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황후의 시녀가 된 에이바의 첫 출근일은 바로 오늘이었다.
“환영해요, 에이바 양. 내 처소에 일손이 부족하진 않아서, 시간 여유는 많을 거예요.”
황후 레베카는 한껏 치장하고 찾아온 에이바를 인자한 미소로 맞아들였다.
하지만 황후의 입가에 걸려있는 웃음은 다소 작위적이었다.
시녀를 굳이 뽑을 생각은 없었다. 에이바를 채용한 이유는 하나였다.
에이바의 어머니인 볼드윈 공작부인의 간곡한 부탁.
공작부인은 어릴 적 황후와 막역한 사이였다. 볼드윈 공작에게 시집간 뒤 다소 소원해지긴 했지만.
“여전히 젊고 아름다우십니다, 황후 폐하. 남는 시간에는 황태자 전하를 찾아뵈려고 하는데, 괜찮으실까요.”
“그럼요. 우리 그이한테 테렌스 일 좀 덜 시키라고 해야겠어요. 에이바 양과 만나려면 여유 시간이 있어야 할 테니.”
레베카는 마주 앉아 차를 마시는 에이바의 자태를 유심히 살폈다.
다크초콜릿 빛깔의 치렁치렁한 생머리. 투명한 연분홍빛 피부와 짙은 고동색 눈동자. 깨물면 자몽 과즙이 나올 것 같은 다홍빛 입술.
이제 막 성년이 된 스무 살이랬다. 싱그럽기 그지없었다.
황후가 주목한 건 에이바의 몸매였다.
어릴 때부터 키가 크고 팔다리도 길쭉길쭉했던 소녀였는데. 지금 보니 발육도 남다르다. 상체 쪽이 특히 발달해 있었다.
공녀도 자신의 매력을 잘 아는 듯, 골짜기가 훤히 드러나는 검붉은 와인색 드레스를 입고 왔으니 말이다.
“그건 그렇고, 에이바 양, 오늘 옷차림 굉장히 신경 썼네요….”
노출이 조금 과하다고 생각한 황후가 빙 둘러서 말했다.
특별히 황후가 옷차림에 보수적인 건 아니었으나 에이바의 드레스는 무려 명치 근처까지 파여 있었다.
“첫날이라 힘 좀 줘 봤어요. 편하게 이브라고 불러주세요, 폐하.”
황후는 얼떨떨함을 감추지 못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
그 시각 황녀의 석실.
평소라면 한창 검을 맞부딪칠 오전 시간인데, 웬일인지 발레리와 프리다는 연무장이 아니라 테이블에 마주 앉아있었다.
“황녀님, 오늘은 그림을 먼저 그릴 거예요.”
발레리는 아침에 챙겨온 자루를 뒤적거리더니, 맞은편의 황녀 앞으로 종이와 물감, 붓을 내밀었다.
프리다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응? 갑자기 무슨 그림이에요? 나 그림 잘 못 그리는데….”
“음, 오늘 훈련에는 살기가 필요해서요. 죽이고 싶은 사람…. 있으실지는 모르겠지만, 멱따고 싶은 의지를 불러일으키는 얼굴을 한번 그려보세요.”
“죽이고 싶은 사람은 없는데…. 흠, 일단 그려보기는 할게요.”
황녀가 붓에 가장 먼저 찍은 건 붉은색 물감이었다.
프리다는 넓은 타원을 그리고, 그 안을 온통 새빨갛게 색칠했다. 그 위에 노란색 점을 두 개 찍었다. 눈이었다. 길게 찢어진 입에는 날카로운 송곳니가 빼꼼 나와 있었다.
마지막으로 그 머리에 새카만 뿔을 두 개 달았다.
프리다의 완성작을 본 발레리는 양쪽 눈썹을 높이 추켜세웠다.
“아니, 무슨 마귀를 그려놓으셨어요?”
“그냥 미지의 존재를 상상해서 그려봤어요. 이러면 의욕이 좀 더 날까 해서.”
“황녀님은 정말 인류애가 넘치시네요. 죽이고 싶은 사람이 없다고 마귀를 그리시다니.”
발레리의 요청에 따라 프리다는 똑같은 마귀 그림을 다섯 장이나 그려냈다.
이제 본격적인 훈련을 시작할 차례였다.
석실 연무장 한쪽엔 싯누렇고 묵직한 무언가가 수북이 쌓여있었다. 짚단으로 만든 사람 크기의 인형 스무 개였다.
오늘 검술 훈련에 쓰일 용품으로, 발레리가 지난주 미리 주문해둔 것이었다.
발레리는 바닥에 놓인 짚단 인형들을 일으켜서 연무장 한가운데 일렬로 세워두었다.
그리고 프리다가 그린 그림을 인형의 머리 부분에 하나하나 붙였다.
그렇게 프리다의 앞에는 짚단으로 만든 마귀 다섯 마리가 나란히 놓였다.
어깨높이만 한 마귀부터 켄드릭만큼이나 키가 큰 마귀까지. 이들의 목 부분을 깨끗이 쳐내는 게 오늘 프리다의 목표였다.
“자, 그럼 마귀들의 모가지를 댕강 잘라볼까요? 고통 없이 빨리 보내주려면 이렇게 하시면 돼요.”
사락—
발레리가 인형 하나를 세워서 시범을 보였다. 순식간에 단면이 깨끗하게 잘려나갔다.
“사람 목 치는 느낌이랑은 다르긴 하겠지만, 기분만 내 보자고요. 마귀 놈들 목 한가운데를 노리시면 돼요. 제일 큰 놈 칠 때는 도약하는 거 잊지 마시고요.”
“응, 발레리한테 배운 대로 휘둘러 볼게요!”
프리다가 의욕 넘치는 목소리로 검을 뽑아 들었다.
“어, 근데 저게 뭐죠?”
프리다가 마귀들을 향해 돌진하기 직전, 발레리가 그녀의 뒤편에 있는 무언가를 가리켰다.
프리다는 뒤를 돌아 발레리가 무엇을 가리키는지 확인했다.
석실 연무장 벽 한가운데 가늘고 길쭉한 무언가가 썰썰 기어 다니고 있었다.
지네였다.
다리가 족히 서른 개는 달린 것 같았다.
“와, 딱 걸렸어. 내가 벌레 잘 잡는 걸 어떻게 알고 나왔지.”
발레리는 눈에 불을 켜고 칼자루를 쥔 채 지네를 향해 휘적휘적 다가갔다.
그런 그녀의 앞을 프리다가 대뜸 막아섰다.
“자, 잠깐만요, 발레리.”
“왜 이러세요, 황녀님? 쟤 빨리 안 잡으면 어디 숨었다가 또 나오는데.”
“…내가 해볼게요. 그러고 싶어요.”
검 자루를 꽉 쥔 프리다의 두 눈에 광채가 번뜩였다.
“예? 황녀님께서요? 괜찮으시겠어요?”
“응,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네, 그럼 그러세요.”
지네 한 마리 가지고 이렇게까지 비장할 일인가. 발레리는 프리다의 결연한 표정을 보며 의아해했다.
징그러운 독충이긴 하지만 고작 벌레일 뿐인데. 굳이 본인이 잡겠다는 이유는 뭘까.
살생 연습이라도 하려는 건가.
침을 꿀꺽 삼킨 프리다는 검을 들고 지네를 향해 살금살금 다가갔다.
턱!
프리다는 꽤 그럴듯한 동작으로 지네의 허리 한가운데를 내리쳤다.
지네의 몸은 정확하게 반이 갈린 채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허리가 두 동강 난 상태에서도 지네의 목숨은 한동안 붙어있었다.
프리다는 잠자코 기다렸다. 지네의 무수한 다리가 꿈틀거림을 멈출 때까지.
드디어 모든 다리가 빳빳이 굳어 천장을 향했다.
지네의 죽음을 확인한 프리다는 뜻 모를 미소를 흘리며 석실 문 쪽으로 쪼르르 달려갔다.
그녀는 문을 열고 밖으로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그리고 가장 가까이에 서 있는 남자를 보며 눈꼬리를 휘었다.
“켄드릭, 잠깐 들어와 봐요!”
이제 ‘경’이라는 호칭을 빼고 이름으로 부르는 모양이었다.
켄드릭이 영문을 모르는 얼굴로 석실 연무장 안에 저벅저벅 따라 들어왔다.
“이거 봐요, 켄드릭. 내가 잡았어요.”
프리다가 바닥에 널브러진 지네의 사체를 검 끝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하하…. 이거 보여주려고 부르셨습니까?”
“켄드릭이 검으로 왕거미 잡았던 거 감명받아서, 나도 따라 해봤어요.”
“정확히 반으로 자르셨네요. 바로 치우겠습니다.”
켄드릭은 ‘황녀는 못 말려’라는 얼굴로 씩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는 곧바로 석실 한구석의 수납장에서 비를 가져와 사체를 치우기 시작했다.
둘의 대화를 지켜보던 발레리는 어안이 벙벙했다.
“왕거미라니? 너 검으로 왕거미 잡았어?”
왕거미 사건을 모르는 그녀는 켄드릭에게 자초지종을 물었다.
“아, 발레리. 너 예전에 휴가 갔을 때, 황녀님께서 왕거미를 발견하시곤….”
“석실에 왕거미가 나왔거든요. 내가 그거 피하려고 테이블 위에 올라갔다가, 거미가 갑자기 쫓아 올라와서 켄드릭한테 뛰어들었어요. 내가 팔다리로 꽉 매달려있었는데, 그 상태로 켄드릭이 검을 뽑아서 왕거미를 죽였어요.”
프리다가 당시 상황을 자세히 설명해 줬다.
발레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프리다가 말하는 장면을 머릿속으로 그려봤다.
켄드릭의 몸에 찰싹 감겨있는 프리다의 모습. 거미를 물리친 뒤 품 안의 황녀를 향해 미소 짓는 켄드릭.
남녀가 딱 눈 맞기 좋은 장면이었다.
발레리는 열심히 지네 사체를 수습하는 켄드릭의 모습을 말없이 쳐다봤다.
‘아하, 나 없을 때 그런 일이 있었구나.’
목 뒤로 쓴 침이 넘어갔다.
프리다는 작약 꽃망울 같은 연분홍빛 얼굴로 켄드릭의 빗자루질을 지켜보고 있다.
정말 뭐가 있긴 있나 보다.
‘그래, 이젠 정말 아무래도 괜찮아. 쟤가 평생 여자 한 명 안 만나고 살길 바랐던 것도 아니잖아? 상대가 황녀님이라면 더욱 환영해 줄 일이지.’
뭐든 포기하면 편해진다는 말은 사실이었다.
문제는 죄책감이었다.
‘내가 황녀님을 납치, 아니 데려간다면…. 켄드릭에게도 못 할 짓이 되는 건가.’
발레리는 또다시 까마득한 불안감에 빠져들었다.
의뢰인과 접촉해 본다던 두목 피어스는 아직까지도 연락이 없었다.
만나보긴 했을까.
약속을 받아내기는 했을까.
이러다 중간 접선일까지 시간이 가버리는 건 아닐까.
“…켄드릭, 시체 다 치웠으면 빨리 나가.”
“그래. 오늘 수업도 열심히 해. 황녀님, 저는 나가보겠습니다.”
“응, 이따 봐요.”
발끝을 향하던 발레리의 시선은 다시 프리다를 잡았다.
프리다는 문밖으로 걸어가는 켄드릭의 뒷모습을 응시하고 있었다.
“…황녀님, 그럼 이제 마귀들 한번 잡아 보실까요?”
발레리는 좀체 힘이 들어가지 않는 목청을 애써 쥐어짰다.
그래도 할 일은 해야 하니까.
***
꽤 자주 돌아오는 것 같은 정기 보고 시간.
테렌스는 이날 발레리에게 구운 대하 요리를 대접했다. 새우와 가재 등 갑각류를 좋아한다고 하기에.
발레리의 접시 위에는 새우 껍질이 수북이 쌓여있다.
그녀는 이미 세 마리를 후딱 해치운 뒤, 손이 불편한 테렌스를 위해 대하 껍질을 열심히 해체하고 있었다. 좋아하는 음식을 정성스레 준비해 준 그에 대한 보답이었다.
“황녀님께 죽이고 싶은 사람을 그리라고 시켰는데, 뭘 그리신 줄 아세요?”
“뭘 그렸지.”
“마귀요.”
“…마귀?”
“새빨간 얼굴에 눈깔은 노랗고 뿔 두 개 달린 마귀였어요. 얼마나 싫어하는 사람이 없으면 마귀를 그렸겠어요.”
“…그렇게 상상하고 있었구나.”
테렌스는 뭔가 짚이는 게 있는 듯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뭘 상상한다는 거예요?”
“글쎄…. 그나저나 그림은 왜 그리라고 한 거지.”
발레리와 대화를 거듭할수록 테렌스는 말수가 점점 늘었다. 이제 곤란한 주제가 나오면 화제도 돌릴 줄도 알았다.
“짚단 인형 얼굴에 붙일 그림이었어요. 그냥 베는 것보단 그렇게 하는 게 좀 더 몰입감이 좋을 것 같아서요. 키 작은 인형부터 키 큰 인형까지 높이별로 멱따는 연습 했어요.”
“…키는 아마 크지 않을까.”
“누가요?”
테렌스는 당황했다.
속으로 하던 추측이 입 밖으로 흘러나와 버려서.
똑똑.
마침 노크 소리가 들렸다.
“레이븐입니다.”
테렌스는 잠시 고민했다. 이 시간에 문을 두들긴 걸 보면 나름대로 중요한 일이겠지 싶었다.
“무슨 일이냐.”
“볼드윈 공작가 영애가 찾아왔습니다. 잠시 인사만 하고 간다는데요.”
테렌스는 잊고 있던 게 떠올랐다는 듯 눈을 치켜떴다.
보조개가 희미해지는 걸 보니 딱히 반가운 손님은 아닌 듯했다. 그는 잠깐 침묵하더니 나직이 대답했다.
“…들어오라고 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