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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자한테는 관심 없는데요 (30)화 (30/173)

30화

“…추리력이 제법이지만 틀렸어요. 문지기들은 대부분 경처럼 생각하는 것 같더라고요.”

프리다는 켄드릭의 질문에 씩 웃으며 답했다. 딱히 그가 답을 맞히길 기대한 건 아니었다.

“하하, 제게 퀴즈라도 내시는 겁니까?”

“나, 그렇게까지 위험한 상황에 놓인 건 아니에요. 아버지랑 어머니, 오빠는 그렇게 생각 안 하겠지만.”

“…그렇습니까.”

켄드릭은 물로 입술을 축이며 프리다를 조용히 바라봤다. 이런 깊숙한 곳에 숨어 지내면서도 위험한 상황이 아니라는 건가.

어쨌든 석실 생활은 황녀 본인이 아닌 가족들의 의사에 따른 것이란 얘기였다.

“그래도 여기 생활, 1년도 채 안 남았어요. 밖에 나가려면 준비가 많이 필요하겠지만요.”

‘1년도 안 남았다고? 석실 집사 생활도 길진 않겠구나. 그런데 왜 살짝 아쉬울까.’

켄드릭은 문득 든 아쉬운 감정의 출처가 어딘지 잠시 헤맸다.

석실 집사 일은 생각보다 빡빡했다. 지체 높은 황족을 모시는 건 경력이 십 년을 넘는 시종에게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다행히 켄드릭은 체력과 지구력, 승진 욕심이 받쳐줘서 어렵지 않게 하고 있었다. 황녀의 요구 사항이 까다롭지 않은 것도 있었고.

하지만 황실 근위기사로서는 다소 자존감이 떨어지는 일이긴 했다.

‘…그래도 다른 데 발령 나면 발레리를 자주 못 보겠지.’

켄드릭이 집사 일을 즐겁게 하는 배경에는 발레리도 있었다. 그녀가 아침마다 건네는 명랑한 인사는 고된 일상에 큰 활력소였다.

“켄드릭 경, 나도 질문 좀 할게요.”

“네, 하문하십시오.”

켄드릭이 프리다의 깊고 푸른 눈을 직시하며 물음을 기다렸다.

“내가 알기론 미혼인데, 맞나요?”

“…결혼 여부를 물으시는 거라면, 안 했습니다.”

“그럼 정혼자는 있나요?”

“없습니다.”

프리다는 켄드릭의 진녹색 눈동자에 드리운 물음표를 읽고 해사하게 웃었다.

“그럼 앞으로 일주일에 두 번 같이 저녁 먹을까요? 수요일하고 금요일에.”

수요일과 금요일 저녁이라면, 발레리가 정기 보고를 하러 황태자궁에 가는 때를 말한다.

황녀의 제안을 굳이 해석하자면 이런 내용이었다.

‘일주일에 두 번, 둘만의 시간을 보내자. 따로 만나는 사람이 없다면.’

그녀의 의도를 못 읽을 켄드릭이 아니었다. 눈치가 그렇게까지 없지는 않았으니까. 

켄드릭은 멈칫하며 미간을 좁혔다.

일단 황녀의 의중을 좀 더 명확하게 파악하고 싶었다.

“단도직입적으로 여쭈겠습니다. 혹시 결혼을 전제로 한 교제를 제안하시는 겁니까? 그런 거라면 송구하지만….”

“아니에요.”

“…예?”

프리다의 단호한 대답에, 켄드릭은 눈꺼풀을 빠르게 깜빡이며 되물었다.

“켄드릭 경, 나는 결혼을 전혀 생각하고 있지 않아요.”

보통 칼레바니아 귀족 사회에서 연애를 먼저 제안하는 건, 일 년 후쯤 반지를 나눠 끼우자는 의미로 통했다.

하지만 결혼은 생각하지 말고 연애만 하자니. 일반적인 경우는 아니었다.

켄드릭이 당혹한 기색을 보이자 프리다는 한 번 깊은숨을 들이마셨다.

“그냥, 경을 좀 더 알아가고 싶을 뿐이에요. 내가 여기 석실을 벗어나기 전까지만요. 내년 3월 정도까지, 8개월이 좀 넘을 텐데…. 딱 그때까지만 그럴 수 있을까요?”

시간제한 조건까지 달렸다.

켄드릭은 황녀가 왜 이런 제안을 하는지 납득이 가지 않았다.

아직 연애를 생각할 만큼 둘은 친한 사이도 아니었다.

‘일종의 기한부 계약 연애를 제안하시는 건가.’

“아니, 저 황녀님. 이런 제안을 하시는 연유를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아까 말한 그대로예요. 서로 좀 더 알아갔으면 좋겠어요. 어떤 약속에도 얽매이지 않고서.”

“기한은 왜 설정해두시는 겁니까?”

“…그 이후에는, 내가 어떻게 될지 모르거든요.”

켄드릭의 어깨가 한 차례 크게 들썩였다.

“네? 그때 황녀님께 무슨 일이라도 생기는 겁니까?”

프리다는 살구색 입술을 자근자근 깨물다가 입을 열었다.

“미안한데, 이 이상은 자세히 말해줄 수가 없어요. 너무 부담 갖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그냥 이렇게 식사 같이하면서 얘기하는 것만으로도 난 좋으니까.”

너무나도 갑작스러운 제안이었다.

켄드릭은 눈을 사선으로 내리깔았다.

솔깃하긴 했다. 다른 것 없이 함께 식사하면서 대화만 하면 된다고 하니까.

게다가 상대는 무려 제국에서 가장 지체 높은 미혼 여성이었다.

켄드릭은 황녀가 대단한 미인이라는 사실은 진작부터 인지하고 있었다. 자신을 주의 깊게 응시하는 짙푸른 눈동자가 조금 의식되긴 했다. 특히 그녀가 품에 와락 뛰어들었던 왕거미 사건 이후로.

그러나 켄드릭에겐 문제가 있었다.

그는 연애 관련 경험이 전무했다.

사랑이 인생의 우선순위가 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뭔가 걸리적거리는 느낌도 들었다. 신발 속에 작은 자갈돌이 들어가 있는 것처럼. 가슴 속의 어딘가가 계속 아프게 배겼다.

“…좀 더 생각해 보고 답해 드려도 되겠습니까.”

“일주일 줄게요. 거절한다고 해도, 이전과 똑같이 대할 거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감사합니다.”

프리다는 미지근하게 식어버린 수프를 떠서 입안으로 가져갔다.

혀가 뻣뻣하게 굳어 아무 맛도 느껴지지 않았다.

‘켄드릭 경도 나한테 어느 정도 흥미가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던 걸까.’

하지만 그녀는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아, 켄드릭 경. 내가 빠뜨린 얘기가 하나 있어요.”

“네 말씀하십시오, 황녀님.”

“나와의 만남으로 경이 얻을 수 있는 게 뭐가 있는지. 그것도 차차 얘기해 보면 좋을 것 같아요.”

대가가 없는 제안은 아니니, 천천히 협상을 해보자는 소리였다. 켄드릭의 녹안이 반뜻 빛났다. 그가 기대하던 무언가가 조금씩 윤곽을 드러내고 있었다.

***

‘어색해 죽겠는데 뭘 바래다주겠다는 거야? 보고도 끝났고 더 할 말도 없는데.’

황태자궁 정문을 빠져나온 발레리는 자신을 굳이 따라나선 테렌스가 불편하기만 했다.

발레리는 랜턴을 든 채 나란히 걷는 테렌스를 힐끗 곁눈질했다. 역시 평상시의 살얼음 잔뜩 낀 얼굴로 돌아와 있었다.

“저기, 전하. 여기서부턴 저 혼자 갈 수 있을 것 같아요.”

“랜턴이 하나밖에 없는데. 나더러 등불도 없이 돌아가란 건가.”

“저는 눈이 밝아서 랜턴이 따로 필요 없는데요? 그대로 들고 돌아가시면 돼요.”

사실이었다.

발레리는 도적답게 밤눈이 밝았다. 어두운 곳에서도 물체를 식별할 줄 알아야 제대로 할 수 있는 게 도적 일이었으니.

“…저번처럼 채플 근처에 이상한 게 나타날 수도 있다.”

“그 검은 고양이를 말씀하시는 거라면요. 음, 문지기분들이 너무 예민하게 경계하셔서 부담스러울 정도던데요. 굳이 안 오셔도 그분들이 잘 대처하실 거예요.”

“이번엔 고양이가 아니라 다른 게 나올 수도 있으니까….”

테렌스는 말끝을 얼버무렸다. 본인이 생각해도 억지 주장이었다. 다시 입안에 주워 담고 싶어질 정도로.

“하하, 제 실력 아시잖아요? 고양이가 아니라 호랑이가 나와도 쓱싹해 버릴 수 있는데.”

발레리는 허리춤에 찬 칼자루를 꽉 부여잡으며 그에게 씩 웃어 보였다.

“후우….”

테렌스는 허탈한 얼굴로 허공에 기다란 날숨을 뽑아냈다.

어쩌면 칼레바니아의 진짜 철벽 요새는 여동생 프리다가 아니라 이 여자가 아닐까.

그가 깊은 한숨을 내쉬자 발레리는 또다시 불편한 긴장감에 휩싸였다.

굳이 귀찮게 안 바래다줘도 된다는데, 대체 뭐가 불만이라 저러는 걸까.

‘못마땅하면 차라리 화를 내거나 혼을 내지…. 사람 기 빨리게 웬 한숨이야, 한숨이.’

발레리가 말이 없어지자, 테렌스는 목을 큼큼 가다듬은 뒤 그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뾰로통하게 입술을 내민 채 팔짱을 끼고 있었다.

“…그냥 정기적으로 밤 산책을 하고 싶을 뿐이다.”

제 딴에는 솔직한 답변이었다. ‘너와 함께’라는 조건이 빠지기는 했지만.

“진작에 그렇게 말씀하시면 되잖아요.”

“…앞으로 네가 보고하러 오는 날은 이렇게 채플까지 같이 걸을까 하는데. 그래도 되겠나?”

“예, 뭐, 그러시든가요. 요즘은 낮에 햇볕이 뜨거우니까 바깥 운동은 밤에 하는 게 더 낫긴 하겠네요.”

발레리는 고개를 살짝 튼 뒤 윗입술을 달싹이며 구시렁댔다.

‘하…. 보고 끝났다고 끝난 게 아니었어. 이거 무슨 강아지도 아니고, 산책까지 시켜줘야 끝나는 건가.’

업무의 연장선이 길어진 건 그녀에게 전혀 반갑지 않은 일이었다.

열심히 걷다 보니 둘은 어느덧 채플 안까지 다다랐다.

테렌스는 기어이 발레리의 방문 앞까지 따라왔다. 그녀는 속으로 진땀을 흘렸다. 황태자가 정말 여기까지 올 줄은 몰랐다.

‘왜 안 가지 이 사람…. 석실에라도 들르려고 그러나.’

발레리는 쭈뼛거리며 테렌스의 맞은편에 자리 잡았다. 얼굴을 슬쩍 올려다보니 또다시 미소가 피어있었다.

그의 낯선 얼굴은 어두침침한 채플 복도에서도 화사하게 빛났다.

하지만 또 왜 웃는 건지 도통 모르겠다.

솔직히 조금 무섭기도 했다.

“저기, 음, 전하? 저는 이제 들어가 볼게요.”

발레리는 테렌스의 입가에 팬 보조개를 빤히 쳐다보며 작별 인사를 건넸다.

빨리 뒤돌아서 문을 따야 할 텐데. 그에게서 안 보이던 부분이 자꾸 시선을 붙잡고 놓아주질 않았다.

“그래, 잘 자라.”

테렌스가 대답하는 순간 덜컥, 하고 문소리가 들렸다.

옆방 기도실에서 사람이 한 명 나왔다. 마주 보던 남녀의 시선이 동시에 그쪽으로 향했다.

켄드릭이었다.

켄드릭은 둘을 발견하고 당황해서 머뭇거리다 이내 자세를 잡고 예를 갖췄다.

테렌스는 단번에 미소를 감춘 뒤 그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발레리 양과 저녁 식사 마치고 바래다주는 길이다.”

테렌스의 입에서 나온 소리였다. 켄드릭이 아무런 질문도 하지 않은 상황인데도.

생경한 호칭에 발레리는 테렌스 쪽으로 다시 얼굴을 틀었다. 황태자 입에서 ‘발레리’라는 이름이 나오는 건 처음이었다.

‘잉? 매번 로빈슨이라고 부르더니 갑자기 왜 발레리라고 하는 거야. 양은 또 뭐고.’

켄드릭은 할 말을 잊은 채 테렌스를 멀거니 쳐다보고만 있었다.

그의 얼굴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안 물어봤는데.’

“…아, 그러셨습니까.”

미적지근한 반응이었다.

테렌스도 말을 꺼내놓고 괜히 멋쩍어하는 것 같았다.

어쨌건 제삼자에게 불필요한 정보를 제공한 꼴이 됐으니까.

“식사 맛있게 하셨길 바랍니다. 저는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수고 많았다.”

“잘 가.”

발레리도 그에게 인사했다.

켄드릭은 테렌스에게 다시 경례한 후 발레리에게도 손을 살짝 흔들어 보였다. 그리곤 뒤돌아서 곧장 후문으로 나갔다.

‘젠장, 방금 헤어지는 타이밍이었는데 켄드릭 저놈 때문에 다시 인사해야 하잖아.’

또다시 마주 선 발레리와 테렌스 사이엔 서먹함이 감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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