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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자한테는 관심 없는데요 (32)화 (32/173)

32화

“부르셨습니까, 폐하.” 

“딱딱한 녀석 같으니. 사석에서는 폐하 소리 좀 집어치울 수 없겠느냐? 모르는 사람이 보면 내가 네 계부인 줄 알겠다.”

황제는 지나칠 만큼 깍듯한 아들에게 가끔 이렇게 툴툴거렸다. 테렌스는 친아버지인 황제에게 늘 ‘폐하’라는 경칭을 썼기 때문이다.

그러지 말라고 몇 번 잔소리를 해 봐도 호칭이 바뀌는 일은 거의 없었다.

테렌스에겐 경칭이 훨씬 익숙했다. 아버지인 황제를 맞닥뜨리는 건 각료회의나 안보회의, 각종 연회 등 공무를 보는 자리가 대부분이었으니까.

또 다른 이유도 있었다.

같은 부모 밑에서 한날한시에 쌍둥이로 태어났지만, 테렌스와 프리다의 성장 환경은 결이 달랐다.

프리다는 한 세기 반 만에 태어난 황녀인 만큼 모두의 관심과 사랑을 독차지했다. 건강했던 테렌스와 달리 프리다는 잔병치레가 많아 손이 많이 가기도 했다.

황제 부부는 매일 밤 어린 프리다를 끼고 잠들었다. 그들이 딸에게 밥 먹듯이 하던 말이 있었다.

─우리 프리다, 하고 싶은 거 다 해!

반면 테렌스는 황실에 당연히 태어났어야 할 아들이었다. 황위를 이어야 할 그는 엄격한 통제 대상이었으며, 모든 행동에 기대와 책임이 따랐다.

물론 그도 한창 사랑받고 싶은 어린아이였다. 유모의 만류에도 동화책을 들고 황제의 집무실에 찾아갔을 때 그는 이런 말을 들어야 했다.

─책은 혼자서도 읽을 수 있잖니. 예고 없이 집무실에 난입하지 말고, 남들이 보는 데선 폐하라고 부르거라.

테렌스의 기억 속에 흉터처럼 새겨진 말이었다.

“…네, 아버지.”

“테렌스, 코르테스가 지어준 약은 발라 봤니?”

황후가 아들의 장갑 낀 오른손을 쳐다보며 걱정스레 물었다.

코르테스는 칼레바니아에서 가장 유명한 마법 약 전문가였다. 테렌스의 오른손이 나을 기미가 보이지 않자, 황제는 수만 갈렌을 주고 그에게서 화상 치료제를 주문했었다.

“네.”

“차도가 좀 있었고?”

“아뇨, 없었습니다.”

“이를 어찌하면 좋을꼬….”

황제는 탄식하며 양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었다. 곁에 있던 황후 또한 망연자실한 얼굴로 고개를 떨구었다.

“평생 낫지 않을 상처란 걸 아시잖습니까. 실록에도 치료된 사례가 없었습니다.”

테렌스의 담담한 어조는 황제 부부의 억장을 무너뜨렸다.

“신탁의 주인을 저로 착각해서 일어난 일입니다. 제가 무모하게 내린 결정이었으니 결과는 달게 받아들여야지요.”

낫겠다는 욕심을 버린 지는 이미 오래였다.

왼손으로 서류를 결재하는 것도, 단추를 푸는 것도, 검을 잡는 것도 이젠 그에게 익숙한 일이었으니.

***

모두가 잠든 깊은 새벽.

석실 앞 문지기들이 하나둘씩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마법사 한 명은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았다가 부르르 발작하며 몸을 일으켰다.

이 고요한 적막 속에 혼자 눈을 뜬 사람이 한 명 있었다.

석실 안에서 자고 있던 프리다였다.

누워 있는 몸 아래쪽으로 뭔가 찝찝한 기운이 올라왔다.

“뭐가 이렇게 축축하지?”

햇빛 한 줄기 들지 않는 깊숙한 지하이기에, 지금이 몇 시인지는 알 수 없었다.

프리다는 상반신을 일으켜 침대 옆에 놓인 성냥으로 기름등에 불을 붙였다.

그리고는 자신이 누웠던 자리의 이불을 들춰보았다.

“이, 이게 뭐야?”

새하얀 침대 시트 한가운데가 시커멓게 물들어 있었다.

프리다는 떨리는 손으로 기름등을 들어 그곳에 가까이 가져다 댔다.

붉은 선혈이었다.

충격받을 법도 한 장면이건만, 이를 확인한 프리다의 얼굴엔 오히려 화색이 돌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침이 밝았다.

발레리는 언제나처럼 씩씩한 걸음으로 석실 안에 입성했다.

그런데 어딘가 허전했다.

매일 입구까지 마중 나와 있던 프리다가 오늘은 보이지 않았다.

“엇, 황녀님이 어디 계시지?”

두리번거리던 발레리는 황녀의 침대가 있는 가벽 뒤편에서 인기척을 감지했다.

프리다는 하얀 침구에 폭 파묻혀 켄드릭의 간호를 받고 있었다.

“황녀님? 어디 편찮으세요?”

발레리는 잰걸음으로 달려가 켄드릭 곁에 앉았다. 다행히 프리다는 안색이 나빠 보이지 않았다.

“아니에요, 발레리. 괜찮아요.”

목소리에 힘은 빠져 있었지만 황녀의 얼굴은 평소만큼 밝았다.

그런데 아프지 않다면 왜 갑자기 침대 신세인 걸까.

“그럼 왜 여기 누워 계세요? 옆에 켄드릭은 왜 있고요?”

켄드릭은 발레리의 질문에 약간 쩔쩔매는 기색이었다.

프리다는 말문이 막힌 그를 귀엽다는 듯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사실 좋은 일이에요.”

“네? 좋은 일이요?”

“나, 달거리를 다시 시작했어요. 일 년이 넘도록 안 해서 아예 끊긴 건가 싶었는데, 아니더라고요.”

“예에? 그렇게 오랫동안 달거리를 안 하셨었다고요?”

그랬다. 프리다는 오랫동안 생리를 하지 않았다. 당연히 영양 불균형 때문이었다.

식사량이 극히 적었던 데다 먹는 음식도 부실 그 자체였다. 생존할 만큼만 먹었으니 생식 기능에 제약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발레리가 들어온 이후 음식을 골고루 섭취하고, 검술 수련을 통해 운동량을 늘린 이후에야 그녀는 정상적인 신체 리듬을 회복할 수 있었다.

어제 새벽에 발견한 혈흔은 그 결과물이었다.

“응, 그동안 이 문제 때문에 아버지 어머니도 걱정이 많으셨는데. 이제 한시름 놨어요.”

“헤헤, 축하드려야 할 일이네요! 황녀님, 그럼 오늘은 수련을 건너뛰어야 할까요?”

“아니에요. 아침 먹고 가벼운 동작 위주로 하면 될 것 같아요. 무리만 안 하면 괜찮아요.”

“음, 그래도 혹시 하다가 힘드시면 꼭 말씀하세요.”

“그럴게요. 아 그리고 켄드릭 경, 민망했을 텐데 아침부터 고생 많았어요.”

황녀가 자신의 곁을 지키던 켄드릭에게 감사 인사를 했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황녀님.”

켄드릭이 이른 아침부터 수고가 많긴 했다.

출근하자마자 피 칠갑을 한 황녀의 침대보를 새로 갈았다. 그다음엔 목욕물과 갈아입을 옷, 달거리 천까지 대령했다. 아무런 싫은 기색도 없이.

“아침은 푸짐하게 먹고 싶어요. 달달한 디저트도 같이 챙겨 줄래요?”

“네, 좋아하시는 무화과를 듬뿍 넣어서 만들라고 전하겠습니다. 편히 쉬고 계십시오.”

저녁때마다 황녀의 간식 심부름을 했다더니, 벌써 켄드릭은 프리다의 간식 취향을 줄줄이 꿰고 있었다.

프리다가 켄드릭을 바라보는 눈빛에서 따스한 온기가 느껴졌다.

‘이젠 안 어색한가 보네. 다행인 걸까.’

발레리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둘 사이에 무언가가 쌓이고 있다는 걸.

두 사람이 뻔히 가까워지는 상황임에도 위기감도, 질투심도 느껴지지 않았다.

일찍부터 그녀는 큰 욕심이 없었다. 자신과 맺어질 수 없는 사람에게 바랄 수 있는 건, 그 사람의 행복뿐이라고 여겼다.

오랜 짝사랑은 이제 체념 단계에 접어들었다.

문득 발레리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얘는 언제나 높은 곳을 바라보니까, 결혼도 앞날을 생각해서 하겠지. 그렇다면 황녀님만큼이나 적절한 상대도 없겠네.’

켄드릭은 야망을 숨기는 사람이 아니었다.

제국의 총사령관으로 등극해 병력을 모아 와이어 숲으로 출정하겠다는 목표가 있었으니까.

그는 실종된 두 형이 숲속 어딘가에 아직 살아있다고 믿었다.

숲속 마물의 손아귀에서 형들을 비롯한 실종자들을 구출하겠다는 의지가 그의 원동력이었다.

하지만 그에 앞서 켄드릭은 황제를 설득해야만 한다.

와이어 숲 실종사건을 미제로 남겨둔 건 황제의 결정이었다. 그는 숲에 진입 금지 결계만 쳐 두고 사건을 10년간 방치했다.

아무도 이런 결정에 납득하지 못했지만, 황제의 입장은 확고했다.

이미 그곳에서 두 아들을 잃은 프레이저 후작은 숲을 차라리 벌목해 진상을 파악하자고 줄기차게 촉구해왔다. 후작의 애끓는 요구에도 황제는 나중에 꼭 해결하겠다며 즉답을 피해왔다.

그리고 여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어찌 알겠는가. 켄드릭이 칼레바니아 황실의 부마가 된다면, 언젠가 황제의 마음을 돌려세울 수 있을지도. 

***

벌써 두 번째 보고 시간이다.

발레리는 수업을 끝내자마자 황태자궁 집무실에 찾아와 허겁지겁 저녁 식사부터 마쳤다.

오늘의 메뉴는 꿩고기. 그녀에겐 처음 먹어보는 음식이었다. 닭고기에 비해 기름기가 적어서 담백하고 고소했다.

‘조금 불편한 고급 식당이라고 생각하면 꽤 참을 만한 것 같네.’

그녀는 냅킨으로 입가를 닦자마자 또 물음의 포문을 열었다.

“전하, 저 정말 궁금한 게 있는데요.”

“그래, 이번엔 또 뭐가 궁금하지.”

어느새 이들의 테이블에는 오렌지 타르트와 블루베리 시폰 케이크 등 달콤한 디저트 메뉴가 올라와 있었다.

전날 테렌스는 주방장에게 후식을 푸짐하게 준비해 두라고 일러두었다. 발레리를 좀 더 오래 잡아두기 위한 나름대로의 술책이었다.

“황녀님께 검술 수련을 하는 구체적인 목표를 여쭤봤거든요.”

“목표?”

“네, 저한테 이런 질문을 하셨어요. 누군가를, 음….”

“누군가를.”

“죽여봤냐고요.”

“…그래서 뭐라고 답했지.”

두 사람 간의 대화는 첫 보고 때보다는 자연스러워졌다.

테렌스가 발레리의 말에 답변이 늦어지지 않도록 노력한 덕이다. 서툴지만 조금씩 리액션도 해주었다.

─받아칠 말이 생각이 안 나면, 그 아가씨가 하는 말의 일부를 반복해 보시면 됩니다.

물론 레이븐의 조언이었다.

공백이 오래 이어지면 저번처럼 심기가 불편해 보일까 봐서다. 입가에 미소도 애써 유지하고 있었다.

“당연히 안 죽여봤으니까 아니라고 했죠. 근데 목표에 대해선 별말 없으시고, 그냥 좀 더 치명적인 기술을 배우고 싶으시대요.”

“치명적인 기술이라….”

테렌스는 ‘치명적’이라는 단어에 반응하며 생각에 잠겼다.

프리다가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는 대충 짐작이 갔다.

“하하, 황녀님의 목표가 뭔지 전 너무 궁금한데, 전하께서도 말씀 안 해주시겠죠? 이 나라 황실은 비밀 천지니까요.”

테렌스는 잠시 침묵하다 이렇게 답했다.

“그만큼 강해지고 싶다는 뜻으로 이해하면 된다. 누군가의 목숨을 앗을 수도 있을 만큼.”

발레리의 얼굴에 또 커다란 물음표가 떴다. 테렌스는 불안했다. 이번엔 무슨 질문을 하려고 이러는지.

“흠, 황녀님이 무슨 전쟁이라도 나가나요? 이런 태평성대에.”

테렌스의 연청색 눈동자가 여리게 진동했다. 적절한 대답을 찾지 못하는 듯했다.

그의 입가에서 보조개가 점점 흐릿해지자 발레리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발레리는 테렌스의 입가에 볼우물이 팼는지를 계속 확인하고 있었다. 그나마 그게 심기를 드러내는 신호가 아닐까 싶어서.

“질문은 여기서 그만할게요. 어차피 말 안 해주실 거잖아요. 치명적인 기술은 저도 실전 경험이 부족하니까, 좀 더 연구해 보고 가르쳐 드리려고요.”

“고맙다, 발레리.”

발레리의 어깨가 훌쩍 오르내렸다. 황태자의 입에서 본인의 이름이 흘러나와서다.

호칭이 로빈슨에서 발레리로 바뀐 것에 아직도 그녀는 적응하지 못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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