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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자한테는 관심 없는데요 (49)화 (49/173)

49화

“자고 갈 거죠?”

발레리의 직설적인 질문에, 테렌스는 한 번 심호흡한 뒤 이렇게 대답했다.

“…네가 원한다면.”

“저 이런 건 처음이라서 잘 몰라요.”

“나도 처음이다.”

정적이 흘렀다.

어느새 발레리의 상체는 대부분이 드러나 있었다. 길고 미끈한 목 아래로 깎아놓은 듯한 근육질 어깨가 돋보였다. 잘록한 허리 한가운데 자리잡은 복근은 구획이 선명하게 나뉘어 있었다.

건강한 관능미가 물씬 풍겼다. 그녀를 바라보는 테렌스의 시선이 한층 더 강하게 타올랐다.

“처음이라고요? 방금 이러쿵저러쿵 한 건 뭔데요?”

“…이러쿵저러쿵? 그게 무슨 소리지.”

“입술도 헤집고 허리도 막 이렇게 꼼지락거렸잖아요. 근데 처음이라고요?”

테렌스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리둥절한 그의 표정이 말해주었다.

그저 본능이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라고.

“내가 처음인 게 걸리나?”

“그런 건 아닌데….”

‘아니 대체 왜 처음이지? 여자 좋아한다면서 여태 한 번도 안 해봤다고?’

발레리가 잠시 혼란에 빠진 사이, 테렌스는 벌써 코앞까지 훌쩍 다가와 있었다.

곧바로 또다시 입을 맞출 것처럼.

“네 의사를 말해줘. 나를 원하는지.”

“…잘 모르겠는데요.”

“그래, 알겠다.”

긍정의 답은 아니라는 생각에, 테렌스는 바닥의 검을 집어 들고 떠날 채비를 했다. 확실한 동의 없이 그녀를 안을 생각은 없었다.

“아, 잠깐만요.”

발레리가 얼른 그의 앞을 막아섰다.

“궁금해요.”

“…뭐가.”

“아 그러니까. 이다음이 궁금하다고요.”

“…그게 전부인가?”

“뭐가 더 필요해요?”

연인도 아니고. 서로 책임질 사이도 아닌데.

피차 하룻밤 유희를 바라는 게 아니었나.

테렌스는 발갛게 익은 발레리의 뺨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네 확신이 필요하지.”

“무슨 확신이요?”

“선후 관계가 많이 뒤집힌 것 같다. 잠자리는 나중에 해도 괜찮다.”

“그걸 따지는 사람이 입술 박치기부터 해요?”

발레리는 그의 얼굴을 얄궂게 올려다봤다.

까만 눈동자 위로 눈꺼풀이 스산하게 오르내렸다.

퍽 불만스러운 눈빛이었으나 테렌스는 그냥 웃어버렸다. 귀엽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그래, 인정한다. 내가 성급했어.”

“네.”

“…곁에 있어 줄까?”

“아뇨, 침대도 좁은데 무슨.”

솔직히 발레리는 자존심이 상했다.

나름대로 용기를 내서 욕망을 있는 그대로 내보였는데, 뭔지도 모를 확신을 운운하며 뒤로 빼는 꼴이라니. 그리고 불장난을 시작한 건 본인 아니었나.

그녀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테렌스는 희미하게 웃으며 발레리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마치 오랜 연인이라도 되는 양 자연스럽게.

“잘 자, 발레리. 수요일에 보자.”

“…네.”

그가 떠나고 문이 닫혔다.

약속이라도 한 듯 적막함이 찾아왔다.

발레리는 그의 입술이 닿았던 이마를 손등으로 슥 훔쳐냈다.

“나중 같은 소리 하네. 불장난은 여기서 끝이야. 너랑 내가 무슨 사이라고.”

덥다.

땀을 너무 많이 흘린 건지. 옷이 위아래로 전부 다 척척했다.

그녀는 훌렁훌렁 옷을 갈아입고는 침대 속에 몸을 파묻었다.

후─

발레리는 기름등을 다시 껐다.

잠은 쉬이 오지 않았다.

***

한때 목에 칼을 들이대던 남자가, 이젠 입술을 들이밀기 시작했다.

정말 낯설기 그지없었다. 테렌스라는 남자가 촉발한 이 상황은.

발레리는 막 스무 살이 됐을 무렵을 떠올렸다.

자유분방한 펠런 단원들은 성년이 된 그녀에게 이런 말을 툭툭 내뱉었다.

─어른 됐으니 딱 두 가지만 조심해. 술, 그리고 밤. 남자는 다 똑같다. 딸 같아서 하는 소리야.

─야야, 그럼 무슨 재미로 살아. 사람이 어! 경험을 다양하게 하고 살아야지.

─그래그래. 여러 남자 만나보고 거사도 치러보고 해야 사람 보는 눈이 생긴다고. 자유롭게 살아라, 발레리.

펠런이 지방에서 작전할 때, 처자식이 없는 일부 단원들은 번화가에 나가 하룻밤 상대를 찾곤 했다.

그 덕에 발레리는 자연스럽게 알았다.

꼭 마음을 나눈 사이가 아니더라도, 심지어 일면식도 없었던 사이더라도, 남녀가 유희를 위해 하룻밤을 보낼 수 있다는 사실을.

당시엔 아무 생각 없이 지나갔지만 이제 대충 알 것도 같았다. 술과 밤이 왜 위험한지. 남녀 간에 ‘거사를 치른다’라는 게 어떤 의미인지.

“술이 문젠가? 아니야. 둘 다 얼마 마시지도 않았는데. 그래, 밤이 문제였어. 너무 어두워서 회까닥 돌았던 것 같아.”

고뇌의 연속이었다. 누군가가 이성으로서 접근해온 건 생전 처음이라서.

평생 남자랑 입을 맞춘다거나 밤을 보낸다거나 그럴 일은 없을 줄 알았다.

짝사랑 상대였던 켄드릭에게도 이런 종류의 욕구가 피어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마냥 애틋했고, 힘이 되고 싶었고, 그게 다였다.

22년 인생 최초로 맞이한 대격변이었다. 하필이면 그 상대가 황태자라니.

더 화가 나는 사실은, 그때 그 상황이 도무지 싫지가 않았다는 것이다.

아무래도 단단히 미쳐버린 게 틀림없었다.

불장난을 마치고 돌아온 발레리의 출근길.

석실로 통하는 나선형 계단은 어느새 그녀만의 모노드라마 무대로 둔갑해 있었다.

“아니 근데, 내가 순간 여자로 보였던 건가? 대체 왜? 뭘 보고?”

며칠 새 혼잣말이 배로 늘었다. 자아도 여러 개로 분열하곤 했다. 머리카락은 양손으로 하도 쥐어뜯다 보니 제비집 꼴이 됐다.

“또 하고 싶다. 기분 되게 좋았는데.”

“미친. 뭘 또 해. 그건 사고였어. 충동이 부른 사고.”

“하, 재채기하다 만 기분이야. 끝까지 가면 어떻게 되는 걸까? 궁금해서 돌겠네.”

“이미 돌았어. 돌이킬 수가 없어. 망했어. 뭘 어쩌자고 이러냐.”

프리다와의 검술 수업 중에도 까딱하면 정신줄을 놔버리기 일쑤였다.

거푸집 하나로 두 번 찍어내기라도 한 건지. 쌍둥이 남매는 이목구비가 너무 비슷하게 생겨먹었다. 프리다의 얼굴 위에 계속 테렌스의 잔상이 떠다녔다.

눈을 꽉 감았다가 수십 번씩 부릅떠도 똑같았다. 이전에도 비슷한 증세가 있긴 했으나 지금은 완연한 중증이었다.

도무지 빠져나갈 수가 없었다. 그날 밤 일어난 일에서.

‘본능이란 게 이렇게 무서운 거였나.’

발레리의 등 뒤로 식은땀이 쭉 흘러내렸다.

정말 그녀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심지어 검술 대련 도중에는 프리다의 급습에 왼쪽 귀가 베일 뻔했다.

프리다는 짚단 인형 베기를 졸업하고, 이젠 발레리를 직접 상대하며 급소 파훼법을 익히고 있었다. 하지만 발레리가 공격을 통 피하질 않으니 제대로 검을 휘두를 수가 없었다.

자칫하면 크게 다칠 위험이 있으니까.

프리다는 참다못해 한마디 했다.

“발레리, 나 진검 들고 있어요. 제발 정신 좀 차려줘요. 뭐 잘못 먹었어요?”

“…죄송합니다, 황녀님.”

“안 되겠다. 좀 덥겠지만 갑옷 입고 투구도 써요. 그러다 정말 다칠까 봐 그래요.”

이미 프리다는 발레리의 뺨에 상처를 낸 전력이 있었다. 그 흔적은 희미하게 흉터로 남아 볼 때마다 죄책감을 자극했다.

다른 문제도 있었다. 발레리에게 또 상처를 입혔다간 오빠인 테렌스에게 무슨 말을 들을지 몰랐다.

흉터 사건 이후 테렌스는 석실에 찾아와 이렇게 신신당부했었다.

─네 스승이 또 다치는 일은 없도록 하는 게 좋을 거야.

서릿발 날리도록 차갑게 정색하는 게 당부라기보단 경고에 가까웠다.

발레리는 착잡한 얼굴로 발끝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프리다에게 한 소리 들은 건 처음이었다.

언제나 온화했던 황녀님께서 짜증을 낼 정도라니. 자신의 정신 상태가 얼마나 심각한지 바로 체감할 수 있었다.

“휴… 황녀님, 제가 또 멍 때리면 그냥 배때기에 칼을 꽂아버리세요.”

“턱하고 목이나 조심해요. 이번엔 진짜 치명타 날릴 거니까.”

식사 시간에도 발레리는 심상치 않은 모습이었다.

점심으로 나온 비프 부르기뇽을 한 입 먹고 말더니, 멍한 눈으로 이상한 질문을 했다.

“황녀님, 혹시 그거… 해보셨어요?”

“그거? 그게 뭔데요?”

“음… 키스요.”

“키스? 연인끼리 하는 거라면, 안 해봤어요.”

“아, 네….”

평소엔 흑요석같이 빛나던 발레리의 눈동자가 녹슨 청동 거울처럼 혼탁해져 있었다.

그녀의 넋 나간 얼굴을 쳐다보며 프리다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리고 확신했다.

무슨 일이 있는 게 분명하다고. 그것도 남자랑.

‘발레리는 그 멀리 떠났다던 짝사랑을 다 잊은 건가? 지금 대체 누굴 만나는 거지?’

프리다는 그게 제 혈육인 줄은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발레리는 포크로 음식을 뒤적거리며 속으로 날짜를 세었다. 어느덧 화요일이었다.

내일 또다시 보고하러 황태자궁을 찾아가야 한다.

아직 테렌스에게선 별 소식이 없었다.

그녀는 슬슬 현실의 땅에 발을 붙일 때가 됐다고 생각했다.

수업을 모두 마친 뒤.

나선형 계단을 오르는 그녀의 걸음걸이는 한결 차분해져 있었다.

모노드라마는 여전히 이어지고 있었지만.

“거기서 멈춘 게 천만다행이야. 그 인간도 이성이 있으니까 중간에 관둔 거겠지.”

며칠간 그녀의 속에선 여러 감정이 거세게 휘몰아쳤다. 그래도 중심부만큼은 태풍의 눈처럼 고요했다.

“그래, 아무 의미 없어. 어차피 지나간 일이고, 다 부질없어. 그 인간도 벌써 까먹었을 거야. 뭐 별일이라고.”

발레리는 황궁에 들어온 목적 하나만큼은 뚜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그녀는 혼자 거듭 되뇌었다.

“명심하자, 발레리. 나 여기 좋은 일 하러 들어온 거 아니야. 내년 봄엔 여길 뜰 거라고.”

그리고 작게 탄식했다. 아직은 실낱같아 보이는 가능성을 생각하면서.

“…황녀님 데리고.”

***

집무실 문이 열리고 발레리가 들어왔다.

테렌스는 그녀에게 성큼성큼 다가가 입술부터 찾았다.

지금 이 순간만을 기다렸던 사람처럼.

그의 기습 입맞춤에 발레리의 눈이 저절로 감겼다.

어느새 두 손은 테렌스의 가슴 위에 살포시 올라가 있었다.

그러다 후끈한 열기가 슬슬 비집고 들어오자 화들짝하며 뒷걸음질 쳤다.

그대로 말려들 뻔했다. 다시 만나자마자 또 이렇게 키스라니.

“아, 또 왜 이러세요!”

“싫은가?”

“…하.”

왜일까. 싫다는 말은 도무지 나오지 않는다.

애먼 두 뺨만 홧홧하게 달아오를 뿐이었다.

테렌스는 발레리의 상기된 얼굴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그녀를 위해 테이블 의자를 빼 줬다.

그리고는 맞은편에 앉아 양피지 한 장을 천천히 내밀었다.

“이게 뭔데요?”

“네게 작위를 내릴까 한다.”

“작… 뭐요?”

“말 그대로, 네게 준남작 작위를 주려고.”

이게 무슨 신종 개수작인가. 뜬금없이 신분을 올려주겠다니. 발레리는 납득이 가지 않아서 미간을 구긴 채 물었다.

“아니, 무슨 작위요? 설마… 전하랑 입술 비볐다고 훈장이라도 준다는 거예요?”

“훈장이라니. 그런 의미가 아닌 걸 잘 알 텐데….”

“아뇨, 저는 모르겠는데요? 왜 이러시는지 당최 이해가 안 가요.”

테렌스는 특유의 진중한 말투로 천천히 대답했다.

“그날 밤 일, 내가 책임지고 싶다.”

“아이고, 나 참….”

발레리는 기가 차서 코웃음을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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