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테렌스는 더 환하게 미소하며 이야기를 계속했다.
“혼나고 한참을 울다 밖을 내다보는데 비가 오기 시작했다. 그냥 나가서 맞아보고 싶었어. 쫄딱 맞고 흠뻑 젖었는데 참 시원했다. 서러움도 씻기는 것 같고. 다음 날 감기에 걸려서 한참 앓았지만…. 그때만큼은 부모님의 관심이 내 쪽으로 왔다.”
발레리는 어린 황태자가 앓아누운 모습을 상상했다.
측은하면서도 한심해서 헛웃음이 났다.
“관심이라기보단 걱정과 근심이었을 텐데요.”
“…맞는 말이야. 몸살이 나서 몇 번 관심을 끌어도 그때뿐이었어. 계속해 봤자 부모님의 골칫거리만 될 게 뻔했지.”
“그걸 아는 사람이 그러셨어요. 철은 언제부터 든 거예요?”
“글쎄, 언제부터였더라….”
말이 트인 테렌스는 그녀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가 더 많아졌다.
“하루는 프리다와 중앙궁에서 숨바꼭질을 하다 숨었는데, 우연히 부모님의 대화를 엿들었다. 그분들이 내게 원하는 바는 확실했어. 제국의 황태자로서, 황실의 장남으로서, 황녀의 오라비로서 제대로 역할을 하길 바라셨지.”
“흠, 바라는 것도 참 많으셨네요.”
“내겐 걸어야 할 정도가 있었던 거다. 그런데도 굳이 엇나가서 부모님을 괴롭혔던 거지. 내가 아무리 발악한들, 부모님께서 날 프리다처럼 대해주지 않으시리라는 걸 깨달았다. 황실에서 걔와 나는 역할 자체가 다르니까.”
“그래서 그때부터는 지금처럼 모범생으로 사신 거예요?”
“단번에 그렇게 된 건 아니고, 점점 자라면서 방향이 잡힌 거다.”
발레리는 턱을 주억거렸다.
“아아, 성격이 이렇게 되신 게 다 이유가 있었네요.”
“이런 성격이라니? 어떤 면을 말하는 거지.”
“아시면서 뭘…. 말 안 할래요.”
“음, 어릴 적 얘기를 이렇게까지 길게 한 건 처음인데. 신기하군. 그때로 돌아간 기분이라.”
아까부터 발레리는 묘한 기분이었다.
과묵의 대명사인 황태자의 입에서 이런 대서사시가 나올 줄이야.
언제나 두세 마디로만 대꾸해서 말을 길게 안 하는 성격이겠거니 싶었다.
그런데 이렇게 자기 얘기도 줄줄이 털어놓을 줄 아는 사람이었다.
“저도 신기해요. 다른 면도 보이는 것 같아서요.”
“어떤 면이.”
“음, 인간적인 면이랄까요. 좀 더 친근하게 느껴져요.”
발레리의 눈매가 반달을 그렸다.
흑진주 같은 까만 눈동자가 벽난로 불빛을 반사해 반뜻 빛났다.
그 모습이 유별나게 아름다워 보이는 순간이었다.
테렌스는 강한 충동을 느꼈다. 곁에 앉은 이 여자를 품에 끌어안고 싶다고.
“가끔은 이런 생각을 하는데….”
“무슨 생각이요?”
“그때 냇가에서 널 발견하지 못했더라면 어땠을까….”
테렌스의 얼굴이 살짝 그늘졌다. 발레리가 없는 황궁을 상상하면 아찔하기만 했다.
“음, 그때 얘기가 또 왜 나오죠.”
지금이야 웃으면서 말할 수 있지만, 발레리에게 테렌스와의 첫 만남은 다소 더러운 기억이었다.
그때만 해도 황태자는 철천지원수였으니까.
시간이 지나 이젠 많은 것들이 녹아내렸지만.
“고맙다. 황실 근위병으로 입대해 줘서. 첫 만남은 불미스러웠어도, 어찌 됐든 이런 이야기도 나눌 수 있으니 말이다.”
“아…. 네.”
발레리는 이제야 의식했다.
테렌스의 얼굴이 꽤 가까이 다가와 있다는 걸. 그의 하늘색 눈동자 속 홍채 무늬가 세세히 들여다보일 정도였다.
그녀의 목뒤에서부터 뜨끈한 기운이 올라와 얼굴까지 번져왔다.
“저, 저도 고마워요. 잘해 주셔서. 많이 웃어주시고.”
“…내가 많이 웃는다고?”
테렌스는 속으로 반색했다.
많이 웃으려 노력한 건 사실이었다. 그게 발레리의 눈에도 보였다니. 나름대로 성과가 있었다.
“요즘 들어 많이 웃으시잖아요. 처음엔 그 인중에 바늘 한번 꽂아보고 싶었어요. 너무 무표정이시라.”
“…무서운 말을 잘도 하는군.”
“하핫, 근데 어느새 보니까, 웃을 줄도 아는 사람이더라고요. 특히 입가에 보조개. 예뻐서 계속 보게 돼요.”
발레리가 양손으로 그의 입가를 가리키며 말했다.
테렌스는 그녀의 눈웃음을 멍하니 응시하며 왼손으로 자신의 입가를 만졌다.
그녀의 말대로 보조개가 옴폭 잡혀 있었다.
“내게 보조개…. 가 있지 참.”
자신에게 보조개가 있다는 걸 테렌스도 알고는 있었다. 딱히 의식한 적은 없지만.
“평소 안 그러던 분이 웃으시니까 저도 기분이 좋았어요. 근데, 음. 가끔은 왜 웃으시는지 잘 몰라서 이상할 때도 있어요.”
가끔 테렌스의 웃는 표정은 인위적으로 느껴지기도 했다. 맥락을 몰라서 그렇지, 보기 싫은 건 아니었다.
어떤 이유로 웃든 그는 아름답긴 했으니까.
“이젠 무표정도 보기 괜찮아요. 솔직히 예전에는 재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재수가…. 없다고?”
재수가 없다니. 이런 표현을 처음 들어본 테렌스의 눈썹이 서서히 치켜 올라갔다.
그의 심상찮은 반응을 본 발레리는 아차 하며 얼른 수습에 나섰다.
“아하하, 지체 높은 분이 너무 빳빳하시니까요. 그러면 아랫사람은 긴장되고 불편하거든요.”
“…흠.”
“그, 근데 또 사고방식이 경직된 분도 아니더라고요. 솔직히 제가 예법도 모르고 제멋대론데, 다 받아주시고 편하게 대하시잖아요. 보고하러 올 때마다 식사도 준비해 주시고. 무슨 얘길 해도 잘 들어주시고.”
발레리는 테렌스의 호의를 마냥 당연히 여기지는 않았다. 쑥스러워서 고마운 티를 잘 내지 못했을 뿐.
“전하는 생각보다 좋은 분이신 것 같아요. 저 같은 일개 병사한테도 인재랍시고 잘해 주시잖아요.”
머쓱하게 뒷머리를 긁는 발레리를 보며, 테렌스는 고개를 내저었다.
“…넌 일개 병사가 아닌데.”
“음, 그건 그렇죠. 황녀님의 검술 스승으로 전격 발탁된 실력파 검사기도 하니까요.”
아니. 일개 병사가 아니라는 건 그런 뜻이 아니었다.
“…발레리.”
“네?”
황태자는 조용히 발레리의 이름을 부르며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발레리는 또다시 간지러움을 느꼈다. 명치 밑바닥을 누가 거위 털로 간질이는 것처럼.
그래서 더더욱 똑바로 눈을 맞췄다.
“…주말에 시간 있나? 함께 어딜 좀 갔으면 하는데.”
“주, 주말에요? 저 일요일에는 채플에서 보초 서는데요. 당직 돌아오면 토요일에도 서고요.”
만나자는 제안이 싫은 건 아니었지만 당황한 발레리는 핑계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원한다면 순번에서 빼주겠다.”
“하하하, 힘들 것 같은데요. 저 안 그래도 평일 근무 순번에서 빠져서 욕 많이 먹어요. 여자라서 군 생활 편히 한다고.”
평일 근무에서 빠지는 건 물론 프리다와의 검술 수련 때문이었다.
채플 담당 근위병들은 이런 속사정을 알 리 없었다.
그들에게 발레리는 그냥 주말에만 보초 서면서 꿀 빠는 여자 병사일 뿐이었다.
“신경 쓰이긴 하겠구나. 그럼 당직 안 서는 토요일은.”
“되긴 하는데…. 근데 저랑 뭐 하시게요? 더 보고할 것도 없는데요.”
“황궁 밖으로 나갈 일이 있다. 보리 수확 시기가 지났으니 맥주 축제가 곧 열릴 텐데…. 시찰 가는 데 호위가 필요해서.”
“아…. 호위 마법사님이 떡하니 있는데, 인력이 더 필요하세요?”
테렌스는 잠시 망설이다 이렇게 답했다.
“걘 그날 휴가다. 너만 있으면 돼.”
이렇게 레이븐은 강제로 휴가 하나를 얻게 됐다.
“…어, 음, 알았어요.”
제안을 승낙하는 발레리의 얼굴에 서서히 보름달 같은 미소가 떠올랐다.
왁자지껄한 맥주 축제를 상상한 덕이다.
그녀는 축제 특유의 시끌벅적한 분위기를 좋아했다. 펠런이 위기에 빠지기 전, 지방 곳곳에서 작업할 때면 단원들과 함께 종종 다녔었다.
행복한 생각을 하니 몸에 온기가 가득해졌다.
온몸이 노곤해진 건 그때부터였다.
거기에 두툼한 담요까지 계속 덮고 있자니 눈꺼풀에 무게가 더해졌다.
발레리는 고개를 오른쪽으로 툭, 떨궜다.
그녀의 머리가 테렌스의 왼쪽 어깨에 살포시 내려앉았다.
갑작스러운 접촉에 놀란 테렌스는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그는 자신에게 기댄 발레리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봤다.
감긴 눈 아래로 검고 기다란 속눈썹이 촘촘히 나 있었다. 뭘 먹는 꿈을 꾸는지, 입술을 우물거린다.
그러고 보니 둘은 저녁 식사를 하지 않았다. 이야기꽃을 피우다 보니 배가 고파오는 것도 몰랐다.
“주중이고 주말이고 언제나 곁에 두고 싶은데…. 그건 욕심이겠지.”
테렌스의 나직한 속삭임을 발레리는 전혀 듣지 못했다.
어젯밤에 잠을 설쳤기에 잠이 꽤 깊이 들어 있었다. 거기다 비까지 쫄딱 맞고 난 뒤였다. 휴식이 절실했다.
그는 발레리의 몸을 소파에 길게 눕혔다. 오른손을 최대한 안 쓰려 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손바닥 전체가 날붙이에 스치는 듯한 고통이 밀려왔다. 그래도 이를 악물고 참았다.
테렌스는 그녀의 머리통을 왼손으로 받치고 있다가, 모서리에 앉아 무릎을 내어 줬다. 담요도 목 위까지 올라오도록 고쳐 덮어줬다.
레이븐은 그때 집무실 문에 귀를 대고 있었다.
늦었지만 식사를 챙겨야 하는데, 방 안이 조용해도 너무 조용했다.
호기심에 슬쩍 문을 연 레이븐은 집무실 안으로 고개를 들이밀었다.
소파 위에 두 사람이 보였다. 테렌스의 무릎 위에 발레리가 자고 있었다.
“쉿.”
레이븐과 눈이 마주친 테렌스가 왼손 검지를 인중에 가져다 댔다.
다시 조용히 문을 닫은 레이븐은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휴…. 저러고 밤새우실 작정인가? 담요 하나 더 갖다 드려야겠네.”
***
“어우 씨, 여기가 어디야.”
어느새 아침이었다. 발레리는 잠자리가 낯설었는지 몸을 배배 꼬며 상체를 일으켰다.
눈을 떠보니 매일 아침에 보던 광경이 아니었다.
일단 햇살이 너무나도 밝았다. 발레리의 방은 창문이 실외가 아니라 복도로 나 있었기에 아침에도 어두운 편이었다.
“깼나?”
“우와악!”
발레리가 소파에서 번쩍 튀어 올랐다. 덮고 있던 담요가 공중으로 휙 날아갔다.
아침부터 똑똑히 들려온 황태자의 목소리는 날벼락처럼 느껴졌다.
“뭐, 뭐예요! 왜 여기 계세요!”
“내 집무실에 내가 있는데, 뭐가 잘못된 건지 모르겠군.”
이제야 상황이 파악됐다.
어제저녁에 이곳 소파에서 잠든 모양이었다.
그리고 황태자가 앉아있는 위치도 이상했다. 자신의 머리가 놓여있던 자리였다.
“저 여기서 잤어요?”
테렌스가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전하 무릎 베고요?”
“…문제 있나?”
발레리는 그 자리에 그대로 굳었다.
테렌스는 밤새 그녀의 무릎베개 역할에 충실했다. 그러다 본인도 소파 팔걸이에 기댄 채 잠들었다.
“지, 지금 몇 시죠?”
테렌스가 눈짓으로 벽시계를 가리켰다. 여덟 시 십 분이 조금 넘었다.
“하하, 벌써 출근할 시간이네. 아, 안녕히 계세요!”
발레리는 황급히 집무실 밖으로 나왔다.
그녀는 잰걸음으로 계단을 내려오며 제비집이 된 머리를 쥐어뜯었다.
“이놈의 정신머리. 미쳤다고 여기서 잠이 들어. 저 사람 무릎은 왜 베냐고!”
그때였다.
로비에서 인적을 살피던 하인 데니스는 허겁지겁 건물을 나서는 발레리를 목격했다.
요즘 들어 황태자궁에 자주 드나드는 병사였다.
이상하게 군복이 아니라 사복 차림이었다.
“그러고 보니 저 병사도 여자였지. 선머슴 같긴 하지만. 아침부터 황태자궁엔 웬일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