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저한테요? 뭐가 궁금하신데요?”
발레리는 제 앞에 불쑥 다가온 테렌스를 멀뚱히 쳐다봤다.
“문지기들 말로는, 어제 네가 고양이 한 마리를 봤다고 하던데.”
어젯밤 문지기 여럿이서 고양이를 찾아 나선 일을 말하는 것 같았다.
“아아 네, 그랬죠.”
“어떻게 생긴 고양이인지 기억하나?”
“음, 온몸이 새까만 애였어요. 크기는 보통 길고양이 성묘 정도? 워낙 순식간에 지나가서 자세히는 못 봤고요.”
“별다른 움직임은 없었고?”
“그냥 제 방문 앞에 있었는데요, 뭐지 하고 다가가니까 후문 쪽으로 도망갔어요.”
“…알았다.”
이쯤이면 용건은 모두 해결된 것 같은데, 황태자가 우두커니 서서 움직이지를 않는다.
“더 하실 말씀 있으세요?”
“오빠, 발레리한테 무슨 할 말 있어?”
프리다 또한 테렌스가 머뭇거리는 이유가 궁금했다.
“…정기 보고 시간은 오후 일곱 시로 하겠다.”
“아아, 네.”
역시나 업무 관련 용건이었다.
할 말을 마친 테렌스는 바로 뒤돌아서 밖으로 나갔다.
정기 보고 시간이라니 무슨 소릴까. 프리다는 궁금증이 샘솟았다.
“발레리, 오빠한테 무슨 보고하기로 했어요?”
“아, 훈련 진행 상황 일주일에 두 번 보고하라고 하시더라고요.”
“응? 내 훈련 진행 상황을 보고한다고요?”
“네. 매주 수요일 금요일에 하기로 했는데, 오후 일곱 시에 집무실로 오라고 통보한 거예요.”
프리다는 팔짱을 끼고 고개를 갸웃했다.
“이상하다…. 내가 주말마다 엄청 자세히 얘기해 주는데. 시범도 보이고. 오빠가 발레리를 참 귀찮게 하네요. 내가 대신 사과할게요.”
“아뇨, 괜찮아요. 군 생활을 해보니까…. 보고받는 것 자체를 즐기는 상관들도 있더라고요. 황녀님 오빠분도 아마 그런 쪽인가 보죠.”
발레리는 황태자궁 보초 시절 직속상관이었던 클린트 하사를 떠올렸다.
클린트는 근무를 마친 병사들로부터 한 시간씩 보고를 받아야만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었다.
후문으로 몇 명이 지나갔는지, 그중에 고관대작은 누가 있었는지 미주알고주알 쏟아내야 했다. 이 때문에 발레리는 관리들의 얼굴과 이름을 매치하는 데 몇 날 며칠을 투자했었다.
‘그때 입 털던 실력 좀 발휘해 보지 뭐.’
발레리는 어깨를 으쓱했다.
병사 시절 괜히 에이스였겠나. 보고라면 자신이 있었다.
그 시각 석실에서 나온 테렌스는 닫힌 문 앞에 멈춰 서 있었다.
바짝 긴장한 문지기들이 경례했다. 입에서 어떤 불호령이 떨어질까 노심초사하는 눈치였다.
“루퍼트, 밤새 고생이 많았네.”
다행히 황태자의 말투는 평소와 같았다.
“아닙니다, 전하.”
“석 달 전보다 마기가 강했나?”
“아닙니다. 그에 비하면 아주 약했습니다. 위협적인 느낌도 없었습니다.”
“…그래도 경계를 더 강화해 주길 부탁하겠네.”
“네. 마기 감지력이 뛰어난 마법사들의 야간 근무를 늘리려 합니다.”
루퍼트가 향후 계획을 설명하자, 마법사들이 뒤에서 작게 한숨 쉬는 소리가 들렸다.
“너무 무리시키진 말고.”
“네, 알겠습니다.”
테렌스가 별말 없이 계단을 오르자 문지기들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
프리다가 일주일간 목이 빠지게 기다리던 시간이 다가왔다.
발레리와의 아침 식사 타임.
켄드릭이 큰 쟁반을 들고 들어와 테이블에 접시를 세팅했다.
오늘의 메뉴는 생선찜. 매끼 고기나 생선, 또는 계란을 챙겨주라는 발레리의 당부에 켄드릭은 성실히 응하고 있었다.
“식탁보가 바뀌었네?”
발레리는 단번에 알아봤다. 원래는 상아색이었던 것 같은데, 오늘은 연한 하늘색 천이 깔려 있다.
“아, 그, 그러네. 식탁보가 바뀌었네.”
켄드릭은 프리다의 눈치를 보며 말을 더듬었다.
“뭐야, 기사 겸 집사님께서 식탁보 바뀐 것도 몰랐어?”
모를 리 없었다. 식탁보를 바꿔 깐 장본인이 켄드릭이니까.
콜록콜록.
프리다가 갑자기 기침했다. 목구멍이 타는 듯 따가워져서.
“켄드릭 경, 나 물 좀 줄래요?”
“네, 여기 있습니다.”
켄드릭이 유리컵에 물을 따라 바로 황녀에게 내밀었다.
프리다가 그걸 받아드나 싶더니, 정전기라도 오른 듯 소스라치며 유리컵을 놓쳐버렸다.
와지끈 깨지는 소리가 세 사람의 고막을 때렸다. 이미 컵은 산산조각 났다.
“아아…. 미안해요.”
“아, 아닙니다. 바로 치우겠습니다.”
켄드릭이 석실 구석 수납장에서 비와 쓰레받기를 챙겨왔다. 그는 기계 같은 동작으로 깨진 유리컵을 쓸어 담았다.
발레리는 프리다의 상태를 살폈다.
“황녀님, 갑자기 왜 그렇게 놀라세요? 어디 안 좋으세요?”
“아뇨, 그냥 물컵이 너무 차서요!”
얼음물도 아닌데 너무 차다고 손에서 놓치다니.
발레리는 살짝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넘어가기로 했다. 황녀가 체질상 온도에 민감할 수도 있으니까.
한데 프리다의 표정이 왠지 모르게 굳어 있었다. 붉은 입술을 자근자근 깨물기도 했다. 발레리는 그 모습을 별말 없이 지켜봤다.
켄드릭은 여전히 기계처럼 유리컵 잔해를 치우고 있었다. 평소라면 넉살 좋게 아무 말이라도 했을 텐데, 말수가 눈에 띄게 줄었다.
‘이 둘은 왜 이렇게 어색한 거지. 설마….’
발레리는 생선찜을 입안에 한가득 밀어 넣으며 생각했다.
‘싸운 건가? 에이, 아닐 거야. 황녀님이랑 사이 틀어지면 본인 출셋길 막는 건데. 야망가 켄드릭이 그럴 리 없지.’
이리하여 황녀의 검술 수업은 일주일 만에 재개됐다.
오늘부터는 진검을 쓰기로 했기에, 프리다는 잔뜩 기대에 차 있었다.
“진검은 어떤 걸로 쓰실 거예요?”
발레리가 연무장 벽에 걸린 검들을 하나하나 살펴보며 물었다.
“여기엔 없어요. 조금만 기다리면 새로 올 거예요.”
몇 분 지나지 않아 노크 소리가 들리더니 켄드릭이 들어왔다.
기다란 무언가를 양손에 받쳐 들고 있었다. 옆으로 긴 상자였다.
아무래도 보통 상자는 아닌 것 같았다. 표면을 둘러싼 소재가 그 귀하다는 로열 블루 색상의 실크였다. 범상치 않은 광택이 흘렀다.
“황제 폐하께서 직접 주문하신 검이라고 전달받았습니다.”
켄드릭의 설명에 프리다는 눈을 반짝이며 상자를 받아들었다.
프리다는 아버지의 선물을 신중하게 열어봤다. 발레리도 떨리는 마음으로 곁에서 구경했다.
검 한 자루가 모습을 드러냈다. 신비한 푸른빛이 감돌았다.
발레리의 눈길을 가장 먼저 사로잡은 건 검집 한가운데 박힌 커다란 사파이어.
잔혹한 표현을 빌리자면, 황녀의 눈동자를 그대로 박아 넣은 듯한 형상이었다.
황녀의 머리칼과 유사한 빛깔의 플래티넘이 검집 전체를 뒤덮고 있었다.
플래티넘으로 세공한 가느다란 넝쿨과 작은 잎사귀들이 검집과 칼등 부분을 촘촘하게 휘어 감았다. 자루 부분은 군청색으로 마감됐고, 자루 맨 끝에 달린 또 다른 사파이어도 찬연히 빛났다.
프리다의 모습을 검으로 형상화한다면 딱 이렇게 생기지 않았을까.
“와…. 황녀님만을 위해 만들어진 검 같아요.”
발레리의 입에선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정말 비슷하게 생겼네….”
프리다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칼을 천천히 뽑았다.
“네? 뭐가 비슷해요?”
“아니에요. 우리 빨리 시작해요.”
프리다는 한쪽 손에 검을, 다른 쪽 손에 발레리의 손을 쥔 채 연무장으로 잰걸음을 쳤다.
두 여인은 곧이어 진검으로 연습 겨루기를 시작했다.
프리다는 켄드릭과 함께 연습한 대로 검을 힘껏 휘둘렀다.
하지만 역부족이었다.
발레리는 들어오는 공격을 족족 가볍게 쳐냈다.
“와, 발레리. 나 정말 열심히 덤벼드는 건데 어떻게 다 쳐내요?”
“저는 아주 오래전에 외운 동작이니까요. 이번엔 제가 갈 테니까 막아 보세요.”
발레리가 검을 절도 있게 휘두르며 프리다를 밀어붙였다. 물론 속도와 힘은 평소의 절반 수준으로 유지했다.
이 역시 그녀가 켄드릭에게서 배운 프레이저 가문의 검술 동작이었다.
초반엔 쩔쩔매며 뒷걸음질 치던 황녀는 어느새 공격을 척척 막았다. 아직 힘이 약해서 좀 더 세게 밀고 나가면 무너질 게 뻔했지만.
“오오, 황녀님. 막기 연습 되게 열심히 하셨나 봐요. 자세도 안 무너지는데요?”
“네. 켄드릭 경이 자세를 좀 봐줬어요.”
“아아, 그래서 그렇구나.”
발레리는 또다시 의문에 잠겼다.
‘켄드릭이 자세 봐주던 중에 황녀님을 혼냈나? 그래서 어색한 건가?’
그녀는 애써 궁금증을 잠재운 뒤 프리다의 방어 패턴을 유심히 관찰했다.
그러다 특이점을 발견했다. 프리다는 발레리의 칼날이 훅 들어올 때마다 눈을 감았다.
상대의 검 궤적을 끝까지 봐야 어떤 공격이든 막을 수 있을 텐데, 그러질 못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목검이 아니라 진검이 다가오니 움찔할 수밖에 없겠지. 반사 신경을 좀 더 강화할 필요가 있겠다.’
이게 발레리의 결론이었다.
“황녀님, 검이 무서우세요?”
“아뇨, 왜요?”
“제가 휘두를 때마다 눈 감으시길래요.”
“…내가 그래요?”
프리다는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본인이 눈을 감는다는 사실을.
“검의 움직임을 끝까지 보셔야 해요. 그래야 변칙적인 공격도 막을 수 있어요.”
“그렇구나. 내가 본능적으로 겁을 먹나 봐요….”
두 여인은 잠시 연습을 멈췄다.
한동안 생각에 잠겨있던 발레리의 입에서 ‘아!’ 소리가 나왔다. 뭔가 아이디어가 떠오른 것처럼.
“황녀님, 우리 놀이 하나 할까요?”
“헤헤, 이번엔 어떤 놀이예요?”
프리다가 눈을 반짝였다.
새로운 놀이라니. 발 가위바위보와 땅따먹기를 졸업했으니 더는 안 할 줄 알았는데. 그녀의 짙푸른 눈에 기대감이 가득 차올랐다.
발레리는 석실 밖으로 걸어 나갔다.
켄드릭은 황녀의 집사답게 철문에서 가장 가까운 위치에 서 있었다.
“켄드릭.”
“응? 무슨 일 있어?”
“투구 하나 갖다 줘. 눈구멍만 뚫린 거로.”
“…투구는 왜?”
“훈련할 때 쓰게. 공도 좀 많이 가져와 줘. 병사들 공차기할 때 쓰는 거랑 애들 놀이할 때 쓰는 작은 고무공도.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알았어. 구해볼게.”
켄드릭은 군말 없이 그녀의 부탁을 들어줬다.
어차피 다 황궁 내 군용 창고에 있는 물건들이었으니까.
한 시간쯤 뒤, 켄드릭은 공이 가득 든 상자를 석실로 가져와 발레리 곁에 내려놨다.
“고마워.”
발레리는 켄드릭에게 감사 인사를 한 뒤 사과만 한 공을 집어 들었다.
“자, 준비되셨나요?”
무거운 양철 투구를 쓴 황녀가 발레리의 맞은편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곧 던질게요. 피하셔도 되고 잡으셔도 좋은데, 절대 눈을 감으시면 안 돼요.”
“응! 나 눈 감는지 잘 봐줘요!”
놀이가 시작됐다.
발레리는 투수로 변모해 프리다를 향해 공을 마구 쏘았다. 프리다는 눈을 치켜뜨고 공을 이리저리 피했다. 크고 느린 공은 손을 뻗어 잡기까지 했다.
프리다는 신이 나서 좌우로 게걸음을 하며 웃음을 터뜨렸다.
“흐흐, 더 던져봐요, 더!”
그러던 중.
‘탕’
발레리가 던진 고무공이 황녀의 얼굴 한가운데 명중했다.
프리다가 투구를 쓰지 않았다면 코가 깨졌을 정도로 충격이 강했다.
“발레리, 투구 썼다고 내 코에다가 던지면 어떡해요….”
프리다가 우는소리를 내며 발레리를 나무랐다.
“죄송해요, 황녀님. 너무 잘 피하셔서 한번 도발하고 싶었어요.”
“헤헤, 그래도 눈 안 감았어요! 나 눈 뜨고 있던 거 봤죠?”
켄드릭은 아직 나가지 않은 채 가만히 서서 관찰했다.
신나서 공을 던지는 발레리의 모습과, 이를 피하려고 애쓰는 프리다의 몸짓을.
그의 녹색 눈동자엔 두 여인의 움직임이 느린 화면으로 흘러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