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에이바는 테렌스에게 묻고 있었다. 올해도 건국제 무도회의 첫 춤을 자신과 추겠느냐고.
“아쉽지만 올해 무도회에서는 춤을 안 추려고 하는데.”
“왜요? 우리가 5년 동안 쌓아온 역사가 있잖아요.”
역사랄 것까지 있을까. 그냥 관습적으로 춘 것뿐이었다. 테렌스는 에이바의 과도한 의미 부여가 부담스러웠다.
“…흠. 용건이 그것뿐인가?”
“에이, 설마요. 당연히 다른 용건도 있지요. 멀리 중앙궁에서 찾아왔는데, 차라도 한 잔 대접해 주세요, 전하.”
에이바의 요청에 따라 테렌스는 집무실로 차를 주문했다.
곧 하인이 집무실로 페퍼민트 차를 대령해왔다.
두 사람은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찻잔 두 개를 사이에 두고 테이블에 마주 앉았다.
“사려 깊으셔라. 밤이라고 카페인 없는 차로 시켜주셨네요.”
“내가 홍차를 안 좋아해서.”
“그 취향, 잘 기억해둘게요.”
에이바가 잔을 들고 차를 한 모금 들이켰다.
그녀는 입안에 머금은 찻물을 여러 번 나눠 삼킨 뒤에야 입술을 뗐다.
“전하께 확언을 좀 받고 싶어요.”
“확언이라니. 무슨 소리지.”
“저 밖에 있는 호위 마법사는 한사코 아니라고 주장했지만….”
“……?”
“이런 건 직접 여쭤보는 게 맞는 것 같아요.”
“무슨 질문이기에.”
“혹시 여성에 흥미가 없으신 걸까 해서요.”
테렌스의 무표정이 한층 더 싸늘해졌다. 발레리도 한 차례 했었던, 썩 달갑지 않은 질문이었다.
“…굳이 그걸 또 내게 확인하러 온 건가.”
“제 혼인 상대가 될지도 모르는 분인데. 어느 쪽을 바라보시는지는 확실히 해둬야죠.”
“나는 공녀와 혼인할 생각이 없는데.”
부드럽고 나직하지만 단호하게 느껴지는 대답이었다.
에이바는 손가방에서 검은 부채를 꺼내 살살 부치기 시작했다. 부챗살 마디마디에 작은 루비 알이 촘촘히 박혀있었다.
솔직히 그녀는 당황했다. 황태자는 결혼 적령기다. 당연히 혼인 상대로 자신을 고려하고 있을 줄 알았다. 에이바는 제국에서 가장 위세가 강한 공작가의 여식인 데다 미색으로도 둘째가라면 서러웠다.
‘흠, 우리 집안이 마음에 안 들어서 그런가. 아버지가 워낙 뒤가 구리고 황제 말도 잘 안 들으니까….’
“기회조차 안 주시는 건가요? 저 별로 급하진 않은데, 적어도 노력은 하게 해 주셔야죠.”
“서로 피곤할 일은 그만하지. 더 늦기 전에 이만 처소로 돌아가 줬으면 한다.”
테렌스는 찻잔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책상 뒤 창가로 걸어가 창문을 활짝 열었다.
대뜸 혼사 이야기를 꺼내는 공녀가 껄끄러웠다. 그녀가 기대하는 걸 줄 생각이 전혀 없으니까.
“황실의 하나뿐인 아들이시잖아요. 후사 생각도 하셔야지요. 황후 폐하께서도 걱정하십니다.”
에이바의 간드러진 목소리가 점점 가까이 들려왔다. 그녀는 천천히 테렌스의 등을 향해 접근하고 있었다.
그녀의 움직임이 새카만 유리창 너머로 비치자, 테렌스는 헛기침으로 목을 다듬었다.
“…내 후사 문제는 공녀가 상관할 일이 아니다.”
아까보다 매몰차면서도, 미묘한 불쾌감이 묻어나는 답변이었다.
에이바는 테렌스의 너른 등판을 바라보며 뜻 모를 미소를 흘렸다.
“전하께서 왜 이렇게까지 경계심이 지나치실까, 저도 생각해 봤는데요.”
“…….”
“다른 여자 있구나, 맞죠?”
테렌스는 고개를 홱 돌려 그녀를 쳐다봤다.
다 안다는 듯 능글맞게 웃는 에이바에게, 테렌스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
반가운 토요일.
이른 아침부터 구름 한 점 없이 화창한 날이었다.
채플 후원으로 슬슬 걸어 나온 발레리는 새 지저귀는 소리에 괜히 마음이 들떴다.
그녀는 스트레칭을 시작했다. 목과 어깨, 허리를 차례로 돌리니 뻐근했던 몸이 슬슬 풀어졌다.
이제 하체 운동을 할 차례다.
발레리는 두 다리를 A자로 벌린 뒤 그 사이로 고개를 숙여 뒤편을 바라봤다.
그렇게 세상을 거꾸로 보고 있자니, 저 멀리서 낯익은 사람이 걸어오는 게 보였다.
복장을 보니 황궁 하인이었다.
이상했다. 발레리는 황궁에 아는 하인이 한 명도 없었다. 낯익은 사람이 있을 리가.
발레리는 상체를 똑바로 일으켜 다시 그 남자 쪽을 쳐다봤다.
아, 하인이 아니었다.
“케빈?”
도적단 동료였다.
“바로 알아보네. 나름대로 변장한 건데.”
“내가 여기 있는 건 어떻게 알았어?”
“두목한테 채플에 있다고만 전해 들었어. 와, 여기 경비 진짜 삼엄하더라. 귀족들 성이랑은 비교가 안 되던데? 황궁은 뚫어볼 생각조차 못해봤는데 좋은 경험이었어.”
발레리는 오랜만에 보는 그를 향해 반갑게 미소했다.
“황궁이 괜히 황궁이겠냐. 근위병들이 얼마나 빡세게 지키는데. 근데 그 하인 복장은 어디서 났냐. 설마…?”
“당연하지. 나 목치기 하나만큼은 너한테도 안 뒤져.”
목치기는 목뒤 급소를 노려 상대방을 잠시 기절시키는 동작을 말했다.
발레리가 황실 무기고에 잠입했을 때 보초에게 썼던 바로 그 기술이다.
애먼 황궁 하인 한 명이 케빈에게 목치기를 당한 모양이었다. 일어나서 정신 차려보면 어리둥절할 것이다. 옷도 휑하니 벗겨져 있고.
“어디 하인인지는 몰라도 케빈 너한테 당하다니 참 안됐네. 아 맞다, 나 전해줄 게 있어.”
“어, 너도? 나도 전달할 게 있어서 왔는데.”
“흠…. 일단 따라와 봐.”
발레리는 자신의 방문 앞으로 케빈을 안내했다.
그녀는 혼자 들어가더니 5분여 만에 사람 몸통만 한 자루 하나를 들고나왔다.
무게가 꽤 되는지, 자루를 감싸 안은 발레리의 양팔 근육이 단단히 부풀어 있었다.
“발레리, 그 자루는 뭐야? 엄청 묵직해 보여.”
“내가 열심히 모은 거야. 이래 봬도 나 월봉 많이 받는다. 잠깐 억울하게 옥살이해서 보상금도 넉넉히 받았어. 여기 든 게 얼만 줄 알아?”
“얼만데.”
“4만 갈렌.”
케빈의 입이 떡 벌어졌다.
“엥? 4천도 아니고 4만 갈렌? 그럼 이게 다 금화란 소리잖아. 입대한 지 넉 달도 안 됐는데 번 돈이 4만 갈렌이라고? 일개 병사가?”
“어…. 일개 병사라면 일개 병사긴 하지. 근데 아까 말했듯이 옥살이 보상금이 절반이야. 황실이 내 검술 실력을 봐서 월봉도 많이 올려줬어. 야, 팔 아프다. 좀 받아줄래?”
발레리가 자루를 척 내밀어 케빈에게 건넸다.
이를 받아든 케빈은 하마터면 자루를 든 채 땅으로 고꾸라질 뻔했다. 생각보다 훨씬 육중해 몸이 휘청거릴 정도였으니. 안에 든 금화가 서로 마찰하며 철거덕거리는 소릴 냈다.
“…저기, 발레리. 네가 힘들게 번 돈을 왜 다 주는 거야?”
“다는 아닌데? 내가 쓸 돈은 당연히 남겼지. 단원들 지금 발 묶여서 후작령 밖으로 나가기 힘들잖아. 생활비에 보태 쓰라고.”
황궁 내에선 돈 쓸 일이 정말 없었다.
기본적으로 의식주가 모두 해결되는 곳이었다. 발레리는 여윳돈이 생길 때마다 차곡차곡 모아뒀다. 물론 도적단에 보내기 위해서다. 4만 갈렌이라면 단원들이 생활비로 넉넉히 쓰고, 마력석 구매에도 조금 보탤 수 있을 터였다.
“…고마워, 발레리.”
케빈은 내심 거절하고 싶었다. 지나친 수준의 호의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펠런은 발레리의 도움을 뿌리칠 상황이 못 됐다. 미안한 마음에 케빈은 애꿎은 자루 주둥이만 꽉 쥐었다.
“별말씀을. 앞으로 뭐 전해줄 거 있으면 이 방문 밑으로 밀어 넣어. 그럼 내가 볼 테니까.”
“알겠어.”
“맞다, 케빈. 로이는 잘 있어? 저번에 꿈에 나왔었는데.”
“로이…? 어어, 잘 있지.”
케빈은 살짝 당황한 기색을 숨기며 대답했다.
“다행이다. 네가 줄 건 뭔데?”
“아아, 이거야.”
케빈이 가슴팍에서 손바닥만 한 양피지 봉투 하나를 꺼냈다.
봉투의 모양을 보아하니 뭔가 중요한 서신이 담겨있는 듯했다.
“웬 편지? 나 편지 주고받을 사람 없는데.”
“두목이 전해주랬어. 의뢰인한테서 왔다고. 난 무슨 내용인지 전혀 몰라. 일부러 나한테 시킨 것 같아. 나 글 읽을 줄 모르잖아.”
의뢰인이라는 말에 발레리는 심장박동이 확 튀어 올랐다.
얼른 뜯어서 내용물을 확인해 보고 싶었다. 지금 당장.
“거기 누구냐.”
순간 익숙한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서늘한 기운이 감도는 테렌스의 목소리였다. 발레리는 얼른 서신을 낚아채 상의 안쪽으로 숨겼다.
케빈은 테렌스를 멀뚱히 쳐다보다, 심상치 않은 제복 차림인 걸 확인하고 어설프게 인사했다.
“아, 안녕하십니까.”
“어디 소속 하인이지. 채플엔 무슨 일이냐.”
테렌스의 날 선 질문에 발레리는 어거지로 웃음소리를 내며 케빈의 등판을 툭툭 두들겼다.
“아하하하, 지나가다가 마주쳤는데요. 어디서 많이 봤다 했더니 고향 친구더라고요.”
케빈도 따라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리며 그녀에게 호응했다.
“하하, 오랜만에 봐서 반가웠어, 발레리.”
“야, 너 상관이 부른다며. 빨리 가봐. 혼나기 전에.”
“그, 그래야지. 송구하지만 먼저 가보겠습니다!”
케빈은 살살 뒷걸음질 치더니 자루를 품에 안고 냉큼 꽁무니를 뺐다. 테렌스는 그 모습을 미심쩍어하며 바라보고 있었다.
“대답도 않고 사라지는구나.”
“상관이 급히 불러서 정신이 없었나 봐요. 원래 황제 폐하보다 직속상관이 더 무서운 법이잖아요. 양해해 주세요, 전하.”
발레리가 멋쩍게 웃으며 변명을 이어갔다.
그 와중에 테렌스는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발레리가 저번보다는 활력을 되찾은 것 같아서.
“…저자가 네 고향 친구라고.”
“하하, 네.”
“네게 뭘 주는 것 같던데. 뭐지?”
시력도 좋지. 케빈에게서 서신을 넘겨받는 장면을 고스란히 목격한 모양이었다.
“별거 아니에요.”
발레리의 시선이 우왕좌왕 흔들렸다.
“…네 친구고, 황궁 하인이라고 해도 여기서는 외부인이다. 채플 근처로는 데려오지 말았으면 한다.”
“네. 앞으론 안 그럴게요.”
발레리는 테렌스의 입가를 슬쩍 확인했다. 보조개는 온데간데없었다. 심기가 편하진 않은 모양이었다.
당연했다. 그녀에게 외간 남자가 접근하는 장면을 목격해 버렸으니. 그것도 그녀의 방문 근처에서.
“그럼 전 이만 들어가 볼게요, 하하.”
발레리는 테렌스를 뒤로하고 황망하게 방으로 들어왔다.
그녀가 급하게 뛰어 들어가는 모습을 테렌스는 가만히 주시하고 있었다.
쿵. 방문을 엉덩이로 눌러 닫은 발레리는 떨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책상 서랍에서 나이프를 꺼냈다. 봉투 표면의 새까만 실링 왁스를 얼른 뜯어내기 위해서다.
“편지봉투는 보통 빨간색 왁스로 봉인하던데, 이건 왜 시꺼멓지. 무슨 먹물 같네.”
실링 왁스에는 둥그런 타원을 둘러싸고 까마귀 두 마리가 서로 마주 보는 모양의 인장이 찍혀 있었다.
한마디로 괴이했다.
“흠, 귀족 가문 인장은 보통 독수리나 비둘기를 쓰지 않나? 까마귀 쓰는 집안은 또 처음이네.”
그녀는 나이프로 왁스와 종이 표면을 사각사각 분리한 뒤, 봉투 속의 종이를 슬슬 꺼냈다.
드디어 의뢰인의 신상을 알 수 있게 되는 건가. 발레리의 입꼬리가 긴장 속에 잘게 경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