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검술 수업을 마친 발레리는 황태자궁 앞뜰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그녀는 오늘 테렌스에게 볼일이 있었다. 하지만 그의 일정을 모르니 이렇게 무작정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벌써 30여 분이 지났는데도 테렌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올 때마다 잠깐씩만 얼굴 비치다 가더니, 바쁘긴 바쁜가 보네.”
“누가 바쁘다는 말이지.”
기다리던 목소리가 뒤에서 불쑥 들려왔다.
테렌스의 예고 없는 출몰에 발레리는 움찔하며 고개를 돌렸다.
“아, 깜짝이야. 왜 매번 사람이 인기척이 없어요?”
“저희는 평소에 걷던 대로 걸었는데요. 아가씨가 정신을 팔고 있었나 보죠.”
테렌스의 곁에 선 레이븐이 가벼운 시비조로 대답했다. 발레리는 그를 쥐어박고 싶단 생각에 주먹을 살짝 쥐었다.
“그래, 무슨 일로 찾아왔지.”
테렌스는 반가운 기색을 감추며 물었다.
그는 황제 부부를 알현한 직후 헛구역질을 하던 발레리를 계속 신경 쓰고 있었다.
검술 수업 참관 중에도 그녀가 이따금 딴생각에 빠져 한숨을 쉬는 게 보였다.
집에 무슨 우환이라도 있나 싶었지만 질문할 짬이 나지 않았다.
고민을 물어볼 만큼 친한 사이도 아니었고.
“부탁이 있어서요.”
“부탁…?”
“네. 부탁이요.”
“말해 봐.”
“저 이제 믿어주시면 안 되나요?”
대뜸 찾아와서 믿어달라니.
이게 무슨 부탁인가 싶은 테렌스는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이 마법, 절 못 믿어서 걸었다고 하셨잖아요.”
발레리가 자신의 발목을 가리키며 말했다.
─아직 널 완전히 믿지는 못해서 말이지.
테렌스는 탈출 금지 마법을 걸 당시 자신이 했던 말을 얼른 기억해 내곤 심경이 복잡해졌다.
마음 같아선 진작에 풀어줬어야 했던 마법이었으니까.
“아, 내가 그랬었지….”
“풀어주시면 안 될까요?”
발레리의 눈이 애처롭게 빛났다.
그녀의 까만 눈동자가 늦은 오후의 불긋한 햇살을 거울처럼 반사했다.
“아가씨, 어디 성 밖에 나갈 일 있어요?”
레이븐이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그녀에게 물었다.
“네, 급히 가볼 데가 있어요. 일주일이면 돼요. 꼭 돌아올게요.”
“일주일이라….”
“저 이제 범죄자 아니잖아요. 정말 이렇게 부탁할게요….”
발레리가 테렌스를 올려다보며 가슴 앞에 두 손을 모았다. 눈가가 점점 붉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이대로 가다간 무릎까지 꿇을 기세였다.
“…그래.”
그 모습을 보다 못한 테렌스는 얼른 승낙했다. 무슨 사연인지는 몰라도 절실해 보였다.
“네? 정말 허락해 주시는 거예요?”
“꼭 일주일 안에 돌아와라. 프리다의 검술 수련에도 목표 시한이 있으니, 공백이 길어져선 안 된다.”
“감사합니다, 황태자 전하.”
방금 얘가 날 전하라고 부른 건가. 테렌스는 멈칫했다.
‘전하’라는 호칭은 하루에도 수백 번씩 듣지만, 발레리의 입에서 나오니 생소하기 그지없었다. 그녀는 단 한 번도 테렌스를 제대로 호칭한 적이 없었다.
“레이븐, 마법 풀어줘.”
테렌스의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레이븐은 품에서 지팡이를 꺼내 발레리의 발목에 가져다 댔다.
그녀의 양 발목에 다시 빛 고리가 나타났다. 그 고리에 균열이 생기더니 이내 가루가 되어 산산이 흩어졌다.
그 과정을 내려다보던 발레리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한결 홀가분한 얼굴이었다.
자유를 허락해 준 테렌스에게, 발레리는 얼굴 가득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 웃음에는 전염성이라도 있는 건지, 테렌스는 덩달아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애써 꾹꾹 눌러 내려야 했다.
“아, 그리고. 이거 돌려드릴게요.”
발레리가 문득 뒷주머니를 뒤적거리더니 무언가를 내밀었다. 새하얀 천 조각 두 장이었다.
“이게 뭐지?”
“보시다시피 저한테 주셨던 손수건이에요. 깨끗이 빤 거니까 다시 쓰셔도 돼요.”
“…아.”
“죄송한데 처음 주셨던 건 못 돌려드려요. 제 머리에 똥 싸고 튄 새 치료하느라 찢어먹었거든요. 그럼 전 가보겠습니다!”
발레리는 그에게 손수건을 넘기고 바로 뒤돌아서 떠났다.
‘처음 준 것? 내가 이 두 장 말고 다른 손수건을 줬었나….’
테렌스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과거를 되짚었지만, 딱히 생각나는 건 없었다.
발레리는 금방 눈앞에서 사라졌다. 테렌스는 그녀가 건넨 뽀송뽀송한 손수건 두 장을 감싸 쥔 채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러고 있자니 불현듯 불안감이 엄습했다.
선명한 이유도 없었다.
발레리는 이미 황궁에 정식으로 채용된 사람이었다.
성 밖으로 나가게 한다고 갑자기 종적을 감출 이유도 없었다. 채플에 거처도 마련돼 있었고, 검술을 가르치는 일도 보람 있다고 했었다.
하지만 왜 이렇게 마음이 내키지 않을까.
테렌스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
“오늘 수업 마치고 황녀님께 인사드리고 가야지.”
다음 날 아침. 발레리는 여느 때처럼 검을 차고 방문을 나섰다.
어제보다 가벼운 표정으로 옆방 기도실로 향하려는 순간.
“어우, 깜짝이야!”
황태자가 또 방문 옆에 딱 붙어 기다리고 있었다.
발레리는 놀란 고양이처럼 번쩍 튀어 오를 뻔했다. 처음 있는 일도 아닌데.
바쁘신 몸께서 아침부터 어인 일로 행차했을까. 오늘은 레이븐도 없이 혼자였다.
“하, 왜 또 문 옆에 붙어있는 건데요!”
“저번보단 떨어져서 서 있었는데.”
“한 발짝은 더 떨어지셔야 안 놀라요.”
“…알았다. 잠깐 후원으로 갈까. 할 얘기가 있어서.”
발레리는 테렌스를 따라 채플 후원으로 향했다.
어젠 잘 채비해서 다녀오라 해 놓고, 아침 댓바람부터 무슨 용건일까.
발레리는 불안한 기색으로 황태자의 심기를 살피려 애썼지만 그는 언제나처럼 냉엄한 얼굴이었다.
‘기껏 휴가 줘 놓고 말 바꾸는 건 아니겠지. 진짜 그러기만 해봐라.’
“언제 출발하지?”
“오늘 수업 마치고 저녁에 가려고요.”
“말은 탈 줄 아나?”
“말이요? 네, 켄드릭한테 배웠어요.”
“…넌 모든 걸 그자에게서 배웠다 하는구나.”
검술도, 글도, 승마도. 전부 그 사내가 가르쳤다니.
테렌스의 얼굴이 서서히 굳어갔다.
아무리 오랜 친구라지만, 두 사람의 관계가 너무 긴밀하게 얽혀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테렌스는 문득 법정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그때 켄드릭은 발레리를 이렇게 소개했었다.
─저의 집착광…. 팬입니다.
‘검술 말고도 배울 게 많아서 쫓아다녔던 건가. 하, 어디에 집착했던 거지. 별게 다 신경 쓰이는군.’
테렌스는 낯선 감정을 억누르며 발레리의 대답을 기다렸다.
“걔한테 배우기만 한 건 아닌데요….”
발레리는 말끝을 흐렸다. 켄드릭에게 배운 게 많긴 했으나 그저 받기만 한 건 아니었다.
그렇다고 차마 켄드릭에게 은신과 줄타기, 자물쇠 따기 같은 도적단 기술을 가르쳤다곤 말할 수 없었다.
“네가 돌아온 후에 해줬으면 하는 일이 있는데.”
“네, 뭔데요?”
“프리다의 수련을 계속 지켜보고 싶지만, 일정상 석실을 자주 찾기가 힘들어서.”
“…그래서요?”
“네게 보고를 받아야겠다. 정기적으로.”
직선을 그리던 발레리의 입매가 점점 아래로 처졌다.
“보고를, 정기적으로요?”
그녀의 확인 질문에 테렌스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프리다의 수련 진행 상황을 보고하러 집무실로 와라. 일주일에 세 번.”
세 번이라니. 집무실에 하루걸러 찾아가란 얘긴가.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잦은 주기였다. 발레리는 고개를 저었다.
“한 번이면 충분하지 않을까 싶은데요.”
“…….”
테렌스는 말없이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또 그 싸늘한 표정이었다. 그의 연푸른 눈동자가 풍기는 선득한 분위기에 발레리는 반 발짝 물러났다.
“아, 알겠어요. 두 번으로 하시죠. 수요일 중간보고, 금요일 주간 보고. 어떠세요?”
“…알았다.”
협상이 빠르게 타결됐다.
발레리는 합의의 의미로 그에게 씩 웃어 보였다. 그 모습을 마주한 테렌스의 입가가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정기 보고를 하라니. 탐탁지 않은 요구였지만 받아들일 만은 했다. 보고야 뭐 진척 상황을 있는 그대로 얘기하면 되는 거 아니겠나.
‘일주일 휴가 보내준답시고 정기 보고 같은 걸 시키다니…. 그래도 마법은 바로 풀어줬으니 못 해줄 건 없지.’
게다가 황녀를 ‘뛰어난 검사’로 만들기까지 목표 시한이 이제 아홉 달 남짓 남았다. 정기적으로 실력 수준을 점검할 필요가 있긴 했다.
대체 왜 그런 시간제한을 두고 있는지는 알 길이 없지만 말이다.
“그럼 오늘 수업도 열심히 해라.”
“네, 전하도 일 열심히 하세요.”
발레리가 채플 안으로 다시 들어가는 걸 확인한 뒤 테렌스는 정문 쪽으로 이동했다.
그곳에선 레이븐이 기다리고 있었다.
레이븐은 테렌스를 발견하고 그에게 잰걸음으로 다가갔다.
“전하, 어떻게 협상은 잘하셨을까요?”
“그럭저럭.”
“몇 번으로 합의 보셨나요?”
“주 2회.”
“목표치에 미달하셨네요. 처음에 몇 번 부르셨어요?”
“세 번.”
“아, 처음에 주 5회를 부르셨어야죠! 매일 보고하라고 했다가 3일로 줄이면 선심 쓰는 것처럼 보일 수 있잖습니까. 저번에 이스티아 장관이랑은 무역 협상 잘하셨으면서 왜 이런 쪽은….”
레이븐은 구구절절 안타까움을 토로했다.
어젯밤 자정이 가까울 때쯤.
레이븐은 야근하다 말고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는 테렌스에게 대놓고 물었다.
─전하, 왜 자꾸 허공을 쳐다보고 딴생각을 하시죠?
명색이 황태자의 오른팔인데, 상관의 업무 집중도가 현저히 떨어지는 걸 보고만 있을 순 없었다.
─내가 그랬나.
─전하의 집중력을 흐리는 원흉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
─원흉이라니? 무슨 말이냐.
─그 검술 선생 아가씨 들어오고 나서부터 이러셨는데요. 휴가 간다니까 더 심해지셨습니다.
레이븐은 확신에 찬 얼굴이었다. 그가 테렌스의 속을 간파한 지는 오래였으니까.
어쩔 수 없었다. 테렌스는 솔직한 심정을 얘기했다.
─모르겠다. 나도 내가 왜 이러는지 원인을 알면 좋을 텐데…. 방법이 생각나질 않아.
레이븐은 감격하며 손뼉을 쳤다.
─와우, 살다 보니 전하께서 이러시는 날도 오네요. 왜 그러시는지 알 방법이야 있죠. 일단 단둘이 몇 번 만나보시면 됩니다.
그가 황태자궁 마법사로 발령 난 지 어언 7년.
레이븐은 일찍이 테렌스를 무성애자로 단정하고 있었다.
아침 먹고 일, 점심 먹고 일, 저녁 먹고 일, 자기 전까지 일만 했으니까.
취미랄 것도 없었다. 자투리 시간은 왼손으로 검술 수련을 하거나 근력운동을 하는 데 썼다.
그런 테렌스가 타인에게 비상한 관심을 보인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게다가 그냥 사람도 아니고 여자 사람이라니.
레이븐은 그 자체만으로 기념비적인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오늘 보니 테렌스는 도통 이런 쪽으로 소질이 없다.
“…일주일에 두 번 보고받는 것도 나쁘진 않다. 업무라고 생각하면 부담스러울 테니.”
“자주 봐야 답이 나온다니까요. 전하, 제발 좀 지름길로 가시죠. 부담 좀 줘도 됩니다. 그만큼 돈도 주실 거잖아요.”
레이븐은 답답해서 주먹으로 가슴을 쿵쿵 쳤다.
충분히 더 나은 기회가 있었는데 스스로 놓쳐버린 꼴이었다.
레이븐은 삶은 감자를 한 움큼 집어먹은 듯 속이 답답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