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이날 저녁, 에이바는 드레스룸에서 가장 좋아하는 옷을 골랐다.
역시나 풍만한 상체를 돋보이게 해 주는 샛노란 카나리아 색 드레스였다.
“아껴뒀다가 무도회 때 입으려고 했는데. 그건 나중에 따로 또 맞추지 뭐.”
그녀는 거울로 자신의 옷맵시를 찬찬히 들여다보며 만족스럽게 미소 지었다.
코르셋을 꽉 묶지 않아도, 타고나길 허리가 가늘었다.
덕분에 모두의 시선을 잡아끄는 극적인 곡선이 연출됐다.
그리고 이번에는 미리 언질을 주었다.
오늘 저녁에 황태자궁에 찾아가겠노라고.
그렇게 에이바는 그 어느 때보다 화려한 차림으로 테렌스의 집무실에 입성했다.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어김없이 테렌스는 서류 더미에 파묻혀 있었다.
저번보다 훨씬 피곤한 기색이었다.
“아, 왔군.”
“오늘도 바쁘시네요.”
“지금 막 마무리했다.”
테렌스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에이바에게 의자를 빼 주었다.
에이바는 가슴을 꼿꼿이 펴고 그 자리에 다소곳이 앉았다.
“…시녀 일은 할 만한가.”
“네, 황후 폐하 말동무해드리면서 제가 많이 배워요. 워낙 교양과 학식이 풍부하셔서요.”
“그래, 공녀도 독서를 즐긴다면 좋은 말동무가 될 수 있겠지.”
에이바는 책을 가리지 않고 즐겨 읽었다. 볼드윈 공작은 가장 아끼는 딸을 응석받이로만 키우진 않았다. 꽤 엄격한 가정교사를 채용해 지성을 쌓도록 했다.
“아, 그리고 황후께선 공예품 무역에 관심이 많으시더라고요. 그래서 황실 도서관에서 관련 서적도 여러 권 빌렸어요.”
“공예품이라면 볼드윈 공작령에서 생산되는 걸 일등으로 치지 않나. 공녀의 부친이 거느린 장인 숫자만 수천이라지.”
“맞아요. 사실 아버지 사업에는 별로 관심 없었는데요. 황후 폐하께서 눈여겨본다고 하시니 좀 더 공부하고 싶어졌어요.”
“부가가치가 높은 사업이긴 하지. 요즘은 마력석으로 장신구 만드는 사업이 제일 쏠쏠하다던데.”
에이바는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테렌스는 정보가 빨랐다. 마력석 장신구는 공작이 최근 들어 가장 몰두하고 있는 사업이었으니까.
“뭐, 마력석 장신구야 불티나게 팔리긴 해요. 거기다가 마법사들이 이것저것 주술 걸어서 웃돈 받고 팔더라고요. 시장이 꽤 커진 걸로 알아요.”
“…그러고 보니 이전부터 묻고 싶었던 게 있었는데.”
“네, 말씀하세요.”
테렌스가 한층 진지한 얼굴로 호기심을 보이자 에이바는 기대감에 눈을 반짝였다.
뭘 물으려는 걸까. 드디어 내게 궁금한 게 생긴 걸까.
“마력석을 귀금속처럼 깎아서 가공하면 남는 부산물이 꽤 많이 나오는 걸로 안다. 그것들은 어떻게 처리되는 거지? 잘게 쪼개진 형태라 해도 얼마든지 재사용이 가능한 것으로 아는데.”
그럼 그렇지. 일 얘기가 왜 안 나오나 했네. 에이바는 차게 식은 얼굴로 잠시 뜸을 들이다 이렇게 답했다.
“…글쎄요. 자세한 건 저도 잘 몰라요. 장인들이 알아서 처분하겠죠.”
“흠, 이 사안은 공작에게 직접 물어봐야겠군.”
얘기가 딱딱하게 흘러가기 시작했다.
이 남자와 대화할 땐 늘 이런 식이었다.
가볍게 안부를 주고받은 뒤 어김없이 가문 얘기로 흘러가는.
에이바는 한쪽 입꼬리를 비스듬히 올리며 한숨을 삼켰다.
오늘은 사업 얘기를 하러 온 게 아니었다. 그럴 거였으면 이렇게 힘주어 꾸미지도 않았다.
그녀는 앉아있던 의자를 쭉 당겨 테이블 위로 상체를 밀착했다. 한껏 힘을 준 골짜기에 시선을 모으기 위해.
하지만 테렌스의 서늘한 눈동자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이렇게 하면 남자든 여자든 다들 힐끗 내려다보던데. 뭐야, 얘는 시력이 안 좋은가.’
“…전하, 오늘 식사 메뉴는 뭐죠?”
“구운 가리비.”
“가리비 좋죠. 화이트 와인 곁들여도 될까요?”
“원한다면.”
둘은 갖가지 해산물을 안주 삼아 와인을 마셨다.
별 대화 없이 먹고 마시다 보니, 빈 병이 벌써 둘이었다.
여섯 잔을 내리 들이켠 에이바는 취기가 올랐다. 마주한 테렌스의 얼굴이 아지랑이처럼 흐물거렸다.
그에 비해 테렌스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같은 페이스로 마셨는데도.
“공녀, 주량을 초과한 건가? 상태가 안 좋아 보이는데.”
에이바의 눈이 조금 풀려 있었다. 고개에도 힘이 빠져 한쪽 손으로 턱도 받쳤다.
“아…. 전하. 우리 산책해요.”
“산책?”
“저 취했어요. 술 좀 깨고 가려고요. 바래다주실 거죠?”
“그러지.”
테렌스와 에이바는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섰다.
집무실을 나서자마자 에이바는 테렌스의 오른팔에 손을 끼웠다.
그는 당황하며 천천히 팔을 뺐다.
“이쪽은 좀…. 잡으려면 왼팔을 잡았으면 하는데.”
“아아, 네.”
에이바가 자리를 바꿔 테렌스의 왼쪽 팔에 의지했다.
그가 굳이 왼팔을 잡으라 한 건, 물론 화상을 입은 오른손에 접촉이 생길까 봐서다.
황태자궁 후문을 나온 두 사람은 달빛에 의지해서 걸었다.
랜턴을 갖고 나온다는 걸 깜빡 잊었지만, 달빛이 밝아 조명 없이도 걸을 만했다.
“잘 마시지도 못하는 술을 왜 달라고 한 건지 모르겠군.”
“전하께서 취한 모습을 보고 싶었어요.”
“날 취하게 하려 했다고?”
“네.”
“쓸데없는 일을…. 난 웬만해선 취하지 않는다.”
테렌스는 아직 자신의 주량을 파악하지 못했다.
연회에서 와인은 최대 세 병까지 마셔봤지만, 다음 날 살짝 머리가 아픈 정도였다.
굳이 주량의 한계를 시험하고 싶진 않았다.
계속 마시다 보면 동석한 관리들이 속도를 맞추다가 고주망태가 돼 버렸기 때문이다.
상관의 입장에서 그 꼴을 지켜보는 건 괴로운 일이었다.
“불공평해요. 저만 이렇게 취하도록 내버려 두시고.”
“잔을 채워달라 한 건 공녀 쪽으로 기억하는데.”
테렌스가 희미하게 코웃음을 쳤다. 물론 어이가 없어서 나온 웃음이었다.
그의 웃음기를 포착한 에이바는 지금이 기회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테렌스의 왼팔에 풍만한 상체를 바짝 붙였다.
그리고 그의 반응을 천천히 살폈다.
‘이 정도면 자극이 좀 오려나.’
팔에 와 닿는 물컹한 느낌에, 테렌스는 눈살을 확 찌푸렸다.
“공녀, 걷기가 많이 어려운가?”
“아, 그건 아닌데, 약간 어지러워요.”
“중앙궁까지 마차를 불러주겠다.”
“아, 아니에요. 술 좀 취했다고 무슨 마차까지….”
“그렇다면 이 정도로만 하지.”
테렌스는 에이바의 품에 안겨 있던 왼팔을 싹 거둬들였다.
그리고 왼손으로 에이바의 오른쪽 손목을 힘 있게 잡았다.
의지는 되어 주되, 더 이상의 접촉은 할 수 없게 하려는 의도였다.
하지만 그의 행동은 오히려 에이바의 도전의식에 불씨를 댕겼다. 의미가 어떻든 그가 직접 나서서 한 스킨십이었으니.
가능성이 아예 없지는 않은 건가. 그녀는 최대한 상냥하게 웃으며 테렌스의 옆얼굴을 봤다.
“저도 하나 여쭐게요, 전하.”
“그래.”
“저희 아버지 마음에 안 드시죠? 솔직히 말씀하셔도 돼요.”
오스카 볼드윈 공작.
굳이 따지자면 테렌스에겐 불호에 가까운 인물이었다.
속내를 짐작할 수 없는 얼굴. 홀쭉하게 여윈 뺨에 퀭하게 옴폭 꺼진 눈. 어딘가 괴이쩍은 그의 웃음소리는 귓가에 거슬렸다.
최근엔 그가 크세니아와 밀무역을 하는 정황이 포착됐다는 북부 정탐꾼의 정보 보고가 있었다.
뚜렷한 증거는 없었지만 계속 신경 쓰고 있던 사안이었다.
테렌스가 대답이 없자 에이바는 조용히 미소하며 말했다.
“저도 아버지가 요즘 영 찜찜해서요. 언젠간 제가 도움이 돼 드릴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그게 무슨 말이지.”
“들으신 대로예요. 물론 제가 공작가가 아니라 황가의 일원이 돼야 가능한 일이겠지만요.”
“…….”
“좀 더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려요? 황권 강화에 이 한 몸 바칠 수 있단 말이에요.”
테렌스는 그녀의 얼굴을 무감하게 내려다봤다.
황태자비가 된다면, 제 출신 가문을 배신하면서까지 황실에 충성하겠다는 뜻인가.
그는 잠시 생각하다 조용히 대답했다.
“…정말 많이 취한 것 같군. 그 말은 못 들은 걸로 할 테니 들어가서 편히 쉬길 바란다.”
***
평소보다 차분한 분위기의 석실 안.
일과를 마친 프리다와 켄드릭은 테이블에 마주 앉아 협상을 하고 있었다.
“5년 뒤 근위대장. 어때요?”
“너무 빠릅니다, 황녀님. 지금 근위대장은 15년 차가 넘는데요.”
“그럼 7년?”
프리다는 켄드릭이 기한부 연애를 수락한 대가를 열심히 제시하고 있었다.
“7년이라뇨…. 그것도 너무 빠릅니다.”
“흠, 되게 야심 있는 사람이라고 들었는데. 켄드릭, 생각보다 간이 너무 작은 거 아니에요?”
“하하, 제 평판을 이미 알고 계셨습니까. 승진 자체는 좋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초특급으로 올라가면 무슨 비위가 있는 줄로 의심을 살 겁니다. 그리고 제가 대단한 걸 해 드리는 것도 아니고….”
그의 말이 맞았다.
둘은 연애를 시작했지만 친구 사이에 가까웠다. 서로 일상적인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천천히 친분을 쌓아가고 있을 뿐.
왕거미 사건 이후로 이렇다 할 신체 접촉도 없었다. 어쩌다 가끔 손을 잡는 정도였다.
그것도 늘 프리다가 먼저 시도했다.
“응? 대단한 거, 내가 천천히 요구할 건데요.”
“…예?”
“나, 연애하면서 하고 싶은 건 다 할 거예요. 뭐든 마음의 준비하고 있길 바랄게요.”
프리다의 입꼬리에 걸린 미소는 어딘가 야릇했다.
이분이 정말 왜 이러실까. 뭘 하고 싶으시길래. 켄드릭의 뒷덜미가 불안감 속에 빳빳이 굳었다.
“…네, 알겠습니다.”
“아버지한테 인사 청탁은 안 해봤지만, 내 마지막 부탁이라면 들어줄 거예요. 그러니까 더 과감해져도 괜찮아요.”
지금 뭘 잘못 들은 건가. 프리다의 의미심장한 발언에 켄드릭은 눈을 확 치켜떴다.
“…마지막 부탁이라니요? 황녀님, 그건 또 무슨 말씀입니까.”
프리다는 눈을 내리깐 채 찻잔을 들었다. 씁쓸하고 텁텁한 녹차 향이 코끝에 스몄다.
오늘따라 떫게 우려진 차 한 모금을, 그녀는 조용히 입안에 머금었다.
또 대답이 없으시네. 황녀의 침묵이 이어지자 켄드릭은 고개를 푹 숙였다.
아직 입 밖에 꺼낼 용기는 나지 않았지만, 그는 프리다와의 만남을 통해 얻고자 하는 바가 분명히 있었다.
황녀와의 교제를 기회로 목표에 훌쩍 다가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리고 기한이 정해진 만남이니, 끝난 뒤에는 얼마든지 제자리로 돌아갈 수 있을 거라 여겼다.
어렵사리 교제 제안을 수락한 두 가지 이유였다.
하지만 점점 자신이 없어진다.
그저 함께 식사하며 친근하게 이야기를 들어주기만 하면 될 줄 알았는데.
프리다가 보내는 눈길은 지나치게 다정했고, 때로는 너무 강렬했다. 그리고 그녀는 지금 ‘마지막’이라는 단어를 꺼냈다. 속뜻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모든 게 켄드릭을 점점 초조하게 만들고 있었다.
‘혹시 내게 진심까지 요구하시는 걸까. 그런 거라면 난…. 힘들 것 같은데.’
녹색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