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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자한테는 관심 없는데요 (35)화 (35/173)

35화

“딱 봐도 과로네요, 과로.”

불안감을 견디다 못해 발레리는 입을 열고 말았다.

“…과로라고?”

발레리의 갑작스러운 발언에 테렌스는 더 자세한 설명을 요구했다.

“제가 보초 생활해봐서 알잖아요. 교대근무하면 밤낮이 수시로 바뀌어서 엄청 피곤해요. 서 있다가 갑자기 졸도하는 병사들 한둘이 아니에요. 석실 문지기분들도 가끔은 졸던데.”

“흠….”

“그 교대근무라는 게, 수면장애 얻는 지름길이더라고요. 일할 땐 잠이 쏟아지는데요. 막상 등 대고 자려면 잠도 안 와요. 병사들이 괜히 불면증이나 기면증 걸리는 게 아니에요.”

발레리의 열띤 주장에 테렌스는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그게요, 전하. 사람이 너무 피곤하면 꿈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기도 하잖아요? 그 병사도 아마 그런 게 아닐까요. 사라진 물건도 없고, 자물쇠도 잠겨있었으면.”

발레리의 구구절절한 설명이 이어졌다.

테렌스는 잠시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가 이렇게 결론을 냈다.

“그렇다면…. 병사들의 피로도를 낮춰야 해결되는 문제겠구나. 역시 인력 보충이 필요할 것 같다. 그리고 무기고 같은 경우는 한 명보단 두 명씩 지키는 게 낫겠지.”

발레리는 움찔했다. 쓰러진 병사가 피곤해서 헛것을 봤다고 설득하는 게 목적이었는데.

황태자의 생각은 한발 더 나아가고 있었다.

‘아 인력 보충하면 안 되는데. 그럼 기절시켜야 할 사람들만 늘어나잖아.’

“저, 전하, 근데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요? 하하…. 그럼 인건비가 많이 들잖아요.”

발레리가 태세를 급격히 전환했다. 어떻게든 경비 인력 보강은 막아야 하니까.

“사실 중앙궁의 병력 보충은 내 소관이 아니다. 최종 인사권은 황제 폐하께 있으니, 네 의견을 그대로 전해드려야겠다. 예산이 부족할 일은 없을 테니 걱정은 말고.”

“아, 그게 어, 인력 보충보다는요. 그냥 잘 먹이고, 침상을 좋은 거로 바꿔 주기만 하면….”

“그 의견도 접수하겠다. 네가 이토록 병사들의 복지에 관심이 많은 줄은 몰랐군.”

테렌스는 그녀를 보며 흡족하게 미소했다.

또다시 환하게 피어난 그의 보조개를, 발레리는 불안한 눈빛으로 응시했다.

뭔가 단단히 잘못돼가고 있었으니까.

‘아이씨, 안 되는데. 지키는 애들 많아지면 뒤지기 힘들어지는데.’

눈앞이 팽글팽글 돌았다.

어쩌겠나. 한동안 몸 사려야지. 

***

밤이 내렸다.

테렌스는 랜턴을 들고 황태자궁 중앙계단을 천천히 올랐다. 물론 발레리를 채플까지 바래다주고 오는 길이었다.

다음 보고 시간엔 그녀에게 무엇을 대접할까, 고민하며 침실 문 앞까지 다다른 순간.

“도통 포기를 모르시네요. 그 아가씨 보는 눈빛이 그대로십니다.”

레이븐이 팔을 엇건 채 문을 가로막고 있었다. 평소처럼 빤빤하면서도 영 탐탁지 않은 얼굴이었다.

“…아직 친해지고 있는 단계다.”

“역시 그 아가씨 눈치에 문제가 있는 거였군요? 그렇게 티를 내시는데 아직도 그 단계라니. 정기적으로 만나신 지 한 달도 넘지 않았습니까?”

“벌써 그렇게 됐나. 얼마 안 만난 것 같은데.”

테렌스는 속으로 보고 횟수를 셌다. 아직 열 번도 되지 않았다.

레이븐은 고개를 내저었다.

“전하, 정말로 그 아가씨한테 진지하신 거예요?”

“안 진지해 보이나?”

“아니 그게, 제 말은…. 그 아가씨와의 미래를 진지하게 생각하시는 거냐고요.”

“…한다. 틈날 때마다.”

레이븐은 눈꺼풀을 꽉 눌러 닫았다.

점점 마음이 깊어지나 싶더니, 드디어 올 게 왔구나.

“칼레바니아 역사를 새로 쓰셔야 할 텐데요. 평민 출신 황태자비는 여태 한 명도 없었습니다. 황제 폐하와 황후 폐하께서 동의하실 거라고 보세요?”

“너야말로 너무 앞서간 것 같은데. 아직 당사자의 마음조차 얻지 못했다. 그 정도 미래까진 아직….”

“전하, 그거 아세요?”

레이븐이 대뜸 말허리를 끊자 테렌스는 미간을 좁혔다.

“…그게 뭔지 말해야 알지.”

“에이바 양이 청혼을 다 물리고 있다던데. 이유는 아실 테고요. 곧 황후 폐하의 시녀로 들어온답니다.”

“볼드윈 공작가 영애가 왜 굳이 어머니의 시녀로?”

“왜겠어요. 예비 시어머니한테 잘 보이겠다는 거 아닙니까.”

테렌스의 얼굴에 살얼음이 깔리기 시작했다.

그에게 에이바는 볼드윈 공작의 어린 딸이자 건국제 무도회 춤 상대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목소리 낮춰라, 레이븐. 누가 누구의 시어머니란 거냐.”

“제가 괜히 포기하라고 말씀드린 게 아닙니다. 그 아가씨는 차라리 에이바 양이랑 결혼하고 나서 측실로 들이시든가요.”

“굳이 왜 그래야 하지? 그건 공녀에게도 예의가 아니다. 황실이 후궁을 두지 않은 지도 오래고.”

레이븐은 결국 목에 핏대를 세웠다.

“전하, 다른 일은 잘하시면서 왜 이런 덴 현실감각이 없으세요? 아무리 볼드윈 공작이 뒤가 구려도 그쪽이랑 척 져서 좋을 거 없잖습니까.”

“그 집안과 혼약을 안 맺는다는 이유로 척까지 지게 된다는 건 비약이다.”

“그건 그렇지만…. 그 집 장남 사이러스, 차남 리처드 둘 다 황녀님한테 뻥 차였잖아요. 근데 그 집 막내인 에이바 양까지 전하께서 거절하면, 공작가랑 척 지자는 게 아니고 뭡니까?”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귀족파 거두인 볼드윈 공작은 그동안 황실에 끊임없이 혼담을 넣었다.

하지만 장남과 차남 모두 보기 좋게 프리다로부터, 정확히 말하면 황제로부터 퇴짜를 맞았다.

황제는 공작의 체면을 생각해 프리다의 건강 핑계를 댔지만, 공작은 불편한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공작이 올 초 황제의 탄신 연회에 올린 공물의 숫자가 미묘하게 줄어들었으니 말이다.

“레이븐, 너도 알다시피 황실은 국혼을 추진할 심적 여유가 없다. 프리다가 일을 치르기 전까진.”

“그 공녀도 멀리 내다보고 시녀로 들어오는 것 같은데요. 전하와의 관계를 장기적으로 쌓아 올리려고요.”

“…….”

“하하, 머릿속이 아주 복잡하시죠? 저도 그 공녀 별로 안 좋아해요. 그래도 현실적인 측면에서 깊이 고민해 보시라고요. 전 이만 퇴근합니다.”

“…쉬어라.”

레이븐은 그제야 테렌스의 침실 문 앞에서 비켜주었다.

제 방으로 돌아가려던 그는 다시 상전을 향해 방향을 틀었다. 꼭 당부하고 싶은 말이 하나 생각나서.

“잠깐만요, 전하.”

“…왜.”

“제가 진짜 노파심에서 말씀드리는 건데요.”

“…….”

그를 말없이 내려다보는 테렌스의 얼굴에는 무거운 피로감이 역력했다.

레이븐은 까치발을 들고 테렌스의 귓가에 이렇게 속삭였다.

“속도위반만큼은 안 됩니다.”

속도위반이라니.

침실 문고리를 잡고 있던 테렌스는 순식간에 식은 촛농처럼 굳어버렸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줄곧 독신이었던 그에겐 너무나도 자극적인 단어였다. 

손조차도 닿아본 적이 없는데.

레이븐은 테렌스의 홧홧해진 뒷덜미를 확인하곤 쿡쿡 웃으며 다시 뒤돌아섰다.

“…그래도 속도위반이 무슨 뜻인지는 아시는 모양이네.”

***

칼레바니아 북부를 다스리는 볼드윈 공작가는 개국공신 집안이다. 초대 황제 엘로이스와 함께 제국의 기틀을 놓았던.

나라가 세워진 지 700년이 다 돼가니 개국공신 가문으로서의 명예는 빛이 바랬지만, 가장 부유하고 위세 강한 가문이라는 사실만큼은 변하지 않았다.

공작가는 120여 년 전 북부로 침공해온 크세니아와의 전쟁에서 큰 공훈을 세우기도 했다.

그런데도 황실은 공작가보다는 충직한 기사 가문인 남부 프레이저 후작가를 공공연히 더 챙겼다.

크세니아와의 전쟁에 병력을 가장 많이 투입한 건 공작가였으나, 남부 후작령에서 나온 마력석이 없었다면 이기기 힘든 싸움이었기 때문이다.

전쟁 초기 던컨 황제는 불명의 이유로 국경 남쪽 미개척지에 손을 뻗쳤다. 그곳에서 발견된 마력석 광산은 지리상 모두 후작령에 편입됐다.

후작가는 마력석을 빠르게 채굴해 북부 전선으로 실어 나르면서 전쟁의 2등 공신으로 등극했다.

이후 황실은 후작가의 든든한 뒷배가 되어 볼드윈 공작가를 견제해왔다.

지난 한 세기 동안 프레이저 후작가는 마력석 수출을 통해 공작가만큼이나 융성했다. ‘북부는 볼드윈, 남부는 프레이저’라는 말이 나온 것도 이 시기부터였다.

물론 볼드윈 공작령에도 광산은 많았다. 황금과 다이아몬드, 에메랄드 등 진귀한 광물의 매장량이 풍부했다.

하지만 나라의 군사력을 뒷받침하는 마력석 앞에서는 그저 생김새만 화려한 돌멩이일 뿐이었다.

그리고 현재 가주인 오스카 볼드윈 공작은 가문의 위신을 더 확고히 세울 방법을 찾고 있었다.

일단은 화려하고 상징적인 ‘트로피’가 필요하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그게 칼레바니아의 살아있는 여신이자 황가의 가장 큰 보물, 만인의 연인인 황녀 프리다를 예비 며느리로 점찍은 이유 중 하나였다.

무엇보다 공작은 황제가 제 앞에서 벌벌 기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금이야 옥이야 키운 딸을 빼앗아 손아귀에 그러쥐고 있으면 내 말 한마디에 껌뻑 죽겠지. 내가 무슨 짓을 하더라도 손 놓고 지켜볼 수밖에 없을 거야.’

그러나 황제가 장남에 이어 차남의 구혼장까지 돌려보냈을 땐 이를 빠드득 갈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아름다워 봤자 이젠 스물넷 노처녀일 뿐인데…. 감히 우리 리처드까지 거절하다니. 황제를 주군으로 섬길 이유가 점점 사라지는구나.”

분노에 치를 떠는 공작을 만류한 건 그의 고명딸 에이바였다.

“아버지, 왜 그렇게 무서운 소릴 하세요. 황실에 등이라도 돌릴 것처럼.”

“에이바, 우리 가문이 그동안 황실의 홀대를 얼마나 참았는지 모르고 하는 말이냐. 황제놈의 번질거리는 면상만 생각하면 불면증이 도무지 낫지를 않는다. 그놈이 누구 덕에 보위에 올랐는데….”

아비의 말에 에이바는 고개를 갸웃했다.

‘흠, 굳이 황실과 혼약을 맺어야겠다면, 내가 황태자비로 들어가면 되는 거 아닌가.’

에이바는 볼드윈 공작 부부의 슬하 2남 1녀 가운데 막내였다.

그녀는 매년 9월 칼레바니아 건국제 무도회 때마다 테렌스의 첫 춤 상대이기도 했다. 그게 가장 서열 높은 귀족 가문의 여식에게 주어지는 특권이었으니까.

─전하께선 매년 춤 솜씨가 느시는 것 같아요.

─매년 똑같은 춤만 추니 그렇겠지.

에이바는 여섯 살 꼬마였을 때 아버지를 따라 방문한 황궁에서 테렌스를 처음 봤다.

첫인상은 충격이었다. 찬란한 백금발과 조각칼로 깎아낸 듯 완벽한 대칭을 이루는 얼굴. 눈이 시릴 정도로 냉랭한 분위기까지. 그야말로 황태자의 표본이었다.

하지만 십여 년이 지나도 친해지는 일은 쉽지 않았다.

─전하께선 평소에 뭘 하시나요?

─글쎄. 업무?

─업무 안 보실 때는요?

─공부.

─공부 안 하실 때는요?

─검술 수련.

‘얼굴, 키, 체형 전부 내 취향이긴 한데…. 사람이 뭐가 이렇게 딱딱해? 재미없게.’

그렇게 테렌스와는 대충 어색하진 않은 정도의 사이로 지내왔다.

최근까지도 그에게 특별한 감정은 없었다.

하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에이바는 굳이 황실의 며느리가 되겠다고 자원하고 있었다.

공작은 아들들의 혼담을 넣을 때와 달리 전혀 내켜 하지 않는 반응이었으나, 에이바는 고집스럽게 황궁에 입성하고야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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