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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자한테는 관심 없는데요 (25)화 (25/173)

25화

“아니, 그 마력석을 벌써 다 썼다고요? 그럼 의뢰를 아예 못 무른다는 거잖아요!”

발레리는 깊이 한탄하며 손바닥으로 이마를 짚었다.

임무에서 아예 발을 못 빼게 돼 버렸다니.

피어스는 힘없이 고개를 떨어뜨렸다.

“의뢰인은…. 어렵겠지만 접촉을 시도해 볼게. 결과는 어찌 될지 전혀 모르겠지만….”

“꼭 받아 오셔야 해요.”

“최선을 다해 볼게.”

피어스는 무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발레리는 어쩔 수 없었다. 그를 믿어보는 수밖에.

그래도 두목은 한다면 어떻게든 하는 사람이었으니까.

“이왕이면 황녀를 왜 데려오라는지도 좀 물어봐 주실래요? 궁금해 미치겠어서요.”

“…내가 물었을 땐 답변을 못 받았지만, 한 번 더 질문해 보겠다.”

둘 사이에 또다시 껄끄러운 정적이 지나갔다.

유유히 흐르는 물줄기 앞에서, 발레리는 황궁에서의 생활을 떠올렸다.

아무것도 모르는 프리다의 말간 미소.

야심으로 빛나는 켄드릭의 녹안.

손등을 쓰다듬던 황후 레베카의 보드라운 손길.

모든 게 겹쳐 마음이 산란해졌다.

명치가 턱 막히는 기분이었다.

“솔직히 죄책감 때문에 다 그만두고 싶었어요.”

“…….”

“근데 그럴 수 없는 상황이네요.”

“부담되겠지. 우리 도적단 꼴이 말이 아니어서.”

“어떻게 부담을 안 느끼겠어요? 다들 이 땅을 떠나야지만 얼굴 들고 살 수 있는데.”

고개를 흔드는 발레리의 머리칼은 제멋대로 헝클어져 있었다.

온종일 바람을 가르며 말을 타고 달린 탓이었다. 피어스는 자연스레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를 정돈해 줬다.

그러나 발레리는 피어스의 손을 매몰차게 뿌리쳤다.

한때 아버지처럼 따뜻했던 손길이었지만 지금은 불편하기 그지없었다.

“건드리지 마세요. 속 뒤집힐 것 같으니까.”

피어스는 깊은 고민에 빠졌다. 부담감에 짓눌린 발레리를 위로할 수 있는 말이 뭐가 있을까.

“발레리.”

“왜요.”

“의뢰인이 요구한 기한까지는 아홉 달이 남았어.”

“…그러네요.”

아홉 달이면 길지도, 짧지도 않은 시간이었다. 

“물건이 아니라 사람을 노리는 의뢰는 처음이니 심적으로 힘든 건 이해한다. 그러니까…. 임무를 한동안 잊고 있는 건 어떻겠니?”

“임무를…. 잊고 있으라고요?”

그녀는 힘 빠진 목소리로 피어스에게 되물었다.

피어스는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그래. 아직 내년 봄까지는 시간이 꽤 남았잖니. 그리고 정확한 의뢰 내용을 기억하고 있을지 모르겠는데….”

“네, 황녀를 산 채로….”

“데려오라고 했지. 납치는 가장 유력한 방법 중에 하나일 뿐이야.”

발레리는 코웃음을 쳤다. 덩달아 왼쪽 입꼬리도 비틀려 올라갔다.

“유력한 게 아니라 유일한 거겠죠.”

“발레리, 이것만큼은 믿어 줘. 의뢰인은 정말 황녀를 해칠 생각이 없어 보였다.”

“…하.”

아무리 생각해도 찝찝함이 가시지 않았다.

순진무구한 황녀를 아무도 모르는 낯선 곳에 데려가야 한다는 사실 자체가.

“약속이나 받아 오세요. 그 전까지 저 아예 안 움직일 거예요.”

“아마 좀 걸리긴 할 텐데…. 만약 의뢰인에게서 답신을 받는다면, 케빈을 통해 황궁 근위대로 보내겠다.”

“근위대 말고 채플로 보내 주세요. 지금은 거기서 일하고 있어요.”

“알았다. 황녀 일은 당분간 잊고…. 황실 보검 위치만 천천히 파악해 줘.”

“…하, 그 망할 놈의 보검이 또 있었지.”

발레리는 한창 열을 올리느라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깊이를 알 수 없는 진창 속에서 헤매는 기분이었다.

***

펠런의 오두막 앞뜰 한가운데 큼지막한 모닥불이 후드득후드득 타오르고 있다.

그 위에선 꼬챙이에 꿰인 멧돼지 고기가 지글대며 익었다. 하얗게 퍼져나가는 연기와 함께 노릇노릇 뜨끈한 냄새가 사방에 물씬 풍겼다.

발레리의 손에는 단원들이 쥐여 준 바비큐 꼬치가 들려있었다.

그녀는 먹는 둥 마는 둥 허공만 쳐다보고 있었다.

꼬치를 들고 멍하니 앉아있는 그녀의 얼굴을, 케빈은 걱정스레 관찰했다.

발레리보다 두 살 많은 그는 남자 단원 중에 막내로, 그녀를 여동생처럼 아꼈다.

지금껏 발레리는 고기 앞에서 한 번도 정신을 빼놓은 적이 없었다. 그만큼 내적으로 힘든 상황인 게 확실했다.

“발레리, 마음이 안 좋아도 먹을 건 먹어야지.”

“어, 먹고 있어.”

“그래도 로스코 남작저는 잘 털었어. 한 명한테도 안 걸리고 감쪽같이 챙겨왔거든. 내일 보수 받으면 마력석으로 바꿀 거야. 얼마 안 되겠지만.”

“그래….”

발레리는 앞니로 고기를 뜯으면서도 아무런 기운이 없어 보였다.

그렇게 환장해 마지않던 멧돼지 고기를 고무 씹듯 하다니. 케빈은 한숨을 내쉬었다.

“우리도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고 있어. 이전보단 꽤 버거워졌지만.”

“알아. 다들 열심히 하는 거.”

케빈은 발레리의 어깨에 살포시 손을 얹었다.

“발레리, 그냥 임무 포기하고 여기 남으면 안 돼? 너무 힘들어 보여서 그래.”

“손 치워라. 포기할 수 있었으면 진작에 포기했을 일이니까.”

“…너 지금 어디 있는 거야? 몇 번을 물어도 두목은 절대로 말 안 해주시더라.”

“궁금해하지 마. 어차피 알게 되겠지만.”

그녀는 질겅질겅 짓씹은 고기를 꿀꺽 삼켰다.

***

황녀의 석실은 다시 어둡고 적막해졌다. 동트기 직전의 깊은 새벽처럼.

마법사들이 들어와 광구를 띄워 놓고 갔지만, 조명이 환해도 텅 빈 느낌은 그대로였다.

프리다는 아무도 없는 정면을 바라보며 꿋꿋이 아침 식사를 마쳤다.

4년 동안 갇혀 지내며 늘 아침은 혼자 먹었었다. 그래도 한 달 가까이 앞자리를 지켜주던 사람이 있다가 없으니 더 허전하고 우중충했다.

“며칠이나 됐다고 벌써 보고 싶네….”

젖은 솜처럼 축 처진 기분을 추스르며, 프리다는 연무장으로 향했다.

잠시 후 켄드릭이 큰 쟁반을 들고 식기를 치우러 들어왔다.

접시 위의 음식들은 절반 정도 남아있었다. 켄드릭이 보기에 황녀의 식사량은 턱없이 적었다. 이 정도만 먹고 어떻게 검술 수련을 하나 싶었다.

하지만 수프조차 몇 숟갈 못 뜨던 과거에 비해선 장족의 발전이었다. 발레리가 있었다면 칭찬했을 정도의 식사량이었으니까.

“이얍! 이얍!”

연무장 쪽에서 기합 소리가 들렸다.

프리다가 목검을 휘두르고 있는 모양이었다.

이젠 어린이용 목검이 아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너무 무거워서 들기 힘들다고 했던, 그 1미터가 넘는 목검이다.

켄드릭은 황녀의 열정에 내심 감탄했다.

보통 선생이 휴가를 가면 제자는 살판난 듯 쉬게 마련인데, 황녀는 전혀 그런 기색이 없었다.

‘발레리 없이도 계속 열심이시네. 누가 따로 안 봐 드려도 되는 걸까.’

“아앗!”

그 순간, 프리다가 외마디 소리를 지르며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켄드릭은 즉시 그녀에게 달려가 상태를 살폈다.

“황녀님! 괜찮으십니까?”

“다, 다리가…. 아으, 여기 종아리가 너무 아파요….”

프리다가 오른쪽 다리를 감싸 쥐고 있었다. 쥐가 난 듯했다.

같은 자세로 오랫동안 연습을 해서 무리가 간 게 분명했다.

“황녀님, 실례가 안 된다면 제가….”

프리다가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날카로운 통증에 숨을 헐떡이면서.

켄드릭은 양손으로 황녀의 어깨와 무릎 뒤편을 받친 뒤 번쩍 들어 올렸다. 이른바 공주님 안기 자세로.

그는 가벽 뒤편에 있는 침대 위에 황녀를 살포시 눕혔다.

프리다는 누워서도 여전히 고통에 신음했다.

“저, 황녀님, 잠시 실례를 좀….”

뭐라도 해보라는 듯, 황녀가 다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켄드릭은 그녀의 종아리를 바깥 방향으로 살짝 튼 뒤, 손바닥에 쥐고 천천히 주무르기 시작했다. 가느다란 종아리 한가운데 놀란 근육이 바짝 서 있었다.

“이렇게 해드리면 조금 나으실까요? 저도 쥐가 날 때마다 이렇게 합니다.”

“으, 아직 아프긴 한데, 조금 나아지는 것 같아요.”

“제가 감히 황녀님께 손을 댔는데…. 불편하시면 꼭 말씀해 주십시오.”

켄드릭이 진땀을 흘리며 황녀의 심기를 살폈다.

황녀가 긴 바지를 입고 있긴 했지만, 외간 남자가 다리에 손을 대고 있으니 편하지는 않을 것 같아서.

다행히 프리다는 전혀 개의치 않는 얼굴이었다.

“아니에요. 발레리도 이렇게 해줬는걸요.”

“…발레리가요?”

“네.”

프리다가 슬며시 미소했다. 찌르는 듯한 고통 속에서도 발레리를 생각하니 입술이 절로 호선을 그렸다.

“음…. 내가 수업 첫날부터 너무 많이 움직여서, 다음 날 근육통이 엄청 심했어요. 난 너무 아파 죽겠는데, 발레리는 기뻐하더라고요. 근육통 생기면 거기에 근육 붙는다고.”

켄드릭의 입가에도 옅은 웃음기가 번졌다. 발레리가 어떤 표정으로, 어떤 어투로 황녀에게 그런 말을 했을지 머릿속에 선명히 그려져서.

“하하, 발레리는 근육통이 영광의 통증이라고 생각하는 녀석입니다. 어느 정도는 맞는 말이기도 하고요.”

“헤헤, 발레리가 다리를 참 열심히 주물러 줬어요. 나도 발레리처럼 탄탄한 근육이 생겼으면 좋겠어서, 아파도 참고 계속 연습하게 되더라고요.”

“지금처럼만 하신다면 머지않았습니다.”

켄드릭은 목청에 기름을 바른 듯 번드르르한 음성으로 황녀에게 호응했다.

속마음은 달랐다.

황녀가 열심히 운동하면 근육이 더 붙기야 하겠지만, 10여 년간 수련해온 발레리를 따라잡긴 어려우리라 생각했다. 체격 차이도 현격했고.

그래도 황녀의 노력만큼은 가상해 보였다. 벌써 며칠째 쉬지 않고 혼자 연습을 해왔으니.

다만 초보자가 혼자 연습하다 보면 자세가 흐트러질 가능성이 있었다.

켄드릭은 여기서 기회를 찾았다. 이런 상황을 틈타 상전인 황녀에게 좀 더 잘 보일 수 있지 않을까.

“황녀님.”

“…네?”

“발레리가 없는 동안, 검술 연습을 제가 좀 봐드려도 되겠습니까?”

켄드릭이 프리다의 종아리를 마사지하며 조심스레 물었다.

그녀에겐 솔깃한 제안이었다. 안 그래도 혼자 연습하면서 자세가 신경 쓰이던 참이었다.

“나야 좋지만…. 지금 일만 해도 힘들 텐데 괜찮겠어요?”

“문제없습니다.”

켄드릭이 기합 든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의 입매가 양쪽으로 시원스럽게 벌어졌다. 프리다는 그의 진녹색 눈동자를 응시하며 생각했다.

‘사람이 참 인상이 따스하고 믿음직스럽네.’

“그럼 오후에 잠깐씩만 봐줘요. 오빠한테도 그렇게 이야기해둘게요.”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은 무리하셨으니 이만 쉬시는 게….”

“아니에요. 오전까지만 쉬고 오후에 다시 하고 싶어요.”

대단한 의지였다.

다리에 쥐가 나서 이렇게 아파하는데도 연습을 다시 하겠다니.

“음, 오후에 상태를 보고 결정하심이 나을 듯합니다.”

“알았어요. 이제 괜찮으니 그만 주물러도 돼요.”

“네, 이따 점심 식사 전에 상태를 봐 드리러 오겠습니다.”

프리다는 알았다고 대답했다. 켄드릭은 그녀에게 예를 갖춘 뒤 다시 테이블로 가서 식기를 치웠다.

그녀는 가벽 틈으로 엿보이는 켄드릭의 뒷모습을 빤히 지켜보았다.

‘등판이 정말 넓네…. 내 두 배는 넘을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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