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쿵쿵.
새벽 두 시. 때아닌 노크 소리에 발레리의 눈이 번쩍 뜨였다.
쿵쿵.
“아씨…. 뭐야.”
그녀는 졸음기 가득한 눈을 한 손으로 비비며 침대맡의 기름등을 켰다.
지금 시간에 문을 두들길 사람이 누굴까.
아무리 생각해도 없었다.
쿵쿵쿵.
세 번째 노크였다.
무례한데 집요하기까지 하다니.
발레리는 인상을 팍 쓰면서 몸을 일으켜 문가로 다가갔다.
“안 열어줄 거니까 허튼짓 하지 말고 꺼져요. 이 시간에 뭐야 진짜!”
그녀는 문간에 세워둔 검을 집어 들고 소리쳤다. 혹시라도 문이 강제로 열릴 상황에 대비해서였다.
“…나야.”
뭐지. 익숙한 목소리인데.
발레리는 검을 내려놓고 바로 문을 열었다.
그러자마자 묵직한 남자의 몸이 흐느적거리며 그녀를 향해 쏟아졌다.
켄드릭이었다. 발레리는 얼른 그의 어깨를 받쳐 일으켜 세웠다.
“어우 씨, 술 냄새. 이 시간에 어디서 이렇게 처먹고 온 거야?”
“아, 발레리…. 숙소에서 혼자…. 한잔했어.”
“너 숙소에서 여기까지 20분도 넘게 걸리잖아. 이 상태로 걸어왔다고?”
“…응….”
발레리는 쯧쯧거리며 고개를 내저었다.
한 잔이 아니라 한 갤런은 마신 것 같은데. 10년 지기 켄드릭이 이렇게 머리끝까지 취하는 건 드문 일이었다.
“에휴…. 석실 집사 일 힘들지? 오죽하면 너 같은 애가 술로 스트레스를 푸냐.”
“…아니야, 발레리. 집사 일은…. 안 힘들어.”
잎사귀 위를 기어가는 달팽이처럼 느릿느릿한 말씨였다. 균형을 잡기조차 힘든지, 켄드릭은 문간에 한쪽 어깨를 기대고 섰다.
“그럼 왜 마셨는데.”
“…미안해….”
“뜬금없이 뭔 사과?”
발레리는 그의 상태를 유심히 관찰했다.
양 눈에 초점이 아예 없었다. 어깨까지 오는 긴 머리는 짚더미처럼 부스스했다. 셔츠 바람에 단추는 세 개나 풀려 있고. 아무튼 제정신은 아니었다.
“…조금….”
“조금 뭐.”
비틀거리며 여기까지 온 걸 보면, 뭔가 용건이 있긴 할 텐데.
“…늦을 것 같아…. 끅.”
이젠 딸꾹질까지 하기 시작했다.
“어, 너 지금 그 상태면 내일 백 퍼센트 지각이야.”
“…그런 말이 아니잖아.”
켄드릭이 이맛살을 찌푸리며 손을 뻗었다. 투박한 손길에 발레리의 머리칼이 헝클어졌다.
그의 옷소매에선 럼주 냄새가 났다.
제법 독한 걸 마셨네. 발레리는 콧잔등을 구기며 머리에 얹힌 손을 떨쳐냈다.
“죄 없는 내 대갈통 건들지 말고, 할 말 있으면 퍼뜩하고 곱게 돌아가라.”
“…한동안….”
“어.”
“…널….”
“어, 나를.”
“…묻어야 하는데….”
미친놈이 꼭두새벽에 쳐들어와서 뭔 소릴까.
발레리는 눈을 쌜룩이며 그를 올려다봤다.
“…묻어? 나를? 술 먹고 와서 고작 한다는 말이 친구 생매장한다는 소리냐? 헛소리 들어줄 시간 없으니까 가라.”
발레리는 눈알을 사납게 굴리며 문고리를 다시 붙잡았다.
켄드릭은 발레리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다, 그녀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커다란 손안에 그녀의 양쪽 뺨이 밀가루 반죽처럼 짓눌렸다.
“발레리, 그대로 있어 줘….”
“으억 뭐야! 이거 놓고 말해!”
화들짝 놀란 발레리는 얼굴에 감긴 손바닥을 확 떼어냈다.
“…욕심이야?”
“하, 또 뭐라는 거야. 이 새끼 이렇게 염병할 줄 알았으면 문 안 열어주는 거였는데.”
그녀의 욕지거리에 켄드릭은 고개를 푹 숙였다.
“…미안, 갈게….”
“혼자 갈 수는 있겠냐?”
“…응. 네 욕 들으니까 좀 깨는 것 같아.”
그는 뻑뻑한 눈을 다시 한번 부릅떴다.
깊은 녹안에 총기가 약간 돌아왔다. 문간에 기댔던 몸도 똑바로 세웠다.
이제야 직립보행이 가능해졌나 보다.
“그래, 잘 가. 황녀님한테는 너 내일 늦는다고 말씀드릴게.”
“…응….”
켄드릭은 깨질 듯한 머리를 부여잡고 몸을 천천히 돌려 복도로 향했다.
생각보다 걸음걸이는 양호했다.
“…황궁 생활 참 어렵지. 나도 그런데 너라고 안 그러겠냐.”
발레리는 그가 후문으로 나갈 때까지 뒷모습을 지켜보다 문을 닫았다.
***
“발레리.”
다음 날 퇴근길. 나선형 계단을 오르던 발레리는 켄드릭의 호명에 발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봤다.
“어 왜. 속은 좀 괜찮아?”
“아, 많이 괜찮아졌어.”
“용건은?”
켄드릭은 발레리를 앞에 세워놓고 한참을 머뭇거렸다.
꺼내기 어려운 고민이라도 있는 건지, 착잡한 얼굴로 바닥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제처럼 헛소리할 거면 나 그냥 간다.”
“…황녀님이 이상해.”
“뭐가 이상한데. 뒷담은 안 받아.”
발레리는 짝다리를 짚고 팔짱을 꼈다.
‘이상하다’라는 표현이 긍정적인 뉘앙스는 아닌 것 같아서.
“그런 게 아니야, 발레리…. 걱정돼서 그래.”
“뭐가.”
“요즘 자꾸 이상한 말씀을 하셔. 어디론가 훌쩍 떠날 사람처럼.”
“뭔 소리야. 황녀님께서 석실을 두고 어딜 가신다고. 지금 문지기들이 몇 명인데.”
켄드릭은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지금 당장을 말하는 게 아니야. 너한테 검술 배우는 게 내년 3월까지라고 하셨잖아. 그 이후엔 석실 밖으로 나가시는 거고.”
“그렇지. 근데?”
“자꾸 그 전에 하고 싶은 걸 다 해보시겠대. 그동안 살면서 안 해본 게 너무 많다고. 무슨…. 마지막을 앞둔 사람같이.”
발레리는 팔짱을 풀고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도 느끼는 바가 없는 건 아니었다.
가끔 프리다의 눈빛은 초연한 데가 있었다. 세상일에 달관한 사람처럼.
“석실 밖에 나가면 오히려 더 자유롭게 이것저것 할 수 있을 텐데…. 나간 뒤에 무슨 일이 있는 거냐고 물어도, 대답이 없으셔.”
켄드릭은 한숨 섞인 목소리로 고충을 털어놨다.
“저기, 켄드릭. 나도 이해가 안 가는 게 한두 개가 아니야. 나라고 질문 안 해봤겠냐. 황녀님 본인이나 황태자나 하나같이 입도 뻥끗 안 해. 일단 멀쩡한 사람을 석실 안에 숨어 지내게 하는 것 자체가 정상은 아니잖아.”
발레리 또한 켄드릭과 같은 의문을 마음속에 품고 있었다.
의문을 좀 더 일찍 잠재우고, 그러려니 받아들이며 지내고 있을 뿐.
“…발레리 너도 답답한 건 마찬가지였겠다. 그냥 여러모로 혼란스러웠어. 근데 얘기를 나눌 사람이 너밖에 없으니까.”
“흠, 나도 요즘 이상하게 생각한 게 있긴 해.”
“너도? 뭔데?”
“황녀님, 나 퇴근한 이후에도 계속 연습하시지? 하루도 안 빼놓고.”
사실이었다. 켄드릭은 최근 매일같이 연장 근무를 했다.
황녀의 야식 심부름을 하면서 밤늦게까지 검술 연습까지 돕고 있었다. 자세를 바로잡아 주고, 허점이 있으면 짚어주기도 했다.
“어떻게 알았어? 요즘엔 거의 밤 열 시까지 혼자 연습하시는데. 내가 봐드리고 있어.”
“그럴 줄 알았어. 실력 느는 속도가 장난이 아니야. 손목에 무리만 안 갔으면 좋겠는데.”
“…음, 그런데 그게 왜 이상한 거야? 원래 검술 연습은 열심히 하셨잖아. 강도가 많이 세지긴 했지만.”
“아, 예전하고는 조금 달라지셔서. 이전엔 그냥 즐겁게 배우시는 느낌이었는데, 지금은 뭐랄까…. 그 수준을 넘어섰어.”
강해지겠다는 프리다의 의지는 범접할 수 없는 지경이었다.
요즘에는 휘두르는 검에서 살기가 느껴질 정도였다.
한기 서린 검에 싹둑 잘려나가는 짚단 인형의 숫자만 하루에 수십 개였다.
“어떻길래 그래?”
“동작 하나하나가 절실해. 생존이 걸려 있는 것처럼.”
“생존이 걸린 동작이라…. 맞다, 발레리. 너 대체 황녀님한테 무슨 기술을 가르치는 거야?”
켄드릭의 연이은 질문에 발레리는 눈썹을 꿈틀거렸다.
“질문이 끝나지를 않네. 이제 하나당 1갈렌씩 받는다.”
“정통 검술이 아닌 것 같아서 그래. 그냥 거의 뭐랄까…. 살인 기술에 가깝던데. 급소 찌르는 동작만 수십 개고, 음…. 기사도 정신에 어긋나는 느낌도 있고.”
예리한 분석이었다.
발레리가 최근 황녀에게 가르치기 시작한 건 프레이저 가문의 정통 검술이 아니었다.
도적단에서 배운 급소 공략법을, 검술에 응용해서 전수하고 있었다.
프리다가 바라는 건 하나였다.
상대방을 최대한 빨리 끝장내기. 기사도 정신 같은 건 하나도 필요 없다고 했다.
“황녀님이 바라시는 대로 가르쳐 드리는 거야. 기사도 이런 건 전혀 신경 안 쓰셔. 최대한 치명적인 기술을 배우고 싶으시대. 짧은 시간 안에 승부를 낼 수 있게.”
켄드릭은 양손으로 머리를 쭉 쓸어 넘겼다.
“치명적인 기술이라…. 아, 그리고 나한테 이상한 질문하셨어.”
“무슨 질문?”
“누군가를 죽이면…. 어떤 기분일 것 같냐고.”
발레리는 흠칫 놀랐다. 켄드릭도 비슷한 질문을 받았을 줄이야.
“흠….”
“아무리 생각해도 의도를 모르겠네. 지금까지 말씀하신 걸 하나하나 연결해도, 나오는 그림이 다 말도 안 돼. 무슨 암살단에 들어가시겠다는 건지. 아니면 전쟁을 일으켜서 출정이라도 하시겠다는 건지.”
켄드릭은 아까보다 더 착잡한 표정이 됐다. 발레리는 그를 잠시 지켜보다가 입을 열었다.
“켄드릭.”
“응?”
“기다려 보자. 석실에 계신 이유, 검술이 어느 경지에 이르면 알려준다고 하셨어. 금방일 거야. 열심히 하시니까.”
켄드릭은 숙취로 퀭해진 얼굴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인내심이 너무 없었나 보다. 들어줘서 고마워, 발레리. 어젠 미안했고…. 오늘은 푹 쉬어.”
맥빠진 켄드릭을 뒤로하고, 발레리는 방으로 돌아왔다.
그녀는 옷을 갈아입자마자 책상 위에 놓인 달력부터 확인했다.
오늘은 목요일.
내일은 정기 보고. 모레인 토요일은 외출.
이틀 연속으로 테렌스를 보게 됐다.
“이제 나름대로 편해졌으니까…. 뭐 괜찮겠지.”
아직도 그를 볼 때마다 이따금씩 간지럼증이 일긴 했지만, 이젠 견딜 만했다.
어느덧 발레리는 조금씩 그에게 적응해 가고 있었다.
***
드디어 돌아온 토요일.
황태자와 황궁 밖으로 나가기로 약속한 날짜였다.
발레리는 황성 시내 입구의 시계탑 아래서 약속 상대를 기다리고 있었다.
시찰을 명목으로 한 축제 구경이라니. 그녀는 한껏 기대감에 부풀어 있었다.
다만 걱정거리가 있었다.
“과연 황태자가 내 흥을 감당할 수 있을까. 영 못 놀 것처럼 생겼는데 걱정이네.”
발레리가 우려하는 건 하나였다. 놀아도 재미가 없을까 봐.
‘뭐, 웃는 얼굴이 재미있으니까 괜찮겠지.’
“기다리고 있었구나.”
발레리는 테렌스의 목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황태자는 평소와 다른 모습이었다. 흰 셔츠에 진회색 바지 차림. 그리고 등 뒤에 검을 차고 있었다.
제복을 입었을 때와는 분위기가 확연히 달랐다.
특유의 백금발이 가벼운 옷차림과 어우러져 더 화사해 보였다.
각 잡힌 제복에 가려졌던 몸매도 은근히 드러났다. 어깨와 등판이 커 보이는 건 제복 때문이 아니었다. 진짜로 커서 그대로 보이는 거였다.
“아아 네, 정말 보통 사람처럼 입고 나오셨네요.”
“…칭찬인가.”
“아이고 그럼요. 편해 보여서 좋은데요.”
사실 테렌스야말로 발레리의 차림새에 놀란 상태였다.
그녀는 몸에 딱 붙는 카키색 민소매 상의를 입고 있었다. 탄탄한 근육질 팔뚝과 구릿빛 피부가 훤히 드러났다.
“너도 평소와는 다른 복장이군.”
“네, 밖에서도 군복 입고 다니긴 싫어서요. 아시다시피 엄청 더운 소재라.”
“아….”
테렌스는 묵직하게 오르내리는 목울대를 왼손으로 가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