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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자한테는 관심 없는데요 (34)화 (34/173)

34화

“로이?!”

꿈이었다.

상체를 벌떡 일으킨 발레리는 등에서 한기를 느꼈다. 옷을 흥건하게 적신 땀이 차갑게 식어버린 탓이다.

“하, 이런 꿈 너무 싫은데.”

발레리가 황녀의 검술 스승이 된 지 어느덧 두 달이 다 돼 간다.

잠시 임무를 잊고 있으라는 두목 피어스의 말을, 그녀는 곧이곧대로 따르고 있었다.

눈앞의 현실에 안주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도적단으로서의 기억과 정체성을 한동안 덮어두었다.

프리다와의 수업에 열중하노라면, 정말 황녀의 정식 검술 스승이라도 된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순간 그녀의 뇌리에 무언가가 스쳤다.

「황실의 보검을 가져오라」

피어스가 신경 써 달라 당부했지만, 잠시 망각하고 있었던 또 하나의 임무.

“내가 소홀히 한 일이 있었네. 그 망할 놈의 보검은 계속 찾아봤어야 했는데.”

황녀를 데려오라는 요구 사항은 보류하더라도, 황실의 보검을 탐색하는 작업은 재개할 수도 있었다. 그것조차 잊고 지내왔다니. 발레리는 잠시 눈을 감고 반성했다.

사실 두목으로부터 넘겨받은 물건도 있었다.

지난번 휴가를 내고 후작령의 아지트로 내려갔을 때, 피어스는 막 떠나려는 발레리에게 상자 하나를 건넸다.

─이게 뭐예요, 두목?

─혹시 도움이 될까 해서 챙겨봤어. 가서 열어봐라.

아직 짙은 밤이었다. 발레리는 침대맡 기름등에 불을 붙이고 침상에서 내려왔다.

그녀는 바닥에 엎드려 침대 밑 깊숙이 밀어뒀던 그 상자를 꺼냈다.

한동안 방치했던 상자 위에는 먼지가 제법 앉아있었다. 발레리는 기침을 쿨럭이며 덮개를 천천히 들어냈다.

상자에는 여러 가지 물품이 담겨 있었다.

흑색 작업복과 복면, 가죽 벨트, 질긴 밧줄, 각종 잠금 해제용 장치. 그리고 정체 모를 약병 하나. 피어스가 발레리를 위해 성심성의껏 구비해 둔 작업용 물건들이었다.

“이걸 이제야 열다니. 나 무슨 정신으로 산 거지.”

발레리는 금방 작업복에 몸을 끼워 넣었다.

그녀를 위한 맞춤 복장이었다. 걸리적거리지 않게 몸에 딱 붙는 디자인에 신축성까지 뛰어났다. 어떤 좁은 틈새라도 쉽게 빠져나올 수 있도록 미끈한 소재였다.

오랜 운동으로 단련된 상체의 섬세한 잔근육, 정교한 곡선으로 갈라진 허벅지 실루엣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발레리는 그 위에 특수 제작된 가죽 벨트를 둘렀다. 잠금 해제 도구도 하나하나 꽂았다. 단검도 차고, 평소에 차던 장검도 챙겼다.

마지막으로 복면까지 썼다. 머리카락 한 올 한 올을 모두 감춰주는 복면이었다.

뚫려있는 눈구멍 사이로 그녀의 검은 눈동자가 번뜩였다.

발레리는 완연한 도적의 모습이 됐다.

“그래. 이제야 진짜 내 옷 입은 기분이네.”

***

발레리가 중앙궁에 도착한 건 두어 시간 뒤였다.

그녀는 동관 사각지대의 기둥을 타고 옥상까지 올라, 그 언저리의 사자상 아래 어금니에 밧줄을 꽉 묶었다.

밧줄을 몸에 고정하고 벽을 타 내려오다 보니, 여느 날처럼 4층 복도 창문이 열려있었다.

발레리는 그 안으로 쏙 몸을 집어넣었다.

무기고는 황제의 연무장 바로 옆에 위치해 있었다. 이곳은 기사나 병사들의 무기고와는 달랐다. 황제가 직접 쓰는 귀한 무기를 보관하는 별도의 창고였으니까.

창문은 없고 출입문은 단 한 개뿐. 그야말로 걸리면 독 안에 든 쥐처럼 빠져나갈 수 없는 구조다.

이날은 꽤 고참으로 보이는 보초 한 명이 지키고 있었다.

다행히 보초는 늘 그렇듯 자고 있었다. 간이 의자에 목이 뒤로 꺾이도록 기대앉은 채 다르릉거리며 코를 고는 소리가 요란했다. 이따금 숨이 막히는지 컥컥대기도 했다.

‘예전부터 느꼈지만, 이분들은 참 경각심이 없어. 털려본 적이 없으니 해이할 수밖에 없는 건가.’

발레리는 황태자궁 근위병 시절에도 이곳에 몇 번 잠입했었다. 새벽엔 누가 보초를 서든 늘 이렇게 자고 있어서 가능한 일이었다.

이 무기고에는 웬만한 장정 정도 크기의 무기 상자가 무려 삼백 개였다.

그동안 뒤진 건 오십여 상자에 불과했다. 이곳의 검들은 충분히 진귀해 보였지만, 황실의 보검이라고 불릴 만큼 특별해 보이는 물건은 없었다.

발레리는 숨을 죽이며 문 앞에 다다랐다.

그녀는 피어스가 준 락픽 두 가닥을 자물쇠 구멍에 천천히 밀어 넣었다. 섬세한 각도 조절이 관건인 작업이었다.

몇 초간 돌린 끝에 손끝에서 딸깍하고 느낌이 났다. 역시 도적질도 장비가 받쳐줘야 수월한 법. 이전에 쓰던 락픽보다 따는 속도가 훨씬 빨랐다.

철컥.

자물쇠 풀리는 소리가 제법 컸다. 문 주변에 걸쳐진 쇠사슬이 잠을 방해당한 맹수처럼 낮게 그르렁댔다.

생각보다 큰 소리에 발레리는 보초 쪽을 슬쩍 살폈다.

보초는 미동도 하지 않고 있었다.

‘제대로 숙면 중이시네. 감사합니다.’

발레리는 무기고 문을 최대한 천천히 움직였다. 아무리 속도를 늦춰도 쇠사슬 소리와 삐걱대는 경첩 소리가 한껏 민감해진 귓가를 파고들었다.

한 뼘 반 정도의 공간이 나오자 곧바로 몸을 그 사이로 밀어 넣었다.

화려한 무기 상자들이 각 선반에 질서정연하게 정리돼 있었다. 50상자씩 총 6열이었다.

“아으, 쇠 냄새. 1열까진 뒤졌던 것 같으니까, 2열부터 봐야지.”

발레리가 자루에서 망사 주머니를 하나 꺼냈다. 그 속엔 반딧불이 수십 마리가 꼬물거렸다. 어두운 곳에서 물건 뒤질 땐 등불보단 반딧불이가 제격이었다.

무기고까지 오는 데 시간이 걸린 건 성내 호숫가에서 반딧불이를 잡아야 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다람쥐처럼 날래게 2열 선반 꼭대기에 올랐다. 그리고 맨 위 상자의 덮개를 조심조심 열었다.

“아 뭐야, 이거 검 아니고 창이잖아. 어쩐지 상자 길이가 다른 것보다 길다 했네.”

그렇게 달그락거리며 근처 상자들을 뒤적이길 20여 분째. 다들 하나같이 비싸 보이는 무기들이긴 한데, 이렇다 할 느낌은 전혀 오지 않았다.

‘하, 황제가 웬만한 무기는 다 여기 보관한다고 들었는데. 왜 아무리 봐도 이거다 싶은 게 없지.’

그녀는 얕게 한숨을 내쉬며 방금 연 상자의 덮개를 슬며시 내려놨다.

“흐아암…. 문이 왜 열렸지? 거기 누구 있습니까?”

발레리의 입에서 헉 소리가 절로 튀어나왔다. 머리털이 푸스스 곤두서고, 온몸의 살갗에 돌기가 일어났다.

세상모르고 자던 보초가 깨 버릴 줄이야. 무기고가 열린 걸 발견하고 무슨 일인가 해서 들어온 모양이었다.

발레리는 얼른 반딧불이 뭉치를 자루에 주워 담아 어둠 속에 몸을 숨겼다.

‘아, 실수했다. 자고 있어도 기절을 시켰어야 했는데.’

그녀는 선반의 골조 사이로 보초의 위치를 파악했다. 보초는 랜턴을 들고 있어서 어디쯤 있는지 바로 보였다.

발레리는 바닥에 사뿐 내려앉았다.

보초는 두리번거리면서 무기고 안쪽으로 어기적어기적 진입하고 있었다. 아직 졸음이 깨지 않아 동작이 굼떴다.

그새 발레리는 뒤꿈치를 세우고 선반 사이를 빙 돌아 보초의 뒤통수 쪽으로 슬그머니 접근했다.

그녀는 눈초리를 날카롭게 세우고 보초의 뒷덜미에 초점을 맞췄다.

턱.

그의 목뒤 급소에 발레리의 단단한 손날이 정확히 꽂혔다. 보초의 몸은 버들가지처럼 하느작거리다 앞으로 꽈당 고꾸라졌다.

동시에 발레리는 보초의 손에서 빠져나간 랜턴을 향해 온몸을 던졌다.

세이프. 슬라이딩 캐치로 랜턴이 깨지는 사고만은 막았다.

그제야 발레리는 바닥에 코를 박고 쓰러진 보초에게 눈길을 주었다.

“아이고, 아프게 넘어졌네. 코는 안 깨졌길 바랄게요.”

발레리는 그냥 나가려다 멈춰 섰다. 뒤처리까지 완벽하게 끝내야 뒤탈이 없을 테니까.

그녀는 보초의 몸을 질질 끌어 무기고 바깥으로 빼냈다.

발레리는 곤죽이 된 묵직한 몸을 간이 의자 옆에 대충 기대놨다. 랜턴과 함께.

보초의 왼쪽 콧구멍에서 검붉은 핏방울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목치기 때문에 앞으로 고꾸라지면서 바닥에 코를 찧은 듯했다.

“으, 코피 터뜨려서 죄송해요. 오늘 밤 일은 꿈이라고 생각해 주신다면 고맙겠습니다.”

발레리는 무기고 자물쇠를 잽싸게 걸어 잠근 뒤 다시 창문 밖으로 빠져나갔다.

***

그렇게 시간은 다음 날 저녁까지 흘렀다.

정기 보고가 있는 금요일. 발레리는 딱 일곱 시에 맞춰 테렌스의 집무실에 도착했다.

“오늘은 어딘가 피곤해 보이는데.”

“아, 꿈자리가 뒤숭숭해서 잠을 잘 못 잤어요.”

“저녁 먹고 바로 바래다줄 테니 일찍 쉬어라.”

“하하, 정말요? 감사합니다….”

아랫사람이 피곤해 보인답시고 보고를 면제해 주다니. 황태자는 겪을수록 의외인 부분이 많은 사람이었다. 첫인상처럼 빡빡하기만 한 성격은 아닌 것 같았다.

두 사람은 식사가 차려진 테이블에 마주 앉았다. 오늘의 메뉴는 파슬리와 로즈메리, 생강을 곁들인 송어 요리였다. 발레리는 피곤함조차 잊은 채 군침을 삼켰다.

똑똑.

발레리가 포크를 잡고 전투태세를 취하자마자 노크 소리가 들렸다.

“레이븐입니다.”

“들어와라.”

여태 레이븐은 단 한 번도 발레리의 정기 보고 시간에 노크한 적이 없었다. 상관이 가장 공들이는 시간을 방해할 마음은 조금도 없었기에.

하지만 오늘은 당당히 문을 두드렸다. 중요한 용무가 있었기 때문이다. 테렌스도 이를 알고 선뜻 그에게 들어오라고 지시했다.

레이븐이 뚜벅뚜벅 걸어 들어왔다. 그는 여느 때처럼 초록색 로브를 입고 있었지만, 평소와 달리 꽤 심각한 표정이었다.

“그 쓰러졌다는 무기고 보초, 진술 끝났어요.”

“그래, 뭐라고 진술했지.”

“분명히 문이 열려있고 인기척이 있어서 들어갔다는데요. 다음 순번 병사가 깨워서 일어나 보니 문밖이었다고 그러더라고요. 다시 보니 자물쇠는 잠겨있었는데, 쇠사슬이 좀 느슨해져 있었답니다.”

지금 무슨 얘길 하는 거지? 발레리의 심장 밑바닥이 쿵 내려앉았다.

레이븐은 어젯밤 중앙궁 무기고에서 있었던 일을 말하고 있었다.

그저 해프닝으로 끝날 줄 알았는데. 황태자에게 보고가 들어갈 정도로 일이 커질 줄이야.

쇠사슬을 좀 더 빡빡하게 조일 걸 그랬나. 뒤늦은 후회가 물밀듯이 밀려왔다.

“흠, 무기고에서 사라진 건 없고?”

“네, 전수조사 끝났는데 다 그대로 있대요.”

발레리의 손금을 따라 식은땀이 줄기줄기 흘렀다. 제 발 저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니까.

나름대로 깔끔하게 마무리했다고 생각했는데. 보초의 기억력이 도와주지 않았다.

“정말 사라진 게 하나도 없었나?”

“네, 목록이랑 대조해 본 결과 전부 온전히 남아 있었다고 하던데요.”

“흠…. 도둑이 든 건 아니란 건가. 그렇다면 병사는 대체 왜 쓰러져있던 거지.”

어느덧 발레리의 관자놀이 위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새카만 눈동자가 갈 길을 못 찾고 이리저리 헤맸다.

‘하, 어떡하지. 그냥 가만히 있을까? 아니면 무슨 말이라도 꺼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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