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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자한테는 관심 없는데요 (33)화 (33/173)

33화

“하하. 고맙긴요. 별말씀을 다 하시네.”

“왜 말을 더듬는 거지.”

“저는 성보다는 이름으로 불리는 편이 훨씬 좋거든요.”

테렌스는 조금 전 자신이 그녀를 어떻게 불렀는지 되짚으며 고개를 갸웃했다.

“분명 내가 이름으로 불렀을 텐데, 아닌가?”

“하하, 근데 꼭 전하께서 그렇게 부르시면 참 어색하더라고요.”

“그럼 다시 로빈슨이라고 부르는 편이 낫겠나?”

“아, 아뇨. 그건 아니고요. 편하신 대로 하시라고요.”

내 이름을 있는 그대로 불러주는 건데 뭐가 이리 어색한 걸까. 발레리는 괜히 쑥스럽고 민망했다. 그녀는 포크와 나이프를 양손에 집어 들고 애꿎은 오렌지 타르트를 서걱서걱 잘라냈다.

그녀는 그중 제일 큰 조각을 푹 찍어서 입안 가득 밀어 넣었다.

바닐라 시럽을 입힌 오렌지 과육이 입안에서 토도독 터졌다. 턱 근육이 아릴 만큼 새콤달콤했다. 그녀의 콧잔등이 찡긋하고 구겨졌다. 오물거리던 도톰한 입술이 양옆으로 쭉 휘어지며 기분 좋은 곡선을 그려냈다.

테렌스는 그녀의 식사 장면을 조용히 감상했다.

오렌지 타르트를 먹어보지 않고도 어떤 맛인지 알 수 있었다. 발레리의 얼굴에 모든 게 투명하게 내비치고 있었으니까.

그녀의 다채로운 표정은 입에 들어가는 음식의 종류에 따라 시시각각 변화했다. 오늘처럼 단 음식을 먹을 땐 입꼬리가 하늘로 치솟았고, 잘 익은 고기를 음미할 땐 눈동자가 흑진주처럼 반득거렸다.

‘먹는 걸 지켜보는 것만으로 이렇게 재미가 있다니. 최대한 다양한 음식을 먹여보고 싶어지는군.’

아무리 생각해도 발레리는 그가 쏟아내는 관심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정말 오로지 섭식 행위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레이븐의 말에 괜히 우려했던 것 같다. 대차게 까기는 무슨.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인데.’

테렌스의 입가에 한층 더 깊고 또렷한 보조개가 팼다. 생크림처럼 보드라운 미소가 얼굴 위로 떠올랐다.

둘의 시선이 마주쳤다.

황태자가 어울리지 않게 방싯방싯 웃고 있었다. 발레리는 타르트 부스러기가 덕지덕지 붙은 입술 양 끝을 시원하게 끌어올리며 화답했다.

속으로는 식은땀이 흘렀다.

‘보면 볼수록 적응이 안 되네. 안 그러던 인간이 왜 자꾸 쳐웃고 난리지? 약간 미친놈 같은데 너무 예뻐서 뭐라고도 못하겠다….’

좋은 게 좋은 거겠지. 그 트레이드마크 같은 무표정보다는 나으니까.

발레리는 눈썹을 찡긋하며 블루베리 시폰 케이크 조각으로 포크를 옮겼다.

***

발레리가 석실을 떠난 뒤, 프리다는 한껏 긴장한 얼굴로 혼자 테이블을 지키고 있었다.

누군가의 노크를 기다리고 있는 참이었다. 출입 허가용 종을 쥐고 있는 그녀의 손은 식은땀으로 축축이 젖어있었다.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만으로도 그녀는 누구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켄드릭만의 박자와 세기가 있었으니까.

프리다는 팔딱대는 가슴을 진정시키려 크게 심호흡한 뒤 종을 울렸다.

잘게 떨리는 맑은 종소리가 철문 밖으로 흘러나왔다. 벌어지는 문틈 사이로 켄드릭이 늠름하게 걸어 들어와 그녀에게 경례했다.

“황녀님, 저녁 식사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건 내가 하고 싶은 질문인데. 오늘도 같이 먹을래요?”

“…아.”

문가에 멈춰 선 켄드릭은 시선을 바닥에 내리깐 채 동상처럼 굳어있었다. 기실 당황한 기색이었다.

프리다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일단 좋은 신호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역시…. 내 제안이 무리였던 걸까요.”

켄드릭은 다시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봤다. 강한 턱선이 어느 때보다 돋보였다.

“…아닙니다. 2인분으로 준비하겠습니다.”

평소보다 기합은 빠져있었지만 목소리만큼은 또렷했다.

“그럼, 앞으로도 계속?”

프리다는 마음이 얼마나 급한 걸까.

일주일 생각할 시간을 준다면서, 며칠이나 지났다고 벌써 답변을 요구하고 있었다.

켄드릭은 혼란스러웠다. 상전으로 모셔온 황녀를 여자로서도 대해야 하는 상황이라니.

‘정말 식사만 같이해드리면 되는 건가. 이분이 기대하는 걸 내가 드릴 수는 있을지 모르겠는데….’

그는 마른침을 삼킨 뒤 결국 이렇게 답했다.

“네, 그리하겠습니다.”

프리다는 기쁨을 감추지 못한 채 켄드릭을 향해 쪼르르 달려갔다.

혹시나 팔을 벌려 안아주지 않을까 기대했으나, 그는 뻣뻣한 자세로 서 있기만 했다.

품을 내주지 않는 그에게, 프리다는 아쉬움을 감춘 채 천천히 오른손을 내밀었다.

“내 제안에 응한 대가는 있을 거예요. 경이 무엇을 원하는지 조금은 알고 있으니까.”

프리다의 손은 켄드릭의 손아귀 안에 쏙 감춰질 만큼 자그마했다.

켄드릭은 황녀의 짙푸른 눈을 직시하며 악수에 응했다.

프리다는 자신만만하게 미소 지었다. 

그녀는 이미 켄드릭에 대한 제1 기사단장의 인사평가서를 입수해 정독한 뒤였다.

‘야망 있는 사람이라고 적혀 있었지. 원하는 게 뭘까. 내가 이뤄줄 수 있는 거면 좋을 텐데.’

***

마침내 찾아온 주말.

테렌스는 어김없이 짬을 내서 석실을 찾았다. 프리다의 근황을 체크하기 위해서다.

훈련 상황 점검이 목적이었다. 사실 수업과 관련된 내용이라면 발레리의 간접 보고보다는 이렇게 프리다의 생생한 후기를 듣는 편이 훨씬 나았다.

프리다는 언제나처럼 발레리와의 수업 후기를 실감 나게 들려주었다. 고운 목소리로 쉴 새 없이 재잘대는 것이 마치 이른 아침 숲속의 카나리아 같았다.

그녀는 달거리를 다시 시작했다는 희소식도 전했다.

“다행이다. 부모님께서 기뻐하시겠네.”

“고마워, 오빠. 이게 다 발레리 덕이지 뭐야. 이전보다 훨씬 많이 먹는데 하나도 안 더부룩하고 즐거워. 몸이 튼튼해지고, 속도 한결 편해져서 그런 것 같아.”

테렌스도 똑같은 사람의 얼굴을 떠올리며 입가에 보조개를 살포시 띄웠다. 그 또한 일주일에 두 번 있는 그녀와의 식사가 낙이었으니.

오라비의 얼굴을 가만히 관찰하던 프리다는 미간을 구기며 질색했다. 속에서 불쾌한 무언가가 부글거리며 치솟았다.

“그 표정은 뭐야, 오빠?”

“왜.”

“처음 보는 표정을 지어서. 왜 그러고 웃어?”

“마음에 안 드나?”

“응. 하지 마.”

“왜.”

“너무 느끼해서 때리고 싶어.”

프리다는 자그마한 주먹을 꼭 쥐더니 앞으로 불쑥 내밀었다. 정말 한 대 쳐버리고 싶다는 듯이.

“느끼…. 하다고?”

“응. 속이 느글거려. 나랑 한번 대련해 볼래? 오빠 발레리한테도 졌다며. 왠지 나도 이길 수 있을 것 같아.”

분명한 도발이었다. 테렌스의 얼굴이 평소의 시니컬함을 되찾았다.

“까불지 마라. 아직 왼손으로 너 정도는 이길 수 있다.”

그는 굳게 다짐했다. 앞으로 여동생 앞에선 이렇게 웃지 말아야겠다고.

“크흐흐, 장난이야 오빠. 있잖아, 나는 내가 일종의 시한부라고 생각해.”

프리다의 자극적인 언사에 테렌스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게 무슨 소리지. 알아듣게 말해.”

“그래서 그전까지는 내 마음 가는 대로 하고 싶어. 뭐든지 간에.”

“넌 언제든 마음 가는 대로 할 수 있을 텐데.”

“…아니, 나 실패할 수도 있는 거잖아.”

프리다는 미세하게 떨리는 아랫입술을 윗니로 꽉 물어 고정했다. 테렌스는 한숨을 쉬며 테이블 위에 놓인 여동생의 손목을 잡았다.

“약한 소리 하지 마. 넌 신탁까지 받았어. 그걸 할 수 있는 사람은 너밖에 없고, 그 이후에도 넌 자유다.”

그는 평소보다 강한 어조로 여동생을 나무랐다.

하지만 프리다는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었다.

“나 지금 행복하긴 해. 예전보다 점점 나아지고 있어서. 그런데 아직은 모르겠어. 내가 할 수 있을지.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고 생각하면 무기력해져.”

“…프리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어. 살면서 내가 못 해 본 게 너무 많아. 석실 안에서라도 할 수 있는 건 뭐든 해야겠어.”

어느새 프리다의 큰 눈망울에 투명한 이슬이 그득히 고였다.

그녀가 옷소매로 물기를 훔치자, 테렌스는 재킷 안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얼른 내밀었다.

“난 아직도 이해가 안 가. 왜 하필이면 날 선택했을까? 오빠처럼 준비된 사람이 있는데. 왜 굳이 나여야만 했을까….”

“프리다, 지금까지 잘해왔잖아. 이제 그만….”

프리다가 눈물을 닦던 손수건에 코를 팡 풀자 테렌스는 이맛살을 살짝 찌푸렸다.

“오빠 손, 결국 나 때문에 그런 거잖아…. 그 장갑 낀 손 볼 때마다 너무 괴로워서 미치겠어. 그래서 더 조급해져.”

오른손 이야기가 또 나오고야 말았다.

테렌스의 목울대가 바짝 섰다. 어느새 그의 눈썹엔 노기가 가득해지고, 꽉 닫힌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몇 번을 말해. 내가 이렇게 된 건 내 의지였다니까. 그만 좀 하라고!”

테렌스가 이렇게까지 목청을 높이는 건 드문 일이었다.

프리다는 화들짝 놀라 히끅거리기 시작했다.

그녀의 시야가 점점 더 뿌옇게 흐려졌다. 보석 같은 눈에서 물방울이 퐁퐁 솟구쳤다. 모두 짜디짠 줄기가 되어 창백한 두 뺨을 흠뻑 적셨다.

“미안해 오빠…. 흐흑….”

테렌스는 곧바로 후회했다.

이렇게까지 힘들어하는 동생 앞에서 왜 못 참고 언성을 높였을까.

그는 프리다의 맞은편에서 일어나 옆자리에 앉았다.

“…아니, 내가 잘못했다. 힘든 만큼 마음껏 울어. 그칠 때까지 옆에 있을 테니.”

그는 조용히 여동생의 어깨를 끌어안고 토닥였다.

태어날 때부터 프리다는 황제 부부의 사랑과 백성들의 축복을 한 몸에 받았다.

한때 테렌스는 자신이 쌍둥이 여동생의 그림자에 가려져 있다고 생각했다.

아무 조건 없이 존재 자체로 사랑받는 여동생이 마냥 부러웠고, 때로는 밉기도 했다.

지금은 그런 감정을 가지려야 가질 수 없었다.

프리다는 어쩌면 황태자인 그보다 더 버겁고 고통스러운 짐을 지고 있는지도 몰랐다.

***

“발레리, 내가 잘못했어….”

도적단 동료 로이가 쉰 목소리를 낸다. 몰골은 지난번에 본 그대로였다.

고통에 이지러진 표정. 온몸의 화상 자국과 성치 못한 손톱들. 매킬런 백작가에서 고문당한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로이가 사과하는 이유를 발레리는 알고 있었다.

그는 칼레바니아 곳곳에 있었던 도적단 펠런의 아지트 위치를 대부분 발설했다. 원망스러웠지만 이해 못할 일은 아니었다. 그렇게 모진 고문을 당했다면 누구라도 그랬을 터다.

“미안해.”

그가 발레리의 손목을 힘없이 감싸 쥐었다. 그런데 이상하다. 피부에 닿은 로이의 손이 점점 싸늘하게 식어갔다.

툭.

로이가 고개를 떨구었다. 휘몰아치는 폭풍에 맥없이 꺾여버린 나뭇가지처럼.

“로, 로이! 왜 그래!”

흔들어도 반응이 없다. 창백한 뺨을 툭툭 쳐 봐도 마찬가지였다.

왜 이러는 걸까. 마치 죽은 사람처럼.

발레리는 로이를 끌어안고 왼쪽 가슴에 귀를 댔다. 심장이 뛰어야 하는데,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이윽고 어둠이 그녀의 눈앞에 들이닥쳤다.

정신을 차려보니 흙바람이 부는 황량한 벌판 위였다. 로이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겁에 질린 발레리는 비명을 지르려 했지만, 목청이 말을 듣지 않았다. 힘을 다해 악을 써봤으나 허사였다. 입에선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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