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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자한테는 관심 없는데요 (51)화 (51/173)

51화

똑똑.

노크 소리와 함께 하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전하, 저녁 식사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이날 음식은 평소보다 늦게 나왔다. 테렌스가 특별 메뉴를 주문했기 때문이다.

먼저 자리를 떠 버린 발레리를 위해서.

하인이 카트를 끌고 들어왔다. 그뤼에르 치즈를 가득 얹은 바닷가재 테르미도르였다. 신선한 바다향에 은은한 머스터드 냄새가 레이븐의 구미를 당겼다.

레이븐은 입속에 군침을 가득 머금었다. 2인분인 데다 그 아가씨도 일찍 가고 없다. 기대해 봐도 좋지 않을까.

“데니스.”

테렌스가 하인의 이름을 불렀다.

“예, 전하.”

“오늘은 속이 안 좋다. 이만 물리고 다른 하인들과 나눠 먹어라.”

“아, 알겠습니다. 전하.”

“그리고.”

“하명하시지요.”

“내일 중에 집무실 문에 방음재를 붙여라.”

레이븐의 입에서 아쉬운 신음이 터져 나왔다. 저녁 특식은 물 건너갔고 도청길도 막혀버렸다. 일에 파묻혀 사는 테렌스의 집무실에서, 유일하게 엿들을 묘미가 있는 건 발레리와의 대화뿐이었는데.

“…너무하시네.”

바닷가재는 다시 카트를 타고 황태자궁 주방으로 향했다. 레이븐은 음식이 멀어져 가는 모습을 허망하게 지켜보며 입맛을 다셨다.

“전하, 대체 왜 식욕까지 잃으신 겁니까. 사람이 먹고는 살아야지, 실연이 뭐 대숩니까?”

테렌스는 손가락을 들어 문을 가리켰다.

“나가.”

그렇게 정색하고 명령하시니 따를 수밖에.

집무실에서 나온 레이븐은 굳게 닫힌 문을 뒤돌아보며 혼자 중얼거렸다.

“대체 둘이 키스는 어떻게 하게 된 거지? 어휴, 공녀가 알면 아주 기절초풍할 일이야.”

***

해가 정수리를 빼꼼 내밀 무렵.

황태자궁 하인 데니스는 새벽이슬을 맞으며 중앙궁 뒤 난초 정원으로 불려왔다.

에이바 볼드윈 공녀에게 두 번째 보고를 하기 위해서다.

이번에는 금화를 몇 닢 더 받아낼 수 있을 터다. 최근 황태자궁에 자주 드나드는 여인 하나를 특정했으니까.

데니스는 인적을 살피며 두리번거렸다.

얼마 후, 정갈하게 심긴 난초들 사이로 공녀가 모습을 드러냈다. 별다른 장식 없이 수수한 회색 드레스 차림이었다.

에이바는 언제나 고개를 빳빳이 쳐든 자세로 걸었다. 목줄기에 쇠막대라도 심어놓은 것처럼.

“공녀님을 뵙습니다. 오늘따라 자태가 더 고우십니다.”

“고마워, 데니스. 너도 안색이 좋아 보이네? 이번에는 좀 좋은 정보가 있나 본데.”

“네, 공녀님. 여자를 찾았습니다.”

에이바는 ‘그럼 그렇지’라고 생각하며 한쪽 입꼬리를 쓱 올렸다.

“그래, 연애편지를 주고받는 여자였어?”

“아뇨. 황태자궁에 직접 드나드는 여자입니다.”

“흠, 어느 가문의 누구지?”

“귀족이 아니라 평민입니다. 남부 프레이저 후작령의 한 농가 출신이라던데요.”

에이바는 치렁치렁한 생머리에 손 빗질을 하다 그대로 멈췄다. 평민이란 말에 충격을 받은 듯했다.

“뭐라고? 하녀 중에 있었던 거야?”

“아, 하녀는 아닙니다.”

“그럼 평민 신분으로 어떻게 황태자궁을 드나들어?”

“황궁 병사니까요.”

그녀의 일자 눈썹이 물결 모양으로 굽이쳤다. 여자인데 황궁 병사라니, 앞뒤가 맞지 않았다.

“그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야. 여자가 어떻게 병사야?”

“아, 제국에서 유일한 여자 병삽니다. 이름은 발레리 로빈슨인데요. 남자 신분을 사서 위장 입대한 게 드러났는데, 황태자 전하께서 애국심을 높이 사서 복직시켜 줬다는 그 병사입니다.”

그제야 에이바는 최근 어렴풋이 들은 소문이 생각났다. 어쨌든 데니스가 없는 말을 지어내는 건 아니었다.

“아아, 들었던 것도 같네. 황실 근위대에 웬 여자가 들어와서 난리 났었다고. 그 병사인가.”

“아, 알고 계셨습니까?”

“외모는 어떤데? 자세히 설명해 봐.”

“일단 키가 웬만한 남자만큼 크고, 짧은 흑발입니다. 얼굴은 까무잡잡하고요. 인상은…. 좀 새초롬해 보인달까요? 순해 보이진 않습니다.”

마침 에이바의 기억에 스치는 얼굴이 하나 있었다.

흑발에 까무잡잡한 얼굴. 날렵하니 새초롬한 인상. 앉아있었기에 키는 못 봤지만, 데니스가 말하는 조건에 얼추 들어맞았다.

“오호라.”

그 미소년 병사였다. 테렌스를 잠시 남색자라고 의심하게 했던.

“내가 아는 얼굴이었네. 그때 현장을 잡은 거였어.”

“공녀님께서도 본 적이 있으십니까?”

“응. 근데 여자인 건 몰랐어.”

“잘 보면 여자 티가 납니다. 떡대는 좀 커도, 얼굴이 조그맣고 이쁘장하게 생겼거든요.”

에이바는 다시 발레리와의 첫 만남을 떠올렸다.

그 병사는 테렌스와 집무실 테이블에 마주 앉아 식사하고 있었다. 나름대로 정다운 분위기였던 것 같다.

생각해 보니 당시 테렌스는 방해받고 싶지 않은 눈치긴 했다.

한껏 꾸미고 찾아간 에이바에게 별 눈길도 주지 않고 그대로 돌려보냈으니.

“흠. 오늘은 돈값 했네. 데니스, 걔가 황태자궁에 얼마나 자주 오는지, 뭐 하러 오는지도 좀 알아봐 줘.”

“예, 공녀님. 눈에 불을 켜고 지켜보겠습니다.”

데니스는 자신 있게 씩 웃어 보였다. 표적이 생겼으니 이제 관찰하기만 하면 된다.

에이바는 작은 손가방에서 금화를 한 줌 꺼냈다.

저번의 딱 두 배였다.

데니스의 뒷주머니가 불룩 솟아올랐다.

***

“전 오늘 머릿속이 좀 뒤숭숭해서…. 먼저 가보겠습니다.”

발레리는 수업이 끝나자마자 석실을 떠나버렸다. 저녁 식사까지 마다하고서.

그래서 프리다는 켄드릭과 단둘이 저녁을 먹었다.

수요일이나 금요일이 아닌 목요일인데도.

갓 연애를 시작한 연인들은 식사를 마친 뒤 소파에 나란히 앉아 느긋하게 계피차를 마셨다.

프리다는 고개를 돌려 켄드릭의 옆모습을 감상했다.

깎아지른 듯 높고 곧게 뻗은 콧대가 인상적이었다. 찻잔을 향해 내리깐 눈에는 갈색 속눈썹이 기름하게 드리워 있었다.

한참을 보고 있자니 어느덧 깊은 진녹색 눈동자가 프리다의 기색을 살폈다. 약간 민망해하는 얼굴로.

“하하, 왜 계속 쳐다보십니까?”

“잘생겨서요. 인기 많죠? 여자들한테.”

“없지는 않습니다만…. 일흔일곱 명의 구혼을 거절하신 황녀님만 할까요.”

외모에 대한 칭찬이 익숙한 켄드릭이었다. 가는 곳마다 뭇 여인들의 시선이 자신에게 쏠린다는 걸 잘 알았다.

칭찬을 여유롭게 받아넘기는 태도 또한 프리다의 마음에 든 부분이었다.

이렇게 매력적인데, 왜 아직 독신일까.

“나야 그렇다 치고, 켄드릭은 왜 장가 안 갔어요? 혼담도 많이 들어왔을 법한데.”

“혼담이 오간 적이 있긴 합니다. 제가 깨자고 했지만요.”

“깼다고요? 왜요?”

“음, 그쪽 집안 여성이…. 발레리를 심하게 모욕했습니다.”

“응? 발레리를요?”

혼담을 깬 사유에 발레리가 연관돼 있다니.

프리다는 의아했다. 혼담은 집안 사이에 오가는 일종의 거래인데, 발레리는 제삼자인 데다 켄드릭과는 연인도 아니고 친구 관계였다.

“네. 발레리와 제 사이를 오해해서요. 걔한테 제 정부가 되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차마 입에 담지 못할 말을 내뱉었습니다.”

“뭐 그런….”

“오해야 할 수 있습니다. 그래도 전후 사정도 모른 채 무고한 사람을 몰아세우는 건 너무 무례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네요. 발레리도 당황했겠다.”

“다행히 걔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지만, 상처가 된 것 같아서 미안했습니다.”

켄드릭의 목소리에서 기운이 약간 빠졌다. 그때 기억을 떠올리는 듯했다.

프리다는 그의 손을 잡고 천천히 쓰다듬었다. 위로의 표시였다.

둘 사이의 스킨십은 대충 이 정도였다.

프리다는 연애를 제안할 당시 켄드릭에게 ‘얘기 나누는 것만으로 좋다’고 했지만, 진짜 속마음은 달랐다.

심리적으로 가까워진 만큼 신체적으로도 더 긴밀하게 접촉하고 싶었다.

아무래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그런 조바심도 있었다.

그러나 켄드릭은 이쪽으론 딱히 열정을 보이지 않았다.

처음 손을 잡았을 땐 얼굴을 살짝 붉히긴 했으나 그게 좋아서 나오는 반응인지는 애매했다.

이런 생각까지 들었다.

‘왕거미한테 다시 나타나 달라고 해야 하나.’

둘 사이에 가장 진한 스킨십이 이뤄졌던 게 그때뿐이니 말이다.

잠시 망설이던 프리다는 켄드릭의 눈을 보며 이렇게 물었다.

“켄드릭, 그거…. 해봤어요?”

“뭘 말입니까?”

말똥말똥한 그의 눈동자는 사심이라곤 전혀 없어 보였다. 갓 따낸 청포도알마냥 싱그럽고 순수했다.

“키스요.”

“푸웁.”

켄드릭이 입에 머금고 있던 차를 내뿜었다.

계피향 가득한 찻물이 황녀의 얼굴에 골고루 분사됐다.

썩 유쾌하지 않은 물방울이 프리다의 얼굴을 온통 뒤덮었다.

때아닌 날벼락이었다. 프리다는 눈을 질끈 감았다. 질문이 좀 직선적이긴 했지만, 이런 알레르기 반응이 나올 줄이야.

“내 질문이 무례했다면 미안한데… 그렇다고 얼굴에 차를 뱉어버리면 어떡해요.”

“아아! 정말 죄송합니다, 황녀님. 너무 갑작스러운 질문이라 좀 당황했습니다.”

화들짝 놀란 켄드릭이 허둥지둥 재킷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냈다. 그리고 프리다의 얼굴을 찬찬히 닦아주기 시작했다.

따스한 손길에 프리다의 불만은 금세 사르르 녹았다. 미간이 펴지고 입꼬리가 조금씩 올라갔다. 급기야 웃음이 터졌다.

“아하핫, 아 웃겨.”

“뭐가 웃기십니까.”

“안 해봤죠?”

“…네.”

안 해본 걸 해봤다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이대로 계속 만난다면, 거짓말을 해 봤자 언젠가는 들통날 테니까.

물기를 닦아낸 황녀의 얼굴은 금방 보송해졌다. 켄드릭은 안도의 한숨을 쉬며 손수건을 다시 주머니에 넣었다.

“그런 건 갑자기 왜 물으십니까.”

“발레리가 나한테 똑같은 질문을 하더라고요. 키스해 봤냐고.”

“…걔가요?”

프리다가 고개를 끄덕했다.

켄드릭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발레리가 그런 쪽에 관심이 있었던가. 그녀와는 한 번도 그런 주제로 대화를 나눈 적이 없었다. 주로 칼싸움 얘기, 아니면 먹는 얘기만 했던 것 같다.

“그래서 뭐라고 대답하셨습니까?”

“안 해봤다고 했죠. 여기서 4년을 갇혀 지냈는데, 누구랑 입 맞출 일이 어디 있겠어요.”

“아….”

뭐라고 대답할 말이 없었다. 켄드릭은 잔에 남아 있는 계피차를 한입에 털어 넣었다. 불현듯 머릿속에 낯선 그림이 그려졌다.

발레리가 누군가와 입을 맞추는 장면이.

콜록콜록.

그러다 사레가 들려 연신 기침을 했다. 프리다가 그의 등을 토닥였다.

“아유, 천천히 마시지 그랬어요.”

“…실례가 많습니다. 오늘따라 제가 칠칠치 못하네요.”

“근데 켄드릭, 요즘 발레리한테 뭐 이상한 거 못 느꼈어요?”

“글쎄요. 저녁을 안 먹고 간 게 이상하긴 합니다. 웬만하면 끼니는 안 거르는 애라서요.”

“아까 나한테는 머릿속이 뒤숭숭하다고 하더라고요. 수업 시간에는 반쯤 넋이 나가 있고.”

켄드릭은 잠시 과거를 돌이켰다. 발레리가 음식을 멀리한 적이…. 5년 전 도적단 동료 몇 명이 살해당했을 때. 두세 달 정도 그랬다.

그땐 정말 건강이 우려될 정도로 곡기를 끊어서 비쩍 말랐었다. 멍하니 처져 있는 발레리의 입속에 켄드릭은 마늘빵을 억지로 욱여넣곤 했다.

‘그 정도로 심각한 일이 있는 건가. 그렇다기엔 인사도 씩씩하게 잘하고 걸음걸이도 평소랑 똑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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