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발레리와 켄드릭의 맞대결이 성사됐다.
곧 대련을 펼칠 두 사람은 연무장에 널려 있던 운동기구와 무기들을 구석으로 다 치웠다.
무대가 준비되자, 프리다는 종을 울려 석실 문을 활짝 개방했다.
발레리와 켄드릭은 그 한가운데서 두 발짝 너비로 마주 섰다.
모처럼 구경거리가 생긴 문지기들이 우르르 몰려와 이들을 빙 둘러쌌다.
발레리가 검을 쭉 뽑으며 한쪽 입꼬리를 장난스럽게 비틀어 올렸다.
“기사님, 석실 앞에서 보초 서더니 몸이 근질근질해졌나 보네요.”
“역시 내 심정 알아주는 건 광팬뿐이야. 오랜만에 땀 좀 빼 볼까?”
두 사람의 검이 매서운 속도로 맞부딪히며 대결이 시작됐다.
서로의 공격 패턴에 익숙한 둘은 불꽃 튀는 탐색전부터 벌였다. 발레리는 여러 각도로 들어오는 켄드릭의 공격을 능숙하게 받아쳤다.
얼마간의 격돌 끝에 그녀는 이상한 점을 포착했다.
켄드릭의 검이 그리는 궤적이 평소보다 너무 크고 화려했다.
프레이저 검술의 묘미는 절도 있고 간결한 동작인데. 도무지 본인답지가 않았다.
‘어디서 이렇게 겉멋이 든 거야. 황궁 물 먹고 망가진 건가.’
발레리가 손쉽게 허점을 찌르자 켄드릭이 뒤로 조금씩 주춤했다. 그 동작마저도 어색한 데가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켄드릭은 제대로 싸우는 것 같지 않았다. 일부러 져 주려고 이러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이러면 재미없는데. 제대로 좀 하자?”
발레리는 짜증스러운 말투로 그에게 핀잔을 줬다.
켄드릭은 본래 실력의 8할 정도만 드러내고 있는 것 같았다. 옆구리 쪽으로 파고들 만한 여지도 훤히 남겨놓고서.
“나 지금 최선을 다하고 있는데?”
순 거짓말. 이게 최선일 리 없었다. 먼저 덤벼놓고는 왜 설렁설렁하려는 건지, 발레리는 슬슬 열이 뻗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둘의 속사정을 알 리 없는 구경꾼들은 턱이 빠질 지경이었다.
애초에 남녀 대결이 이렇게 대등한 양상으로 펼쳐질 줄 몰랐다.
“와, 저 여자 어디서 정통 검술 배운 것 같은데.”
“어떻게 몸동작이 저렇게 재빠르지?”
켄드릭도 아까보다 동작이 날래졌다. 그는 발레리의 공격을 모두 받아치긴 했지만, 여전히 불필요한 동작으로 여러 각도를 열어놓고 있었다.
발레리는 이대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이겨봤자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다.
그녀는 후, 하고 앞머리에 바람을 불어넣은 뒤 진지하게 경고했다.
“본 실력으로 안 하면, 여기 발라당 누워버리는 수가 있어.”
통했다.
켄드릭의 녹안이 약간 동요했다.
그가 비축해둔 완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살짝 열려있던 옆구리 아래 각도도 차단했고, 칼자루도 좀 더 바짝 쥐었다.
검날이 허공을 가르는 소리가 한층 살벌해졌다.
이번에 수세에 몰리는 쪽은 발레리였다. 대결 양상이 조금씩 뒤집히자 문지기들이 웅성거렸다.
“켄드릭 경이 역전할 것 같은데?”
“아냐, 저 여자가 잠깐 숨 고르는 타이밍일 거야.”
“와, 그래도 황실 근위기사랑 겨뤄서 호각세라니. 장난 아니다.”
켄드릭의 각성에 발레리도 이를 악물었다. 틈새를 찾아내려 눈을 몇 번이고 부릅떴다.
몸을 낮춰 파고들까 했지만, 여지가 주어지지 않았다.
몰아치는 켄드릭의 검에 체중이 한껏 실리기 시작했다. 발레리는 검이 부딪힐 때마다 몸에 전해오는 충격파가 부담스러웠다.
그 와중에 왼발에 생긴 물집이 터졌는지 알싸한 통증이 올라왔다.
황제 부부를 알현할 때 신은 납작구두가 남긴 흔적이었다.
‘아씨, 하필이면 물집이 지금 터져서.’
욱신거리는 통증에 발레리의 주의가 흐려졌다.
스텝도 조금씩 꼬였다. 무게중심이 자꾸 불안정해졌다.
기회를 포착한 켄드릭은 재빨리 결정타 각도를 잡았다. 그가 검날을 그대로 내리치려는 순간.
“저, 저기! 이제 그만하면 안 될까요!”
프리다의 외침이 한껏 달아오른 정점에서 찬물을 끼얹었다.
“그 정도면 됐어요. 다들 제자리로 돌아가세요.”
황녀가 정색하며 지시하자 상황은 바로 종결됐다.
켄드릭을 필두로 한 모든 문지기가 프리다에게 경례한 뒤 석실 밖으로 줄지어 나갔다.
그제야 발레리는 다리에 힘이 풀려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프리다는 그녀의 곁에 쪼르르 다가와 앉았다.
“발레리, 괜찮아요? 마지막에 몸이 좀 불편한 것 같았어요.”
“아, 네. 싸우다가 왼발에 물집이 터져서 그래요. 이제 괜찮아요.”
결투 내내 프리다는 발레리의 모습을 주의 깊게 지켜보고 있었다.
싸움을 멈춰 세운 건 패배 우려 때문이 아니었다. 발레리의 표정과 몸 상태가 심상치 않아 보여서다.
“물집 터지면 많이 아픈데…. 붕대라도 한 겹 감아 줄게요.”
“아, 정말 괜찮은데요.”
발레리의 만류에도 프리다가 석실 한구석의 서랍장에서 상자 하나를 가져왔다.
“발레리, 미안해요. 이렇게 무리할 줄 알았으면 켄드릭 경을 말리는 거였는데.”
프리다가 바지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냈다. 연한 분홍색 천에 그녀를 닮은 하얀 에델바이스가 수 놓여있었다.
그녀는 발레리의 신발을 벗기고, 왼발에 흐르는 진물을 세심하게 닦아줬다.
“발레리가 이기는 것보다, 안 다치는 게 나한테는 더 중요해요.”
프리다는 상자에서 붕대를 꺼내 발레리의 환부에 조심스레 감았다.
“정말 감사합니다, 황녀님.”
그녀는 프리다의 진심 어린 걱정과 정성스러운 치료에 할 말을 잃었다. 눈가가 붉게 달아오르고 시야에 물기가 뿌옇게 들어찼다.
“감사는 무슨…. 내가 더 고마워요. 발레리 덕분에 석실 생활이 얼마나 즐거워졌는지 몰라요. 발레리를 발탁해 준 오빠한테도 매번 고마워하고 있어요.”
프리다는 특유의 선한 미소를 띤 채 치료를 마무리했다.
발레리는 고개를 푹 숙여 눈물을 감췄다. 더없이 괴롭고 부끄러웠다.
이렇게 따스한 사람을 무슨 수로 납치해간단 말인가.
이토록 걱정해 주고 아껴주는 사람을, 무얼 해도 믿고 따라와 주는 사람을.
의뢰인은 황녀를 해치지 않겠다고 피의 맹세까지 했다.
그렇다 해도 프리다를 미지의 장소에, 정체 모를 인간 앞에 데려가는 일은 전혀 내키지 않았다.
도대체 의뢰인의 정체는 뭘까. 황녀에게 볼일이 끝나면 황궁으로 다시 돌려보내 주긴 할까.
이런 생각이 지속될수록 괴롭기만 했다.
발레리는 속이 또다시 메스꺼워졌다.
어제 황제 부부를 알현하고 나서부터 이랬다.
밤새 정체 모를 욕지기에 시달리며 잠도 이루지 못했다.
사람을 훔치는 건 역시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
켄드릭과 발레리의 대결이 펼쳐지는 동안, 문지기 수장인 로저 경은 테렌스의 집무실에 있었다.
어수선한 석실 분위기를 잠재울 사람이 없었던 이유다.
“전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그래, 말해보게.”
“아내가 조산기가 있습니다. 나이도 적지 않은데 늦둥이를 가진 터라…. 많이 우울해합니다.”
테렌스는 턱 끝을 매만지며 고민했다. 여러 각도로 생각해 봤으나 로저 경에게 줄 답은 하나밖에 없었다.
“휴직이 필요하겠군. 기간은 얼마면 적당하겠는가.”
“송구스럽지만…. 일단 6개월 정도 돌봐주고 복귀하겠습니다.”
“알겠네. 일단 이번 주 내로 문지기들 중에 후임자를 구하고 내게 알려주게. 휴직계는 바로 처리할 테니.”
흔쾌히 휴직을 허락하긴 했지만 테렌스는 몹시 골치가 아팠다.
그동안 로저 경은 프리다의 집사 겸 시종 역을 도맡으며 궂은일을 다해왔다.
그 깊숙한 계단을 오르내리며 매끼 식사와 따뜻한 목욕물까지 대령해야 했다.
각종 의복과 검술 훈련 용품 등을 놓고 실시간으로 황녀의 수발을 들었다. 체력과 완력, 지구력이 모두 요구됐다.
다른 문지기들은 기피하는 직무였다.
다들 내로라하는 가문 출신의 기사와 마법사들이었다. 긍지 높은 이들이 시종 노릇을 반길 리 없었다.
준남작 출신인 로저 경조차 이 일을 처음 맡을 때 주저했기에 설득이 필요했다.
아무리 월봉에 웃돈을 얹어준다 해도, 후임을 찾기엔 쉽지 않을 터였다.
로저 경이 떠난 뒤 테렌스는 석실 문지기들의 명단을 꺼내 다시 뒤적거렸다.
개중에 그나마 적당한 인물이 누가 있을까 탐색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눈에 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테렌스는 의자에 깊이 기대어 앉아 눈을 감았다.
“후임이 마땅히 없으면 별도로 시종을 뽑는 수밖에 없겠군. 보안에 좀 더 신경을 써야겠지만….”
***
이후 수업 시간 내내 발레리는 프리다를 똑바로 쳐다볼 수 없었다. 황녀를 마주할 때마다 막연한 죄책감이 눈앞에 물안개처럼 자욱해졌기에.
일과를 마친 발레리는 한숨을 쉬며 석실 밖으로 나섰다.
마침 켄드릭도 교대시간이 돌아온 참이라 그녀를 뒤따랐다.
두 사람은 출구로 통하는 나선형 계단을 함께 올랐다.
걸음이 좀 더 빠른 발레리는 뒤를 홱 돌아보며 켄드릭에게 물었다.
“오늘 대련 신청 엄청 뜬금없었던 거 알지? 너 정말 심심해서 쳐들어온 거였냐?”
“뭐 그것도 있고.”
“다른 이유가 또 있다고?”
“문지기들이 네 실력을 모르는 것 같길래. 무대 한번 마련해 봤지.”
“하…. 그래서 초반에 허술한 척 쇼를 했다?”
“내 수제자이자 라이벌 무시하는 건 내가 못 참아. 프레이저 후작가 자존심이 있지.”
“…….”
발레리는 그를 말없이 쳐다보다가, 다시 뒤돌아 계단을 밟아 올랐다.
켄드릭은 그런 그녀의 뒷모습을 빤히 쳐다봤다.
평소 같았으면 그딴 쓸데없는 짓을 왜 하냐고 반발했을 법도 한데, 별다른 반응이 없으니까 이상했다.
계단을 오르는 발레리의 발걸음은 이전과는 무게감이 사뭇 달랐다.
무거운 상념 속에 깊이 침잠해 있는 듯했다.
***
로저 경이 문지기들에게 휴직 계획을 알린 건 다음 날이었다.
“개인 사정으로 반년간 쉬게 됐다. 황녀님을 모시는 일을 이어받을 의사가 있다면 자원을 부탁하겠다.”
일동 침묵.
역시나 예상한 대로였다.
로저 경은 맥 빠진 얼굴로 뒷덜미를 긁었다.
“공개적으로 이야기하기 어렵다면, 개인적으로 찾아와도 좋다.”
절세미인 황녀를 아무리 자주 본다지만, 로저 경이 고생하는 걸 그대로 지켜본 문지기들은 격무를 이어받고 싶지 않았다.
말이 좋아서 집사지 허드렛일이 대부분이었다. 매끼 식사를 챙기고, 목욕물과 갈아입을 옷가지들을 나르고, 훈련 도구까지 대령해야 했다.
날고 기는 가문에서 자란 문지기들이 보기엔 영락없이 하인들이나 하는 일이었다.
“제가 하겠습니다.”
그때, 누군가가 번쩍 손을 들어 올렸다.
문지기들의 시선은 의외의 인물에게 쏠렸다.
칼레바니아 남부를 호령하는 프레이저 후작가의 하나 남은 영식이었다.
“…켄드릭 경, 자네 정말 이 일에 자원하는 건가?”
로저 경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 머리를 갸웃거렸다. 자원자가 있다는 게 반갑긴 한데, 전혀 예상치 못한 인물이었다.
“네, 부족하지만 제가 한번 해보겠습니다. 많은 지도와 편달을 부탁드립니다.”
여전히 의아해하는 로저 경에게, 켄드릭은 시원스럽게 웃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