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얼마나 달렸을까. 드디어 황궁 정문이 보이기 시작했다.
“후….”
테렌스의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하지만 멈출 수 없었다. 발레리는 아직도 그의 오른팔을 꽉 쥔 채 뛰고 있었다.
전력 질주에 가까운 속도였다. 바람을 맞다 보니 귀에 꽂았던 꽃송이도 땅에 떨어져 버렸다.
“발레리. 아무도 안 쫓아와. 이제 놔도 돼.”
테렌스가 숨을 헐떡이며 간곡히 부탁했다. 발레리는 화들짝 놀라 그의 팔목을 놓고 뜀박질을 그쳤다.
“…아, 죄송해요. 제가 한번 뛰면 끝까지 뛰는 성격이라.”
그때부터 둘은 평소의 속도로 나란히 걸었다. 손이 스칠 만큼 가까운 거리였다.
“고맙다. 지켜줘서.”
숨을 다 고른 테렌스는 발레리에게 감사 인사를 건넸다.
“지키긴 뭘 지켜요. 같이 싸웠으면서.”
“혼자였으면 훨씬 버거웠겠지.”
“혼자였다면 뒷골목에 가지도 않으셨을걸요. 괜히 끌고 가서 죄송해요.”
“아니다. 색다른 경험이었어.”
테렌스는 발레리에게 은은하게 웃어 보였다.
발레리는 그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며 얕게 한숨을 쉬었다.
“잘생겨도 참 피곤하겠어요. 뒷골목 여왕님의 눈에 띌 건 뭐람.”
“네가 꽃목걸이도 해주고, 귀에 꽃도 꽂아줬으니 돋보이긴 했겠지.”
“지금 제 탓하시는 거예요? 꽃목걸이 싫으면 이리 내세요.”
“아니. 이건 내 거다.”
“제가 딴 상품인데요?”
“내게 준 순간 내 것이지. 다음에 다른 꽃으로 갚겠다.”
“…뭐 그러시든가요.”
발레리는 입술을 샐쭉거렸다. 그녀는 곁눈질로 테렌스의 보조개를 확인했다. 그런데 이젠 다른 부분이 눈에 들어온다.
두 보조개 사이에 자리한 도톰한 연홍색 입술.
떠오르고 말았다. 이 남자가 자신을 향해 넘어지던 장면이. 허리춤을 끌어안고 가만히 입술을 응시하던 그 농밀한 시선이.
눈을 맞추며 입으로 장갑을 벗어내던 그 아찔한 표정도.
명치끝에서 간지러운 느낌이 확 올라왔다. 심장박동이 또다시 불쑥 빨라졌다.
‘대체 이게 무슨 반응이지. 다시 안아봐도 똑같이 그러려나?’
‘아 미쳤어. 뭔 뚱딴지같은 생각을 하는 거야.’
머릿속에 두 개의 자아가 서로 부딪치며 날뛰었다. 발레리는 도리질하며 턱을 부르르 떨었다.
“왜 그러지?”
“뭐가요?”
발레리는 시치미를 뗐다. 아무 생각도 없었던 것처럼.
두 사람은 약간의 시차를 두고 정문을 통과했다.
문 안에서 다시 만난 둘은 황태자궁을 자연스럽게 지나쳤다.
채플까지 함께 걷다 보니 어느덧 발레리의 방문 앞이었다.
“바래다주셔서 고맙습니다.”
“시간 내줘서 내가 더 고맙다.”
“저랑 노는 거 재밌죠?”
“그래. 또 놀자.”
창밖의 달빛이 테렌스의 옆얼굴을 은은하게 비추었다.
결이 고운 백금발과 흰 셔츠 위에 밤의 푸른 기운이 감돌았다.
꽃목걸이는 어둠 속에서도 싱그럽고 화사했다.
“그럼 안녕히 가세요.”
“편히 쉬어라.”
발레리는 뒤돌아서 방문을 땄다. 테렌스는 그녀의 뒷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천천히 후문 쪽을 향해 발걸음을 내디뎠다.
그의 발소리가 점점 멀어져 가는데.
이상하다. 그 울림이 발레리의 귓가에 심히 거슬렸다.
확인하고 싶은 게 남아서일까.
“…잠깐만요, 전하.”
텅 빈 채플 복도에 발레리의 목소리가 웅웅 울려 퍼졌다.
테렌스는 바로 멈춰 서서 뒤를 돌았다.
“이리 좀 와 보세요.”
발레리가 손짓했다. 테렌스는 고개를 기울이며 저벅저벅 되돌아왔다. 부른다고 순순히 오는 이 백금발 남자는 발레리의 눈에 이렇게 비쳤다.
‘골든 리트리버 같네.’
“무슨 일이지.”
“한 번만 좀…. 안아봐도 돼요?”
뜬금없는 질문이었다.
테렌스는 귀를 의심하며 미간을 찌푸렸다.
“방금 뭐라고….”
그의 눈이 크게 벌어졌다. 당혹해하는 듯한 반응에 발레리는 괜히 무안해서 말을 주워 담았다.
“아, 싫으시면 말고요. 안녕히 가세요.”
아무리 인체 반응 시험을 해보고 싶기로서니, 황태자를 상대로는 무리수인 제안이었다.
차라리 잘 못 들어서 다행이지. 발레리는 홱 뒤돌아 문고리를 잡고 비틀었다.
문이 덜컥 열리려는 순간.
등 뒤로 서늘한 체향이 갑자기 밀려들었다. 이윽고 테렌스의 왼팔이 뒤에서 나타나 발레리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안 싫은데.”
발레리의 어깨가 테렌스의 가슴팍으로 온전히 뒤덮였다. 꽃목걸이 향기가 달큰하게 올라왔다. 뒤통수로 테렌스의 따스한 숨결이 느껴졌다.
큰일이다. 발레리의 심장은 춤출 때보다 한층 더 거세게 맥동했다. 이번에는 숨이 가빠질 정도였다.
아까처럼 사고도, 실수도 아니었다. 테렌스가 본인의 의지로 발레리를 안은 결과였다.
‘하아…. 어떡하지. 아까보다 더 심하네.’
발레리는 열심히 숨을 골라봤지만 허사였다.
여전히 테렌스는 그녀를 뒤에서 끌어안고 있었다.
발레리는 열심히 상황을 파악하려 노력했다. 그러나 가슴이 제멋대로 방망이질을 치는 탓에 사고회로가 돌아가지 않았다.
그러던 중 갑자기 옆방 기도실에서 웅얼웅얼 소리가 들려왔다. 석실 문지기 여러 명이 나선형 계단을 타고 한꺼번에 올라오는 듯했다.
생각해 보니 문지기들의 야간 교대시간이었다.
발레리는 방문을 휙 열고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얼떨결에 그녀의 등에 붙어있던 남자까지 한 공간에 입성해 버렸다.
“아, 문지기들이 볼까 봐요.”
그녀는 변명투로 얘기하며 테렌스의 왼팔에서 빠져나왔다.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방문을 눌러 닫았다.
두 사람을 담은 공간이 조용히 밀폐되었다.
방안은 복도보다 어두침침했다. 창 하나를 더 투과한 달빛 속에 테렌스는 실루엣만 보였다.
발레리는 여전히 숨쉬기가 벅찼다. 목구멍으로 마른침이 꼴깍 넘어갔다.
어쩌다 이 사람과 방 안까지 들어와 버렸는지 모르겠다.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툭. 검을 바닥에 내려놓는 소리가 들렸다.
순간 어둠 속에서 손이 나타나 그녀의 허리를 확 잡아당겨 안았다.
“흐억!”
발레리는 깜짝 놀라 숨을 멈췄다. 긴장감에 바짝 조여진 그녀의 등 근육이 테렌스의 왼손 안에 선명히 잡혔다.
뜨끈해진 이마가 테렌스의 귀밑에 닿았다. 고개 숙인 그녀의 가쁜 숨소리가 테렌스의 이성을 슬슬 마비시켰다.
테렌스는 암흑 속에서도 알 수 있었다. 발레리의 입술이 어디쯤 자리 잡고 있는지.
“발레리.”
“…네?”
“얼굴 들어봐.”
의지와 상관없이 고개가 절로 들렸다. 점차 어둠에 적응한 그녀의 눈은 테렌스의 이목구비를 어렴풋이 잡아냈다.
눈이 마주친 것 같다.
테렌스가 발레리의 턱 끝을 살포시 쥐었다. 캄캄한 가운데서도 그의 물빛 눈동자는 발레리의 시선을 강하게 빨아들였다.
“지금부터 싫으면 말해.”
그가 조심스레 입술을 포개왔다.
숨을 참는 발레리의 입술에 몰캉한 살덩이가 꾹 눌렸다.
수 초간 맞닿았던 두 입술이 작게 쪽,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짧은 입맞춤.
그리고 이어진 눈 맞춤.
발레리는 몽롱하게 풀린 눈을 애써 부릅떴다. 시리도록 푸른 테렌스의 눈동자 안에, 화르륵 타오르는 무언가가 내비치고 있었다.
그 속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자니 눈꺼풀이 묵직하게 내려앉기 시작했다. 무슨 주술에라도 걸린 것처럼.
이대로 심장이 멈춰 버릴 것 같았다. 시야를 가득 메우고 있는 이 남자 외에 다른 어떤 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눈앞이 서서히 암전됐다.
테렌스는 그녀의 감긴 눈을 확인하고 입술을 다시 살근살근 비벼왔다.
발레리는 그가 전하는 체온을 고스란히 받아들였다.
그의 허리춤에 발레리의 두 손이 올라왔다.
땀으로 축축해진 그녀의 손아귀가 테렌스의 셔츠 옆 자락을 꽉 움켜쥐었다.
이를 인지한 테렌스는 발레리의 뒷덜미를 감싸 쥐고 입술을 더 강하게 짓눌렀다.
살짝 벌어진 그녀의 잇새로, 축축한 무언가가 비집고 들어왔다.
‘이게… 뭐지?’
발레리의 눈이 번쩍 뜨였다.
정수리에 벼락을 맞은 기분이었다.
일순 눈앞이 뿌옇게 흐려졌다. 머릿속이 도가니에 끓는 쇳물처럼 녹아내렸다.
본능에 휘감겨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파들거리던 그녀의 검은 속눈썹이 무겁게 툭, 가라앉았다.
테렌스는 그새 그녀의 입안에 스며들어 여린 점막을 구석구석 헤집고 있었다.
발레리는 그 달콤하고 나른한 감촉을 음미하며 그를 더 깊은 곳까지 끌어들였다. 이렇게 따뜻하고 보드라운 걸 입에 넣어본 적이 있었던가. 생전 처음 맛보는 묘한 감각이었다.
테렌스의 왼손이 발레리의 귀밑머리를 부드럽게 쓸어 넘겼다.
둘은 뜨거운 숨결을 몇 번이고 나누었다.
격정적이면서도 한없이 다정한, 한여름 밤의 키스였다.
그녀를 집요하게 탐미하던 테렌스의 움직임이 조금씩 느긋해졌다.
발레리의 윗입술을 느릿느릿 핥으며 간질였다.
줄곧 이렇게 입을 맞추고 싶었다. 그녀가 아이스크림을 들고 미소할 때부터.
그게 당장 오늘 밤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녀의 입술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달고 부드러웠다. 아이스크림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고요한 방안. 두 입술 사이에선 끈적한 물소리가 끊임없이 울렸다.
기분 좋은 질척임 속에서 발레리의 널뛰던 심장은 점점 가라앉고 있었다.
그녀의 움직임이 더뎌지자, 테렌스는 또다시 깊은 곳까지 파고들어 입안을 어지럽혔다.
아찔하게 밀려오는 감각에 발레리는 눈앞이 핑 돌았다. 온몸의 피가 아래쪽으로 쏠리는 느낌에 어쩔 줄 몰라 끙끙댔다.
숨을 아껴 쉬는 것도 이젠 한계에 다다랐다.
그녀는 테렌스의 넓은 가슴팍을 살포시 밀어냈다.
손바닥이 닿은 부분에서 강한 박동이 느껴졌다.
두 사람은 잠시 입술을 떼고 이마를 맞댄 채 숨을 몰아쉬었다.
한 뼘도 안 되는 거리에서 더운 공기가 만나 뒤섞였다.
“…저랑 이러고 싶으셨어요?”
“안아보자면서.”
“입 맞추자고는 안 했는데요.”
“그만할까?”
“아뇨.”
이제 발레리에게 발동이 걸렸다.
그녀는 테렌스의 양 뺨을 부여잡고 다시 입술을 겹쳤다.
발레리가 기세 좋게 침투하자 테렌스의 어깨가 움찔했다.
그녀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불장난이 촉발한 본능의 소용돌이에 온몸을 내맡긴 상태였다.
테렌스의 입안을 훑는 그녀의 움직임은 직선적이었다. 평소의 말투나 성격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게 은근히 승부욕을 자극했다.
질 수 없었다. 테렌스는 오른팔로 그녀를 품 안에 고정했다. 왼손은 허리의 곡선을 따라 움직이다가, 그녀의 등 한가운데 얕은 골짜기로 향했다.
그녀의 척추 마디마디를, 테렌스는 손끝으로 정교하게 쓸어내렸다.
한때 즐겨 연주하던 첼로 현의 음률을 조절하듯.
발레리의 잇새에서 앓는 듯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신음이 자동으로 터지는 자극이었다. 민감한 자리에 신경이 바늘처럼 곤두섰다. 발레리는 허리를 꺾으며 입술을 더 밀착해왔다.
“으흡….”
두 사람의 상체가 빈틈없이 맞닿았다.
밀착한 두 가슴 사이에서 테렌스의 꽃목걸이가 압화처럼 짓눌렸다.
꽉 맞물린 입술 사이로는 한 쌍의 살덩어리가 질펀하게 뒤섞였다.
테렌스는 몰랐다. 발레리가 이토록 농염하게 반응할 줄은.
발레리의 아슬아슬한 몸짓에 한껏 자극받은 그는 입술을 거둬들였다.
그리고 허공에 뜨거운 날숨을 뱉어냈다.
“하아….”
이대로라면 고삐가 풀릴 것 같아서.
아니, 애초에 고삐를 잡고 있기는 했던가.
칼레바니아 찬가를 외워야 하나, 테렌스가 번뇌에 빠져들 무렵.
발레리가 대뜸 민소매 상의를 한 꺼풀 벗어 던졌다.
그리곤 침대맡으로 걸어가 협탁 위 기름등에 성냥불을 붙였다.
‘이왕 불장난 시작한 거 한번 끝까지 가보자. 그다음이 궁금해서 못 참겠네.’
몸속의 열기가 한계치에 달했다. 이런 종류의 욕구가 치미는 건 생전 처음이었다. 그리고 뭘 해야 풀리는지는 아주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아마 이 사람도 같은 걸 원하겠지.
발레리는 뭔가 결심이 선 듯한 얼굴로 테렌스에게 물었다.
“자고 갈 거죠?”
역시 그녀는 돌려 말하는 법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