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일주일이라…. 발레리 없이 보내려면 긴 시간이겠네요.”
발레리가 7일간의 휴가 계획을 알리자 프리다는 아쉬움을 감추지 않았다.
“저 없이도 잘 지내실 거 알아요. 그동안 식사 잘 챙기시고요.”
“그래도 발레리랑 같이 먹어야 더 맛있는걸요….”
프리다는 살짝 기운이 빠졌다.
그동안 거의 모든 끼니를 발레리와 함께 해왔다.
그녀와 이야기꽃을 피우며 밥을 먹노라면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먹는 양도 덕분에 배로 늘었고, 살도 올라 얼굴에 생기가 돌았다.
근육도 조금 잡혔는지 검을 잡는 손에도 제법 힘이 붙었다. 발레리가 시키는 대로 물통 들기와 팔굽혀펴기에 힘쓴 덕이다.
“그거야 그렇겠지만, 이제 식욕도 있으셔서 곧잘 드시잖아요. 저 걱정 안 해도 되죠?”
“응…. 혼자서도 잘 먹을게요.”
마침 문이 열리고 로저 경이 아침 식사를 한가득 내왔다.
그런데 그 뒤에 한 사람이 더 따라 들어왔다. 발레리에겐 너무도 익숙한 얼굴이었다.
“켄드릭, 넌 뭔데 들어와?”
“이제 이게 내 일이니까.”
켄드릭의 양손에 비프스튜 접시가 들려있었다.
“로빈슨 양은 아직 못 들으셨군요. 켄드릭 경이 제 후임으로 황녀님을 모시게 됐습니다.”
로저 경이 발레리에게 상황을 설명했다.
“로저 경이 곧 휴직하는데, 켄드릭 경이 이 일에 지원했어요. 오늘부터 인수인계하는 거예요.”
프리다도 그의 설명을 거들었다.
그러니까 로저 경이 맡던 황녀의 집사 일을 켄드릭이 그대로 이어받는다는 소리였다.
‘와, 내 친구지만 정말 출세에 돌아버린 놈이야. 명망 있는 후작가 아드님이 평생 안 해본 집사 일까지 도맡다니…. 딱 봐도 잡일 많아 보이는데.’
발레리는 켄드릭의 투명한 야심에 또다시 진저리를 쳤다.
윗사람 눈에 들려고 저렇게까지 해야 할까. 분명 매력이라고도 할 수 있는 부분이건만, 다소 과한 느낌이었다.
“로저 경, 그럼 문지기 수장은 누가 한다고 했죠?”
“마법사 루퍼트가 맡기로 했습니다, 황녀님. 오후에 인사하러 올 겁니다.”
루퍼트는 문지기 마법사 중 가장 연차가 높았다. 머리카락이 샛노랗고 긴 데다 늘 암갈색 로브를 입고 다녀서 늦가을 은행나무가 걸어 다니는 듯한 인상이었다.
“아아, 루퍼트가 하게 됐구나…. 켄드릭 경, 자원해 줘서 정말 고맙고 앞으로 잘 부탁할게요.”
“네 황녀님, 편안하게 모시겠습니다.”
“일주일 동안 발레리도 없을 텐데, 가끔 말 상대도 좀 해줘요.”
“발레리가 어디 갑니까?”
발레리가 자리를 비운다는 말에 켄드릭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나 휴가받았어. 어디 좀 다녀오려고.”
“어딜?”
“비밀.”
휴가 직전의 마지막 수업.
이날 발레리는 평소보다 신경 써서 황녀를 가르쳤다.
새로운 동작을 알려주기보다는 이미 배운 동작을 복습하고, 어려워하는 자세를 고치는 데 치중했다.
프리다가 혼자서도 근력을 기를 수 있는 도구도 전달했다. 계단 한 칸 높이의 나무 블록이었다.
“심심할 때마다 계단처럼 오르락내리락 해보세요. 허벅지랑 엉덩이에 힘 빡! 주는 거 잊지 마시고요.”
“알았어요, 발레리.”
수업을 모두 마친 뒤, 황녀는 퍽 아쉬운 얼굴로 미소 지었다.
“발레리, 다녀오면 이제 진검으로 수업하는 거 맞죠?”
“네. 무거운 목검도 이제 잘 드시니까, 그걸로 연습하고 계세요.”
“응, 그동안 열심히 하고 있을 거니까 기대해요. 몸조심해서 다녀오고요.”
석실 문 앞까지 배웅 나온 프리다는 발레리를 살포시 안아줬다.
체격 차이 때문에 황녀가 발레리의 가슴팍 한가운데 쏙 하고 들어왔다.
“황녀님도…. 건강하셔야 해요.”
발레리는 품속의 황녀를 살살 토닥였다.
“발레리, 잘 다녀와. 어딜 가는지는 모르겠지만.”
문지기들과 함께 선 켄드릭도 발레리에게 작별 인사를 건넸다.
절친인 자신에게도 목적지를 알리지 않아서 서운해하는 느낌이었다.
“그래. 나 없는 동안 새로운 일에 적응 잘하고 있어. 황녀님 잘 모시고.”
인사를 마친 발레리는 애써 입꼬리를 올리며 원형 계단을 천천히 올랐다.
오랜 짝사랑 상대였던 켄드릭.
그를 자주 보게 되면 이전처럼 계속 마음이 가서 힘들 줄 알았는데.
오히려 점점 평온해지는 듯했다.
황궁에서 제 야망을 한 단계씩 실현해 나가는 모습을 보며 발레리는 확신할 수 있었다.
친구로서도, 남자로서도, 그는 더 이상 욕심낼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발레리는 나선형 계단을 오르며 수통에 담아온 생수를 벌컥벌컥 마셨다.
이렇게라도 해야 입안의 텁텁함이 조금이라도 가라앉을 것 같아서.
그녀는 방에서 서둘러 짐을 챙겨 채플 뒤편으로 나왔다.
그런데 후원 한가운데 무언가가 그녀의 눈길을 확 사로잡았다.
웬 백마 한 마리가 떡하니 묶여있었다.
등에 고급 안장까지 얹은 채로.
“뭐야, 이 비싸 보이는 말은….”
“이제 나왔나?”
황태자가 등장했다. 말이 묶여있던 나무 뒤편에서.
그 바쁘다는 작자가 오늘만큼은 아침저녁으로 얼굴을 비치니 이상했다.
“웬 말? 걷기 귀찮아서 타고 오셨어요?”
“아니. 네게 빌려주려고 하는데.”
“이 말을요? 저한테요?”
발레리는 어리둥절한 얼굴이었다.
“그래, 너한테.”
“뭐 이렇게까지…. 감사합니다. 잘 탈게요.”
고작 휴가 일주일 다녀오는데 이런 고급 말을 대여해 준다니. 특히 백마를 타보는 건 난생처음이었다.
그녀는 의아해하면서도 덥석 받아들였다.
그만큼 빨리 돌아오라는 뜻인 것 같아서 마음은 편치 않았으나, 이런 편의를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그런데 나…. 정말 돌아올 수 있겠지.’
일주일 뒤에 돌아오겠다고 큰소리는 쳐놨지만, 그녀는 사실 겁이 났다.
이곳에 머무를 의미를 더는 찾지 못할까 봐.
“왜 그러지?”
잠시 생각에 잠긴 듯한 발레리를 보며 테렌스가 물었다.
“아, 아니에요. 이제 출발해야겠어요.”
발레리가 말에 올라 고삐를 잡았다. 평소보다 한층 굳은 표정으로.
“그동안 건강히 잘 지내고 계세요. 이랴!”
그녀는 담백한 작별 인사와 함께 뒤도 안 돌아보고 떠났다.
테렌스는 또다시 발레리의 뒷모습을 조용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가 점이 되어 사라질 때까지.
기마 자세마저 완벽하다고 생각하면서.
“저 아가씨도 참, 전하께서 캐런까지 내주셨는데 감동하는 기색도 없네요.”
어디선가 튀어나온 레이븐이 투덜거렸다.
캐런은 테렌스가 가장 아끼는 말이었다. 자신 외에 그 누구도 태운 적이 없었다.
“그런 것까진 바라진 않아. 안전히 돌아오기만 하면 된다.”
“전하께서 저 아가씨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이제 확실해졌네요.”
“…또 무슨 소리냐.”
“아버지의 마음이에요. 돌아오면 바로 수양딸 삼으세요.”
“…….”
테렌스 또한 레이븐을 쥐어박고 싶을 때가 많았다.
행동에 옮기지 않을 뿐이었다.
***
발레리가 캐런을 타고 목적지에 이르기까지는 꼬박 이틀이 걸렸다.
도착한 곳은 남부 프레이저 후작령.
에버렛 강 돌다리를 건너, 얼마 지나지 않아 잎이 무성한 플라타너스 숲이 나왔다.
발레리는 눈을 감고 익숙한 공기를 한가득 들이마셨다.
그녀는 말에서 잠시 내려, 가까운 발치에서 산딸기를 따 입에 집어넣었다. 바싹 말랐던 입안이 새콤한 과즙으로 흠뻑 물들었다.
임시방편으로 허기를 잠재운 그녀는 고개를 들어 가장 키 큰 나무를 찾았다.
그 아래 도적단 ‘펠런’의 본거지인 오두막 아지트가 있었다.
그 앞마당에서 피어오르는 반가운 연기가 불긋불긋한 저녁 하늘을 뿌옇게 물들였다.
“엇갈릴까 봐 걱정했는데, 역시 여기 있었구나.”
발레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혹시나 펠런이 다른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을까 봐 노심초사하고 있던 터다.
황궁에 있는 동안에는 연락이 끊겼던 탓에 단원들의 위치를 파악할 수 없었다.
그나마 초여름은 남부에서 장물을 처리하는 시즌이라 후작령에 있을 확률이 높았다. 다행히 예상이 적중했다.
금방 다다른 오두막 앞에는 단원 대여섯 명이 마당에 불을 지피고 있었다.
어디서 멧돼지라도 잡았는지, 바비큐를 해 먹으려는 모양이었다.
발레리는 엉덩이를 문지르며 천천히 말에서 내렸다. 거의 쉬지 않고 달리느라 물집이 잡혔다. 눈가에는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녀는 온 힘을 다해 목청을 돋우었다.
“다들 잘 지냈어요?”
“발레리?!”
갑자기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에 단원들이 반색하며 다가왔다.
“야, 발레리! 단독 임무 받았다더니 어디 있었던 거야?”
“말 엄청 좋은 거 타고 왔네. 성과가 꽤 좋았나 보다.”
“마침 바비큐 하려던 참인데. 얼른 같이 먹자.”
동료들은 이전과 같은 모습이었다.
발레리는 제 보금자리에 되돌아온 기분이 들어 마음이 한결 놓였다.
하지만 이럴 때가 아니었다.
“…두목은 지금 어디 있어요?”
발레리는 두리번거리며 아지트 근처를 살폈다.
잠시 후 그녀가 찾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돌아왔구나, 발레리.”
오두막에서 나온 피어스가 굳은 표정으로 발레리를 주시했다.
***
악명 높은 도적단 펠런.
이 집단에 악명을 씌운 주체는 따로 있었다.
바로 칼레바니아 ‘일부’ 귀족들이었다.
펠런의 악명 높은 짓들은 대부분 이들을 겨냥한 것이었으니까.
두목 피어스가 세운 펠런의 신조는 여러 가지였지만, 그중 몇 개는 이랬다.
약자들의 재산은 탐내지 않는다.
정당하게 쌓은 부는 건드리지 않는다.
펠런이 귀족들의 소유물을 집중적으로 노린 이유다.
특히 공갈이나 강탈, 착취 등 부정한 방식으로 쌓은 재물은 높은 확률로 펠런의 표적이 됐다.
펠런은 무고한 사람들이 부당하게 빼앗긴 것들을 되찾아주는 일을 했다.
주로 세금 명목으로 소유물을 부당하게 뜯긴 이들이 펠런을 비밀리에 찾아왔다. 잃은 것들을 다시 훔쳐 와 달라며 두둑한 선수금을 내밀었다.
의뢰인의 범주는 부유한 무역상부터 가난한 평민까지 다양했다.
─볼드윈 공작이 갑자기 집에 들이닥치더니, 가보 ‘세이렌의 피리’를 멋대로 가져가 버렸습니다. 이번에 낸 항만 사용료가 부족했다는 핑계로…. 바다의 여신 세이렌의 가호가 깃든 물건이니 꼭 되찾아주시길 부탁드립니다.
─덕스턴 백작가에서 저희 은식기를 말도 안 되는 헐값에 쓸어갔습니다. 거의 도둑맞은 수준입니다. 제값에 성전에 납품할 수 있도록 되찾아주신다면 사례하겠습니다.
펠런을 고용하려면 적지 않은 돈이 요구됐다.
이 때문에 평민들은 대부분 전 재산을 싸 들고 찾아왔다. 되찾고자 하는 게 물건이 아닐 때도 있었다.
─영주 아들놈이 납치해간 제 어린 딸을 되찾아주십시오.
─농번기가 돼서 사채 쓴 돈을 이제 막 갚을 참이었는데…. 인신매매단이 찾아와 제 아내를 데려가 버렸습니다.
보수가 높은 건 의뢰의 난도가 높기 때문이었다.
특정 계층을 위주로 공략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특히 귀족 저택을 뚫는 건 난도가 최상이었다. 부유한 상인이나 악덕 업주들의 집보다 경비가 몇 배는 삼엄했다.
성공한 이후에도 문제였다.
취득 경로는 부정했을지 몰라도, 귀족들에겐 귀중한 소유물이었다.
소유물을 도난당한 귀족들은 온갖 자원을 투입해 펠런을 집중적으로 추적했다.
펠런에 대한 ‘가진 자들의 원한’은 계속해서 쌓여갔다.
그렇게 활동 기간이 20년이 되어가니, 펠런에도 한계가 찾아왔다.
단원들의 신상이 점점 알려지기 시작하면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