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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자한테는 관심 없는데요 (31)화 (31/173)

31화

“저, 전하. 저 이제 진짜로 들어갈게요. 시간이 정말 너무 늦었네요, 하하.”

발레리는 테렌스를 마주 보며 쑥스럽게 뒷머리를 만졌다. 쓸데없이 길어진 작별 인사는 어색하기만 했다.

“…네 입에서 전하라는 말이 나올 때마다 참 낯선 기분이 든다.”

“저도 방금 낯설었는데요? 저한테 발레리라고 하셔서요. 그냥 발레리도 아니고 발레리 양이라니. 갑자기 저한테 왜 그러시는 거예요?”

“…후.”

대답 못 할 질문도 아닌데. 황태자가 또 한숨을 쉬며 뜸을 들인다.

아으, 저 인간 또 한숨이네. 발레리의 매끈한 이마에 힘줄이 툭 튀어나왔다. 이젠 짜증이 나는 단계에 이르렀다.

“그, 있잖아요, 전하.”

“음?”

“제 말 때문에 기분이 상하셨다면 말로 해주시면 안 될까요.”

“기분이 상하다니, 그게 무슨 말이지.”

“제가 말할 때마다 대답하기 싫어하시는 것 같아서요. 자꾸 한숨을 쉬시질 않나. 차라리 혼을 내시거나 지적을 하시면 제가 고칠게요.”

테렌스는 당황해서 움찔했다.

당장 받아칠 말이 생각나지 않아서 습관적으로 그랬을 뿐인데…. 의도치 않게 그녀를 불편하게 만들었을 줄이야.

“…네가 말실수한 건 전혀 없다.”

“그럼 왜 그러시는 건데요?”

테렌스는 열없이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내가 말주변이 없어서 그런 것 같아. 아직은.”

퍽 진솔한 태도였다. 미안해하는 기색도 보였다. 발레리의 마음은 금방 누그러졌다.

방금 그의 입가에서 서서히 피어난 보조개 때문이다.

“정말 그런 거예요?”

“그래. 개의치 말고 어서 들어가라. 오늘 밤도 시에나 여신의 축복이 네게 임하길 바란다.”

“네, 전하께서도 조심히 들어가세요.”

발레리는 드디어 방문을 따고 무사히 귀가했다.

이제야 해방이었다. 그녀는 근위병 생활복을 훌렁훌렁 벗어 던진 뒤 침대에 펄떡 뛰어들었다.

“하…. 너무나도 긴 하루였다. 저 인간은 꿀만 먹고 자랐나, 어떻게 저렇게 과묵하지. 다음 보고 시간은 또 어떻게 견뎌, 아오!”

***

다음 날 아침. 레이븐은 황태자궁 집무실로 출근하자마자 눈을 의심했다.

“보고를 빙자한 첫 데이트는 어떠셨을…. 그 탁상 거울은 뭡니까?”

테렌스의 책상에 웬 낯선 물건이 놓여있었다. 그가 책상에 업무 관련 물건 외에 다른 걸 올려둔 건 처음이었다.

“아, 연습을 좀 하려고.”

“대체 무슨 연습을 하시기에 거울이 필요합니까?”

“웃는 연습.”

눈곱이 덕지덕지 붙어있던 레이븐의 눈에서 졸음기가 단번에 사라졌다.

“예? 무슨 바람이 불어서요? 혹시 그 아가씨…. 잘 웃는 남자가 좋답니까?”

“성격이 밝고, 말도 많았으면 좋겠다는데.”

“아아, 그렇군요! 제가 정말 영양가 있는 조언을 하나 해드려도 되겠습니까?”

테렌스는 책상 앞에 꼿꼿이 서 있는 레이븐을 지그시 올려다봤다.

투명한 벽안이 창밖의 햇살을 반사해 영롱하게 빛났다.

“그런 부담스러운 표정도 지을 줄 아시네요. 말씀드리기가 더 어려워지는데요.”

“…얼마나 영양가가 있을지 기대되는군. 어디 한번 해 봐라.”

레이븐은 목청을 가다듬었다. 대답을 준비하는 그의 태도는 짐짓 엄숙했다.

“포기하시는 게 장기적인 정신건강에 좋을 것 같습니다. 그 아가씨 이상형이랑 전하는 아예 교집합이 없는데요?”

언제나 그랬듯 레이븐은 제 생각을 곧이곧대로 말했다.

테렌스의 얼굴은 마치 석고상처럼 회백색으로 굳어졌다. 어김없이 그의 속에서 깊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내게 여자를 좋아하냐고 묻더군.”

“풉, 질문이 너무 본질적인 거 아닙니까. 뭐라고 대답하셨나요?”

“…여자를 좋아한다고 했지. 내 이상형도 얘기했다.”

“전하께 이상형이란 게 존재하는 줄은 저조차도 몰랐는데…. 뭐라고 말씀하셨을까요?”

“눈동자 색이 짙고, 키가 크고, 검술을 잘하는 여자.”

이 세 가지 조건에 들어맞는 여자라면 단 한 명뿐이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마주 앉은 발레리의 모습을 즉석에서 관찰하며 만들어 낸 이상형이니까.

“첫 데이트에 고백부터 지르고 오셨네요. 정말 섣부르십니다.”

레이븐은 진심으로 안타까워하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아니, 본인인 걸 전혀 모르던데.”

“모르긴 뭘 몰라요. 황궁에 그런 여자 찾으려면 그 아가씨 하나밖에 없는데요. 만약에 눈치를 못 챘다면 그 아가씨한테도 문제가 있는 겁니다. 그래서 뭐라던가요, 그 아가씨가?”

“그런 여자가 주변에 없어서 중매를 못 서주겠다더군.”

“오오, 의외로 간접 화법도 쓸 줄 아는 아가씨였네요.”

간접 화법이라니. 발레리의 대답에 다른 숨은 의미가 있었다는 건가. 테렌스는 눈을 가늘게 뜬 채 레이븐을 올려다봤다.

“무슨 뜻이냐.”

“대차게 까이신 겁니다. 이만 접으시는 게 어떨까요? 나름대로 성과도 있잖습니까. 전하께서 스스로 무성애자가 아니란 걸 깨달으셨다는 점에 큰 의미가 있으니까요.”

“…이만 나가봐라.”

마음에 안 들면 언제나 축객령이지. 레이븐은 불만스럽게 눈알을 굴리며 테렌스의 집무실을 빠져나왔다.

“어휴, 잠깐 저러다 말겠지? 그래도 말수는 좀 많아진 것 같기도 하고.”

***

다음 날 프리다의 검술 수업 시간.

“오오, 황녀님! 이제 눈 안 감으시네요!”

발레리는 자신의 공격 동작을 기세 좋게 쳐내는 프리다를 보며 감탄해 마지않았다.

“응, 안 무서우니까 계속 들어와 봐요.”

프리다의 짙푸른 눈이 번뜩였다. 뭐든 받아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엿보였다.

진검끼리 부딪칠 때 나는 금속음이 이전보다 훨씬 거칠어졌다.

물론 여전히 강도와 속도를 크게 낮춰서 상대하고 있었지만, 발레리는 뿌듯했다. 단점을 이렇게나 빨리 메워버리다니. 분명 혼자 있는 시간에도 피 터지게 연습했으리라.

다만 빈틈은 있었다. 발레리는 검을 머리 위로 들어 황녀의 정수리 쪽 공간을 노렸다. 키 차이가 20㎝ 가까이 나기에 가능한, 긴 리치와 높이차를 이용한 공격이었다.

“으앗!”

황녀는 방어에 실패했다. 발레리의 검 끝이 황녀의 정수리 바로 위에서 멈췄다. 제대로 들어갔다면 머리에 그대로 꽂혔을 공격이었다.

놀란 황녀는 동작을 멈추고 가슴을 쓸어내렸다.

“하아…. 진짜 놀랐어요. 생각지도 않은 방향으로 공격이 들어와서.”

“황녀님, 키 큰 사람하고 겨루실 땐 머리 위쪽도 조심하셔야 해요. 간혹 수직으로 찍어 누르기도 하거든요.”

“알겠어요. 방금 공격은 어떻게 막아야 했던 거죠?”

프리다의 질문에 발레리는 싱긋 웃으며 설명을 시작했다.

“막기보다는 빈틈을 노리셔야 해요. 제가 검을 높이 들고 있는 만큼 아래 공간이 비잖아요? 재빨리 돌진해서 제 배때기에 칼끝을 찔러 넣으시면 돼요.”

“으, 어떻게 그래요. 그럼 발레리가 죽잖아요.”

“하하, 지금 말고 실전에서 그렇게 하시란 말이에요. 그래도 이것만큼은 칭찬해드리고 싶은데요. 마지막까지 눈 안 감으셨어요.”

“헤헤, 투구 쓰고 공 피하기도 이제 졸업하나요?”

황녀는 언제나 의욕이 넘쳤다. 가르칠 맛이 나는 제자였다.

어떻게 사람이 이렇게 완벽하게 동기부여가 돼 있을까.

프리다는 검술뿐 아니라 다른 분야도 배우기만 하면 뭐든 잘 해낼 재목이었다.

몸매도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종잇장 같던 몸에 조금씩 부피가 생기고 있었다. 먹는 양이 두 배 이상 늘어난 데다 근력운동까지 꾸준히 한 결과다.

“황녀님, 몸이 좀 달라진 거 아세요?”

“헤헤, 건강해진 느낌은 있어요. 이전보다 숨도 안 차고, 진검도 이젠 별로 안 무겁고. 그런데 외관상 달라진 게 있나요?”

“네. 몸이 아주 약간 커졌어요. 조금이지만 근육도 붙고 살도 찌신 것 같아요.”

프리다가 함박웃음을 지었다.

“와아, 정말요? 사실 나 고백할 게 있는데, 발레리랑 저녁 먹고 나서도 간식을 좀 더 먹고 있어요. 내 간식 심부름 때문에 켄드릭 경 퇴근이 늦어져서 미안할 정도예요.”

황녀의 생기 가득한 미소가 발레리의 얼굴에도 옅게 번졌다.

“이전보다 식욕이 많아지셔서 보기 좋네요. 그래도 야식 너무 늦게 드시면 속에 무리 갈 수 있으니까, 주무시기 두 시간 전까지만 드세요.”

“응, 알았어요.”

프리다에게 조언을 건네던 발레리는 문득 궁금한 게 생겼다.

“황녀님, 뭐 하나 여쭤봐도 될까요?”

“응, 말해 봐요.”

“황녀님의 구체적인 목표가 궁금해요. 지금부터 8개월 안에 뛰어난 검사가 된다, 이 목표는 너무 추상적이잖아요?”

“음, 그러네요.”

“이를테면 칼레바니아 건국제 무술대회에서 우승한다든가, 아니면 황실 근위기사 열 명하고 대련해서 이긴다거나. 뭐 그런 쌈빡한 목표가 있으세요?”

“목표라고요….”

프리다는 검을 검집에 집어넣은 뒤 잠시 고민에 빠졌다.

“아, 황녀님. 아직 없으면 천천히 세우시면 돼요. 이미 잘하고 계시는걸요.”

“아니에요, 발레리. 나 목표 있어요.”

프리다가 돌연 표정을 굳히며 대답했다.

발레리는 그런 황녀의 얼굴에 잠시 다른 사람의 얼굴이 겹쳐 보였다.

‘황녀님이 굳은 표정을 하니까 황태자랑 정말 똑같이 생겼네. 피는 못 속인다더니.’

“아, 있으세요? 뭔데요?”

“…때가 되면 말할게요.”

역시나 말 안 해주는구나. 발레리는 마른 입맛을 다셨다.

“근데, 발레리. 나도 뭐 하나 물어보고 싶어요.”

“네, 얼마든지요.”

“발레리는….”

“네.”

“누군가를 죽여본 적 있나요?”

방금 황녀님 입에서 무슨 소리가 나온 거지. 발레리는 말문이 턱 막혔다.

당당히 아니라고 답할 수 있었지만, 선뜻 대답하기엔 충격파가 너무 큰 질문이었다.

사람을 죽여봤냐니.

그게 황녀의 목표와 무슨 상관인 걸까.

“아, 당연히 없겠죠…. 내가 무슨 말을 한 거지. 발레리, 그냥 못 들은 걸로 해 줘요.”

***

중앙궁 동관에 위치한 황제 부부의 침실.

이곳의 창문은 자정에 가까운 시각까지 불빛이 환하게 켜져 있었다.

“레베카, 프리다의 검술 실력이 더 늘었다고 하던데. 또 한 번 찾아가 봐야겠소.”

황제는 소파에서 차를 마시던 황후의 곁에 털썩 앉았다.

그는 막 문지기 수장 루퍼트의 보고를 듣고 온 참이었다.

“그 아가씨 선생, 데려오길 정말 잘했네요. 역시 테렌스가 보는 눈은 있어요, 그쵸?”

황후는 레몬그라스 향이 그득한 찻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부드럽게 미소했다.

“신분보단 실력을 보고 결정했다니 그렇겠지. 진검도 똑같이 생긴 걸 보냈으니까 곧 손에 익어야 할 텐데.”

“음, 그런데 여보. 눈으로만 보고 따라 만든 건데, 잡는 느낌도 과연 비슷할까요.”

“그러길 바라야지.”

마침 문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황후가 종을 울리자 문이 활짝 열렸다.

방에 들어온 사람은 테렌스였다.

야심한 시간이지만 여전히 제복 차림이었다. 방금까지 업무를 봐서 그런 걸까. 안색이 파리하게 시들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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