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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자한테는 관심 없는데요 (50)화 (50/173)

50화

작위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배꼽이라도 맞췄으면 모르겠는데, 고작 입 맞춘 것 가지고 왜 이럴까. 책임을 운운하며 신분 세탁까지 해줄 일인가.

발레리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정신이 나간 건 내가 아니라 이 사람이 아닐까.

태생부터 너무 진지한 인간이라, 과도한 책임감에 압도당한 게 아닐까.

그러지 않고서야 이렇게 충동적이고 설익은 제안을 할 리 없었다.

“전하, 제 기억엔 피차 책임질 일이 단 하나도 없었어요. 아니 그리고, 작위가 누구 집 개 이름이에요? 이렇게 막 뿌려도 되는 거냐고요.”

테렌스는 당황해서 진땀이 삐죽 솟았다. 그녀가 이렇게 가시 돋친 반응을 보일 줄은 몰랐다.

파격적인 제안이니 놀랐을 수 있겠지. 그는 애써 평정심을 유지하며 설명을 이어갔다.

“네 공적은 충분해. 프리다의 검술 스승으로서 넌 많은 업적을 이뤄냈으니까. 병사 시절 근무 기록도 전부 확인했다. 흠잡을 데 없더군.”

그가 내민 종이는 발레리의 공적서였다.

테렌스가 꼬박 사흘 밤낮을 투자해 꼼꼼히 작성한 내용이었다.

대략적인 요지는 이랬다.

「…발레리 로빈슨. 뛰어난 검사이자 교육자로서 황녀의 검술 실력 향상에 기여한 공이 크다. 황녀의 식생활을 올바르게 지도해 건강 증진을 돕기도 하였다. 칼레바니아 제국 병사로 근면 성실하게 복무하며 타의 모범을 보였다…」

과거 그녀의 상관이었던 클린트 하사의 추천사까지 들어있었다.

이런저런 이유로 발레리 로빈슨을 준남작 작위에 봉한다는 게 결론이었다. 크게 과장된 내용은 없었지만, 읽을수록 얼굴이 화끈해졌다.

발레리의 눈엔 아무리 봐도 작위를 내릴 만큼의 공적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일개 평민 병사가 준남작이 된다니. 전쟁터에 나가서 수십 명의 목을 베어 온 것도 아닌데 말이다.

게다가 여자가 작위를 받는 건, 귀족 가문의 무남독녀 외동딸인 경우밖에 없었다.

이건 그야말로 파격이었다.

테렌스는 맨 아래쪽의 빈 서명란을 가리켰다.

“황제 폐하의 재가만 있으면 된다. 내가 직접 설득하겠다.”

황제까지 언급되자 발레리는 정신이 아득해졌다. 그녀는 명치 아래서부터 올라오는 한숨을 길게 내뱉었다.

“하아… 아뇨, 진짜 진심인데요. 하지 마세요. 이런 거 필요 없어요.”

너무 아까웠다. 이 남자가 들인 정성이.

이미 위장 입대 사건으로 유명세를 치렀다. 뜬금없이 작위까지 받게 되면 또 황궁이 떠들썩해질 게 뻔했다.

발레리는 이곳에 있는 동안 최대한 조용히 지내고 싶었다.

게다가 지금은 가짜 신분이다. 남의 이름으로 명예 따위를 얻어서 무엇하리.

그녀의 심드렁한 얼굴을 보며, 테렌스는 평소의 서늘한 표정으로 되돌아왔다.

발레리가 이렇게까지 거부감을 드러낼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지난 며칠간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키스에 열렬히 보답하던, 자고 가겠냐고 묻던 여인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다른 사람이 온 것 같았다.

“발레리, 나는 너와─”

“하나만 여쭤볼게요. 책임지는 데 작위가 대체 왜 필요한 거예요?”

드디어 핵심 질문이 날아들었다.

테렌스는 크게 한 번 심호흡하고 준비한 대답을 했다.

“…너와 정식으로 교제하려는 발판이다.”

“어우! 염병하지 마세요!”

발레리는 펄쩍 뛰며 질색팔색했다. 그녀의 험한 언사에 테렌스는 움찔했다.

둘 사이에 적막이 찾아왔다.

테렌스는 충격에 휩싸여 잠시 말을 잃었다. 눈을 끔뻑이며 귀를 의심할 뿐이었다.

염병. 육성으로는 처음 들어보는 단어였으나 대충 비속어라는 건 알고 있었다.

“방금, 염… 병이라고 한 건가? 조금 심한 말 같은데.”

“아, 죄송해요.”

발레리는 바로 사과했다. 저도 모르게 대포알처럼 튀어나간 말이었으니.

“근데요 전하, 생각해 보세요. 우리 술 먹고 잠깐 충동적으로 그런 거잖아요.”

“…우리가 실수했다고 말하고 싶은 건가?”

그녀는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테렌스는 냉정한 얼굴로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우린 둘 다 제정신이었다. 넌 맥주 한 잔, 나는 한 모금 마셨던 걸로 기억하는데.”

“그럼 분위기에 취했던 걸로 하시죠.”

왜 자꾸 그냥 넘기려는 거지. 테렌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얼떨결에 해버린 키스였지만, 발레리와 관계를 시작할 좋은 이정표라고 여겼다.

하지만 그녀는 그 일을 흐지부지 덮고 싶어 한다.

물론 테렌스는 그렇게 해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아니, 너는 그러기 전부터 날 안아보고 싶다고 했다. 이유가 뭐였지?”

“그건….”

발레리는 말문이 막혔다. 선뜻 답하기 어려웠다.

그냥 한 번 더 안았을 때도 가슴이 반응하는지 확인하고 싶었던 건데. 예고 없던 백허그 때문에 심장에 무리가 갈 뻔했으니까.

발레리는 테렌스를 정면으로 바라봤다.

그의 맑은 하늘빛 눈동자가 애처롭게 요동치고 있었다.

그녀는 시선을 얼른 회피하며 입술을 앙다물었다.

대답할 말을 찾던 그녀의 머릿속엔, 한때 단원들 사이에 오가던 이야기가 스쳤다.

─루카스, 넌 왜 그렇게 하룻밤 상대를 못 찾아서 안달이야?

─그야 외로우니까 그렇지. 여자랑 살을 맞대고 있으면 잠시라도 외로움이 잊히거든.

그래. 외로워서 잠시 미쳤던 거야.

그냥 그렇게 생각하자.

이 황태자도 혼자 일에만 파묻혀 살다 보니 외로웠겠지. 아마 그럴 거야.

“외로워서요.”

“…뭐?”

“외로워서 순간 정신줄을 놓은 거예요. 그러니까 그날 일은 그날 일로 끝내자고요.”

이대로 없었던 일로 하잔 건가.

테렌스는 눈을 질끈 감고 이마를 짚었다. 그가 손바닥을 그대로 쓸어올리자 포마드로 정돈한 백금발이 가닥가닥 흐트러졌다.

핏기가 싹 빠진 그의 얼굴엔 후회가 가득했다.

“…마음부터 얻었어야 했는데. 입부터 맞춘 내가 어리석었다.”

발레리는 바지 무릎을 움켜쥔 채 눈에 칼을 세웠다. 괜히 역정이 났다. 가볍게 불장난을 했을 뿐인데, 여기서 왜 마음 타령이 나오는지 도통 모르겠다. 안 지 얼마나 됐다고.

“마음이고 나발이고, 저에 대해 뭘 안다고 이러세요?”

“혼란을 줘서 미안하다. 이제부터 서로 천천히 알아가자.”

“전 알려드릴 생각 없는데요.”

테렌스는 착잡했다. 발레리가 왜 이렇게까지 벽을 치는지 알 수 없었다. 테렌스는 그녀의 낯빛에서 뭔가를 읽어보려 노력했다. 볼은 살짝 붉어져 있지만 어딘가 괴로운 표정이었다.

“…네가 외롭지 않도록 내가 노력하겠다.”

“제 외로움에 신경 끄시고, 연애는 딴 데 가서 알아보세요. 전 그닥 좋은 사람이 아니라서요. 어거지 써서 작위를 줘야 할 만큼 신분도 낮고요.”

“부담스럽다면 작위는 없던 일로 하겠다. 그리고 좋은 사람이 아니어도 괜찮다. 널 굳이 어떤 틀에 가두고 싶지 않아.”

‘하, 이 인간 왜 이렇게 쓸데없이 고집이 세? 키스했다고 다 사귀어야 하는 거면 우리 단원들은 여자친구로만 한 사단을 만들겠다.’

정말 이유를 알 수 없는 직진이었다. 발레리는 짜증과 왠지 모를 위기감이 동시에 밀려드는 걸 느꼈다.

아무래도 의사를 좀 더 확실하게 표현해야 할 것 같았다. 

“저기, 저는 전하랑 진지한 관계로 발전할 생각이 없어요.”

발레리는 허리를 곧추세운 뒤 또박또박 힘주어 말했다.

“…뭐?”

“정말 눈곱만큼도 없어요. 차라리 하룻밤 자자는 제안이었으면 고민이라도 좀 했을 텐데.”

테렌스는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었다.

거대한 쇠망치로 얻어맞은 것 같았다. 나와 하룻밤을 보낼지언정, 진지하게 만날 순 없다는 얘긴가.

“키스 좀 했다고 책임진다면서 무리하지 마세요. 전 여기, 전하는 거기. 저는 지금 이 관계가 딱 좋으니까.”

“…발레리.”

“그럼 보고 시작할게요.”

발레리는 황녀와의 수업 상황을 건조하게 보고했다.

황녀가 머리쪽 급소 파훼법을 익히고 있다고. 턱과 목울대에 정확히 공격을 꽂아 넣는 연습을 하는 중이라고.

테렌스는 그걸 듣는 건지 마는 건지, 세상을 다 잃은 얼굴로 테이블 표면만 쳐다보고 있었다. 톡 건드리면 산산이 부서질 것처럼 위태로워 보였다.

‘하, 왜 저래 진짜…. 비 오는 날 버려진 강아지처럼….’

그 앞에서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는 건 쉽지 않았다.

***

“거 염병이 뭡니까 염병이! 제국의 황태자 앞에서 못하는 말이 없네요. 어디서 배워먹은 버르장머리인지, 쯧쯧.”

발레리가 사라지자마자 레이븐이 혀를 차며 집무실에 입장했다. 대화 엿들은 게 무슨 자랑이라고. 도청 후기를 빙자한 험담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하, 이래서 격에 맞는 사람을 만나라고 하는 겁니다. 염병이라니, 와… 저 진짜 뭐 잘못 들은 줄 알았다니까요. 선을 넘어도 한참을 넘었어요.”

레이븐은 손에 든 지팡이를 휙휙 내저으며 열을 올렸다.

“분해서 참을 수가 없습니다. 황족 모독죄로 잡아넣을까요?”

테렌스는 소파에 깊숙이 기대앉은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나직이 말했다.

“…염병하지 마라.”

레이븐이 아래턱을 툭 떨궜다.

방금 그 여자가 읊던 단어가 황태자의 입에서 그대로 나오다니. 충격 속에 적막이 흘렀다.

분하지도 않으신가, 레이븐은 정색하며 목을 가다듬었다.

“크흠, 응용력도 뛰어나시지. 거봐요, 이렇게 안 좋은 것만 물들잖아요.”

아직도 테렌스의 시선은 탁 풀린 채 허공에 머물러 있었다.

“그래도 저 아가씨 참 대단해요. 황금 사다리 걷어찬 거잖아요. 작위 준다는데 마다하는 사람 처음 봤습니다. 뭐 부담스럽긴 하겠지만요.”

레이븐은 그를 보면서도 입놀림을 멈추지 않았다. 마치 대단한 막장 연극이라도 관람하고 온 것처럼.

“전하께서 업무 끝나고 밤늦게까지 뭐 하시나 했더니, 저 아가씨 공적서 쓰고 계셨나 보네요. 저도 좀 읽어보겠습니다.”

레이븐은 마호가니 테이블 위에 놓인 양피지를 멋대로 펼쳐 들었다. 다갈색 눈동자가 좌우로 천천히 왕복했다.

‘갸륵하다 갸륵해. 구구절절 정성이 깃들었네.’

발레리의 공적을 속속들이 찾기 위해 그녀의 직속상관이었던 사람까지 따로 불러 인터뷰한 모양이었다.

설득만 잘 곁들인다면 황제가 서명을 해줄 법도 했다. 황녀의 검술 교육은 지금 황제 부부의 최대 관심사니까.

‘이렇게까지 애썼는데 대차게 까여버리다니. 그것도 평민 여자한테. 충격이 크긴 하겠지.’

레이븐은 속으로 혀를 끌끌 차며 테렌스의 옆자리에 털썩 앉았다.

“솔직히 작위까진 줄 건 없지 않습니까? 그냥 가볍게 만나자고 하면 되잖아요. 굳이 왜 그러셔서 험한 소릴 들으셨어요.”

테렌스는 천천히 눈꺼풀을 닫았다.

대답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엿보였다.

“아, 설마. 아니죠?”

무언가를 눈치챈 레이븐이 그의 오른쪽 팔뚝을 꽉 부여잡았다.

“전하, 제발 아니라고 해주세요.”

손아귀에 힘을 주고 흔들기까지 한다.

“…놔라.”

“아니, 정말 제정신이세요? 전하께서도 아시잖아요. 황태자의 결혼은 가정사가 아니라 국사예요. 칼타 1면에 그 아가씨랑 대문짝만하게 실리고 싶으신 거예요?”

칼타는 제국에서 가장 널리 읽히는 신문, 칼레반 타임스의 약칭이었다. 정론지라지만 최근에는 구독자를 늘린답시고 귀족들의 가십거리를 캐는 데 집중하고 있었다.

하이에나 같은 기자들에게 황태자와 평민 여자의 스캔들이라. 1면 톱을 넘어서 호외를 내도 될 만큼의 먹잇감이었다.

‘아직 거기까지는 갈 길이 멀지만, 공표하게 되면 발레리는 만인의 입방아에 오르겠지. 그런 상황을 어떻게 막을 수 있을까….’

아무래도 쉽지 않을 것 같았다.

황족과 평민의 통혼은 전례가 없었으니까.

테렌스는 도리질을 하며 아찔한 상상에서 빠져나왔다. 어차피 지금 상황에선 까마득히 멀고 먼 일이었다.

그는 팔뚝에 감긴 레이븐의 손을 거칠게 떨쳐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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