직은 아니라니 그게 무슨 소리지.

발레리는 공녀의 입 모양만 멀거니 쳐다봤다.

“넌 모르겠지만, 우리 신분쯤 되면 남녀가 서로 좋아서 결혼하는 경우는 얼마 없어. 애정 문제야 나중에 서로 노력하면 될 일이니까.”

“…그럼 왜 벌써부터 주변 단속을 하시는데요?”

“여자관계 복잡한 건 싫어. 내가 초라해 보이잖아. 가련한 조강지처 이미지는 별로라.”

“흠, 네….”

‘음, 이 공녀가 지극히 자기 위주로 생각하는 사람인 것까진 알겠네.’

발레리는 더 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시간 아깝게 왜 이런 얘길 듣고 있어야 하는지도 모르겠고.

“친하다니까 물어볼게. 황태자의 매력이 뭐니? 난 도무지 정이 안 붙어서 말이야.”

“…매력이요?”

“응. 유혹해 보려고 노력은 하는데 그럴 때마다 반응이 너무 뻣뻣하고 재미없어서. 매번 내가 왜 이러고 있지, 하면서 허탈해져.”

대체 뭘까. 아까는 황태자를 넘보지 말라는 듯이 말하더니, 지금은 뒷담을 늘어놓고 있다.

극적으로 바뀐 주제에 발레리는 적응하길 포기했다.

골머리가 띵해질 지경이었다.

에이바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사실 처음엔 네가 남자인 줄 알았어. 그래서 황태자한테 남색자냐고 물어봤는데 정색하면서 아니라고 하더라.”

“아, 그런 성향은 아니에요.”

남자를 좋아한다면 그날 밤에 그랬을 리가 없지.

발레리는 무의식적으로 입술에 손을 가져다 댔다.

그와의 첫 키스는 진득했던 만큼 여운이 길었다.

‘어우 씨, 또 위험한 생각할 뻔했네.’

발레리는 제 허벅지를 살짝 꼬집으며 현실로 돌아왔다.

그새 에이바는 한결 차분해져 있었다.

“그래서 말인데. 앞으로도 그분이랑 계속 친하게 지낼 거라면 부탁 좀 할게.”

“무슨 부탁이요?”

“영업을 좀 해봐.”

무슨 물건이라도 팔아오라는 건가. 발레리는 이맛살을 찌그렸다.

“영업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전 대가 없는 일은 안 해요.”

“어머, 나 볼드윈 공작 딸이야. 공짜로 일 시킬 사람으로 보이니? 한 번 올 때마다 천 갈렌씩 주려고 했는데.”

천 갈렌? 발레리의 눈이 주먹만 해졌다. 일개 병사 시절엔 한 달을 꼬박 일해야 벌 수 있는 돈이었다.

‘부수입원으로는 쏠쏠하겠네.’

“뭘 하면 되죠?”

“잘생기고 키 큰 거 말고 다른 매력이 뭐가 있는지 좀 알아봐 줘. 내 눈엔 도무지 안 보여서 말이야. 재미없는 인간 자주 만나서 아양 떨기도 피곤하고.”

“그러니까, 그 영업이라는 게, 황태자 전하의 매력을 공녀님한테 팔아보라는 거예요?”

“바로 그거지. 잘 알아듣네. 내가 방문 판매상 얘기 듣는 거 좋아하거든. 딱 그런 식으로 하면 돼.”

못 받아들일 제안은 아니었다.

다만 공녀의 사고체계를 따라가기가 버거울 뿐.

특정 인물을 미행해서 치부를 알아 오라는 의뢰는 몇 번 있었다.

그런데 사람의 매력을 대신 파악해달라니. 이런 경우는 생전 처음이었다.

“할 수야 있는데요. 굳이 그렇게까지 해서 정을 붙여야 할 이유가 있어요?”

“내 안위를 위해 선택한 사람이야. 생각보단 괜찮은 사람이었으면 좋겠어. 조금이라도 후회하기 싫으니까.”

“뭐…. 알겠습니다.”

사실 테렌스의 매력 포인트라면 지금 당장도 몇 개 짚어낼 수 있었다.

웃을 때마다 드러나는 보조개, 그리고 투명하게 빛나는 하늘색 눈동자. 키스에도 대단한 소질이 있었다. 솔직히 처음이라는 게 안 믿길 정도로.

‘맨 마지막 게 제일 큰 장점인 것 같긴 한데….’

생각에 잠긴 발레리를 보며, 에이바는 미묘하게 눈꼬리를 휘었다.

“근데 너 말투 되게 싸가지 없다.”

“…주의하겠습니다.”

“아냐, 마음에 들어.”

“예?”

“계속해 봐. 그 말투로. 맨날 예의 격식 따지는 사람들만 봐서 그런가. 신선하고 좋네.”

‘또 뭐라는 거야. 이 인간 진짜 제정신이 아닌 건가?’

발레리의 흔들리는 눈동자에는 약간의 공포감이 섞여 있었다.

에이바 볼드윈. 일단 보통내기는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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