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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자한테는 관심 없는데요 (38)화 (38/173)

38화

요즘 들어 발레리는 평소보다 퀭한 눈으로 석실에 출근하고 있었다.

기운이 살짝 빠져 있는 그녀와는 반대로, 프리다는 부쩍 독기가 강해지고 있었다.

검을 집어 드는 자세부터가 달라졌다. 휘두르는 동작도 이전보다 과감하고 거침없었다.

오늘 수업 시간에는 거의 미쳐 날뛰는 수준이었다.

“화, 황녀님. 너무 흥분하신 것 같은데요.”

발레리가 목덜미까지 흘러내린 땀을 훔치며 프리다의 공격을 피했다.

프리다의 동작은 아직 쳐낼 수 있는 수준이었지만, 속도가 꽤 붙었다.

한 시간 가까이 계속 피하다 보니 체력 좋은 발레리도 숨이 가빠 올 정도였다.

“에이, 발레리. 왜 약한 소릴 해요. 다 피하고 있으면서.”

프리다는 웃으면서 뼈 있는 말을 했다. 아무래도 발레리가 엄살을 부리고 있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공격 속도가 눈에 띄게 날쌔지셨어요. 저 지금 땀나는 거 안 보이세요?”

“발레리가 그랬잖아요. 남자한테는 완력으로 안 되니까 속도로 승부해야 한다고. 앞으로 더 빨라질 거예요.”

프리다가 턱을 뻣뻣이 치켜들고 칼을 계속 휘둘렀다.

체력도 많이 좋아졌다. 이젠 1인분도 거의 다 해치울 만큼 식사량도 늘었다.

그때였다.

발레리의 눈앞이 흐려졌다.

프리다의 굳어있는 얼굴에 누군가가 겹쳐 보이기 시작했다. 이 여자와 혈연관계에 있는 또 다른 한 사람이.

검을 피하는 그녀의 움직임이 슬슬 둔해졌다.

프리다는 속으로 유레카를 외쳤다. 발레리의 허점이 눈에 보인 건 처음이었다.

슥.

발레리의 코앞에 칼날이 스쳤다.

프리다의 안색이 돌연 창백해졌다.

뭔가 큰 실수를 저지른 듯한 표정이었다. 문득 발레리는 오른뺨을 타고 무언가가 흘러내리는 걸 느꼈다.

이상하다. 눈물이 나온 건 아닐 텐데.

“아아, 미안해요!”

프리다는 칼을 바닥에 털썩 내려놓고는 바지 뒷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냈다.

“네? 갑자기 뭐가 미안하세요?”

발레리도 동작을 멈추고 손수건을 받아 오른뺨에 가져다 댔다. 새빨간 피가 묻어나 있었다.

그녀는 얼른 석실 한구석의 화장대 앞으로 달려가 거울 속의 얼굴을 확인했다.

오른쪽 뺨 한가운데가 대각선으로 베여 있었다. 길이는 손가락 두 마디 정도.

“아아, 이 정도면 괜찮아요. 별로 안 깊어서 잘 관리하면 흉 안 질 거예요.”

발레리는 씩씩하게 말했지만, 프리다는 고개를 숙인 채 눈물을 글썽였다.

“흐흑…. 아플 텐데 흉이라도 지면 어떡해요. 오빠한테 주치의 불러 달라고 말할게요.”

‘오빠’라는 한마디에 발레리는 또다시 출처 모를 간지러움을 느꼈다. 오른뺨을 파고드는 날카로운 통증도 멎어들 정도였다.

“이까짓 상처 가지고 무슨 주치의까지 불러요…. 저는 괜찮아요.”

발레리는 느닷없는 위기감에 몸서리쳤다.

황녀의 얼굴에 또 그 인간이 겹쳐 보이다니. 고작 그것 때문에 움직임이 둔해지다니. 자신을 용서할 수가 없었다.

‘정말 꺼져달라고 하고 싶다. 내 머릿속에서. 아아!’

발레리는 고통스럽게 신음하며 머리를 쥐어뜯었다.

“으앗, 빨리 처치해 줄게요!”

프리다는 그녀가 아파서 그러는 줄 알고 황망히 서랍장으로 달려가 구급상자를 가져왔다.

그리고 흰색 거즈를 꺼내 발레리의 환부에 붙여주었다.

“발레리, 무슨 일 있는 거죠? 도통 집중을 못 하는 것 같아서요. 안 보이던 빈틈도 보이고….”

“아, 아니에요. 시원한 물 한 잔 먹으면 나아질 것 같아요. 잠깐만, 정말 잠깐만 쉬었다 할게요.”

시원한 물 한 잔은 아무 소용이 없었다. 여전히 문제의 얼굴은 머릿속을 정신없이 떠다녔다. 다음 보고 시간이 찾아오기 직전까지.

***

“왔구나, 발레리.”

“…….”

“발레리?”

“네. 안녕하세요.”

발레리가 집무실 문을 열자마자, 테렌스는 놀란 얼굴로 재빨리 다가왔다. 그녀의 오른뺨에 흰색 거즈가 붙어있어서다.

그가 또박또박 불러주는 이름이 오늘따라 더 생경했다.

그래서 한 번에 대답할 수가 없었다.

“얼굴에 이게 뭐지? 무슨 상처라도 난 건가?”

테렌스는 저도 모르게 왼손을 내밀어 그녀의 오른쪽 얼굴을 감쌌다.

발레리는 갑자기 뻗쳐온 손길에 화들짝하며 한 걸음 물러섰다.

“아아. 검술 수련을 너무 열심히 하다 보니까 이렇게 됐어요.”

“검술 수련? 그럼 프리다가 그랬다는 건가?”

“아뇨, 황녀님이 그랬다기보단. 제가 정신 놓고 있다가 공격을 못 피해서 그런 건데요.”

“네 실력이면 프리다의 공격에 당할 리가 없는데….”

테렌스는 믿을 수 없었다. 프리다는 이제 막 초보를 벗어난 단계였다. 발레리에게 작은 흠집이라도 내려면 아직 한참 수련해야 할 텐데.

발레리는 제 얼굴을 찬찬히 훑는 테렌스를 똑바로 바라보지 못했다.

차마 ‘네 얼굴이 순간 겹쳐 보여서 그랬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상처를 봐도 되겠나?”

“아뇨, 안 보셔도 돼요. 그냥 조금 찢어진 거고, 잘 붙어서 아물 거예요.”

“주치의를 부르겠다. 아니면 레이븐에게 가벼운 치유 마법이라도….”

“됐어요, 별로 깊은 상처도 아니니까. 오늘은 보고 빨리하고 돌아가도 되나요? 저녁은 음…. 안 먹을게요.”

테렌스의 눈이 큼지막하게 벌어졌다. 발레리가 식사를 거른다고 하는 건 처음이었다.

“저녁을 안 먹는다고? 네가 좋아하는 연어 요리로 시종장에게 부탁했는데.”

“속이 조금 안 좋아요.”

낯빛을 보니 정말 그랬다. 발레리는 금방이라도 토할 것처럼 안색이 파랬다. 잠이 부족한 탓인지 눈 밑에도 어두운 그늘이 드리웠다.

“그렇다면 오늘 보고는 건너뛰겠다. 지금 바로 채플까지 바래다줄 테니 잠시만….”

“…감사해요. 저 혼자 갈게요. 안녕히 계세요.”

발레리는 곧바로 뒤돌아서서 집무실을 나갔다. 그녀의 냉랭한 뒷모습에 테렌스는 목 뒤가 시큰해졌다.

문득 그때가 떠올랐다.

황제 부부를 처음 알현한 뒤, 중앙궁에서 뛰쳐나와 헛구역질하던 발레리의 모습을. 그녀는 신발을 벗어 양손을 들고 허겁지겁 사라졌었다.

지금과 똑같은 표정으로.

“이번에는 혼자 못 보내겠는데.”

테렌스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발레리는 평소보다 천천히 걷고 있었다. 무슨 생각에 잠겼는지 아직 중앙계단도 다 내려가지 못했다.

테렌스는 그녀를 발견하곤 계단을 두 단씩 뛰어 내려갔다.

“발레리, 잠깐 거기 서!”

그가 목청을 높여 외쳤다. 그녀를 어떻게든 멈춰 세워야 했다.

발레리는 목소리의 주인을 알면서도 뒤돌아보지 않았다. 오히려 속도를 높여 걸었다.

테렌스는 결국 계단을 다 타고 내려와서야 발레리를 따라잡았다.

여전히 발레리는 썩 좋지 않은 표정이었다.

“…왜 따라 나오셨어요?”

“같이 가자. 안 좋은 몸으로 애써 여기까지 와줬으니.”

하, 굳이 그러겠다는 이 사람에게 어찌 또 등을 돌리겠는가.

발레리는 더는 거절할 자신이 없었다.

“그러시든가요.”

둘은 두 뼘 정도 거리를 유지하며 나란히 후문으로 나왔다.

테렌스는 침묵하는 발레리에게 굳이 먼저 말을 걸지 않았다.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해요.”

먼저 입을 뗀 건 발레리였다.

감사 인사라니. 그것도 평소보다 나긋한 목소리로.

테렌스는 그녀의 갑작스러운 태도 변화에 거리감을 느꼈다.

“혹시 무슨 일 있는 건가?”

“없어요.”

“…몸이 안 좋으면 언제든 말해. 의원이든 치유 마법사든 보내줄 테니.”

“뭘 또 그렇게까지 하세요.”

“아플 땐 보고를 건너뛰어도 괜찮아. 무리하지 말고. 네가 건강해야 프리다도 마음이 놓일 테니.”

“네.”

“속 안 좋다고 억지로 토하거나 하진 말고.”

말씨는 언제부터 이렇게 다정했는지.

발레리는 괜히 속에서 역정이 났다.

“…가끔 보면 정말 잔소리꾼이세요. 맨날 천천히 먹어라, 물 많이 마셔라, 계단 내려갈 때 조심해라. 누가 보면 황녀님 오빠가 아니라 제 오빠인 줄 알겠어요.”

그녀가 평소처럼 말대꾸하기 시작했다. 목소리에도 약간 힘이 돌아왔다. 

‘말대꾸에 길들어버린 건가. 이젠 반갑기까지 하군.’

테렌스의 얼굴에 안도감이 묻어났다.

“…내가 아직 못 미더울 수도 있겠지만, 혹시 힘든 일이 있으면 꼭 얘기해 줬으면 한다.”

“네, 수업에는 지장 안 되게 노력할게요.”

그녀의 답변은 무난하고 사무적이었다. 하지만 테렌스는 속이 확 끓어오르는 걸 느꼈다.

“…넌 내가 수업 때문에 이러는 거라고 생각하나?”

“네? 그게 아니면 뭔데요?”

“내가 걱정하는 건 너다. 수업이 아니라.”

테렌스가 자신의 의도를 단단히 못 박았다.

발레리는 조용히 눈을 감고 주먹을 말아 쥐었다.

속에서 물컹한 무언가가 슬슬 기어 나와 그녀의 명치끝을 보들보들 간질였다. 

‘하…. 이 느낌 대체 뭐야? 저번 보고 시간부터 이랬던 것 같은데.’

“아, 아니 왜요? 제가 뭐라고요.”

“내 사람이니까.”

“…네?”

그녀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방금 내가 뭐라고 한 거지. 테렌스는 바짝 탄 입술을 혀로 축이며 둘러댈 말을 찾았다.

“…내가 직접 발탁해서 가까이 두고 있는 내 사람이니까. 알다시피 나는 일국의 황태자로서 유능한 인재를 매우 중요시한다.”

난 또 뭐라고. 발레리는 테렌스의 장황한 부연 설명에 픽 웃었다.

“누가 보면 제가 전하 오른팔이라도 되는 줄 알겠어요. 마법사님 알면 질투하시겠다.”

발레리는 간질거리던 속을 애써 잠재웠다.

그리고 조용히 결론지었다.

‘양지에서 사회생활하면서 이렇게까지 신임받는 게 처음이라 그런가 보다.’

연보랏빛으로 물든 여름의 저녁 하늘을 향해, 그녀는 깊은 한숨을 뱉어냈다.

예상 밖의 신뢰는 생각보다 무게가 있었다.

‘언젠가 발등 찍을 도끼에 왜 이렇게 믿음을 주는 거지…. 이러면 점점 실망시키기 싫어질 텐데.’

시종일관 얼음 같았던 이 사람의 녹는점을 알게 된 이상, 그 미소를 꺼뜨리고 싶지가 않았다.

그런데 그럴 수 없다는 걸 이미 너무 잘 알고 있었다.

***

별 말 같지도 않은 변명을 해버렸지만, 테렌스는 나름대로 만족했다.

그녀가 희미하게나마 생기를 되찾은 것만으로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오늘 보니 차분한 면도 있고…. 마냥 밝기만 한 성격은 아닌 것 같은데.’

테렌스는 생각에 잠긴 채 황태자궁 계단을 올랐다. 그렇게 다다른 집무실 앞엔 또 다른 손님이 찾아와 있었다.

에이바 볼드윈 공녀였다.

어김없이 풍성한 드레스 차림이었다. 이번에는 테렌스의 눈동자 색과 똑같은 연한 하늘색이다.

“어디 다녀오시나요, 전하. 오늘은 그 병사랑 저녁 안 드셨나 보네요.”

“공녀가 여긴 웬일이지? 언질도 없이.”

“오면 안 되나요? 그냥 심심해서 온 건데.”

“안 될 건 없지만, 갑작스럽군. 앞으로는 미리 말을 해줬으면 하는데.”

에이바는 애써 미소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몇 년을 알고 지낸 사이인데, 이 딱딱하기만 한 태도를 언제쯤 무너뜨릴 수 있을까. 아직은 막막했다.

“그거 아세요, 전하? 건국제가 한 달 좀 넘게 남았어요.”

어느덧 8월 초엽이었다. 건국제는 9월 내내 열리니 한 달도 채 남지 않았다. 테렌스 또한 건국제 준비 문제로 점점 일정이 바빠지고 있었다.

“벌써 그렇게 됐나.”

“네. 이번에도 첫 춤은 저랑 추시겠죠?”

평소 같았다면 그랬겠지만, 올해는 상황이 달랐다.

춤을 추려면 양손을 맞잡아야 했다. 오른손에 부상을 입은 테렌스에겐 어려운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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