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귀족들의 흑색선전까지 더해지면서, 펠런의 악명은 점점 드높아졌다.
발레리와 케빈 등 나이대가 어린 단원들을 제외하면, 칼레바니아 곳곳의 시내와 저잣거리에는 이들의 얼굴이 벽보에 붙어있었다.
이제 웬만한 백성들은 단원들의 얼굴과 이름을 대번 외우고 있었다. 일상생활이 가능한 영역이 점점 좁아질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단원들에게 안전한 지역은 남부 프레이저 후작의 영지였다.
부정축재와는 거리가 먼 프레이저 후작은 단 한 번도 의뢰의 대상이 된 적이 없었고, 켄드릭의 입김 덕에 후작령에는 수배지가 붙어있지 않았다.
10년 전 발레리가 펠런 소속이란 걸 고백했을 때, 켄드릭은 오히려 흥미로워했다. 못된 귀족만 노리는 도적들이 아니냐며.
─발레리, 아버지가 부정축재하는지는 내가 감시할 테니까. 우리 영지에 악덕 상인이 있는지만 좀 알려줘. 아버지께 고발하면 족쳐주실 거야.
켄드릭은 펠런을 이용할 줄도 알았다.
발레리는 프레이저 후작령의 악덕 고리대금업자와 인신매매업자들을 고발했고, 후작은 이들에게 가차 없이 철퇴를 휘둘렀다.
그러던 어느 날.
두목 피어스는 펠런의 조직목표를 변경했다.
그 계기는 예기치 못한 죽음이었다.
3년 전.
이름 모를 귀족 가문이 펠런을 겨냥하는 별도의 자객단을 만들었다. 그들의 매복 습격으로 단원 다섯 명이 목숨을 잃었다. 케니와 폴, 러셀, 조엘, 피터였다.
이날은 발레리가 살면서 가장 슬피 운 날이었다.
이들의 장례식에서 피어스는 눈물을 흘리며 이렇게 말했다.
─펠런을 조직할 땐 나름대로 정의로운 일을 한다고 생각했었다. 사람을 해치지 않았고, 약자의 편에서 강자를 심판하려 했으니….
단원들은 고개를 떨궜다.
─하지만 치기 어린 생각이었다. 우리가 어떤 목적이 있었든, 도적질 자체는 누군가의 증오와 원한을 사는 일이었다. 결국, 이렇게 사랑하는 동료들을 잃고 나서야 깨닫는구나.
피어스가 단원들 앞에 무릎을 꿇었다.
─애초에 이런 일은 지속 가능한 게 아니었다…. 날 따라온 죄로 너희들이 칼레바니아 땅에서 얼굴을 못 들고 살게 됐구나…. 미안하다….
한때 부정축재자 심판을 목표로 했던 펠런은, 이 일을 계기로 길을 완전히 틀었다.
부패한 이들의 재산을 계속 노리긴 했으나, 이전과는 다른 목적으로 재물을 쌓았다.
모든 단원이 손을 씻고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는, 즉 ‘외국으로의 망명’을.
─단원들이 신변이 안전한 곳에서 새 출발을 할 수 있도록 필요한 자원을 모아야 한다.
망명을 위해 필요한 자원이란 건 ‘마력석’을 의미했다.
칼레바니아의 제1 수출품이자 마법 무기에 장착해 위력을 강화하는 재료.
일반 무기에도 장착하면 위력이 높아진다는 사실도 최근 증명됐다. 마력석을 장착한 검을 번쩍이며 검기를 내뿜었고, 마력석을 장착한 방패는 마법 공격에 대한 저항력을 얻었다.
수요가 폭발했다. 군사력 강화를 노리는 외국 정부들이 안달 낼 수밖에 없는 자원이었다.
펠런은 켄드릭이 뒤를 봐주는 후작령에서 장물을 마력석으로 교환하는 데 집중했다.
남부 와이어 숲 인근 광산은 마력석의 최대 매장지였으니 말이다.
「황녀를 산 채로 데려오라」
「황실의 보검을 함께 가져오라」
「지금으로부터 1년 후에」
무리수일 수밖에 없는 의뢰였다.
망토를 코밑까지 뒤집어쓴 의뢰인은 신원조차 불분명했다.
하지만 선수금부터가 차원이 달랐다.
커다란 상자에 빽빽이 들어찬 마력석은 피어스의 마음을 단단히 사로잡았다.
완수하면 스무 배가 돌아온다.
10여 년을 모아야 하는 망명 자금을 단 1년 만에 얻을 수 있는 기회였다.
그리고 그 임무는 현재 발레리가 맡고 있다.
도적단의 에이스이자, 유일한 여자 단원이라는 이유로.
***
황궁에 있어야 할 발레리가 지금 도적단 아지트에 돌아왔다.
게다가 안색도 그늘져 보인다.
피어스는 직감했다.
그녀의 예기치 않은 방문이 좋지 않은 징조라는 걸.
발레리와 약속한 중간 접선 날짜는 8월 말인데, 그녀는 두 달이나 일찍 찾아와 있었다.
피어스는 내심 불안했다. 황궁에서 예상치 못한 무슨 일이 생긴 게 아닐까.
“돌아왔구나, 발레리.”
“잘 지내셨어요?”
“…피곤해 보이는구나.”
그녀가 안부를 물었지만 피어스는 즉답을 회피했다.
잘 지냈다고 말하기 힘든 상황이었으니.
피어스는 굳은 얼굴로 발레리를 오두막 안으로 안내했다.
어두침침한 방 한구석 침상에 단원 로이가 누워있었다.
핏기 하나 없이 파르무레한 낯빛으로.
케빈이 그의 창백한 이마를 물수건으로 닦아주고 있었다.
단원 열댓 명이 침상에 빙 둘러앉아 불안한 얼굴로 로이의 상태를 지켜봤다.
아무래도 로이의 상태가 심상치 않은 것 같았다.
“로이? 로이가 왜 이래요?”
발레리가 로이의 침상 곁에 털썩 주저앉으며 물었다.
단원들은 침통한 얼굴로 고개를 떨어뜨렸다.
“얘기 좀 해 봐요. 로이한테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
“두 달 전 매킬런 백작가에서 빠져나오다 붙잡혔는데…. 며칠 전에 치안대로 넘겨져서 케빈이 보석금을 주고 빼 왔어.”
피어스는 담담한 어조로 설명했다.
“매킬런 백작이면…. 볼드윈 공작하고 한패거리잖아요.”
“…그래, 기억하는구나.”
“치안대가 이랬을 린 없고…. 백작가에서 무슨 짓을 한 건데요?”
“고문한 것 같아. 의식을 회복할 기미가 있을 때마다 깨어나길 거부하고 있다.”
고문이라니. 발레리는 질겁하며 로이를 덮고 있는 이불을 들췄다.
검붉은 피로 물든 옷소매 밑으로 온갖 긁힌 자국과 피부가 벗겨진 화상 자국이 난무했다. 여기저기서 진물이 흘렀고, 까맣게 괴사한 부분에선 고약한 냄새가 났다. 손톱도 몇 개 빠져있었다.
“북부와 동부의 아지트 위치가 모두 발각돼서 불태워졌어. 로이가 발설한 걸 원망하진 않지만, 일단 우리가 활동할 수 있는 지역이…. 더 많이 줄었어.”
케빈이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펠런의 현 상황을 알렸다.
“케빈, 아무리 백작가라도 사적으로 사람을 고문하는 건 불법이잖아. 어떻게 이럴 수 있어?”
“불법이긴 하지. 그래서 벌금 몇 푼 내고 저택으로 돌아갔다더라.”
매킬런 백작이 로이를 만신창이로 만들어 치안대에 넘긴 건, 펠런에 대한 일종의 경고 표시였다.
누구든 잡히기만 하면 죽음보다 더한 고통을 맛 보여 주겠다는, 어떻게든 꼬리를 잡아 펠런의 뿌리를 뽑아내겠다는 으름장이었다.
발레리의 낯빛이 하얗게 질렸다.
로이는 발레리를 조카딸처럼 보살펴준 단원이었다.
발레리도 그를 삼촌처럼 믿고 따랐다. 몸을 숨겨 표적을 쫓는 잠행 기술도 로이에게서 배운 것이었다.
문득 3년 전의 악몽이 그녀의 기억을 스쳤다.
단원 다섯 명이 한꺼번에 목숨을 잃었던, 모두가 말없이 오열하던 그들의 장례식.
더 충격적인 건, 한때 신출귀몰하던 도적단 펠런이 이렇게까지 발이 묶였다는 사실이었다.
***
아지트에서 멀찍이 떨어진 숲속 냇가.
시골 밤하늘의 총총한 별이 고요히 흐르는 냇물 표면에 빛 가루를 흩뿌렸다.
피어스와 발레리는 나란히 서서 잔잔히 피어오르는 물빛을 응시했다. 굳게 입을 다문 채로.
“두목.”
발레리가 먼저 운을 뗐다.
“그래.”
“황녀 말인데요….”
황녀 이야기가 나오자 피어스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임무 관련 얘기가 나올 줄은 예상하고 있었다. 난도가 높은 의뢰인 만큼 애로사항도 분명 있을 테니까.
“그래, 얘기해 봐라.”
“확인하고 싶어요. 의뢰인 앞에 데려가도 정말 무사한 건지.”
“…발레리. 피의 맹세 증표까지 확인했잖아. 의뢰인이 안 해치겠다고 목숨까지 건 마당에 뭐가 불안해서 이러는 거니.”
발레리는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눈을 매섭게 치켜뜨고 피어스를 올려다봤다. 그 강렬한 시선에, 피어스의 어깨가 미세하게 움찔거렸다.
“해치지 않겠다는 말, 고작 그 한마디로는 안심 못하겠단 말이에요.”
“…왜 그런 생각을 하는 거냐.”
“안 해치더라도 다른 무슨 불쾌한 짓을 할지 모르는 일이잖아요.”
“발레리, 왜 자꾸 안 좋은 쪽으로만….”
“그리고 의뢰인 말고 다른 사람이 해치려고 들면 어떻게 해요? 거기가 어딘지 모르는 이상 안전하다고 장담 못 하잖아요.”
발레리가 말허리를 끊어먹자 피어스는 작게 탄식했다.
제대로 악에 받친 그녀의 눈빛을 보며.
“두목, 말해 주세요. 제가 황녀를 두목한테 데려오면, 어디로 데려가실 건지.”
“…나도 그건 확실히 모른다. 장소는 나중에 전달받기로 해서.”
“하, 대체 알고 계신 게 뭐예요? 정말 대가 하나만 보고 받아오신 거예요? 이런 정신 나간 의뢰를?”
그녀의 따가운 질문 세례에 피어스는 말문이 막혔다.
그는 윗눈시울을 내리깔고 깊은 한숨을 쉬었다.
“…네 희생을 강요해서 미안하다. 하지만 단기간에 단원들의 안전을 확보하려면 의뢰를 받는 게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제가 희생하고 자시고가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하, 안 되겠어요. 제가 의뢰인을 직접 만나 봐야겠어요.”
“발레리, 그건 어렵다.”
“하아…. 또 뭐가 어려운 건데요!”
발레리는 속에 응어리진 울화를 뱉어냈다.
밤하늘을 닮은 까만 눈동자에 원망기가 잔뜩 서려 있었다.
“황녀도 사람이더라고요.”
“…발레리.”
“네, 물론 사람인 거 알고 시작한 일이었죠. 근데 보니까 밥도 먹고, 말도 하고, 즐거우면 웃는 진짜 사람이더라고요. 아주 끔찍하게 아껴주는 부모님이랑 오빠까지 있고.”
“그거야 그렇겠지. 그래도 마음을 독하게 먹어야….”
“그게 마음대로 되는 줄 아세요? 생사람 잡아 오는 게 어디 쉬운 일이냐고요!”
발레리는 숨을 씩씩 몰아쉬며 언성을 높였다.
그녀는 답답함에 못 이겨 제 가슴을 주먹으로 쿵쿵 쳤다.
어떤 계기로 자신이 황녀의 검술 스승이 됐고, 인간적인 유대감을 나누게 됐다는 사실은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이제 본론을 꺼내야겠다고 생각했다.
“두목. 의뢰인하고 못 만나더라도, 최소한의 소통은 가능한 건가요?”
“…시도는 해볼 수 있어.”
“그럼 약속 좀 받아 주세요.”
발레리는 짐짓 단호한 목소리로 요구했다.
“약속이라니. 무슨 약속을 말하는 거니.”
“안 해친다는 것만으론 모자라요. 안전 자체를 보장해달라고 하세요. 피의 맹세까진 됐으니까, 서면 자필 확인서 받아 오세요. 인장까지 찍혀 있으면 더 좋고요.”
“발레리, 그건….”
피어스는 제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말끝을 흐렸다.
의뢰인은 이미 맹세의 증표까지 내주었다. 과연 이런 구구절절한 추가 요구 사항에 응하려고나 할까.
게다가 자필 확인서는 필체와 인장으로 신상이 어느 정도 드러난다. 의뢰인이 선뜻 수락할 가능성은 거의 없단 생각이 앞섰다.
하지만 발레리는 물러설 기세가 아니었다.
“그리고 이것도 당부해 주세요. 황녀님한테 무슨 볼일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다 끝나면 다시 황궁으로 돌려보내라고요.”
“발레리, 그런 것까진….”
“중간 접선일까지 약속 못 받으시면, 그냥 짐 싸서 와버릴 테니까 그런 줄 아세요. 망명 자금은 좀 걸리더라도 제가 용병이나 현상금 사냥꾼 일이라도 해서 벌어볼 테니까요.”
협박에 가까운 요구였다.
피어스는 눈을 감았다. 등골에 진땀이 쭉 솟았다. 그동안 말 못 한 상황을 설명해야 하는데, 목이 메서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그래도 할 말은 해야 하니까.
그는 무거운 눈꺼풀을 천천히 들었다.
“…미안하다, 발레리.”
“뭐가요?”
“선수금을 이미 다 써버렸어. 로이 보석금도 들었고, 처자식이 있는 단원들부터 우선 망명 절차를 밟으면서 그 비용으로….”
피어스는 면목 없이 뒷머리를 긁었다. 정말 발레리를 볼 낯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