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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자한테는 관심 없는데요 (40)화 (40/173)

40화

발레리는 봉투에서 서신을 꺼내 곧바로 펼쳐 들었다.

집중력을 높이려 미간도 한껏 끌어모았다.

「네가 황궁에 무사히 들어간 것까지는 확인했다.

한데, 황녀를 찾아낸 것인가? 나도 아직 소재를 파악하지 못했는데 대단하군.

황녀를 직접 만나 인연을 맺었나 본데. 그녀의 안위까지 걱정하는 걸 보니 측은지심이라도 갖게 된 모양이구나.

네 구구절절한 요구 사항은 잘 전해 들었다.

황녀의 안전 자체를 보장해달라니 꽤 당돌하구나. 알다시피 나는 황녀에게 손끝 하나 댈 수 없는 몸이다. 시에나 님을 모시고 피의 맹세까지 괜히 했을까 보냐.

네게 미지의 장소인 이곳의 위험성을 경계하는 건 이해한다.

애석하게도 나를 포함한 이곳의 존재들은 황녀의 몸에 생채기 하나 낼 수 없다. 오히려 황궁보다도 안전하다고 하면 네가 믿을까.

너는 황녀를 황궁으로 되돌려보내 달라 하였지.

글쎄. 황궁으로 돌아갈지 말지는 황녀의 선택이겠으나, 황녀는 아마 그리하지 하지 않을 것이다. 그게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본인이 잘 알고 있을 테니.

황녀를 데려오라는 이유를 끈질기게 물으니 대답은 이렇게만 해두겠다.

이미 약속을 두 번이나 저버린 건 황녀 쪽이라고.

앞으로 질문은 받지 않겠다.

너희 시간으로 제국력 676년 3월 31일.

이 기한에 맞추어 황녀를 데려올 수 있도록, 계속 애써 주길 바란다.」

서신 내용은 여기서 끝났다.

어두운 글눈으로 더듬더듬 소리 내서 읽다 보니 십 분이 넘게 걸렸다.

“무슨 말투가 이렇게 거만해? 본인 이름도 안 밝히고. 황녀님이 약속을 저버렸다는 건 또 무슨 뜻이지. 원래부터 아는 사이인가? 황녀님이 황궁으로 안 돌아오실 거란 얘긴 대체 무슨 소린지….”

궁금증이 해소되기는커녕 물음표가 여러 겹으로 떠오르는 내용이었다.

게다가 서신에는 의뢰인의 신상정보가 어디에도 없었다. 글씨가 쓰이지 않은 뒷면은 모두 공백이었다.

“거참 미스터리한 인간이네.”

그녀는 다시 편지 내용을 훑었다. 첫인사와 끝인사 없이 본문만 있는 데다, 글씨체는 왁스에 찍힌 인장만큼이나 특이했다. 상당히 이국적인 느낌의 필기체였다.

“무슨 외국 사람이 쓴 건가…. 글은 많이 안 읽어 봤지만 이런 필체는 처음 보네.”

발레리는 편지를 햇빛에 비춰 보기도 하고, 기름등 불 위에 살짝 그을려 보기도 했다. 혹시 무슨 암호 같은 게 나올까 싶어서.

아무것도 나오지 않자 급기야 나이프로 편지봉투를 해체했다.

하지만 정말 아무런 단서가 없었다.

의뢰인을 식별할 수 있는 장치라곤 인장 하나뿐. 까마귀 두 마리. 상하로 긴 타원. 무엇의 상징일까. 이런 인장을 쓰는 귀족 가문이 칼레바니아에 있었던가.

발레리는 천천히 기억을 되짚었다.

여태까지 펠런이 털었던 귀족들 가운데 이런 인장을 쓰는 가문은 없었다.

그렇다면 부정한 방식으로 재물을 쌓는 귀족은 아닐 터였다.

“흠, 이 인장이 어디 건지는 나중에 알아봐야겠다.”

의뢰인은 글씨체뿐 아니라 표현도 특이했다.

‘애석하게도 이곳의 존재들은 황녀의 몸에 생채기 하나 낼 수 없다’는 게 무슨 뜻인지.

특히 ‘애석하게도’라는 말이 찝찝했다. 해치고 싶어도 그럴 수 없어서 아쉽다는 말 같아서.

“거기가 안전한 곳이라면 다행이긴 하지만…. 이 사람 자체가 이상해 보여서 또 걱정이네. 약간 망상병 같은 거 걸린 건가.”

가슴이 답답했다. 아직 풀리지 않은 의문이 산더미인데, 앞으로 질문을 받지 않겠다고 하니까.

그래도 발레리의 마음 한구석을 누르고 있던 무거운 돌덩이가 조금씩 바스러졌다.

완전히 믿을 순 없지만, 적어도 황녀를 해칠 의도까진 없다는 걸 재확인한 셈이니까.

***

“발레리. 나 오빠한테 호되게 혼난 거 알아요?”

“네? 혼이 나셨다고요? 왜요?”

“왜긴요. 발레리 얼굴에 생채기 냈으니까요.”

황녀와 함께하는 아침 식사 시간.

프리다는 병아리콩 수프를 떠먹으며 주말에 있었던 일을 털어놓고 있었다.

지난 토요일에 테렌스가 석실에 찾아와서 여동생을 크게 나무란 듯했다.

발레리의 오른뺨에 생긴 상처 때문에.

“엥, 그걸 가지고 왜 혼을 내요?”

“화낼 만하죠. 내 처참한 검술 실력을 구제해 준 스승님한테 부상을 입혔는데요.”

“아니, 제가 더 화가 나는데요? 분명 제가 정신줄 놔서 생긴 일이라고 했는데. 왜 황녀님 탓을 하는 거지. 이해할 수가 없네.”

발레리는 주먹을 꽉 쥐고 테이블을 툭 쳤다. 근처에 놓인 식기들이 달그락거리며 진동했다.

왜 그렇게 속 좁게 구는 건지 모르겠다. 애꿎은 황녀님이 뭔 죄가 있다고.

“화내지 말아요. 내 탓이 맞아요….”

“황녀님,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세요. 제가 피할 수 있었는데 못 피한 거예요.”

“근데, 발레리. 나 이번 사건 계기로 깨달은 게 하나 있어요.”

“뭔데요, 황녀님?”

“오빠가 발레리를 아끼는 것 같아요. 많이.”

프리다의 입에서 ‘오빠’ 소리가 또 나왔다. 정말이지 듣기 간지러운 소리였다.

발레리는 어깨를 움츠리며 양쪽 귓불을 만지작댔다. 간지러움이 발바닥에서부터 쭉 타고 올라오는 기분이었다.

‘하, 왜 또 이래. 오늘도 수업에 집중하긴 글러 먹었네.’

“그, 그런가요. 전하께서 많이 신경 써주시긴 하죠.”

“비결이 뭐야, 발레리? 나도 전하께 아낌 받고 싶은데.”

식사 자리엔 켄드릭도 있었다. 요즘 황녀는 켄드릭을 석실 안으로 자주 불렀다. 아침 식사할 때 옆에 앉혀서 음식을 조금씩 나눠주기도 했다.

그 결과 이렇게 삼자대면이 잦아졌다.

“비결이랄 것도 없어. 주어진 일 열심히 하고 보고 잘하면 돼.”

“그건 나도 만만찮게 잘하거든. 발레리 넌 성격상 아부도 못 하고, 애교는 더더욱 못 부리는데, 어떻게 그렇게 신임을 받냐.”

“…뭐, 내 교육 방식이 뛰어나서 그런 거 아니겠어?”

발레리는 짐짓 거만한 자세로 어깨를 으쓱했다.

─내가 직접 발탁해서 가까이 두고 있는 내 사람이니까. 알다시피 나는 일국의 황태자로서 유능한 인재를 매우 중요시한다.

어쨌든 그녀는 지금 상관에게 인정받고 있다.

그럴 의도는 전혀 없었지만.

***

“그래서, 이번 주에는 누굴 만나셨지? 남자는 필요 없고, 여자만 말해줘.”

중앙궁 뒤편에 조성된 난초 정원.

에이바가 하인 한 명을 이곳으로 불러 뭔가를 캐묻고 있었다. 황태자궁에서 잔뼈가 굵은 하인 데니스였다.

“고, 공녀님. 여성분이라면…. 황후 폐하가 한 번 찾아오시긴 했습니다.”

“아니, 가족 말고. 사적으로 찾아오는 여자 말이야.”

“…….”

데니스는 당장 생각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황태자궁에 여인이 드나드는 일은 극히 드물었다. 아주 간혹 고관대작들이 부인이나 딸을 대동하고 오긴 했었다. 하지만 모두 공식적인 방문이지, 사적인 방문은 아니었다. 

그나마도 한 달 전이 최근이었다.

“특별히 가까이 지내는 시녀나 하녀는? 한 명도 없어?”

“아시다시피 황태자궁에서 일하는 여인네들은 대부분 전하를 흠모합니다만, 전하께서 사적으로 부른 사람은 한 명도 없었습니다. 제가 알기로는요.”

“하, 미쳐버리겠네. 분명히 누가 있는데.”

다른 여자가 있냐는 에이바의 질문에, 황태자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한숨을 깊이 내쉬며 어두운 창밖만 바라봤을 뿐.

“공녀님, 그럼 제가 전하의 서신을 한번 찾아볼까요? 수신인 목록을 잘 살펴보겠습니다. 그중에 여인의 이름이 있다면 보고드리겠습니다.”

“그래, 누구랑 편지 주고받는지도 잘 봐줘.”

“예, 체신담당 관리가 오기 전에 면밀히 살펴보겠습니다.”

“응, 한 주 동안 수고했어, 다음 주엔 돈값 하길 바랄게.”

에이바가 금화 몇 닢을 건네자, 데니스는 얼른 뒷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

수탉의 모가지를 꺾어도 수요일은 오게 마련이다.

오늘도 밤잠을 설치다시피 한 발레리는 달력에서 수요일과 금요일을 지워버리는 상상을 했다. 다음 날 보고를 해야 한다는 생각만으로 속이 간지러워서 미칠 것 같았다.

검을 들고 프리다와 한참 씨름하다 보니 어느덧 여섯 시가 넘었다.

그 사람을 마주하러 갈 시간이 오고야 말았다.

“…저번 주에 건너뛰었으니까 오늘은 보고 제대로 해야겠지. 뭐 별거야? 그냥 좀 많이 높은 상관일 뿐이잖아.”

발레리는 스스로를 애써 설득하며 황태자궁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러던 도중 하늘에서 떨어진 물방울이 콧등에 뚝 내려앉았다.

어쩐지 나올 때부터 하늘이 어둑어둑하더라니.

어깨를 얼룩덜룩 적시던 빗방울이 점점 굵어지다 이내 장대비가 쏟아졌다.

하늘은 벌써 암흑이었다.

우산을 챙기러 돌아갈까 고민하는 와중에 이미 너무 멀리 와 버린 걸 깨달았다.

여기서 계속 가나, 다시 돌아가나 쫄딱 젖어버릴 게 뻔했다.

“…비 맞으면서 가려니까 옛날 생각나네. 가서 할 말만 하고 바로 돌아와야겠다.”

발레리는 빗속을 뚫고 드디어 황태자 집무실 앞에 도착했다.

문 옆에는 레이븐이 기대어 졸고 있었다. 레이븐은 그녀의 인기척을 느끼고 흠칫하며 초록 모자를 고쳐 썼다.

“어, 아가씨, 왜 혼자 와요? 비는 왜 그렇게 쫄딱 맞았고요?”

“그럼 혼자 오지 떼로 오나요? 비는 우산이 없어서 맞았는데요.”

발레리는 레이븐의 질문에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아니, 그게 아니고요. 오는 길에 전하 못 봤어요?”

“…그분 지금 집무실에 안 계세요?”

“네, 아가씨 데리러 나가셨는데요. 우산까지 들고.”

“엥? 데리러 나갔다고요? 저를?”

레이븐이 고개를 끄덕였다.

둘 사이에 한참 침묵이 흘렀다.

발레리는 지금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직접 데리러 나갈 이유가 뭐란 말인가. 고작 비가 온다고?

레이븐의 말대로라면 오는 길에 황태자와 동선이 엇갈린 듯했다.

“아가씨, 일단 여기서 기다려요. 전하는 제가 모시고 올게요.”

발레리는 그를 가만히 기다렸다. 머리카락에서 턱으로 흘러내리는 빗방울을 손으로 훔쳐내며.

얼마 지나지 않아 저 멀리 계단 쪽에서 발소리가 났다.

테렌스가 레이븐과 함께 계단을 올라왔다. 빗물이 뚝뚝 떨어지는 우산을 든 채였다. 바지의 무릎 아랫부분이 온통 젖어있었다.

그는 발레리의 실루엣을 확인하고 한 번 어깨를 들썩이더니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발레리는 온몸이 쫄딱 젖어 몰골이 초췌했다. 미역 줄기 같은 젖은 머리칼이 이마와 목뒤에 덕지덕지 붙어있었다.

“이 비를 다 맞으면서 온 건가? 감기라도 들면 어쩌려고. 레이븐, 장작을 좀 부탁한다.”

“저기요, 전하. 지금 8월인데 무슨 장작입니까. 벽난로라도 때시려고요?”

“다녀와. 조금이면 되니까.”

테렌스의 거듭된 명령에 레이븐은 불만스럽게 눈알을 굴리면서도 지시에 따랐다.

“발레리, 일단 집무실 안에 들어가 있어. 옷가지와 수건을 가져올 테니.”

“예? 저 괜찮은데.”

그녀의 대답이 끝나기도 전에 테렌스는 곧장 뒤돌아서 침실로 향했다.

발레리는 우두커니 서서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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