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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자한테는 관심 없는데요 (26)화 (26/173)

26화

테렌스는 집무실에서 서류 더미에 파묻혀 지내고 있었다. 언제나처럼.

최근 황제는 민원 업무의 3할 정도를 테렌스에게 뚝 떼어줬다. 그 덕에 이전보다 처리할 일이 많아졌다.

동쪽으로 국경을 접한 이스티아와의 무역 협상 합의문도 검토할 부분이 남아 있었다.

“후우….”

“전하, 제가 아까부터 셌는데요. 지금이 서른 번째입니다.”

“뭐가.”

“한숨이요. 한숨을 서른 번 쉬셨다고요. 아침부터 쉬신 거랑 합하면 족히 쉰 번은 됩니다.”

그의 곁에 서 있던 레이븐이 강한 어조로 불만을 표시했다.

한숨 소리를 수십 번째 듣다 보니 속에서 짜증이 올라온 모양이었다.

“내가 그랬나.”

“일은 늘 많으셨잖아요. 다른 걱정거리가 있으세요?”

“…없다.”

레이븐은 테렌스의 어깨를 잡아 마구 흔들고 싶었다. 얼굴에 다 쓰여 있으니까 제발 좀 진실을 말하라고.

“없기는 뭐가 없어요. 한숨을 거의 나팔처럼 불고 계시구먼. 설마….”

“…….”

“아직도 그 아가씨 휴가 간 것 때문에 그러세요?”

테렌스는 고개를 돌려 레이븐을 몇 초간 흘겨본 뒤, 다시 시선을 내려 서류를 훑었다.

“아니다. 볼드윈 공작에 대한 민원이 계속되는군. 북부 무역상들과 상공업자들에게 횡포가 심한가 본데.”

“볼드윈 공작이 그러고 다니는 게 어디 하루 이틀인가요. 황제 폐하께서도 몇 번 경고했는데 안 들어먹잖습니까. 근데 전하, 말 돌리시네요.”

“공작이 저번에 찾아와서 내겐 억울한 듯 말했는데. 민원 내용을 보면 악랄하기 그지없어. 법적 근거도 없는 이중과세 항목이 이 정도라니.”

“당황하셨네요. 전하답지 않게 말이 많아지신 걸 보니.”

“…하.”

테렌스는 곧바로 말을 잃었다. 레이븐은 한 번 건수를 잡으면 끈질기게 몰아붙이는 데가 있었다.

“아직 돌아오려면 이틀은 남았습니다.”

“안다.”

또다시 들려오는 깊은 한숨 소리에 레이븐은 진저리를 쳤다.

***

“꺄아아아악!”

석실 안에서 엄청난 비명이 들렸다. 분명 황녀의 목소리였다.

문지기들의 안색이 덜컥 파래졌다.

수장인 루퍼트가 자리를 비운 참이라 다들 어쩔 줄 모르는 기색이었다. 기사들과 마법사들은 지시가 떨어져야만 마음 놓고 움직일 수 있었다.

모두가 그렇게 얼어붙은 순간. 켄드릭이 석실 문을 활짝 열어젖히고 들어갔다.

황녀의 집사가 먼저 나서자 문지기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황녀님, 무슨 일…. 엥?”

석실 문을 열어보니, 프리다의 위치가 이상했다.

식사용 테이블 위에 올라가 서 있었다. 바들바들 떨면서.

황녀님이 왜 저기 올라가 계시지. 영문을 모르는 켄드릭은 그녀를 멀뚱거리며 쳐다보기만 했다.

“으아…. 저거요, 저거.”

“네?”

프리다의 손가락 끝이 무엇인가를 가리켰다.

켄드릭도 그쪽을 바라봤다.

손바닥 크기만 한 검은색 물체가 근처를 기어 다니고 있었다.

거미였다. 몸통이 웬만한 성인 남자의 주먹만큼 컸다. 사람 손가락만큼이나 굵은 다리에 시커먼 털이 무성했다.

“아, 거미네요. 제가 잡을 테니 일단 내려오시는 게….”

켄드릭은 황녀를 테이블에서 내려주기 위해 성큼성큼 다가갔다.

그 순간이었다.

왕거미가 잰걸음으로 테이블 다리를 타고 올랐다.

어느새 식탁보 위까지 이르렀다.

“끄아아악!”

프리다는 기겁하며 켄드릭 쪽으로 확 뛰어들었다.

놀란 켄드릭이 그녀를 얼른 받쳤다.

얼떨결에 황녀는 켄드릭의 어깨에 와락 매달렸다. 그러면서 켄드릭의 상체에 팔다리를 친친 감았다.

유칼립투스 나무와 한 몸이 된 아기 코알라처럼.

켄드릭은 제 가슴팍에 밀착한 황녀를 왼손으로 지탱했다.

그 상태로 오른손을 써서 검을 슬쩍 뽑더니, 몸을 돌려 왕거미를 내리쳤다.

탁.

왕거미가 정확히 두 동강 났다.

상상조차 하기 싫은 물질이 단면에서 주르륵 흘러나와 상아색 식탁보를 적셨다.

“죽었어요?”

프리다가 눈을 질끈 감고 켄드릭에게 물었다.

그녀는 자신이 누군가에게 매달려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네. 일단 보기 흉하니까 식탁보를 치우겠습니다.”

켄드릭은 거미를 내려쳤던 검으로 식탁보를 대충 수습하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황녀가 아직 몸에 딱 달라붙어 있었기 때문이다.

깡마른 그녀는 전혀 무겁지 않았으나, 그녀의 팔다리에 왼쪽 상체가 속박돼 있어서 움직이기가 힘들었다.

“저, 그런데 황녀님…. 일단 좀 내려오셔야 제가….”

켄드릭이 진땀을 흘리며 품속의 황녀에게 속삭였다.

프리다는 이제야 눈을 번쩍 떴다. 시야에 켄드릭의 얼굴이 한가득 잡혔다.

한 뼘도 안 되는 거리였다.

“아앗!”

프리다는 거의 발작을 하면서 땅으로 콩 내려왔다.

이제야 상황을 파악한 황녀는 목부터 이마까지 온통 불덩이가 됐다. 부끄러움과 민망함, 무안함이 한데 섞여 얼굴이 터질 듯 끓어올랐다.

“미, 미안해요, 경. 갑자기 달려들어서 놀랐죠.”

프리다는 그에게서 뒷걸음질 치며 사과했다. 눈도 마주치지 않고서.

“아닙니다.”

그제야 거동이 자유로워진 켄드릭은 테이블을 치우기 시작했다.

그는 식탁보를 완전히 접어 거미의 유해를 보이지 않게 가렸다.

“이건 치워 버리고, 새 식탁보를 내오겠습니다.”

“응, 고마워요….”

흉물을 감싼 식탁보를 들고, 켄드릭은 석실 밖으로 의연하게 걸어 나갔다.

프리다는 그의 든든한 뒷모습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어쩌면, 저 사람이라면 괜찮지 않을까.

***

발레리가 떠난 지 딱 일주일째 되는 날이었다.

테렌스는 시급한 업무만 급속도로 처리한 뒤 황망하게 밖으로 나갔다. 재킷도 없이 셔츠 차림으로.

그의 발걸음이 닿은 곳은 황태자궁 뒤뜰 한구석에 있는 마구간이었다.

땀을 흘리며 그를 뒤쫓아온 레이븐은 눈살을 찌푸렸다.

“전하, 마구간은 왜요? 캐런도 없는데.”

“귀찮으면 따라오지 마라.”

“어휴, 어떻게 안 따라갑니까? 손도 불편하신데 낙마라도 하면 어쩌시려고요.”

테렌스는 대답도 없이 흑마에 올라타더니 켄트웰 황궁을 둘러싼 성벽을 한 바퀴 돌았다.

레이븐 또한 말을 탄 채 그를 열심히 뒤쫓았다.

그는 정말 질렸다는 얼굴로 상관의 뒤통수에 눈총을 쐈다.

“전하께서 승마에 취미가 있으신지는 몰랐네요.”

“오랜만에 한번 타보고 싶어서.”

“그러니까 문제는, 왜 자꾸 안 하던 짓을 하시냐 이겁니다. 캐런도 자주 안 타셨잖아요.”

“…….”

“이쯤 되면 제가 탈출 금지 마법을 괜히 풀어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테렌스는 그의 툴툴거림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장장 세 바퀴를 더 돌았다.

기다리는 사람이 어느 쪽 출입문으로 들어올지 모르는 일이니까.

꼬박 두 시간이 걸렸지만, 그의 노력은 허사였다.

깊은 밤이 되도록 발레리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대신 채플 근처에 낯선 손님이 하나 등장했다.

루비처럼 붉게 빛나는 눈을 가진, 검은 고양이 한 마리였다.

검은 고양이는 채플 근처에서 한참을 배회했다.

후원과 정문을 쉴 새 없이 오가던 그 고양이는 살짝 열려있는 후문으로 폴짝 뛰어 들어갔다.

고양이는 1층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다 사뿐사뿐 발레리의 방 앞을 거닐었다.

그 시각 석실 앞.

“마의 기운이 느껴진다.”

문지기 수장 루퍼트가 눈을 부릅뜨며 품에서 지팡이를 꺼냈다.

“저도 느껴집니다. 요 위에 뭔가가 온 것 같습니다.”

또 다른 마법사가 거들었다.

석실 앞 모든 문지기가 각자 검과 지팡이를 들고 전투태세에 돌입했다.

“일단 너희 여덟 명이 위로 올라가 동태를 살펴라.”

“예, 알겠습니다.”

루퍼트의 지시에 따라 마법사 세 명과 기사 다섯 명이 나선형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이들은 한순간에 기도실까지 다다랐다.

마법사 하나가 문에 손을 댔다. 심상찮은 기운이 감지됐다.

공격성은 느껴지지 않았지만, 분명한 마기였다.

“요 밖인 것 같다. 지금 바로 열고 나간다.”

콰쾅!

기도실 문이 큰 충격음과 함께 활짝 열렸다. 그곳에서 문지기 여덟 명이 우르르 빠져나왔다.

“우와악!”

사람의 비명이 들렸다.

마기가 느껴졌던 자리엔 누군가가 뒤로 나자빠져 있었다.

“대체 뭐예요! 문 부서지는 줄 알았네!”

지금 막 옆방으로 복귀한 발레리였다.

발레리는 막 채플로 복귀해 방문을 따려던 참이었다.

그러다 옆 기도실 문에서 터진 굉음에 놀라 엉덩방아를 찧은 것이었다.

그녀는 바닥에 주저앉은 채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다가, 꼬리뼈를 타고 올라오는 통증에 인상을 팍 구기며 허리를 붙잡았다.

“아으….”

문지기들은 고통에 신음하는 발레리를 얼빠진 눈으로 내려다봤다.

분명 마의 기운이 느껴져 문을 열었는데…. 그 자리에 떡하니 있는 건 황녀의 검술 선생 아가씨였으니까.

문지기들은 저들끼리 혼란한 시선을 교차했다.

“저, 아가씨. 방금 뭐 수상한 거 없었습니까?”

마법사 한 명이 발레리에게 물었다.

“수상한 거요?”

문지기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발레리의 대답을 기다렸다.

“…방금 고양이 한 마리 보긴 했는데, 저쪽으로 나갔어요.”

발레리가 후문 쪽을 가리키자마자, 문지기들이 서둘러 그쪽으로 달려 나갔다.

그제야 그녀는 바닥에서 몸을 일으킨 뒤 엉덩이를 툭툭 털었다.

“고양이 한 마리 가지고 왜들 문을 쳐부수고 난리신지….”

발레리는 툴툴거리며 방문을 따고 들어갔다.

그 사이 문지기들은 나가서 후원을 한참 살폈다. 하지만 고양이는 무슨. 동물 털 한 가닥조차 보이지 않았다.

마의 기운도 더는 느껴지지 않았다.

완전히 증발한 것처럼 사라지고 없었다.

“분명 뭔가가 있는 것 같았는데…. 이걸 뭐라고 보고한담.”

문지기들은 고개를 내저으며 팔을 축 늘어뜨렸다.

***

“잊고 있으라고…. 그런다고 마음이 편해질까.”

석실로 복귀하는 첫날. 발레리는 나선형 계단을 밟아 내려가며 들릴 듯 말 듯 중얼거렸다.

일단 황궁에 돌아가서 때를 기다리라는 두목의 말. 어쨌든 그 말에 따라 채플로 복귀했다.

의뢰인의 답변을 받기까지 얼마나 걸릴지는 모르겠지만, 그녀는 답을 기다리기로 했다.

황녀의 검술 스승이라는 역할에만 집중하면서.

“내가 내 발로 들어왔으니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끝까지 해 봐야지.”

석실 문이 열렸다.

문틈으로 발레리의 모습이 보이자마자, 프리다의 얼굴에 급속도로 화색이 돌았다.

그 곁에는 테렌스가 서 있었다. 레이븐 없이 혼자였다.

“발레리!”

프리다가 와다다 달려와 발레리의 품에 뛰어들었다.

“황녀님, 잘 지내신 것 같아 다행이에요.”

발레리는 황녀의 부드러운 백금발을 쓰다듬었다. 달콤한 미모사 향기에 절로 눈이 감겼다.

프리다는 한층 혈색이 좋아 보였다. 

말을 타고 황궁으로 돌아오는 동안, 발레리는 프리다의 얼굴이 참 그리웠다. 언제나 전폭적인 신뢰를 보내주는 푸른 눈동자가 보고 싶었다.

두 여인이 반가움을 만끽하는 사이, 테렌스는 발레리의 안색을 찬찬히 살피고 있었다.

“로빈슨, 조금 야윈 것 같은데.”

“아, 말 타고 열심히 달리느라 밥을 잘 못 먹었어요. 말 빌려주셔서 감사해요.”

“그래…. 네게 물어볼 것이 있어서 왔다.”

테렌스는 발레리의 앞에 천천히 다가섰다. 오랜만에 보는 그녀와 좀 더 가까이서 이야기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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