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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자한테는 관심 없는데요 (45)화 (45/173)

45화

발레리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테렌스와 함께 시내로 나란히 걸어 들어갔다.

“황성에는 몇 번 안 와봤는데. 여기 맥주 축제는 규모가 꽤 크죠?”

“전국에서 제일 크지. 수도에는 왜 자주 오지 않았지? 이곳저곳 여행을 많이 다녔다면서.”

“글쎄요. 치안이 너무 좋아서요?”

“치안이 좋은 건…. 여행지로서 장점 아닌가. 오히려 더 자주 와야 할 이유 같은데.”

말실수였다. 치안이 좋아서 수도에 안 왔다니, 너무 도적스러운 발언이었다. 발레리는 식은땀을 흘렸다.

“어, 제가 못된 놈들 혼내주는 게 취미거든요! 하하…. 수도는 치안이 너무 좋아서, 못된 놈들 함부로 팼다간 제가 치안대에 잡혀갈 수도 있는 거니까요.”

결국 발레리는 아무 말이나 늘어놨다.

다행히 테렌스는 농담으로 받아들였는지 픽 웃어넘겼다.

걷다 보니 켄트웰에서 가장 규모가 큰 시장 광장이 보였다.

점심시간이 되기도 전인데 벌써 인파가 들끓었다.

광장 한가운데는 사람이 빽빽이 몰려 있었다. 까치발을 들고 보니 림보 콘테스트가 벌어지고 있었다.

림보는 일정 높이의 기준선 아래로 신체를 통과하는 게임이었다. 뒤로 누운 자세를 취해야 했는데, 엄청난 유연성과 근력, 균형감각을 요구했다.

“와, 림보를 하네. 저 도전해 봐도 돼요?”

“물론이지. 다녀와라.”

발레리가 자신 있게 손을 들고 나섰다. 하지만 림보는 발레리처럼 키가 큰 사람에게 절대적으로 불리한 게임이었다. 테렌스도 큰 기대가 없었다.

“오, 키 큰 아가씨 한 분이 손을 들었네. 아가씨, 어떤 높이에 도전하려고요?”

대회를 진행하던 중년 남성이 발레리에게 물었다.

“80이요.”

“그 키로 80을요? 어어, 힘들 텐데. 일단 접수합니다.”

대회 진행자는 막대 높이를 80센티미터까지 낮췄다. 발레리는 자신감에 차서 씨익 웃었다. 이 정도 높이는 일도 아니었다.

막대 앞에 선 발레리는 천천히 몸을 뒤로 눕혔다.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온몸의 근육을 바짝 세웠다. 하반신이 막대 아래를 가뿐히 통과했다. 이제 상반신 차례다.

여기서 발레리는 극한의 유연성을 발휘했다. 막대에 배와 가슴, 턱이 전혀 닿지 않도록 최대한 몸을 기울였다.

수많은 인파는 엿가락처럼 휘어지는 발레리의 몸에 감탄했다. 모두가 웅성거리며 박수를 보냈다.

도적단원들끼리도 유연성 훈련을 겸해서 림보를 자주 했었다. 키 작은 단원들만큼은 못했지만, 발레리는 몸이 유연하고 코어 근력이 좋은 덕에 상위권에 속했다.

“와, 저 여자 키도 큰데 대단하다.”

“어마, 저 근육 좀 봐. 보통내기가 아니네.”

테렌스는 숨을 죽이며 발레리의 도전을 지켜봤다.

마침내 발레리의 정수리까지 막대 아래로 무사히 빠져나왔다. 군중의 박수 소리가 한층 커졌다.

몸을 일으켜 세운 발레리는 양손을 번쩍 치켜들고 테렌스에게 한쪽 눈을 찡긋해 보였다.

담백한 윙크였다.

테렌스에겐 치명타였다. 그는 가슴에 손을 대고 심호흡했다. 심장을 누가 움켜쥐고 잡아 흔드는 느낌이었다.

“오 아가씨, 키도 큰데 정말 대단하네요! 상품으로는 이걸 드립니다!”

진행자가 집어 든 상품은 꽃목걸이였다.

주황색 장미와 흰 장미 수십 송이를 얽어 만든 화환 목걸이였다. 발레리는 이를 기쁘게 받아들고 테렌스 쪽으로 뛰어왔다.

“어때요, 저 제법이죠? 저기, 전하. 머리 잠깐 숙여보세요.”

“왜?”

이유를 물으면서도 테렌스는 어느새 발레리 앞에 고개를 대고 있었다.

발레리는 웃으며 테렌스의 목에 꽃목걸이를 걸어줬다.

백금발과 흰 셔츠. 그 위에 꽃목걸이가 포인트가 되니 보기 좋았다.

발레리는 흐뭇했다. 주변에 있던 여인들이 테렌스를 흘끗거렸다. 이미 충분히 눈에 띄는 백금발 미남인데, 그 위에 꽃목걸이까지 얹히니 시선을 모을 수밖에 없었다.

“잘 어울려요. 예쁜데요?”

발레리의 해맑은 칭찬에 테렌스가 입가에 깊은 보조개를 만들었다.

그다음 순서로 발레리는 다트 게임에 도전했다.

그녀는 다트 핀을 집어 들고 그 끝에 침을 살짝 분사했다. 그러고는 과녁 한가운데를 매섭게 노려봤다. 영점을 맞추는 듯했다.

딱 5초 후. 다트가 발레리의 손에서 떠났다.

타닥.

핀은 정확히 과녁 한가운데에 꽂혔다. 단검 던지기를 통해 익힌 투척 기술은 여기서도 유효했다.

발레리의 자신감이 한껏 고양됐다.

“후, 난 역시 대단해.”

상품은 보라색 리시안서스 한 송이였다. 발레리는 다트 게임에 한 차례 더 도전해서 꽃 한 송이를 더 받아왔다.

“여긴 상품이 죄다 꽃이네요. 돈이면 더 좋을 텐데.”

“켄트웰은 여름꽃으로도 유명하지. 이런 대회에 돈이 걸리면 사행성이 과해지거나 갈등의 소지가 생기는데, 꽃도 괜찮은 대안인 것 같다. 돈만큼은 아니어도 사람의 기분을 좋아지게 하니까.”

테렌스의 감미로운 목소리를 들으며, 발레리는 그의 귀에 리시안서스를 쓱 꽂아줬다.

그리고 자신의 귀에도 똑같이 한 송이를 꽂았다.

둘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웃음을 터뜨렸다. 서로의 꽃 달린 얼굴을 바라보면서.

***

이번엔 맥주 빨리 마시기 대회였다.

우승자에겐 레스토랑 식사권이 달려 있었다. 꽃보단 음식을 선호하는 발레리는 이번 대회에 좀 더 강한 승부욕을 내보였다.

“전하, 반드시 이기고 돌아올게요.”

“…무리는 하지 말고.”

결연한 표정의 발레리는 장정 네 명과 함께 나란히 무대 위에 올라섰다.

그들의 앞엔 커다란 맥주잔 수십 개가 놓였다.

삐익.

대회 진행자가 호루라기를 불어 시합의 시작을 알렸다.

발레리는 맥주잔을 들자마자 목구멍을 열어놓고 그대로 쏟아부었다.

꿀꺽하는 소리조차 들리지도 않았다. 진짜 냅다 들이붓고 있었으니까.

그렇게 다섯 잔째 퍼붓고 있던 무렵.

호루라기가 다시 울리고 시합이 끝났다.

발레리는 이제야 알았다. 나머지 도전자 네 명은 서너 잔에서 한계를 맞고, 멈춰 서서 그녀만 쳐다보고 있었다.

턱을 바닥까지 떨어뜨린 채로. 무슨 여자가 술을 이렇게까지 마시나, 하는 표정이었다.

진행자도 놀라서 말을 잃고 있다가, 우승자인 발레리의 손을 척 들어줬다. 공짜 식사권도 흔쾌히 넘겨줬다.

발레리는 의기양양한 얼굴로 무대에서 내려왔다. 배가 올챙이처럼 부풀어 있었다.

테렌스는 손등으로 박수를 치며 그녀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대단하군.”

“저, 저기요. 잠깐만요.”

발레리가 갑자기 눈살을 찌푸리며 배를 문지르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뒷골목까지 한달음에 달려갔다. 하수도로 통하는 구멍을 찾기 위해서였다.

목적지를 찾은 발레리는 쭈그려 앉아 속을 게워냈다.

“우욱….”

발레리를 열심히 뛰어 쫓아온 테렌스가 그 등을 토닥여주었다.

그는 애써 내용물을 보지 않으려고 일부러 허공을 쳐다봤다.

“…휴, 널 말렸어야 했는데.”

“웩, 아녜요. 네 잔까지만 마실 걸 그랬어요.”

이날 먹은 게 없어서 그런지 토악질은 금방 끝났다.

발레리는 식은땀을 훔치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테렌스의 입에선 나지막한 한숨이 새어 나왔다.

모처럼 둘만의 시간이 시작되나 했는데, 생각보다 일찍 끝나게 생겼으니까.

“그럼 이제 황궁으로 돌아가야….”

“지금 무슨 소릴 하시는 거예요?”

발레리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테렌스를 쳐다봤다.

“돌아가서 쉬어야 하지 않겠나? 무리한 것 같은데.”

“전 멀쩡한데요? 속 비웠으니까 다시 채우러 가야죠. 식사권도 받았잖아요.”

발레리는 주머니에서 식사권을 꺼내 그의 눈앞에 펄럭펄럭 흔들었다.

테렌스는 눈과 귀를 의심했다.

발레리의 행동은 어떤 면에서 그의 사고 범주를 훌쩍 벗어나 있었다.

***

발레리는 테렌스를 이끌고 식사권에 그려진 약도를 따라왔다.

‘호건스’라는 레스토랑이었는데, 건물 자체는 오래됐지만 깔끔히 정돈된 분위기였다

둘은 창가 쪽에 자리 잡았다.

메뉴판을 쓱 훑은 발레리는 훈제 소시지구이와 감자튀김을 주문했다. 테렌스가 마음대로 시키라고 했기 때문이다.

“어머나, 왕자님처럼 귀티 나는 미남이 찾아오셨네. 마음껏 들어요.”

음식을 날라주던 중년 여인은 테렌스를 보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그러고는 음식 위에 토마토소스를 넘치도록 뿌려줬다. 걸쭉한 소스가 거의 산처럼 쌓였다.

다행히 지금까지 마주친 주민들은 테렌스의 정체를 의심하지 않았다.

세상에 어떤 황태자가 흰 셔츠 바람으로 귀와 목에 꽃을 달고 다니겠는가.

“외식할 때 잘생긴 사람하고 다니면 참 좋더라고요. 서비스가 후해져요.”

“…지금 내게 잘생겼다고 한 건가?”

“네. 그동안 켄드릭이랑 다닐 때 이런 혜택을 자주 봤는데. 전하랑도 자주 나와야겠어요. 누가 알아볼까 봐 걱정했는데 기우였네.”

잘생겼다는 칭찬, 거기까진 좋았다.

하지만 켄드릭이라는 이름이 나오자마자, 테렌스의 입가에 피어있던 보조개가 단번에 사그라졌다.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발레리는 감자튀김에 토마토소스를 푹 담갔다 꺼내 입에 넣고 우물거렸다.

“아, 살 것 같다. 해장에는 토마토소스가 제격이죠. 왜 안 드세요?”

석상처럼 굳어있는 테렌스에게 발레리는 헤실거리며 물었다.

“먹고 있다.”

“잉? 입에 아무것도 안 넣으셨는데.”

“…누가 더 잘생겼지.”

“네?”

“나와 켄드릭 경, 둘 중에 누가 더 낫냐고 물었다.”

발레리는 그제야 질문을 이해했다.

‘뭐야, 비위 맞춰달라는 건가.’

“아아, 그거야 당연히 대 칼레바니아 제국의 빛이신 황태자 전하시죠…. 하하하.”

테렌스는 그제야 포크를 들고 감자튀김을 찍어 입에 넣기 시작했다.

발레리는 주먹으로 입을 가리고 숨죽여 쿡쿡 웃었다.

‘이렇게 유치한 질문도 할 줄 아네. 켄드릭이 더 잘생겼다고 할 걸 그랬나? 반응이 궁금한데.’

소시지를 입안에 한가득 욱여넣던 발레리는 어딘가에 시선을 빼앗겼다.

식당 한구석에 걸린 게시판이었다.

코르크로 된 나무판 위에는 범죄자들의 현상 수배 전단이 덕지덕지 붙어있었다.

그녀의 입꼬리에 걸린 미소가 점점 빛이 바랬다.

맨 위 오른쪽 귀퉁이에 피어스의 얼굴이 보였다. 햇빛에 누렇게 바랜 그림이었지만, 볶아놓은 듯한 그의 곱슬머리와 짙은 턱수염은 멀리서도 알아볼 수 있었다.

나머지 단원들의 모습도 곳곳에 눈에 띄었다.

발레리의 미각은 둔감해졌다.

분명 먹고 싶은 음식을 마음껏 먹고 있는데, 젖은 신문지를 씹는 것처럼 입안이 꿉꿉했다.

“왜 그러지. 어디가 안 좋은가?”

그녀의 표정 변화를 살피던 테렌스가 물었다.

“아니, 아니에요.”

발레리는 컵을 들고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이래야만 목에 묵직하게 걸린 것들이 넘어갈 것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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