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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자한테는 관심 없는데요 (28)화 (28/173)

28화

오늘도 서류 더미로 빽빽한 황태자의 집무실 책상.

테렌스는 내리 다섯 시간 동안 일에 파묻혀 있었다. 화장실도 못 간 채로.

요즘 들어선 오전에 도무지 짬이 안 나서 석실을 찾아갈 수 없었다.

그는 눈앞이 침침해졌는지, 의자를 뒤로 젖히고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았다.

눈꺼풀이 느리게 끔뻑였다. 사막처럼 건조해진 연하늘색 눈동자엔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전하, 서류도 좀 쉬어 가면서 보세요. 20대 때 무리하면 노안 빨리 옵니다.”

“레이븐? 언제 돌아온 거지?”

잠시 외출했던 레이븐이 인기척도 없이 집무실로 복귀해 있었다.

“아까 노크까지 하고 들어왔는데요. 하도 집중하셔서 잠자코 있었습니다만.”

“그래, 고양이에 관해선 얘기가 좀 나왔나?”

“다른 건물에 있던 황궁 마법사들은 마기를 전혀 못 느꼈다네요. 고양이 한 마리 정도면 위협 목적은 아닌 것 같대요.”

테렌스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상했다는 듯이.

“그야 감시 목적이겠지.”

“기도실 내부까진 안 들어갔다면서요. 석실의 존재는 아직 모르지 않을까요.”

“다른 건물도 아니고 채플에 들어간 걸 보면, 뭔가를 감지한 듯하다.”

레이븐은 굳은 얼굴로 팔짱을 꼈다.

“뭐, 일 년은 시간 더 준다고 했었잖아요. 이제 열 달도 안 남긴 했지만.”

“그래도 경계태세는 유지해야 한다. 그들의 말을 완전히 믿을 순 없으니.”

또다시 테렌스의 깊은 한숨이 이어졌다.

대체 몇 번째 한숨인지. 레이븐은 거의 해탈한 표정이었다.

테렌스의 한숨은 주변 사람까지 맥빠지게 하는 효과가 있었다. 어떻게 하면 저 한숨 소리를 틀어막을 수 있을까, 이게 레이븐의 요즘 최대 고민이었다.

“전하, 그래도 좋은 소식 하나 있는데요.”

“…뭔데.”

“오늘은 수요일입니다.”

테렌스가 자리에서 튀어 오르듯 벌떡 일어섰다. 잊고 있던 중요한 게 떠오른 모양이다.

“지금 몇 시지?”

“저기 벽시계 있잖습니까. 한 시간 남았어요. 시종장한테는 때맞춰 식사 준비해 놓으라 했으니 걱정하지 마시고요.”

***

“땀을 많이 흘려서 허기져요. 발레리, 오늘도 저녁 먹고 갈 거죠?”

검술 수업이 끝나고, 프리다는 언제나처럼 발레리에게 식사를 제안했다.

석실에서 외롭게 지내온 황녀에게 발레리와의 식사는 큰 낙이었다. 웬만하면 삼시 세끼 모두 함께하고 싶었다.

“오늘은 좀 어려워요, 황녀님.”

“왜요…?”

“수요일이잖아요. 오빠분한테 보고하러 가야 해요. 오늘이 처음이라 어느 정도 준비도 해야 할 것 같고요.”

“아 맞다, 오빠가 그런 걸 시켰지…. 알았어요. 잘 다녀와요.”

“네, 황녀님. 식사 맛있게 하시고요. 내일 뵐게요!”

프리다는 자못 서운한 표정으로 발레리를 배웅했다.

그녀는 여전히 이해할 수 없었다.

오빠 테렌스가 발레리에게 따로 보고를 받으려 하는 이유를.

테렌스는 주말마다 프리다의 근황을 체크하러 석실에 찾아왔다.

매번 프리다는 발레리가 짚어준 세세한 포인트를 하나하나 설명하고, 새로 배운 검술 동작을 직접 보여주기도 했다.

발레리와 뭘 먹고 무슨 얘길 했는지, 일상적인 사항 또한 빼놓지 않았다. 더 보고할 게 남았나 싶었다.

켄드릭과의 ‘왕거미 사건’은 아직까지 비밀에 부치고 있지만.

똑똑.

“네, 들어와요.”

저녁 식사를 주문받으러 온 켄드릭이었다.

“황녀님, 저녁 식사 준비해드려도 되겠습니까?”

이상하다. 보통은 바로 대답이 나오는데, 황녀는 말없이 가만히 쳐다보고만 있었다.

“황녀님? 식사 생각 없으십니까?”

“먹을 거예요. 음, 두 사람 몫으로 준비해 주세요.”

“발레리는 방금 퇴근했습니다만, 혹시 석실에 다른 손님이 오십니까?”

“아뇨.”

켄드릭은 살짝 당황했다.

황녀는 2인분은커녕 1인분조차 버거워하는 소식가였다. 혼자서 2인분을 시킬 이유가 하나도 없었다.

“네, 그럼 2인분으로 내오겠습니다.”

상급자가 시키는 일에 이의를 제기할 켄드릭이 아니었다. 까라면 까야지 어쩌겠나.

“켄드릭 경.”

석실 밖으로 나가려던 켄드릭이 황녀의 부름에 재깍 돌아섰다.

“네 황녀님, 말씀하십시오.”

“오늘 나랑 저녁 먹어요.”

명령에 가까운 제안이었다. 켄드릭은 당황해 쭈뼛거렸다.

“혹시 곤란한가요? 다른 문지기들 눈치 보여서?”

“아, 아닙니다. 바로 가지고 오겠습니다.”

***

“배고프다. 보고는 속사포처럼 하고 퇴근해야지.”

발레리는 휘파람을 불며 황태자궁에 다다랐다.

정문에는 보초 말고도 익숙한 행색을 한 사람이 서 있었다. 레이븐이었다.

“아가씨, 휴가 잘 갔다 왔어요?”

“덕분에요. 근데 왜 혼자 밖에 나와 계세요? 황태자님 호위 안 하세요?”

“아가씨 마중 나왔죠.”

레이븐은 평소처럼 느물거리며 발레리를 맞아들였다. 발레리는 반 발짝 물러서며 그를 경계했다.

“왜 마법사님이 제 마중을 나오시죠? 저 집무실 가봐서 어딘지 아는데.”

“무릇 인간이란 돈줄 쥔 사람의 명령을 따라야 하는 것 아니겠나요?”

“아…. 그렇고말고요. 앞장서세요.”

이 얄미운 마법사도 어쨌건 황태자한테 월봉 받아먹고 사는 근로자였다.

발레리는 이 사실을 새삼 깨닫고 레이븐에 대한 경계심을 약간 거둬들이기로 했다.

그렇게 그녀는 황태자의 집무실에 또다시 입성했다.

저번엔 켄드릭과 함께 기밀유지 서약서에 서명하러 왔었고, 혼자 찾아온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안녕하세…. 아니, 이게 다 뭐예요?”

발레리는 방에 들어서자마자 코를 벌름거렸다. 아니나 다를까, 집무실 한쪽의 6인용 마호가니 테이블에 온갖 산해진미가 차려져 있었다.

큼지막한 티본스테이크부터 통닭구이,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연어 요리까지. 세상의 고기란 고기는 종류별로 대령해놓은 것 같았다.

그뿐인가. 테이블 한편에는 굉장히 부담스러운 모양의 촛대가 놓여있다. 그 위에서 촛불 다섯 개가 물결치듯 일렁였다.

테렌스는 그 곁에 부자연스러운 자세로 서 있었다. 그는 발레리가 앉을 의자를 미리 빼놓고 옆에서 기다렸다.

“왔구나.”

“어, 따로 약속 있으신데 제가 괜히 찾아온 건 아니죠? 그럼 보고는 나중에….”

발레리가 다시 밖으로 나가려 하자, 레이븐은 고개를 저으며 그녀를 만류했다.

“아가씨, 열심히 잡수시면서 보고하라고 차린 거예요. 그럼 전 이만 나가봅니다.”

그는 두 사람에게 인사한 뒤 집무실을 유유히 빠져나갔다.

이제 정말 둘뿐이었다.

“잘 먹겠습니다!”

어색할 틈도 없었다. 발레리는 자리에 앉기 무섭게 고기를 한입 가득 욱여넣었다. 그녀는 육류를 종류별로 맛을 다 보고 나서야 보고를 시작했다.

대부분은 지난 주말 프리다에게서 들은 이야기였다. 하지만 테렌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열심히 경청했다. 마치 처음 듣는 이야기처럼.

발레리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모두 맑은 새벽 공기처럼 신선하게 다가왔으니까.

새로운 내용이 있긴 했다. 진검을 쓰기 시작한 뒤, 프리다가 방어할 때 눈을 감는 습관이 있다는 걸 발견했다는 것.

“…그거 고치려고 황녀님한테 공을 아주 마구 던져드리고 있어요. 개인적으로 스트레스 풀이도 되고 좋아요.”

“기발하구나. 반사 신경을 그런 방식으로 키울 수 있다니.”

“네, 황녀님도 재밌어하세요.”

“다행이네…. 훈련 보고는 이 정도면 되었다.”

‘뭐야, 생각보다 보고 길게 안 해도 되잖아.’

발레리는 안도의 미소를 지으며 다시 포크를 들었다.

“네. 근데 이거 다 먹고 가도 되죠?”

“다 먹으라고 내온 거니 얼마든지 들어라.”

“헤헤, 네!”

발레리는 티본스테이크를 썰면서 생각했다. 보기보다 황태자의 인격이 나쁘진 않은 것 같다고.

보고하러 온 일개 월급쟁이의 식사를 이토록 정성스레 챙겨주니 말이다.

“너는…. 어떤 느낌을 좋아하지?”

발레리가 먹는 모습을 한참 지켜보던 테렌스가 뜻 모를 질문을 던졌다.

“느낌이요? 뭔 느낌이요? 음식 식감이요?”

“아니.”

“그럼요?”

테렌스는 목을 한 번 가다듬은 뒤 이렇게 답했다.

“…남자 말이다. 어떤 느낌의 남자를 좋아하는지.”

“중매라도 서 주시게요? 결혼 생각은 없는데.”

발레리가 아스파라거스 한 가닥을 쏙 흡입하며 대답했다.

“…….”

테렌스는 할 말을 잃었다. 질문의 의도를 전혀 파악하지 못할 줄은 몰랐으니까.

“그러고 보니 스물둘이면 시집갈 나이긴 하네요. 너무 쏘다니느라 나이 먹는 것도 모르고 살았네.”

칼레바니아 여성들은 이십 대 초반에 시집가는 게 다반사였다. 평민들은 십 대 후반부터 연애해서 스무 살 성인이 되자마자 결혼하는 경우가 많았다.

스물두 살이면 딱 적령기를 지나고 있었다. 발레리 본인은 전혀 의식하고 있지 않은 숫자였지만.

“…쏘다녔다고?”

“아, 뭐 이전에 여기저기 여행을 많이 다녔어요.”

발레리는 그동안 펠런과 함께 쏘다닌 지역을 하나하나 떠올렸다.

‘여행이라기보다는…. 못된 귀족 가문을 이곳저곳 많이 털고 다녔지. 켄드릭네 가문처럼 깨끗한 데는 안 건드렸지만.’

“어디를 그렇게 다녔지?”

“음, 범위를 크게 말하자면 북부 볼드윈 공작령, 동부 버몬트 후작령, 남부 프레이저 후작령…. 웬만한 영지는 안 다닌 데가 없는 것 같은데요?”

“많이도 다녔군. 부모님께서 걱정하시진 않았고?”

“부모님 없는데요.”

“음? 네 신분증명서에는 부모님이 나와 있었는데.”

아차차, 발레리는 마른침을 삼켰다.

이제야 생각났다. 본인이 ‘발레리 로빈슨’이라는 가짜 신분으로 취업한 상태라는 게.

진짜 발레리 로빈슨은 후작령의 한 농가에서 태어난 여자였다.

이걸 어떻게 수습해야 할까. 발레리는 진땀을 흘리며 가까스로 둘러댔다.

“아아, 거둬주신 분들이에요. 친부모님은 아니고요.”

“…아, 그렇구나.”

그녀의 담담한 고백에, 테렌스의 얼굴에 철렁하고 파문이 일었다.

테렌스는 눈을 처연하게 내리깐 채 잠시 말을 잃었다.

무거운 공백이 이어지자 발레리는 그의 심기를 조심스레 살폈다.

“저기요.”

“음?”

“혹시 불쌍하다고 생각해서 말이 없어지신 건 아니죠?”

“…아니다.”

애써 부정하긴 했지만, 마음 한구석이 아려오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생각보다 사연이 있는 여자였다.

“친부모님 얼굴도 몰라요. 그래서 그립거나 슬프거나 그런 것도 없어요. 그런데….”

“그런데?”

“아유, 내 얘길 너무 많이 했네. 전하는 하실 말씀 없나요?”

발레리는 화제를 돌렸다. 신상정보에 관한 얘기는 될 수 있으면 피하고 싶었다.

그러나 테렌스는 발레리의 역질문에 대비하지 못했다.

이윽고 정적이 흘렀다.

분위기가 축 처지자 발레리는 씩 웃었다. 그냥 아무 말이나 해야지 별 수 있나.

“음, 저도 그럼 똑같은 질문할게요. 어떤 느낌의 여자…. 아니 이것부터 물어야겠다.”

“음?”

“여자를 좋아하긴 하세요?”

무슨 질문이 이렇게 원초적인지. 정체성부터 똑똑히 알려줘야 하는 건가.

테렌스는 눈을 질끈 감고 음절 하나하나에 무게를 실어 대답했다.

“나는, 여자를, 좋아한다.”

여자를 얼마나 좋아하면 저렇게 강조를 하는 거지. 발레리는 멋쩍은 얼굴로 코밑을 쓱 문질렀다.

“아 네. 혹시나 다른 가능성도 있지 않을까 싶어서요.”

칼레바니아는 동성 간의 결합을 금지하지 않았기에, 성 지향에 대한 질문이 딱히 실례가 되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테렌스에겐 전혀 달갑지 않은 질문이었다.

애초에 발레리가 자신을 잠재적 연애 상대로 의식하지 않는다는 걸 확인시켜주는 발언이니까.

“…후.”

“그럼 전하는 어떤 느낌이 좋으신데요?”

테렌스는 발레리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봤다. 그의 제일 처음 눈에 들어온 건….

“…눈동자 색이 짙은.”

“아아, 눈동자 색이 연하셔서 반대로 진한 사람을 좋아하시는 건가. 다른 건 없고요?”

테렌스의 시선이 발레리의 목 언저리로 향했다. 언젠가 보았던 그녀의 유려한 목선이 떠올랐다.

그래도 차마 입 밖에 꺼낼 순 없는 부위였다. 그래서 다른 특징을 얘기하기로 했다.

“키는 큰 편이….”

“아아, 키를 보시는구나. 또요?”

“검술도 잘한다면 좋겠지.”

발레리는 어안이 벙벙해져서 뒷덜미를 긁었다. 여자를 좋아한다는데…. 황태자의 취향은 딱히 보편적인 것 같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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