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발레리와 테렌스는 식사를 마치고 다시 광장으로 나왔다.
한쪽에 아이스크림을 파는 부스가 보였다.
그 안에는 십 대로 보이는 초보 마법사가 새하얀 크림에 얼음 마법을 걸고 있었다.
발레리가 그쪽으로 저벅저벅 다가갔다.
“안녕하세요, 마법사님. 바닐라 아이스크림 두 개 주세요.”
그녀는 마법사에게 동전 두 닢을 척 내밀었다.
그 모습을 본 테렌스는 당황했다.
“왜 네가 사주는 거지? 네 덕에 식사도 했는데, 후식은 내가 사겠다.”
“…두 개 다 제가 먹으려고 사는 건데요?”
순간 무안해진 테렌스는 쭈뼛거리며 딴청을 피웠다.
“전하께서도 참…. 줄 사람은 생각도 않는데 착각이 좀 심하시네요.”
“…크흠.”
아이스크림이 나왔다.
발레리는 마법사에게서 콘 두 개를 받아들고 고맙단 인사를 건넸다.
“하하, 농담이에요. 자, 드셔 보세요.”
발레리가 아이스크림을 불쑥 내밀자 테렌스는 다시 미소를 되찾았다.
테렌스는 아이스크림을 슬쩍 베어 물었다.
다디단 얼음 결정들이 혀끝에서 부드럽게 녹아 입안을 가득 적셨다.
곁에 선 발레리는 아이스크림을 날름거리며 행복에 겨워하고 있었다.
테렌스는 그녀를 가만히 바라봤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아이스크림을 직접 먹는 것보다, 그녀가 먹는 걸 관전하는 편이 훨씬 취향에 맞는 것 같다고.
‘천성이 자유로운 여자라 그런가. 황궁 안보다는 바깥 풍경이 훨씬 더 잘 어울리는군.’
자세히 보니 발레리의 입가에 허여멀건 한 자국이 묻어있었다.
“잠깐, 이리 와 봐.”
“네.”
발레리는 아무 망설임 없이 그에게 훅 다가갔다.
테렌스는 그녀에게 아이스크림을 넘기고, 뒷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그녀의 입가를 슥 닦아줬다.
“…감사해요.”
발레리는 그에게 콧잔등을 찡긋해 보였다.
그리고 남아 있는 아이스크림콘을 입에 우적우적 욱여넣었다.
그녀가 아이스크림을 다 먹기까진 채 1분도 걸리지 않았다.
이번엔 과자 부스러기가 입가에 잔뜩 붙었다.
테렌스는 흰 가루로 범벅된 그녀의 입술을 가만히 살폈다.
아무것도 바르지 않아도 윤기가 났다. 가운데는 오동통하고, 가장자리는 날렵했다. 완만한 M자를 그리는 입술 산도 붓으로 그은 듯 정교하고 뚜렷했다.
지금 그녀에게 입을 맞춘다면 달콤한 맛이 묻어날까.
테렌스는 말없이 발레리의 입가를 살살 털었다. 그는 최대한 억누르고 있었다. 속에서 피어오르기 시작한 낯선 충동을.
입술 언저리에 와 닿는 섬세한 손길에 발레리는 괜히 귀 뒤가 뜨끈해졌다.
저번엔 머리 물기도 털어 주더니, 이번엔 입가까지 털어 주는 이 사람.
정말 왜 이럴까. 분명 무슨 이유가 있을 텐데.
그녀는 머뭇거리다 이렇게 물었다.
“더러운 걸 보면 절대 못 참는 성격이신가 봐요?”
“…더럽다고 생각한 적 없어.”
“그럼 왜 자꾸 닦으시는데요? 부스러기도 음식이거든요? 일부러 남겨두는 거예요. 이따가 핥아먹으려고.”
손수건을 든 테렌스의 동작이 빳빳이 굳었다.
진지하게 당황한 얼굴이었다.
“미안. 그런 계획이 있는 줄은 몰랐다.”
어린 시절 구걸하면서 어렵게 살았다더니. 입가에 묻은 음식조차 아끼는 습관이 든 건가.
별생각이 다 들었다.
“크흐흑.”
발레리는 그의 얼어붙은 표정을 보고 웃음을 터뜨렸다.
“왜 웃지?”
“아니, 크흐흐, 이런 말을 어떻게 믿으세요?”
“…놀리지 마라.”
이런 장난을 치다니. 테렌스의 이마에 살짝 힘줄이 돋았다.
“근데요 전하, 원래 이렇게 친절한 사람이에요?”
그녀의 질문에 테렌스는 싱긋 웃으며 잔잔한 어조로 답했다.
“…그러고 싶은 사람에게만.”
아, 간지러운 말이다.
쨍한 햇살 때문에 재채기가 날 것만 같다.
딱히 받아칠 말도 생각나지 않았다.
발레리는 그에게 다시 아이스크림을 넘기고 몸을 홱 돌렸다.
홧홧해진 얼굴을 들키고 싶지 않아서.
“그럼 이만 소화시키러 가시죠.”
테렌스는 그녀의 뒤통수를 응시하며 고분고분 따라나섰다.
***
테렌스는 상점가 곳곳을 돌아다니며 대략적인 물가를 살폈다.
다행히 축제를 빌미로 덤터기를 씌우는 상점은 몇 없었다.
발레리는 그를 빨빨거리며 따라다녔다. 그러다 보니 어느덧 늦은 오후가 됐다.
“…이런 조사는 아랫사람들 시키면 되는 거 아니에요?”
“관리들이 돌아다닐 때만 가격표를 바꿔 단다는 제보가 있었다. 다행히 그런 곳은 별로 없는 것 같군.”
둘은 다시 광장으로 돌아왔다.
그새 광장 한가운데는 꽤 큰 규모의 음악단이 자리 잡았다.
현악기 연주자만 스무 명이 넘었다. 맨 가장자리엔 콘트라베이스 연주자가 자리했다.
이들의 공연이 시작되자마자, 광장에 있던 사람들 사이에서 광란의 댄스파티가 벌어졌다.
다들 얼굴이 벌겠다. 벌써 낮술을 마시고 거나하게 취한 듯했다.
테렌스는 이런 광경이 낯설었다. 모두가 정신줄을 놓고 무아지경에 빠져 있었다.
궁정에서 열리는 무도회와는 세상 딴판이었다.
“오, 이제야 시작하는구나. 우리 춤출래요?”
“그게…. 오른손이 불편해서.”
“참 나, 누가 오른손으로 땅 짚고 춤추래요?”
“양손을 잡기가 좀 그렇다.”
“아이고, 그 귀족들이 무도회에서 추는 그런 춤 아니거든요? 봐봐요. 다들 제멋대로 추잖아요.”
그랬다. 사람들이 추는 건 그냥 막춤이었다.
제자리에서 용수철처럼 뛰는 사람도 있고, 파트너와 팔짱을 끼고 뱅글뱅글 도는 이들도 있었다.
격식이랄 건 하나도 없었다. 다들 제멋대로 흥에 차 있었다. 약간의 광기도 느껴졌다.
발레리는 바로 군중 속에 뛰어들어 신나게 몸을 흔들기 시작했다.
테렌스는 멀뚱히 서서 그녀의 춤사위를 구경했다.
솔직히 잘 추는 춤은 아니었다. 그냥 격렬한 몸부림에 가까웠다.
뭘 자꾸 그렇게 털어대는지. 세상의 모든 먼지를 털고 싶은 의지를 표현한 춤인가 싶었다.
하지만 발레리의 구릿빛 피부에선 건강한 아름다움이 느껴졌다.
그녀의 유려한 목선을 따라 땀방울이 흘러내렸다.
“뭘 그렇게 가만히 쳐다봐요. 흥 깨려고 작정하셨어요? 안 추실 거면 구석에 앉아 계시든가요.”
그의 진득한 시선을 의식한 발레리가 핀잔을 줬다.
짝 짝짝.
그때부터 캐스터네츠 소리가 리듬을 주도했다. 사람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발로 박자를 맞추기 시작했다.
발레리는 긴 다리를 부산스럽게 움직였다. 테렌스도 탭댄스는 어느 정도 출 줄 알았다. 그제야 어색하게 발동작에 시동을 걸었다.
“이제야 추시네. 탭댄스 재밌죠?”
“그런 것 같기도 하고.”
둘은 눈을 맞추며 열심히 스텝을 밟았다.
어느덧 테렌스도 땀이 났다.
사람들이 왜 이렇게 춤을 추는지 알 것 같았다. 힘차게 몸을 흔들자니 잡생각이 사라지고 스트레스가 풀렸다.
한껏 신나 있는 발레리와 동작을 맞춰보는 것도 즐거웠다.
곧이어 음악 분위기가 바뀌었다.
가벼운 왈츠 연주가 시작됐다. 펄쩍펄쩍 뛰던 사람들이 물을 끼얹은 듯 차분해졌다. 저마다 둘씩 짝지어서 손을 맞잡는다.
발레리는 잠시 눈치를 보더니 테렌스의 맞은편에 다가와 자리를 잡았다.
“왼손은 멀쩡하시잖아요. 오른쪽 손목까지는 잡아도 되죠?”
테렌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닿았을 때 통증이 있는 부위는 오른쪽 손바닥뿐이니까.
발레리는 테렌스의 왼손과 오른쪽 손목을 덥석 마주 잡았다.
예상치 못한 스킨십에 테렌스의 얼굴이 붉어졌다.
다행이었다. 마침 같은 빛깔의 노을이 지고 있어서.
둘의 춤이 시작됐다.
왈츠.
신분에 얽매이지 않고 누구나 출 수 있는, 그런 대중적인 춤.
드디어 그가 제대로 출 수 있는 곡이 나왔다.
스텝을 충실히 밟던 테렌스는 잠시 발레리의 손을 놓았다.
“왜 그러세요? 추기 싫으세요?”
“아니, 잠시만.”
테렌스는 왼손에 끼운 장갑의 중지 끝을 앞니로 살짝 물었다.
그리고 천천히 벗겨냈다.
오른손을 안 쓰고 장갑을 벗는 그만의 방법이었다.
그는 장갑을 벗는 내내 발레리의 눈을 바라보고 있었다. 황혼을 반사한 푸른 눈동자가 묘하게 야릇한 빛을 띠었다.
그 시선에서 발레리는 정체 모를 아찔함을 느꼈다. 열심히 땀 빼느라 메말랐던 입속에 어느새 침이 가득 고여 넘어갔다. 꿀떡.
‘장갑을 참…. 야시꾸리하게 벗네.’
테렌스는 벗어낸 왼쪽 장갑을 뒷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고 발레리에게 다시 손을 내밀었다.
멀쩡한 한쪽 손으로나마 그녀의 체온을 느끼고 싶었다.
4분의 3박자. 나비가 날갯짓하듯 가벼운 리듬이 계속되고 있었다.
발레리는 왈츠도 제법 괜찮게 췄다. 몸이 날래서 그런지 박자도 정확하게 탔다.
테렌스는 신기했다. 왈츠를 이렇게 무술 동작하듯 절도 있게 추다니.
“넌 춤을 어디서 배웠지?”
“뭐 가끔 지방에 축제 열리거나 할 때 동료들이랑 췄어요.”
“동료라니? 입대 이전에 다른 일을 한 건가.”
“아하하, 동료라기보단요. 친구, 친구들요!”
“남자?”
“네.”
발레리는 애초에 남탕에서 자랐다.
펠런 단원들도 모두 남자. 유일한 친구인 켄드릭도 남자.
테렌스의 머릿속이 뒤숭숭해졌다. 입꼬리가 다시 일자로 평평하게 굳었다. 발레리가 다른 남자와 춤추는 모습을 머리에 떠올린 게 화근이었다.
그의 보조개가 희미해지자, 발레리는 미간을 찡그렸다.
“흠, 또 뭐가 불만이실까요?”
“불만 없는데.”
“그럼 웃으세요. 춤추는데 분위기 깨지 마시고요.”
발레리는 춤을 추면서도 테렌스의 오른손을 건드리지 않도록 최대한 주의를 기울였다. 그러다 보니 동작이 다소 딱딱해졌다.
그녀의 배려를 아는지 모르는지, 테렌스는 웃으라는 발레리의 명령을 충실히 따르고 있었다.
그녀와 눈을 마주칠 때마다 입가에 힘을 빡 주며 보조개를 드러냈다.
보란 듯이. 예뻐해 달라는 듯이.
귀에 커다란 꽃송이까지 달려 있으니 테렌스의 미소가 한층 애교스러워 보였다.
그 모습이 꼭 사랑받고 싶어 하는 어린애 같아서 발레리는 쿡쿡 웃었다.
‘저번에 보조개 예쁘다고 했더니 이젠 막 대놓고 만들어서 보여주네. 어릴 때 성격 어땠는지 알 것 같기도 하고.’
둘은 웃음기를 주고받으며 춤 동작을 이어갔다.
그때였다. 키가 2미터쯤 돼 보이는 거구의 사나이가 뒷걸음질로 테렌스 쪽으로 맹렬하게 돌진해왔다.
발레리는 그의 보조개를 감상하느라 경고 타이밍을 놓쳤다. 이미 충돌이 발생했다.
덕분에 테렌스가 중심을 잃고 발레리 쪽으로 크게 휘청거렸다.
앞으로 넘어지기 일보 직전.
“어어!”
발레리가 자기 쪽으로 쓰러지는 테렌스의 목덜미를 확 끌어당겨 안았다.
테렌스 또한 균형을 잡으려고 발레리의 몸통을 힘껏 부둥켜안았다. 오른손에 자극이 갔는지 찌릿한 통증이 그의 얼굴을 적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