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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자한테는 관심 없는데요 (37)화 (37/173)

37화

문이 열리고 한 여인이 당당한 걸음으로 집무실에 들어섰다.

적포도주를 온몸에 뒤집어쓴 듯 검붉은 드레스 차림이었다. 가장 먼저 발레리의 시선을 사로잡은 건 그녀의 상체였다.

특히 V자로 깊이 파인 그곳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발레리는 자신에게 없는 풍만한 부분을 멍하니 응시했다.

‘워후… 무겁겠다….’

몸매뿐 아니라 용모 또한 남달랐다.

차르르 윤기가 도는 진갈색 생머리. 차분하고 침착해 보이는 고동색 눈동자.

말 타고 지나가면서 대충 봐도 지체 높은 집안의 여식이었다.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완벽한 예법으로 테렌스에게 절하는 에이바를 보며, 발레리는 입을 헤벌쭉 벌렸다.

‘와, 키도 크다. 나보다는 좀 작겠지만.’

황녀와는 다른 계열의 아름다움이었다.

프리다가 고결하고 청아한 느낌의 미인이라면, 이쪽은 세련되고 고혹적인 분위기랄까.

“식사하시는 중에 예고 없이 들이닥쳐 송구스럽네요. 그래도 황궁에 들어왔는데 당일에 입주 신고는 해야 할 것 같아서요.”

에이바는 테렌스를 향해 싱그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자그마한 얼굴에 볼살이 도톰히 올라 있어 앳된 느낌도 있었다.

“아, 오늘 입궁한다고 했었지. 건강해 보이는군.”

“전하께서도 안색이 훨씬 좋아 보이십니다. 그럼 식사 마저 하시지요. 얼굴을 뵈었으니, 저는 이만 처소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그래, 다음에 보지.”

테렌스는 에이바 쪽을 쳐다보지도 않고 답했다. 그의 눈길은 새우 껍질을 까고 있는 발레리의 손끝에 머물러 있었다.

“그럼 편안한 밤 보내시길.”

에이바는 나가기 직전 발레리를 위아래로 쓱 훑었다.

발레리는 그녀의 칼날 같은 시선을 느끼고 긴장하며 어깨를 움츠렸다.

에이바가 떠나고 문이 닫히고 나서야 발레리는 원래 자세로 돌아왔다.

“왜 그런 동작을 하지?”

테렌스가 어깨를 크게 들썩이는 발레리를 보며 물었다.

“방금 나간 여자분이 절 무섭게 관찰하셔서 긴장됐어요.”

“흠, 일정이 있다고 돌려보내면 되는 걸 굳이 들여보내는군.”

“괜찮아요. 덕분에 좋은 구경 했는데요.”

“구경? 무슨 구경.”

“이런 말 해도 될지 모르겠는데요. 제가 여태까지 본 여자분 중에 제일 가스…. 아니 몸매가 멋있네요.”

아무래도 이성과의 대화이기에 발레리는 발언의 수위를 최대한 낮췄다. 특정 신체 부위를 언급할 순 없다는 생각에.

“잘 모르겠는데. 네가 훨—”

테렌스는 속에 있던 말을 그대로 꺼낼 뻔했다가 가까스로 제동을 걸었다.

다행히 발레리는 새우 껍질을 까느라 그의 말에 별로 주의를 기울이고 있지 않았다.

‘왜 자꾸 이 여자랑 얘기할 땐 생각이 입 밖으로 새는지….’

“그런데요, 전하. 저 여자분 검술 잘하나요?”

“검술? 갑자기 그건 왜.”

“일단 키가 크잖아요. 눈동자 색도 짙던데. 거기에 검술만 잘해봐요. 딱 전하 이상형 아니에요?”

테렌스의 입가에 팼던 보조개가 씻은 듯 사라졌다.

“끼워 맞추지 마라.”

“왜 또 근엄해지셨어요? 도움 되라고 드린 조언인데.”

“…도움 안 돼. 전혀.”

테렌스는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고 한숨을 내쉬었다.

“웬 한숨? 여자 좋아하신다면서요. 저렇게 숨 막히게 매력적인 여자분을 누가 마다해요?”

“…내가. 내가 마다한다. 넌 내가 아무 여자나 좋아한다고 생각하나?”

발레리는 한입 크기로 자른 새우 살을 접시에 담아 테렌스 쪽으로 내주었다.

“뭐 그것까진 아니겠지만, 워낙 여자를 좋아한다고 강조하신 바가 있으니까….”

이건 또 무슨 소리지.

테렌스의 미간이 종잇장처럼 구겨졌다.

“내가 언제.”

“첫 보고 시간에요. ‘나는, 여자를, 좋아한다.’라고 하셨는데, 기억 안 나세요?”

발레리는 눈을 질끈 감고 당시 테렌스의 억양까지 똑같이 따라 했다.

테렌스는 기가 찼다. 정체성을 묻기에 똑똑히 확인시켜줬을 뿐인데, 그걸 그런 뜻으로 이해하고 있었다니. 뻣뻣한 기운이 짜르르하게 뒷덜미를 타고 올랐다.

“하, 그거야 네가─”

‘여자니까. 발레리 로빈슨 네가 여자니까 한 소리지.’

“제가 뭐요? 새우 잘라드린 거 안 드실 거면 제가 먹을게요.”

“…아니, 내가 먹을 거다.”

말을 말자.

테렌스는 그녀가 건넨 접시에서 대하 조각을 포크로 찍어 입으로 가져갔다.

말캉한 새우 살의 육즙이 입안 가득히 톡톡 터졌다. 분명 맛있어야 하는데. 고무를 씹는 것처럼 정말 아무 맛도 나지 않았다.

“맛있죠? 흐흐. 제 손맛이 들어가서 아마 더 맛있을 거예요.”

발레리는 턱을 괸 채 말갛게 웃었다.

이 화상을 어째야 좋을까. 갑갑하고 서운해도 미워할 수가 없다.

석고상처럼 굳어있던 테렌스의 표정은 점차 온화한 미소로 변화했다.

“그래… 맛있네.”

발레리는 속으로 움찔했다.

얼어붙었던 그의 얼굴이 봄볕이라도 쬔 듯 사르르 녹는 걸 보고 있자니, 그 온도 차가 새삼 신기해서.

‘정말 볼수록 묘한 얼굴이야. 근데 왜 자꾸 속에서 간지러운 느낌이 나지.’

뱃속에 가득 든 건 분명 새우 살이건만, 강아지풀을 삼킨 기분이었다.

***

그 시각 에이바는 굳게 닫힌 테렌스의 집무실 문밖에 잠시 멈춰 서 있었다.

그녀는 드레스 자락을 양손에 쥔 채 양쪽 입가를 씰룩댔다. 뭔가가 마음에 안 든다는 듯이.

문 앞을 지키고 선 레이븐은 에이바의 눈치를 보며 어깨를 잔뜩 움츠렸다.

‘이 공녀는 매년 볼 때마다 기가 세지는 것 같네. 어김없이 반말 찍찍 날리면서 시비 걸겠지.’

“저기, 마법사.”

“네, 공녀님.”

“전하께서 웬 병사랑 단둘이서 밥을 드시는 거지?”

“…아, 아끼시는 병삽니다.”

레이븐이 쩔쩔매며 대답했다. 보안상 발레리가 맡은 진짜 업무를 얘기할 순 없으니.

“일개 병사를 뭐 얼마나 아낀다고 단둘이 식사를 해? 계급장 보니까 줄 하나짜리던데.”

“전하께서 원체 인간관계가 넓으셔서요.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친분을 쌓으십니다.”

레이븐이 아무렇게나 만들어낸 답변에 에이바는 코웃음을 쳤다.

“하, 내가 저분을 몇 년이나 봤는데. 저 성격에 인간관계가 넓다고? 마법사, 지금 나랑 장난하니?”

그녀가 앙칼지게 쏘아붙이자 레이븐의 간이 콩알만 하게 오그라들었다.

자주는 아니어도 테렌스를 10여 년간 봐온 에이바였다. 이런 허술한 변명이 통할 리는 만무했다.

“그게….”

레이븐의 흔들리던 눈알이 데구루루 굴렀다. 둘러댈 말이 하나도 떠오르지 않았다.

“얼굴 보니까 꽤 미소년이던데. 하, 그래서 아직 미혼인 건가?”

“…예?”

“마법사, 혹시 전하가 그쪽이신 건 아니지?”

“…예에?”

레이븐의 이마에서 진땀이 삐죽 솟았다.

초장부터 단단히 오해하고 있는데, 어디서부터 풀어야 할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뭘 그렇게 놀라. 전하께서 남색자인지 물어보는 거잖아. 맞아, 아니야? 예, 아니오로 대답해.”

***

“그래서 뭐라고 대답했지.”

테렌스는 집무실 책상에서 벌떡 일어나 레이븐을 차갑게 내려다봤다.

“아니라고 했죠. 예전 같았으면 확신이 없었겠지만. 지금은 확실히 지향점이 있으시잖아요?”

그가 동성애자냐는 에이바의 질문에, 레이븐은 딱 잘라 부인했다.

정말 그것만큼은 아니니 믿어 달라고. 그래도 여전히 못 믿는 눈치였다.

“이런 질문이 벌써 두 번째군.”

테렌스는 눈을 질끈 감고 왼손으로 마른세수를 했다.

발레리 또한 그에게 비슷하게 질문했었다. 혹시 여자를 좋아하는 건 맞느냐며.

고뇌에 빠진 상전을 보며 레이븐은 혀를 찼다.

“그러게 왜 그 나이 먹도록 목석처럼 사셨어요. 이런 오해를 사는 것도 다 전하의 업보입니다. 황녀님은 청혼 거절 사유라도 있지만, 전하는 딱히 핑계도 없었잖아요.”

테렌스는 허공을 바라보며 자신의 과거를 천천히 되짚었다.

그동안 황실에서 황태자의 결혼 얘기가 안 나온 건 아니었다. 실제로 이웃 나라 왕실과 몇몇 고위 귀족 가문에서 제의가 있긴 했었다.

─저는 아직 결혼 생각이 없습니다.

그러나 테렌스의 이 한 마디에, 관련 논의는 전부 흐지부지됐다. 그게 스물한 살 때였으니 벌써 3년이 넘었다.

아들의 결혼은 황제 부부의 우선순위에서 한참 밀려나 있었다. 언제나 황실의 관심은 귀한 딸 프리다의 안위에 있었으니까.

“레이븐, 자꾸 나이를 걸고넘어지는데. 스물넷이면 아직 적령기다.”

“흠, 남자치고 아직 늦은 건 아니죠. 그래도 공녀님한테는 그 아가씨가 여자라는 얘긴 안 했어요.”

테렌스의 눈이 번쩍 뜨였다.

“에이바가 발레리를 남자로 알고 있다는 건가?”

“네, 그게 바로 오해를 사신 이유예요. 당연히 처음 보는 사람이면 남자로 알지 않겠습니까? 머리 짧지, 키 크지, 거기에 군복 입었지. 이 나라에 여자 병사가 어딨어요. 그 아가씨 빼고.”

맞는 말이었다.

군복을 입은 발레리는 영락없는 칼레바니아 황궁 근위병이었다.

“왜 사실대로 이야기하지 않았지.”

“해서 좋을 게 뭐 있겠습니까. 바로 공녀한테 미운털 박혀서 괴롭힘이라도 당하면 어쩌시려고요. 뭐, 그 아가씨라면 순순히 당해줄 것 같진 않지만요.”

“미운털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냐.”

“하…. 경쟁자가 평민 여자란 걸 알면 그 공녀가 그 성질에 얼마나 분기탱천하겠습니까. 저 같아도 가만 안 둘걸요.”

“…….”

그럴 가능성까진 생각하지 못했다.

에이바가 발레리를 괴롭히는 상상을 하니 테렌스는 괜히 아찔해졌다.

아무리 강한 사람이라고 해도 누군가의 괴롭힘을 달게 받아들이진 못할 테니까.

***

─고맙다, 발레리.

─발레리.

─그래…. 맛있구나.

─발레리 양과 저녁 식사 마치고 바래다주러 왔다.

“끄악!”

침상에 누운 발레리는 괴성을 지르며 이불을 마구 걷어찼다.

그 힘이 어찌나 세찬지 이불이 천장까지 날아올라 툭 부딪혔다가 천천히 내려앉았다.

침대 위로 먼지가 어지럽게 흩날렸다.

“에취! 으으, 에취!”

그녀의 입에서 재채기가 연달아 튀어나왔다.

“망할 놈의 보조개. 이게 다 보조개 때문이야. 맨날 죽상이던 인간이 왜 자꾸 그렇게 웃어대지? 적응 안 돼서 미치겠네.”

언제부터였을까.

발레리는 밤에 도통 잠을 이루지 못했다. 특히 화요일과 목요일 밤에는.

그다음 날 저녁에 독대해야 할 사람의 면상이 자꾸 아른거려서.

─발레리.

이름을 불러주는 그의 나지막한 목소리.

그 입가에 살포시 어린 보조개.

말씨는 또 왜 자꾸 점점 따사로워지는 건지.

머릿속에서 좀처럼 떠나질 않는다.

어딘가가 자꾸 간지럽다. 몸이 가려운 거라면 시원하게 벅벅 긁기라도 할 텐데.

갑갑하기만 했다.

이런 건 대체 어떻게 해소해야 하는 종류의 스트레스인지, 갈피가 잡히지를 않으니까.

“하아. 인생에 도움 안 되는 인간. 보고하기 싫다고 테이블을 확 엎어버릴까?”

그녀는 식탁을 엎은 뒤 음식으로 난장판이 된 집무실 바닥을 상상했다.

“…아니야, 그럼 맛있는 음식이 너무 아까워.”

보고 시간이 정말 싫은가, 생각하면 꼭 그런 것만도 아니었다. 황태자는 늘 완벽한 식사를 준비했고, 특별한 보고 내용을 요구하는 것도 아니었다. 시종일관 무뚝뚝하긴 해도 점점 친절해지고 있었다.

그 친절의 정도가 어떤 선을 넘어가고 있다는 것. 그것이 문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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