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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자한테는 관심 없는데요 (52)화 (52/173)

52화

“제가 발레리한테 한번 물어보겠습니다. 무슨 일이 있는지.”

“아니에요. 본인이 먼저 얘기할 때까지 기다려봐요, 우리.”

프리다도 슬슬 찻잔을 다 비웠다.

그녀는 컵 받침에 잔을 내려놓은 뒤 켄드릭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뭔가를 바라는 눈빛이었다.

“켄드릭, 혹시 말인데요….”

“네, 황녀님.”

“내가 하고 싶다고 하면 할 거예요?”

프리다가 수줍게 자신의 입술을 가리켰다. 나름대로 확실한 의사 표현이었다.

“원하십니까?”

켄드릭은 긴장이 역력한 표정으로 그녀에게 되물었다. 프리다는 흔쾌하게 미소했다.

“일어나 봐요.”

상전의 명령이었다. 켄드릭은 한숨을 깊이 삼키더니 소파에서 일어나 정자세로 꼿꼿이 섰다.

이런 때도 군기가 잡혀 있을 건 뭐람. 프리다는 떨떠름함을 숨기며 그의 맞은편에 자리 잡았다.

그녀가 켄드릭의 양팔을 붙들고 목표물에 초점을 고정했다. 그의 입술은 생각보다 한참 높이 달려 있었다. 어쩔 수 없이 까치발을 최대한 들었다.

살굿빛 입술이 차츰차츰 다가왔다.

켄드릭은 눈을 꽉 감았다.

그렇게 10초가 지났다.

셋, 둘, 하나.

몇 초를 더 셌지만 아무것도 와 닿는 게 없었다.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하는 걸까. 단단히 밀봉돼 있던 켄드릭의 왼쪽 눈이 슬며시 뜨였다.

“……?”

프리다가 얼굴을 가린 채 고개 숙여 킥킥대고 있었다. 애초부터 입을 맞출 생각이 없었던 사람처럼.

켄드릭은 얼떨떨했다.

“내가 진짜로 할 줄 알았나 보네? 하하핫.”

“예?”

“아니, 그렇게 눈 꽉 감고 오만상을 하는데 어떻게 입을 맞춰요…. 나한테 못생겨 보이고 싶어서 그런 거예요?”

“제가 그랬습니까?”

그랬다.

켄드릭은 거의 회초리를 맞기 직전의 어린애 같은 표정이었다. 겁을 잔뜩 집어먹고 있던 모양이다. 본인도 자각하지 못한 채.

로맨틱한 분위기가 조성될 리 만무했다. 켄드릭의 어설픈 태도에 한참을 웃던 황녀는 한숨을 푹 쉬었다.

‘아무래도 이 남자, 전혀 준비가 안 된 것 같네.’

멀뚱히 선 켄드릭의 가슴팍에, 프리다는 귀를 바짝 가져다 댔다. 갑작스러운 접촉에 켄드릭은 돌처럼 굳었다.

“송구합니다, 황녀님. 제가 이런 일에 익숙하지 않아서….”

프리다는 대답 없이 켄드릭의 심장박동을 들었다.

평온하고 규칙적이었다.

‘어떻게 해야 할까. 그날이 오기 전까지, 이 남자의 심장이 조금이라도 빨리 뛰게 할 순 있을까.’

답답했다. 스물두 살 먹은 남자가 정말 아직도 이성에 눈을 뜨지 않은 건지.

아니면 다른 데를 보고 있는 건지.

프리다는 켄드릭의 허리에 양팔을 감고 그를 올려다봤다. 30센티미터에 달하는 키 차이 때문일까. 목뒤가 금방 뻐근해졌다.

그래도 수고해서 들여다볼 가치가 있는 얼굴이었다.

“생각은 해봤어요? 나랑 만나는 대가로 뭘 받을지.”

“아….”

“빠른 승진은 안 내킨다고 하고, 월봉 올려주는 것도 부담스럽다고 했잖아요. 다른 바라는 거 없어요?”

그는 머쓱하게 뒷머리를 긁적였다.

“이렇게 만나 뵙는 것도 다 황녀님의 호의인데, 제가 그 대가를 받아도 되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당연히 받아야죠. 귀한 시간 내서 나한테 소중한 추억 만들어주는 거잖아요.”

물론 켄드릭은 일찍부터 받고 싶은 대가를 이미 정해두고 있었다.

프리다가 기한부 연애를 제안했던 바로 그 순간부터.

하지만 막상 입 밖에 꺼내려니 망설여졌다.

어쩌면 너무 맹랑하게 보이지 않을까. 그게 걱정이었다.

그래도 기회를 놓치고 싶진 않았다.

“황녀님.”

“음?”

“저를 위해 폐하께 인사 청탁 같은 건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럼요?”

켄드릭은 황녀의 눈을 직시하며 이렇게 말했다.

“황제 폐하와 독대할 기회를 주셨으면 합니다.”

또렷하고 분명한 어조였다.

“…독대? 우리 아버지랑요?”

프리다는 눈을 슴벅거렸다. 갑자기 아버지를 만나겠다니 왜일까. 그것도 단둘이.

“네, 기회를 주신다면 감사하겠습니다.”

“어렵지는 않은데… 이유를 물어봐도 될까요?”

“이전부터 여쭙고 싶은 게 있었습니다.”

최근 켄드릭은 꿈자리가 산란했다.

똑같은 장면이 연이어 재생됐다. 여러 번 깨서 뒤척이고 돌아누웠다. 잠자리를 옮겨 봐도 같은 꿈을 꿨다.

와이어 숲.

그곳에서 사라진 두 형의 모습이 보였다.

꿈속에서 패트릭과 프레데릭은 눈을 감은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저 숨만 쉬고 있었다. 햇살이 한 줄기도 비치지 않는, 아주 어두컴컴한 곳에서.

10년 넘게 숲을 감싸고도는 황제 엘리엇. 어쩌면 그가 열쇠를 가지고 있진 않을까.

***

“하암….”

채플 정문 앞. 발레리는 하품을 연발하며 주말 보초를 서고 있었다. 시계탑을 보니 예배가 끝나는 시간까지 딱 5분이 남았다.

대예배실에선 성가대의 4부 합창 소리가 흘러나왔다. 

‘엘로이스 황제에게 보검을 하사하신 시에나 여신께 영광을. 보검을 들어 마왕을 물리친 엘로이스 황제에게 찬사를.’

“뭐야? 방금 보검이라고 한 건가?”

나른한 와중에 귀가 번쩍 뜨였다. 느닷없이 찬송가 가사에 보검이 등장하다니.

잠시간 잊고 있던 임무 내용이 되살아나는 순간이었다.

엘로이스는 칼레바니아를 건국한 초대 황제였다.

약 700년 전, 전대 마왕을 처단하고 암흑의 땅이었던 칼레바니아에 깃발을 꽂은 입지전적 여걸이기도 했다.

“흠…. 생각해 보니 초대 황제가 마왕을 검으로 때려잡았었지. 근데 그게 시에나 여신이 하사한 보검이었구나.”

뜻하지 않게 얻은 새로운 정보다. 발레리는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흠, 의뢰인이 가져오라는 게 설마 그건가?’

매번 답답했었다. 의뢰인이 보검에 대한 정보를 하나도 주지 않아서.

의문에 의문이 꼬리를 물었다.

신화 속 보검이 과연 실재할까. 정말로 있다면 황실의 보검과 동일한 물건일까.

수백 년이나 지났다면 유물인데, 사용가치를 잃지는 않았을까.

마왕을 처단하는 데 쓰였다면 엄청나게 강한 무기일 터다. 어떻게 생겼을지도 궁금했다.

‘마왕 하니까 또 생각나는 사람이 있네.’

켄드릭이었다. 그가 어릴 때부터 줄기차게 주장하던 이론이 있었다.

와이어 숲의 아공간에는 지하세계로 통하는 문이 있다고. 그곳에선 700년 전 새로 등극한 마왕이 죽은 자들의 사후 처벌을 집행한다고.

발레리는 도적, 즉 범죄자였다. 직업이 직업인만큼 그런 가설을 전혀 믿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늘 면박을 줬다. 켄드릭이 마왕이나 지하세계 타령을 할 때마다.

─마왕이라고 불리지만 사실은 사후세계의 최고 집행관이야. 악마가 아니라 신으로부터 업무를 하청받은 부하라는 거지.

─그건 또 뭔 헛소리냐.

─아무튼, 살아생전에 완전범죄에 성공한 사람도, 죽고 나서 벌을 고스란히 받게 돼.

─너 어디서 이상한 책 읽고 왔지.

─이상한 책 아니고 성직자들이 읽는 거야. 그러니까 빨리 손 털어. 네가 안 걸린 도둑질도 죽은 뒤엔 다 벌 받는다니까.

켄드릭은 와이어 숲에 관한 책이라면 닥치는 대로 읽었다.

건국신화에서부터 온갖 역사서, 사제들이 읽는 성서까지 섭렵했다.

이유 있는 집착이었다. 소중한 사람 두 명을 그곳에서 잃었으니. 언젠가 형들을 구하겠다는 사명감 아래 그 정도 노력은 쉬운 축에 속했다.

“어쩌면 걔가 보검에 대해 아는 게 있을지도 몰라. 근데 직접 물어보면 괜히 의심 살까 겁나네…. 자료나 구해달라고 해야겠다.”

하지만 자료 탐색은 발레리가 자신이 없는 분야였다.

일단 황실 도서관에 들어가야 하는데, 일개 병사 신분으로는 출입할 수 없었다. 켄드릭 같은 기사는 가능하겠지만.

밤에 몰래 숨어든다 해도 문제가 있었다.

밤눈은 밝아도 글눈이 어두우니까. 제 이름도 간신히 쓰는 마당에, 그 방대한 공간에서 필요한 자료만 쏙쏙 골라내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후… 무식이 죄라는 건 이럴 때 쓰는 말이구나.”

절로 한숨이 나왔다. 이런 데서 또 켄드릭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니.

댕.

종이 울렸다. 예배가 이제 끝나나 보다. 발레리는 얼른 상념에서 벗어나 자세를 바로 했다.

신도들이 한두 명씩 빠져나오기 시작했다.

멀거니 서 있다 보니 누군가가 가까이 다가왔다.

어깨높이의 앳된 여인이었다. 복장을 봐선 황궁 하녀다.

“저기, 로빈슨 양.”

“절 아세요?”

발레리는 약간 신경질적으로 반응했다. 오늘따라 자꾸 모르는 사람들이 알아봐서 불편했다.

오전에도 처음 보는 장교 몇 명이 “네가 그 유명한 여자 병사냐”고 물어보고 갔던 차였다.

훤칠한 발레리가 위압적인 눈빛으로 내려다보자 하녀는 살짝 겁을 먹었다.

“저, 저희 공녀님께서 찾으세요.”

“공녀? 전 그런 사람 모르는데요.”

“근무 끝나고, 중앙궁 서관 후문으로 오세요.”

용건이 끝난 하녀는 잰걸음으로 도망치듯 떠났다.

발레리는 어이가 없어서 그녀의 뒷모습만 물끄러미 쳐다봤다.

“뭐야, 최소한 공녀가 누군지는 말하고 가야지.”

중앙궁 서관이라면 황후 레베카가 기거하는 곳이었다.

발레리는 모르는 사실이었지만 레베카의 시녀, 에이바 볼드윈의 거처기도 했다.

***

채플 뒤편으로 땅거미가 내릴 무렵. 발레리는 군복 차림 그대로 중앙궁에 갔다.

서관 후문에는 아까 그 하녀가 마중 나와 있었다.

“시간 맞춰 오셨네요.”

“그래서 그 공녀가 누군데요?”

“만나보면 아실 거예요.”

하녀는 발레리를 서관 2층 구석으로 안내했다. 도착해 보니 누군가의 침실 앞이었다.

발레리는 팔짱을 끼고 서서 기다렸다. 누군가가 나올 때까지.

덜컥, 하고 문이 열렸다. 방의 주인 되는 사람이 직접 나와 손님을 맞았다.

“안녕, 왔구나. 발레리 로빈슨.”

구면이었다. 분명 어디선가 본 적 있는 여자인데, 신상정보가 떠오르지 않는다.

굴곡진 몸매를 보니 어디서 봤는지 바로 생각났다. 얼마 전 테렌스의 집무실에 찾아와 인사하고 간 그 여자였다.

공녀는 긴 머리를 위로 높이 틀어 올린 채였다. 입은 옷은 보라색에 가까운 자줏빛 드레스였다. 저번만큼이나 가슴이 아찔하게 파여 있었다.

‘여전히 가슴이 웅대하시네. 근데 날 어떻게 알지.’

“…제 이름을 아세요?”

발레리가 기억하기론 통성명한 사이는 아니었다.

“흠, 윗사람한테는 먼저 인사부터 해야 하는 거 아닐까.”

“안녕하세요.”

“인사가 뭐 그러니? 공녀님을 뵙습니다, 라고 해야지.”

“네, 공녀님을 뵙습니다.”

에이바는 초장부터 기선제압에 나섰으나 발레리는 전혀 말려들지 않았다. 인사를 떨떠름하게라도 받아 줄 수밖에 없었다.

“흠, 그래. 네 이름 알아내는 것쯤은 쉬웠어. 너 유명하잖아? 제국 최초의 여자 병사로.”

“아….”

발레리는 자신의 유명세를 새삼 깨닫곤 멋쩍게 뒷머리를 긁었다.

“내가 누군지는 알고?”

“공녀님이라고 하던데요.”

“정확히 말해줄게. 볼드윈 공작가의 에이바라고 해.”

볼드윈? 내가 아는 그 볼드윈?

눈앞의 여인이 정체를 밝히자, 발레리의 입이 쩍 벌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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