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에고, 미안하게 됐수다!”
테렌스를 밀친 거구의 남성은 가볍게 사과하고 다시 춤사위에 몰입했다.
이제 테렌스는 발레리의 몸에 완전히 감겨있었다. 균형을 잡으려면 그럴 수밖에 없었다.
놀라서 숨을 훅 들이마신 발레리는 테렌스에게 밀착된 몸을 살짝 떼었다. 아직 두 팔은 그의 목에 감긴 채였다.
테렌스도 발레리의 어깨에 걸쳐있던 턱을 조심스레 들어 올렸다. 두 사람의 눈이 아주 가까이서 마주쳤다. 코가 맞닿을 정도의 거리였다.
그의 시선이 발레리의 까만 눈동자에 단단히 얽혀들었다. 몇 초간 고정돼 있던 초점이 서서히 풀렸다. 콧등을 타고 인중, 그리고 그 아래까지 흘러내렸다.
이를 인식한 발레리의 체내에선 심상치 않은 반응이 나타났다. 심장 밑바닥에서 뭔가가 투두둑 하고 터져 나오는 소리가 났다.
포도주를 가득 담은 가죽 포대 밑자락이 찢어진 것처럼. 가슴속에 고여 있던 피가 아래쪽으로 콸콸 쏟아졌다.
언젠가 심장이 비슷한 반응을 보인 적이 있긴 했다. 훈련병 시절 팔굽혀펴기 안 쉬고 100회 기록 썼을 때.
‘하, 왜 이러지? 그때만큼 운동 빡세게 한 것도 아닌데.’
문제가 또 있었다. 테렌스가 걸고 있는 꽃목걸이 향기가 코끝을 나른하게 감싸왔다. 달콤한 향기에 눈꺼풀이 자꾸 무거워졌다.
어느덧 테렌스의 모든 신경은 한 지점으로 쏠려 있었다.
발레리는 본능적으로 알았다. 눈앞의 남자가 그녀의 입술을 탐내고 있다는 걸.
순간 심박수가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치솟았다.
발레리는 괴력을 발휘해 두 손으로 테렌스의 어깨를 팍 밀쳐냈다. 계속 그와 붙어있다간 내면의 무언가가 당장 폭발해버릴 것 같았다.
그 힘이 얼마나 강했는지 테렌스는 단번에 뒤로 밀려났다.
“미, 미안하다. 발레리.”
“아녜요, 하하. 저런 거구가 엉덩이로 밀어붙이는데 어떻게 안 넘어지겠어요. 제가 잘 받쳐드린 걸 고맙게 생각하세요. 하하….”
발레리는 테렌스의 눈을 마주치지도 않고 너털웃음을 쳤다. 민망해하는 게 빤히 보였다.
“고맙다.”
“어, 너무 덥지 않나요? 우리 한잔해요. 명색이 맥주 축제인데, 맥주 아직 안 마셨잖아요.”
그녀는 눈알을 이리저리 굴리며 손부채를 부쳤다.
“너는 아까 마시지 않았나?”
“다 토했으니까 무효죠.”
“…속 버릴까 봐 걱정되는데. 무리는 안 했으면 좋겠다.”
따스했다. 말투도. 눈빛도.
한겨울 호수에 엷게 낀 살얼음 같이 생겨서는.
그 온도 차가 주는 매력은 부정하기 힘들었다.
이걸 인정해야 말아야 하나. 발레리는 목을 가다듬으며 이렇게 대답했다.
“…문제없어요.”
***
저녁 어스름이 짙게 깔렸다. 모두가 머리끝까지 취하고 싶은 시간이 됐다.
황성 시내 술집 대부분이 왁자지껄한 취객으로 미어터졌다.
발레리와 테렌스는 장장 술집 네 곳을 돌아다녔으나 빈자리는 찾을 수 없었다.
다섯 번째로 다다른 술집 문 앞에도 이미 얼큰하게 취한 손님들이 장사진을 쳤다.
줄 길이를 보니 족히 한 시간은 기다려야 할 듯했다.
“하, 마실 만큼 마셨으면 험한 꼴 보기 전에 집에 들어가지. 뭘 또 줄을 서고 있대요.”
발레리는 시끄럽게 떠드는 대기자들을 바라보며 볼멘소리를 했다.
“술은 한 번 마시면 계속 들어가니까. 더 마시고 싶을 거다.”
“우리 뒷골목 쪽으로 가요. 양지에서 놀긴 그른 것 같네요.”
뒷골목 또한 와글거리긴 매한가지였다. 그래도 번화가보단 상황이 훨씬 나았다.
이들이 찾아간 건 지하 깊숙이 위치한 펍이었다. 테렌스는 삐걱삐걱대는 나무 계단을 내려가며 거미줄 숫자를 셌다. 무려 다섯 개였다.
술집 내부는 허름하고 어두컴컴했다. 다행히 빈자리는 있었다. 테렌스는 나무통으로 만든 간이 의자에 앉아 어색하게 주위를 둘러봤다.
험상궂은 손님들이 뻑뻑 피워대는 담배 연기구름이 천장에 그득했다.
“아우 시원해.”
발레리는 이런 분위기가 익숙하다는 듯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켜며 목을 축였다.
“…이런 곳도 있구나.”
“이런 데 처음 와 보세요?”
테렌스가 고개를 끄덕이자 발레리는 고개를 저었다.
“하긴, 이런 음지에 와보셨을 리가 없지.”
“너는 자주 와 봤고?”
“지방에는 이런 술집 많아요. 근데 유독 양아치들이 많아 보이긴 하네요.”
“양아치라….”
그는 주변에 앉은 손님 하나하나를 관찰하기 시작했다.
덩치는 제각각이었지만 인상이 하나같이 흉악했다.
얼굴의 절반이 흉터인 남자도 있었고, 온몸이 문신으로 가득한 여자도 있었다.
조용히 속삭이는 사람들은 뭔지 모를 음모를 꾸미는 것 같았고, 떠들썩한 사람들은 금방이라도 멱살잡이를 할 것처럼 서로를 향해 윽박을 질렀다.
뒤쪽까지 샅샅이 둘러보던 테렌스는 한 줄기 시선을 맞닥뜨렸다.
중년 여인이었다. 그녀 역시 외양이 예사롭지 않았다. 왼쪽 눈에 금색 안대를 차고, 오른쪽 관자놀이 아래 머리카락을 시원하게 밀어버린 모습이었다.
나이는 40대 중후반 정도 됐으려나.
여인은 스크래치 난 눈썹을 치켜뜨며 테렌스의 얼굴에 초점을 고정했다.
눈이 제대로 마주쳤다.
테렌스는 흠칫하며 잽싸게 몸을 돌렸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여인의 시선은 이미 테렌스의 백금발에 끈적하게 달라붙어 있었다.
“전하, 안 마시고 뭐 하세요. 사람 구경하러 오셨어요?”
“아, 마셔야지.”
테렌스는 앞에 놓인 맥주를 한 모금 마셨다. 원래 알던 맥주 맛보다 쓴맛이 강했다. 뒷맛도 텁텁하고.
“여기 맥주 되게 맛있죠. 씁쓰름하니 뒷맛이 죽이네요.”
“아니. 내 타입은 아니다.”
테렌스는 뒤통수가 뚫어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불안했다. 다시 뒤돌면 그 여자가 쳐다보고 있을 것만 같아서.
“왜 이렇게 안절부절못하세요?”
“…아니다.”
그때 점원 하나가 저벅저벅 걸어오더니, 테이블에 둥그런 유리잔 하나를 덜컥 내려놨다.
브랜디였다.
난데없이 이렇게 비싼 술이 나올 리가 없었다. 발레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저씨, 저희 이거 안 시켰는데요?”
“스칼릿 님께서 보내신 겁니다.”
“네? 스칼 뭐요?”
“손님 말고, 이 남자분한테요.”
점원이 테렌스를 가리켰다.
올 게 왔구나. 테렌스는 크게 심호흡을 한 뒤 뒤를 돌아봤다.
안대를 낀 여자가 똑같은 브랜디 잔을 척 들어 보였다.
여자는 테렌스를 향해 야살스럽게 눈웃음을 쳤다. 새카맣게 칠한 입술을 쭈욱 내밀고 키스까지 날렸다.
그 노골적인 교태에 테렌스는 기함할 뻔했다. 정체 모를 두려움이 밀려왔다. 그는 고개를 홱 돌리고 가슴을 쓸어내렸다.
점원은 그의 반응을 보고 피식 웃으며 제자리로 돌아갔다.
“하아, 그 스칼릿인가….”
“와, 추파 한번 제대로 던지네요. 전하랑 아는 사람이에요?”
“아니. 이름만 들어봤다.”
“계속 쳐다보네. 전하가 마음에 들었나 봐요.”
발레리는 흥미롭다는 듯 스칼릿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테렌스는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내저었다.
“계속 쳐다보지 마라.”
“범상치 않은 인상이네요. 점원이 님이라고 하는 걸 보니 좀 높은 사람인가 봐요.”
“한때 황성 암흑가를 평정했던 여자다. 전과 14범인데 모두 보석금을 내고 풀려난….”
“오, 여기 뒷골목 여왕님이구나. 능력 있는 사람이네요.”
“…지금 여자와 함께 있는데, 어떻게 대놓고 추파를 보내지.”
테렌스의 말에 발레리는 에이, 하고 손사래를 쳤다.
“저랑 전하랑 애인 사이로는 절대 안 보일걸요. 전 애초에 성별이 잘 분간이 안 가는 외모라. 이거 브랜디 한 모금 마셔 봐도 돼요?”
“아니. 일단 나가자.”
“아 왜요? 모처럼의 호의인데 마셔 줘야죠.”
“세상에 공짜 술은 없다.”
단호한 말투였다. 상관이 나가자는데 어쩌겠나. 발레리는 하는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테렌스는 속히 계산대로 가서 술값을 치렀다. 맥주 두 잔 값에 브랜디 한 잔 값까지 전부.
거스름돈조차 받지 않았다.
테렌스는 계단을 두 칸씩 밟으며 황급히 술집을 빠져나왔다. 발레리 또한 속도를 높여 그를 뒤따랐다.
이들이 뒷골목을 빠져나가려는 순간.
흉악한 인상의 건달 둘이 뒤에서 튀어나와 두 사람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중 덩치가 큰 남자가 테렌스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왔다.
“거기 꽃돌이.”
“…나 말인가.”
“그래, 꽃목걸이 한 너 말이다. 스칼릿 님께 술 얻어먹고 그냥 가기 있나.”
“한 모금도 안 마셨다. 돈도 내가 냈고.”
“오늘 밤만 모시면 된다. 대가는 두둑할 테니 좋은 말 할 때 따라와라.”
말도 안 되는 제안이었다.
테렌스는 분노에 차 입술을 바르르 떨었다.
“거부한다.”
“어디서 감히!”
건달은 위압적인 태도로 테렌스에게 한 발짝 더 다가섰다.
챙!
발레리가 검을 뽑아 들고 남자의 가슴 앞에 들이댔다.
“아저씨들, 적당히 좀 해요. 누가 누굴 모신다는 거예요? 이분 누구 밤 시중들고 그러는 사람 아니거든요?”
테렌스도 치를 떨며 왼손으로 등 뒤의 장검을 뽑았다.
두 건달은 서로 눈길을 주고받더니 동시에 칼을 들고 덤벼들었다.
발레리는 덩치 큰 건달을 맡았다. 빈틈을 단숨에 파고들어 맹공을 가했다.
상대방은 발레리의 검날이 턱밑을 엄습하자 질겁하며 뒷걸음질 쳤다. 발레리는 씩 웃으며 그의 발뒤꿈치에 오른발을 갖다 댔다.
쿠당탕.
덩치 큰 건달은 보기 좋게 걸려 넘어져 엉덩방아를 찧었다. 손에서 검도 놓쳐버렸다.
발레리는 그의 검을 밟고 서서 목에 칼끝을 겨눴다.
테렌스도 전투에 돌입한 상태였다. 상대적으로 왜소한 건달의 공격을 여유롭게 받아내다가, 패턴을 파악한 뒤 기세 좋게 밀어붙이고 있었다.
왜소한 건달은 이미 제압당한 동료를 힐끗 쳐다봤다. 순간 어디선가 주먹 크기의 돌멩이가 날아와 그의 옆통수를 세차게 가격했다.
그 충격에 눈이 까뒤집힌 건달은 비리비리한 몸을 휘청이며 그 자리에 털썩 쓰러졌다.
“오케이. 돌팔매 실력 안 죽었고.”
투수 발레리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테렌스는 검을 휘두르다 말고 우뚝 서서 황당해하고 있었다. 싸우고 있던 상대방이 난데없이 머리에 돌을 맞고 거꾸러졌으니.
우두커니 서 있던 그의 오른쪽 팔목을, 발레리는 덥석 낚아챘다.
그리고 황궁 방향으로 냅다 뛰기 시작했다.
“어, 어딜 가는 거지.”
“여기 계속 있으면 똘마니들 더 올 거예요. 그 전에 빨리 벗어나자고요.”
테렌스는 검을 급히 집어넣고 그녀와 발맞춰 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