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화
발레리는 테렌스가 시킨 대로 집무실 문을 열고 들어가 멀거니 서 있었다.
소파에 앉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옷의 물기 때문에 소파도 젖을 테니까.
잠시 후 문이 열리더니 테렌스가 뭔가를 한 아름 안고 들어왔다.
본인의 것인 듯한 흰색 셔츠와 갈색 바지였다. 뽀송뽀송한 흰 수건도 두 개 챙겼다. 맨 아래에는 꽤 두툼한 담요가 깔려 있었다.
그는 가져온 물건을 모두 커피 테이블에 내려놓고, 발레리의 모습을 찬찬히 살폈다.
그녀의 발아래 대리석 바닥에 물기가 흥건했다. 홀딱 젖은 몸에서 줄줄 흘러내린 것이었다.
“…얼른 갈아입어라. 나가 있을 테니.”
“아, 네.”
그가 급히 나갔다.
환복은 금방 끝났다. 테렌스의 흰 셔츠는 발레리에게 다소 헐렁했고, 팔 길이도 약간 길었다.
갈색 바지는 밑위가 좀 짧았지만 입을 만했다. 다행히 속옷은 거의 젖지 않아서 산뜻하게 갈아입을 수 있었다.
발레리는 양쪽 소매를 코에 대고 킁킁거렸다.
“셔츠에서 좋은 냄새 나네. 머스크인가.”
노크 소리가 다시 들리자 발레리는 자세를 바로 했다.
테렌스는 들어오자마자 발레리의 모습부터 확인했다.
그녀는 셔츠 단추를 두 개 정도 푼 채였다. 근위병 복장 칼라에 가려졌던 곧고 긴 목선이 또다시 드러났다. 쇄골 가운데 부분도 살짝 보였다.
“…잘 어울리네.”
테렌스는 왼손 주먹을 쥐고 제 목을 가렸다.
이렇다 할 노출 부위도 없는데, 목울대가 움직이는 걸 들키고 싶지 않았다.
“셔츠가 좀 크긴 하지만 괜찮네요. 감사해요. 잘 입고 빨아서 돌려드릴게요.”
“안 돌려줘도 괜찮다.”
테렌스와 대화를 나누는 사이, 레이븐이 집무실 문을 뻥 차고 들어왔다. 장작을 한가득 품에 안은 채.
레이븐이 벽난로 옆에 장작을 와르르 내려놨다. 테렌스는 그 안에 땔감을 하나씩 집어넣기 시작했다.
손도 불편한 양반이 왜 직접 저러고 앉아있는지. 그것도 사뭇 진지한 얼굴로.
발레리는 그를 말려야겠다 싶었다.
“어, 벽난로는 진짜 안 때셔도 되는데요.”
“작게 피우고 잠시 후에 끄면 돼. 레이븐, 불 좀.”
레이븐은 한숨을 푹 내쉬며 지팡이를 꺼내 들고 장작에 불꽃 마법을 쐈다.
마력이 좀 강하게 나갔는지 생각보다 큰 불꽃이 피었다. 훅 올라오는 열기에 테렌스는 팔목으로 눈을 가렸다.
비 때문에 바깥 기온이 많이 떨어진 건 사실이었다. 체감상 섭씨 20도 이하였으니.
‘아무리 그래도 벽난로 땔 정도는 아닌데….’
그래도 물세례를 받고 나니 춥긴 했다. 발레리는 아까부터 어깻죽지를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위아래 치아가 서로 부딪히는 소리도 났다.
일을 마친 레이븐은 집무실을 나갔다. 발레리는 다시 테렌스와 단둘이 남겨졌다.
발레리는 이 시간을 굳게 견뎌내리라 다짐했다. 정체 모를 간지러움을 참는 건 고역이겠지만. 사회생활을 시작했으니 공과 사는 구분해야 하니까.
“여기 앉아.”
테렌스는 검은 가죽 소파에 앉아 옆자리를 가리켰다.
발레리는 그가 가리킨 자리보다 약간 멀찍이 자리 잡았다. 젖은 머리에서 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테렌스는 왼손으로 테이블 위에서 수건 하나를 집어 들었다. 그는 목을 한번 다듬더니 한 번 더 말했다.
“조금만 더, 가까이 와 주면 좋겠는데.”
“아, 네.”
소파에 앉은 발레리가 엉덩이걸음으로 그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머리를 잠깐 이리 대보겠나?”
“네? 머리를 대라고요?”
테렌스는 대답 없이 수건으로 그녀의 젖은 머리를 덮었다. 그 위에 왼손을 얹고 물기를 찬찬히 털었다.
발레리의 양쪽 귓불이 타들어 가기 시작했다.
그녀는 끊임없이 되뇌어야 했다. 이건 때아닌 벽난로 열기 때문이라고.
달아오른 귓불은 둘째치고, 한껏 긴장이 들어간 승모근에 담이 결릴 것 같았다.
“…이런 건 제가 해도 되는데요. 손도 불편하시면서….”
발레리는 흔들리는 시선을 바닥에 내리깐 채 말했다.
하지만 테렌스는 물기가 어느 정도 제거될 때까지 왼손을 거두지 않았다.
그는 수건을 치운 뒤 발레리의 어깨에 담요를 덮어주었다.
그제야 오한이 조금씩 잦아들었다.
“따뜻하네요. 감사해요.”
“별걸.”
둘은 집무실 책상 뒤편의 통유리창으로 시선을 옮겼다. 굵은 빗방울이 창문 표면에 부딪혀 산산이 부서지고 있었다.
그 소리를 듣고 있자니 발레리는 아주 오래전 일이 다시 떠올랐다.
열 살 아이였을 때.
두목 피어스가 길거리에서 거둬줬던 그날도 이렇게 세찬 비가 내렸었다.
회상에 잠긴 발레리의 옆모습을 바라보며 테렌스는 입을 열었다.
“왜 그렇게 무리했지? 소나기가 오면 조금 늦게 와도 괜찮은데….”
“이미 출발한 뒤에 내리는 걸 어떡해요. 그리고 전 괜찮아요. 비 맞는 거 좋아해서.”
“비 맞는 걸 좋아한다고…? 부친이 농사를 지어서 그런 건가.”
테렌스가 가짜 신분증명서의 주인공인 ‘발레리 로빈슨’의 출신을 언급하며 말했다.
발레리 로빈슨은 프레이저 후작령의 한 농가에서 태어난 인물이었다.
그래, 나 지금 가짜 신분이지. 발레리는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뇨. 어릴 때 두─ 아니 아버지가 절 거둬주신 날에 비가 이렇게 왔어요.”
“네 양아버지 말인가?”
“네. 저 열 살 정도 때까진 남부 수도원 근처에서 구걸하면서 살았거든요.”
“…구걸?”
테렌스의 얼굴이 충격 속에 얼어붙었다.
그녀가 고아 출신인 건 알았지만, 그 어린 나이에 길거리에서 구걸까지 했을 줄은 몰랐다.
발레리는 이런 반응을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 씩 웃었다.
“하하, 비가 억수로 퍼붓던 날이었는데요. 구걸하다가 어떤 아저씨 발목을 잡고 쓰러졌어요.”
“…뭐?”
“너무 춥고 배고파서 그랬던 것 같은데…. 눈 떠보니까 따뜻한 오두막 안이더라고요. 그 아저씨가 아지─ 아니 집으로 데려간 거였어요.”
“…….”
테렌스의 연푸른 눈동자가 큰 진폭으로 흔들렸다. 그 한가운데 동공도 점점 크게 벌어졌다.
언제나 생기 있고 명랑한 이 여자가, 그렇게까지 불우한 유년 시절을 겪었으리라곤 상상도 못했으니까.
“그 아저씨가 지극정성으로 보살펴줬어요. 누가 이렇게 비 오는데 구걸을 시켰냐고. 밥 굶는 일은 없을 테니 같이 지내자고 하는데…. 사실 저, 남자 어른 아무나 쫓아가면 위험한 거 알고 있었거든요? 근데 망설이지도 않고 바로 눌러살았어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나?”
“아저씨가 해준 밥이 진짜 맛있었거든요. 다시 길거리에서 배곯기는 죽어도 싫었어요. 다행히 정말 착한 분이었어요. 운이 좋았죠.”
이야기를 끝까지 들은 테렌스는 눈을 꾹 감았다가 다시 떴다.
발레리가 묘사하는 장면이 눈앞에 그려지는 듯해서.
그녀는 그제야 곁에 앉은 테렌스와 눈을 제대로 마주했다.
그때부터였다. 이 사람을 생각할 때마다 나타났던 정체 모를 간지러움이, 서서히 가라앉기 시작했다.
이 간지러움은 이 사람을 피한다고 사라지는 게 아니었던 건가.
이렇게 얼굴을 제대로 바라보고, 눈을 맞추니 그나마 나아지는 것 같았다.
눈 맞춤이 생각보다 길어졌다. 발레리는 그의 눈빛에서 측은지심을 느끼고 괜히 멋쩍어졌다.
“아하하, 동정하진 마세요! 이 정도면 나름 훌륭하게 잘 자랐다고 생각하니까.”
“…그래, 널 이렇게 키워주시다니 정말 고마우신 분이네.”
테렌스의 입가에 반가운 우물이 패였다.
발레리는 그 아름다운 얼굴에 미소로 화답했다.
테렌스는 내심 감격했다. 드디어 그녀가 눈을 제대로 맞춰주기 시작했다. 웃기까지 한다. 그는 이내 황홀해진 기분으로 말을 이었다.
“…나도 좋아한다. 비 오는 날.”
“음, 전하께서요? 의외로 감성적인 구석이 있으시네요.”
“감성적인 건 아니고. 나도 어릴 땐 일부러 비를 맞곤 했다.”
“일부러요? 왜요?”
“…그렇게 해서 감기라도 걸려야 부모님께서 관심을 가져주셨으니.”
이게 무슨 소리지. 발레리는 미간을 확 찌푸렸다.
“엥, 관심을 받으려고 감기에 걸렸다고요? 저 밖에는 감기로 죽는 사람도 많은데. 관심받자고 왜 목숨을 걸어요?”
근엄의 표본인 이 황태자가 한때는 관심을 갈구하는 어린애였다니. 이런 반전이 있을까.
“어릴 때니까 생각이 짧았지. 나도 열 살쯤이었던 것 같다. 시선을 끌기 위해 뭐든 하고 싶었어.”
“…왜요?”
“알다시피 부모님의 관심은 온통 프리다에게 있었으니까. 제국에 150년 만에 태어난 황녀인데, 약하게 태어나서 병치레도 잦았다. 신경이 그쪽으로 쏠릴 수밖에 없었지.”
“흠,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닌데…. 어릴 때 얘기 좀 더 해주세요. 황녀님이랑은 둘이 어떻게 지내셨어요?”
발레리는 귀를 쫑긋 세웠다. 그녀를 보는 테렌스의 미소가 한층 더 달콤해졌다.
“어릴 땐 프리다와 많이 다퉜는데….”
“황녀님이랑…. 싸울 일이 있어요?”
테렌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많았지. 장난감을 가지고도 꽤 싸웠어.”
“음? 진짜요?”
“…숙부이신 바이네르 대공이 이스티아에서 사다 준 코끼리 모양 봉제인형이 하나 있었어. 서로 갖겠다고 잡아당기다 찢어졌지. 프리다가 뒤로 넘어져서 울음을 터뜨렸다.”
“상상이 안 돼요.”
“뭐가.”
“황궁에서 부족한 거 하나 없이 자랐을 거 아니에요. 장난감이 천지삐까리였을 텐데, 왜 코끼리 인형 하나 가지고 싸워요?”
머릿속에 그림이 안 그려진다.
코끼리 인형 하나를 가지고 양쪽으로 잡아당기며 싸우는 백금발 황족 어린이들이라니.
“…그냥 그 인형이 너무 가지고 싶었어. 뭐 지금 생각해 보니 별다른 이유는 없었고. 프리다가 가지려 하는 건 나도 다 갖고 싶었던 것 같다.”
“그러셨구나. 황녀님이 뒤로 넘어져서, 그다음엔 어떻게 됐는데요.”
“뒤통수에 큰 혹이 났어. 덕분에 폐하께 뺨을 호되게 맞았다. 오빠가 돼서 왜 하나뿐인 여동생에게 양보하지 못하냐고 하셨지.”
발레리는 일전에 알현했던 황제의 근엄한 얼굴을 떠올렸다.
그가 테렌스에게 손찌검하는 상상을 하니 절로 콧등이 찌푸려졌다.
“흠, 그런 거로 어린애를 왜 때려요? 너무하다. 그리고 여동생이라고 해봤자 고작 몇 분 차이로 태어난 동갑내기인데. 매번 양보할 필요는 없잖아요.”
“나도 같은 생각이었어. 어린 마음에 분해서 프리다를 몰래 괴롭히기도 했다. 안 보이는 데서 머리카락을 잡아당기거나, 걔가 아끼는 인형을 창밖으로 던져 버렸지.”
“크크, 짓궂다. 근데 그런 거 어른들이 금방 다 알 텐데요.”
“맞아. 프리다가 모두 일러바친 덕에 매번 발각됐다. 그때마다 된통 혼이 났는데…. 내 잘못인 걸 알면서도 억울했어. 내 편은 아무도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정말 반전이네요. 천하의 황태자 전하께서 어릴 땐 관심 종자에다 심술꾸러기였다니.”
풉.
테렌스는 발레리의 거침없는 언사에 웃음보가 터졌다.
부정할 것 없이 딱 맞는 표현이었다. 부모님의 관심에 너무 목말랐고, 프리다가 사랑받는 모습을 볼 때마다 심술보가 가득 차곤 했으니까. 어린 마음에 여신께 기도를 올리기도 했었다. 차라리 아픈 게 본인이고, 건강한 쪽이 프리다였으면 좋겠다고.
“하하하….”
테렌스가 소리 내어 웃기 시작했다. 그의 너털웃음에 발레리는 벙찐 채 놀란 가슴을 꾹꾹 눌렀다.
황태자가 이렇게 큰 소리로 웃을 줄도 아는 사람이었나.
보기 좋게 휘어진 눈꼬리와 훤히 드러난 고른 치아가 낯설게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