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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자한테는 관심 없는데요 (29)화 (29/173)

29화

“키 크고 검술을 잘하는? 흠, 부인이 아니라 호위기사가 필요하신 건 아니고요?”

“…호위는 레이븐으로 충분하다.”

“나름대로 확고한 기준이 있으시네요. 아쉽게도 주변에 그런 여자가 없어서 중매는 못 서 드려요.”

통탄할 노릇이었다. 그게 본인일 가능성은 추호도 생각하지 못하다니.

알아달라고 기대한 건 아니었지만 테렌스는 씁쓸함을 감추기 어려웠다.

“너는 아직 대답 안 했는데. 어떤 느낌을 좋아하는지.”

“아 그러네요. 저는 음….”

발레리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이렇게 대답했다.

“잘 웃는 사람이 좋은데요. 성격 밝고 말도 많으면 좋겠어요.”

테렌스의 얼굴에서 핏기가 서서히 가셨다.

좌절감이 3연타로 찾아왔다.

그는 본인이 잘 웃지 않는다는 걸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성격은 어둡진 않았지만 밝은 편도 아니었다. 말수는 거의 처참한 수준이었다.

테렌스는 단숨에 바람 빠진 풍선처럼 맥을 잃었다.

그는 고개를 숙여 입꼬리를 씰룩거리기 시작했다. 표정 변화를 위한 일종의 준비 운동이었다.

웃는 건 정말 익숙하지 않지만…. 이제부터라도 색다른 인상으로 보여야 할 테니까.

“그래, 너는 잘 웃는 사람을 좋아하는구나.”

테렌스는 싱긋 눈웃음을 머금은 채 두 입꼬리를 쭉 끌어올렸다.

그러자 그의 양쪽 입가에 보조개가 스리슬쩍 피어났다.

발레리의 두 눈이 충격 속에 떡 벌어졌다.

세상 처음 보는 느낌의 웃음이라서.

느닷없이 등장한 그의 미소는 더없이 찬연했다. 매서운 눈보라 속에서 피어난 선홍색 동백, 아니면 황량한 사막 한가운데서 선인장이 피워낸 꽃이 이런 모습일까.

촛대의 불빛을 은은히 반사하는 맑은 청안은 환각 속 오아시스 같았다. 바라보기만 해도 갈증이 해소되는 느낌에 발레리는 침을 꿀꺽 삼켰다.

‘아니, 뭐야? 이렇게 웃을 줄 아는 인간이었다고? 이거 뭐 얼굴이 두 개라 해도 믿겠는데?’

그랬다. 테렌스는 작정하고 웃으면 전혀 딴판이 되는 인상이었다.

프리다와는 이목구비가 비슷해도 전혀 다른 분위기라고 생각했는데, 온화하고 따스한 표정을 지으니 쌍둥이는 쌍둥이였다.

발레리는 그의 새로운 미모에 적응하지 못한 채 시선을 떨궜다.

“아, 네, 뭐…. 웃는 거 싫어하는 사람도 있나요.”

테렌스의 미소를 회피하던 그녀의 시선에 밟힌 건 그의 접시였다.

역시 스테이크는 건드리지 않았고, 부드러운 연어 요리만 왼손으로 떠먹고 있었다.

“저, 저기, 스테이크 접시 좀 줘 보시겠어요?”

“왜?”

발레리는 동의도 구하지 않고 벌떡 일어나 테렌스의 접시를 자기 쪽으로 가져왔다. 그리곤 스테이크를 천천히 썰어주었다.

“저도 사과할 거 있어요.”

고기를 능숙한 솜씨로 자르던 발레리는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갑자기 사과라니. 테렌스는 의아한 얼굴이었다.

“사과? 네가 나에게?”

“접때 냇가에서 칼싸움할 때…. 제가 여자라서 일부러 핸디캡으로 왼손 쓰신 줄 알았거든요. 근데 보니까 밥 먹을 때 왼손만 쓰시더라고요? 스테이크도 안 썰어 드시고.”

“…아.”

그런 걸 언제 관찰한 걸까.

생각보다 발레리가 자신의 행동거지를 유심히 보고 있었다는 사실에 테렌스는 흠칫 놀랐다.

“오른손 불편하신 걸 몰랐어요. 멋있어 보이고 싶었냐고 했던 말 취소할게요.”

─여자 상대한답시고 잘 안 쓰는 손을 쓰네. 멋있어 보이고 싶었냐?

“…네가 그런 말을 했었구나. 잊고 있었는데.”

테렌스는 당혹스러웠다.

자신이 오른손을 못 쓴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극소수였다. 매일 장갑을 끼고 다녔으니까.

물론 서명할 때 왼손을 쓰기 시작하면서, 결재받으러 온 신하들이 갑자기 망가진 글씨체에 당황하긴 했지만.

“근데 혹시 물어, 아니 여쭤봐도 돼요?”

“그래.”

“오른손은 어쩌다 다치셨어요?”

그녀가 또다시 직설적인 질문을 들이밀었다. 테렌스의 얼굴에 서렸던 미소는 급속도로 자취를 감췄다.

“…화상을 입었다. 실수로.”

근엄한 얼굴을 되찾은 황태자의 대답은 간단했다.

손바닥에 화상을 입었다면 얼마간 손을 못 쓰는 게 당연했다.

다만 발레리는 의문이 들었다. 황태자가 부엌일을 하는 것도 아닐 텐데, 손에 화상 입을 일이 뭐가 있을까.

냇가에서 칼싸움을 벌인 지도 한 달이 훌쩍 넘었다. 아직도 손을 못 쓴다면 꽤 깊은 화상일 터였다.

“아아, 많이 아프셨겠네요.”

“지금은 괜찮아. 뭘 잡거나 만지지만 않으면.”

발레리는 테렌스의 눈치를 살폈다. 더는 손 얘기를 하면 안 될 것 같은 분위기였다.

황태자 특유의 서늘한 인상이 되돌아오자 발레리는 자못 아쉬웠다.

방금까지만 해도 그는 아주 희귀한 미소를 짓고 있었으니까.

괜히 손 얘길 해서 분위기를 가라앉힌 게 내심 미안했다. 깊은 화상이라면 많이 고통스러웠을 텐데. 걱정해 준답시고 실수로 안 좋은 기억을 건드린 꼴이 됐다.

발레리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자리에서 몸을 천천히 일으켰다.

“왜 일어나지?”

그녀가 썰어준 고기를 씹던 테렌스가 당황해서 물었다. 벌써 채플로 돌아가고 싶은가 해서.

“여기 집무실 구경 좀 하고 싶은데, 그래도 될까요?”

“아…. 그래.”

사실 황태자의 집무실에는 별로 볼 게 없었다.

창가에 있는 업무용 책상에는 서류로 탑을 쌓아놨고, 한쪽 벽은 온갖 책으로 가득했다. 출입문 옆 응접실에는 별 특징 없는 검은색 가죽 소파와 커피 테이블이 놓였다. 아직 날씨가 따뜻해서 벽난로는 굳게 닫혀 있었다.

취향이 무미건조한 건지, 장식품이랄 것도 크게 없었다. 제일 화려한 게 그나마 식사 테이블에 놓인 촛대였다.

“뭐랄까. 정말 일만 하는 사람의 방 같아요.”

“이 방에서는 일만 하는 게 사실이니까.”

그나마 같이 구경할 만한 거라곤 책장뿐이었다. 어떤 책을 읽는지 보면 얘기할 만한 주제도 좀 나오겠지.

대부분은 제왕학과 법학, 역사, 행정 관련 내용을 담은 회색 책이었다. 가까이 들여다보고 싶지도 않았다.

“어? 여기 있는 건 다른 책들이랑은 좀 다른데요?”

발레리가 발견한 쪽에는 확실히 독특한 책들이 꽂혀 있었다.

저마다 색이 달랐다. 짙은 빨간색도 있고, 칠흑같이 검은색도 있고, 푸른빛에 가까운 보라색도 있고.

공통점이 있다면 하나같이 오래된 책들이었다. 가죽 커버는 닳을 대로 닳았고, 종이도 싯누렇게 빛이 바랬다.

발레리는 이 책들의 제목을 한 글자씩 짚어가며 읽었다. 글자와 친하지 않아서 속도는 느렸지만.

“지하, 세계? 지하세계라니. 무슨 소설 같은 거예요?”

“아니.”

“가만있자, 이건 제목이…. 와이어 숲의 역사? 오오, 저 여기 가봤는데. 이런 책 읽으면 재밌어요?”

“아니. 이 책장에서 재미로 읽는 책은 아무것도 없다.”

테렌스는 꽤 냉엄한 말투로 대답했다.

“지하세계, 와이어 숲. 보니까 이쪽에 꽂힌 책들은 다 비슷한 주제인데요? 와이어 숲에 지하세계 입구가 있다고 건국신화에 나오잖아요. 거기 마왕인지 마물인지 산다고.”

“…너도 그 내용을 아는구나.”

발레리는 칼레바니아 건국신화를 대략 외우고 있었다.

특히 와이어 숲을 둘러싼 내용이라면 귀가 닳도록 들었다.

물론 모두 켄드릭의 입에서 나온 내용이었다.

“전하께서 이런 쪽에 관심이 있으신 줄은 몰랐어요.”

“관심이라. 단순히 관심으로 치부할 순 없는데.”

“그럼 취미에요?”

“아니.”

“취미가 아니라면, 굳이 왜 읽으시는 거예요? 이런 특이한 책을?”

“글쎄.”

황태자가 또 침묵했다. 이번엔 왜 심기가 불편한 건지 도통 모르겠다.

마니악한 독서 취향을 들켜서 불쾌해진 건가.

와이어 숲과 통한다는 지하세계, 그리고 마왕과 마물의 존재를 정말 믿기라도 한다는 걸까.

어쨌든 분위기는 또 칙칙하게 가라앉았다.

‘나 또 실수했나 보다. 첫 보고 시간부터 이렇게 망해버리다니. 처음엔 기분 괜찮아 보였는데. 그냥 가벼운 농담 따먹기나 계속할걸.’

발레리는 식은땀을 흘리며 테렌스의 굳은 낯빛을 관찰했다. 누군가의 눈치를 살피는 일은 그녀에게 익숙한 일이 아니었다.

“시간이 늦었구나. 바래다주겠다.”

테렌스가 벽시계를 보며 말했다.

사람 한껏 눈치 보게 만들어 놓고는 굳이 바래다주겠다니.

정말 속 모를 인간이었다.

***

황녀의 석실 안.

켄드릭은 테이블에 음식을 세팅한 뒤 프리다의 맞은편에 앉았다.

“켄드릭 경, 내가 갑자기 저녁 먹자고 해서 놀랐죠?”

“…예상 밖이긴 했습니다만, 영광입니다.”

“음, 그때 일 이후로 우리 사이가 너무 어색해진 것 같아서요. 한동안은 계속 봐야 하는데.”

프리다가 왕거미 사건을 넌지시 거론했다.

켄드릭의 머릿속에서 그녀가 테이블 위에서 덜컥 뛰어드는 장면이 또다시 재생됐다.

“아아, 제 태도로 인해 불편함을 느끼셨다니 송구합니다.”

켄드릭이 고개까지 숙이며 사과하자, 프리다는 당황하며 손사래를 쳤다.

“아, 아니에요! 나도 부자연스럽게 대했는데요. 경에게 함부로 달려든 내 잘못이에요. 그때 경은 왕거미보다 내가 더 무서웠을 것 같아요.”

풋.

켄드릭의 입이 웃음을 터뜨리며 양옆으로 활짝 벌어졌다. 황녀의 입꼬리도 덩달아 올라갔다.

“아뇨, 무섭지는 않았습니다. 조금 당황하긴 했지만요.”

“그동안 석실에서 거미가 몇 번 나오긴 했었는데, 저번만큼 큰 거미는 생전 처음이었어요. 걔한테 물리기라도 하면 정말 죽을 것 같아서요…. 순간 너무 무서웠어요.”

“그런 생각 하실 만도 합니다. 저도 거미를 많이 봤지만, 그놈만큼 큰 건 몇 없었으니까요.”

“거미를 많이 봤어요?”

프리다는 토끼 눈을 뜨고 켄드릭을 쳐다봤다. 곱게 자랐을 후작가 막내아들이 그렇게 흉한 생물을 많이 봤다는 게 신기했다.

“아시다시피 저희 영지가 자연 친화적입니다. 숲도 있고, 강도 있고, 산도 있고. 다리 여러 개 달린 녀석들 천지죠.”

“벌레 많은 건 싫지만, 남부 지방 구경은 해보고 싶네요.”

“저희 영지에 한 번도 안 와보셨습니까? 경관이 좋아서 여행가들에겐 나름대로 인기가 있습니다.”

“여기 황성 밖으로는 거의 안 나가봤어요. 어릴 땐 어리니까 성안에 있었고, 스무 살 때부턴 알다시피, 계속 여기서만 살았으니까요.”

“아….”

수프를 떠먹던 켄드릭은 숟가락질을 멈추고 황녀를 지그시 바라봤다.

그녀가 내심 안타까웠다. 드넓은 세상에 태어나 좁은 땅만 밟고 살아왔으니. 지금은 아예 석실에 발이 묶인 신세고.

황녀는 무슨 이유로 이런 생활을 하고 있을까.

프리다는 그의 동정 어린 눈빛을 금방 눈치채고 씁쓸하게 웃었다.

“무슨 생각 하는지 알아요. 내가 왜 여기서 숨어 지내는지 궁금하죠?”

“네, 저뿐 아니라 모두가 궁금해할 겁니다. 황녀님의 거취 자체가 전 국민적인 수수께끼일 텐데요. 황궁 안에서도 워낙 행방이 묘연하시니 말입니다.”

“그렇죠…. 안 궁금한 게 더 이상할 거예요.”

프리다는 말끝을 흐리며 걸쭉한 수프를 숟가락 끝으로 헤집었다.

켄드릭은 얼마 전에 있었던 검은 고양이 사건을 떠올렸다.

그때 켄드릭은 현장에 없었지만, 문지기 수장 루퍼트에게 전해 듣기론 약한 마기가 느껴졌다고 했다.

“혹시, 어떤 사악한 마법사가 황녀님을 노리고 있는 겁니까? 그자의 눈을 피해 숨어 계신 건가요?”

켄드릭이 자못 진지한 기색으로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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