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발레리의 목선은 처음 보는 부분이었다. 테렌스의 입이 저도 모르게 살며시 벌어졌다.
매일 발레리가 입는 녹갈색 근위병 복장은 목이 중간까지 올라와 있었기에, 목 부분은 거의 가려져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목에서는 기대하던 무언가가 하나 빠져 있었다.
잠시 멍해져 있던 테렌스는 퍼뜩 정신을 차리며 입을 열었다.
“목걸이는 안 했구나.”
“아 맞다, 까먹었어요.”
“…….”
“그럼 이제 가시죠.”
테렌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발레리의 까만 눈동자를 응시했다.
그리고 천천히 왼쪽 팔목을 내밀었다.
‘뭐야, 어쩌라고.’
발레리는 잠시 망설이더니 똑같이 팔목을 들고 테렌스의 팔꿈치를 툭 쳤다.
팔꿈치 인사.
간혹 사내들끼리 우정의 표시로 주고받는 동작이었다.
이 광경을 보고 있던 레이븐이 뒤에서 킥킥거렸다.
발레리는 ‘쟨 또 왜 저래’라는 표정으로 레이븐을 흘끗 쳐다봤다.
레이븐은 웃음기를 전혀 감추지 못했다.
‘에스코트 거부당하시는 건 처음이네.’
테렌스는 눈을 질끈 감더니 한숨을 쉬며 팔목을 내렸다. 이 여인은 에스코트라는 개념 자체를 모르는 것 같았다.
“그럼 출발하지.”
“네.”
결국 테렌스와 발레리는 일정 거리를 유지한 채 나란히 걷게 됐다. 레이븐은 작게 휘파람을 불며 두 사람을 뒤따라갔다.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게 걷다 보니 켄트웰 중앙궁과 그 장대한 앞뜰이 눈앞에 펼쳐졌다.
바로크 양식으로 지어진 웅장한 석조 건물이 동관과 서관으로 나뉘어 있었다.
테렌스는 살짝 불안정한 발레리의 걸음걸이가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평소 걸음걸이는 가뿐했던 것 같은데, 오늘은 어딘가 불균형했다.
“신발이 많이 불편한가?”
“편하진 않아요.”
“폐하께선 형식적인 걸 중요히 여기셔서…. 복장을 급히 준비하느라 어쩔 수 없었다. 다음부터는 좀 더 편안한 신발로 준비시켜 두려 한다.”
발레리는 대놓고 질색했다.
“아 됐어요. 그분 또 뵐 일은 없을 것 같은데요.”
그녀는 쉽게 단언했다.
오늘이 황제를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보는 날일 거라고.
***
테렌스는 발레리를 중앙궁 동관 알현실로 안내했다.
그녀는 붉은색 카펫을 밟으며 천천히 황좌 앞으로 나아갔다.
두 황좌에는 황제 엘리엇뿐 아니라 황후 레베카까지 앉아있었다.
발레리는 최대한 걸음걸이를 자연스럽게 하려고 노력했지만 쉽지 않았다.
불편한 구두 밑창에 사그락사그락 닿는 카펫의 질감이 생경하기만 했다.
카펫 위 화려한 사자 문양이 눈앞에 어지럽게 일렁였고, 속에서는 토기가 올라왔다.
일단 제국에서 가장 지체 높은 사람들을 만난다는 것 자체가 현실감이 들지 않았다.
일생의 절반 이상을 도적으로 살아온 그녀에겐 평생 볼 일이 없었을 상징적인 존재들이었다.
어느새 턱 끝에 대롱대롱 매달린 식은땀을, 발레리는 손등으로 슥 훔쳤다.
목표 지점까지 다 왔다. 하지만 뒷덜미가 굳어 고개를 들 수 없었다.
평생 고아였던 그녀에게, 누군가의 부모라는 존재는 낯설고 어렵기만 했다. 게다가 이 사람들의 귀한 따님을 언젠가 납치해야 하는 상황이다.
“제, 제국 백성들을 자상히 굽어살피시는 황제 폐하와 황후 폐하를 뵙습니다.”
발레리가 버벅거리며 절을 했다. 드레스 자락을 잡고 엉거주춤하게 몸을 숙인다. 이날 아침 프리다로부터 속성으로 배운 인사법이었다.
테렌스는 황제 부부 곁에 서서 그녀의 인사 장면을 지켜봤다.
‘의외로 쩔쩔매는 게 신기하군.’
자신에게 그러듯 누구에게나 당돌한 모습일 줄 알았는데, 그건 또 아닌 모양이었다.
황제 엘리엇은 발레리의 인사를 꽤 흡족하게 받아주었다. 어차피 예법을 완벽히 지킬 것이란 기대가 없었기에.
“그래그래. 로빈슨 양이라고 했지. 테렌스와 프리다에게서 익히 들었네.”
“영광입니다.”
“지난 주말에 우리도 석실에 찾아갔었네만…. 프리다가 이전보다 살도 붙고 혈색도 좋아진 게 확실히 보이더라네. 목검을 들고선 이리저리 휘두르는데 제법 모양이 나더군.”
“가, 감사합니다.”
“곧 진검을 다뤄야 할 텐데. 좀 더 신경 써 주면 고맙겠네.”
그러던 중 옆에 있던 황후 레베카가 눈물을 글썽이기 시작했다.
테렌스는 얼른 재킷 안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어머니에게 내밀었다.
“우리 프리다가 예전처럼 활짝 웃는 걸 보니까 정말…. 흐흑….”
황후가 옥좌에서 천천히 일어나더니 발레리 쪽으로 다가왔다.
당황한 발레리가 살짝 뒷걸음질 쳤음에도, 황후는 끝끝내 다가와 그녀의 오른손을 감싸 쥐었다.
이젠 쓰다듬기까지 한다.
“로빈슨 양, 너무너무 고마워요….”
거친 손등에 와 닿는 보드라운 감촉이 낯설었다. 발레리는 좁아지려는 미간을 펴느라 애쓰고 있었다.
‘이 아주머니는 대체 왜 이러실까. 부담스럽게….’
황후의 따뜻한 손길과 갸륵한 표정에 그녀는 곤란한 기색을 감추기 어려웠다.
“흑…. 우리 딸 앞으로도 계속 잘 부탁할게요.”
“아, 네….”
발레리는 황후의 물기 어린 청록색 눈동자를 애써 외면하며 허공을 바라봤다.
‘무슨 귀한 사위라도 들이는 줄 알겠네. 어르신들, 제가 앞으로 무슨 짓을 할 줄 알고 이러세요….’
발밑에 누가 압정을 뿌려놓은 것 같은데, 그 와중에 억지 미소를 계속 만들어내야만 했다.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황제 부부와 마주하는 내내.
“우웩.”
발레리는 알현을 마치고 나오자마자 헛구역질을 했다.
뒤따라가던 테렌스가 그녀의 소리를 듣고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왜 그러지? 어디가 안 좋은가?”
“아뇨. 저 이만 가볼게요. 안녕히 계세요.”
인사를 마친 발레리는 홀로 급히 발걸음을 재촉하며 중앙궁 정문을 빠져나갔다.
신발이 얼마나 불편했는지, 이내 모두 벗어서 양손에 들고 맨발로 뛰어가고 있었다.
“어, 저 아가씨 신발 벗고 도망가네요. 와, 진짜 빠르다. 저 정도면 100미터 12초에 주파하겠는데요?”
“…많이 부담스럽고 긴장됐나 보다.”
무서운 속도로 작아지는 발레리의 뒷모습을, 테렌스는 그저 안타깝게 지켜봤다.
레이븐도 같은 지점을 바라보며 혼잣소리로 중얼거렸다.
“치마 두르니까 여자 같긴 하네.”
“무슨 소리지. 늘 여자 같았는데.”
“네? 어딜 봐서요?”
“…어딜 봐도 여자다. 그럼 넌 로빈슨이 남자 같다고 생각했나?”
레이븐은 기가 차서 콧방귀를 뀌었다.
“하, 참. 키랑 어깨가 저보다 한 뼘이 큰데 당연한 거 아닙니까? 후문 보초일 땐 영락없는 남자였어요. 여자라곤 절대 의심 못 할 정도였다고요.”
“그때도 로빈슨의 존재를 알았다는 건가.”
“당연하죠. 제가 지나갈 때마다 맨날 위아래로 훑어봐서 얼마나 신경 쓰였게요.”
그의 말이 맞았다.
발레리는 레이븐이 지나갈 때마다, 그의 초록색 옷차림을 빤히 쳐다보곤 했다.
***
황녀의 석실 앞을 굳건히 지키는 문지기들.
이들의 일상은 꽤 단조로웠다.
비밀 장소다 보니 찾아오는 사람도 극히 제한적이었고, 처리할 문서도 없었다.
가만히 서 있다가 챙겨온 도시락을 먹고, 좀 더 버티다가 집에 가는 루틴이었다.
꿀보직이라면 꿀보직이지만 지루한 일상이 계속되면 그것 또한 괴로운 일일 터.
문지기들은 찌뿌둥한 몸을 풀기 위해 한 시간에 한 번씩 단체로 스트레칭을 했다.
스트레칭 시간마다 수다를 떨긴 했는데, 이게 4년째가 되니 대화 주제도 동나 버렸다. 이미 가족과 친구, 애인 이야기는 다 했으니까.
서로 너무 잘 알아서 더 터놓을 것조차 없었다.
하지만 어느 시점부터 이들에게도 ‘뜨거운 감자’가 나타났다.
바로 황녀의 새 검술 스승, 발레리였다.
발레리가 석실 문을 드나들 때마다, 문지기들은 눈알을 위아래로 굴리며 그녀의 전신을 뜯어봤다.
갑자기 웬 여자가 나타나서 황녀를 가르친다고 하니 이목이 쏠릴 수밖에.
─살면서 저렇게 키 큰 여자는 처음 봤어. 180은 되지 않을까.
─키만 크냐? 이두근이랑 삼각근 발달한 거 봤냐고.
─황태자 전하랑 싸워서 이겼다는 게 진짜일까….
켄드릭이 신입 문지기로 들어온 뒤에도, 발레리는 이들의 대화 주제에 심심찮게 올랐다.
오늘도 문지기들은 점심 도시락을 까먹으며 ‘로빈슨 양’ 얘기를 꺼냈다.
“이젠 가위바위보 소리 안 들리네. 수업 핑계로 황녀님이랑 맨날 놀기만 하는 줄 알았는데.”
“근데 제대로 가르치긴 하는 걸까? 여자가 검술을 하면 얼마나 한다고.”
“그래도 인내심은 있나 봐. 황녀님 소질이 영 아니라서 우리도 두 손 두 발 다 들었잖아.”
문지기들은 아직 발레리의 실력에 대한 의구심을 풀지 않은 상태였다.
어쨌건 발레리는 기사도 아니고 말단 병사 출신인 데다, 여자니까.
문 속을 들여다보지도 못하니 어떻게 가르치는지도 알 길이 없었다.
켄드릭은 이들의 이야기를 굳은 표정으로 가만히 듣고 있었다.
그는 잠시 눈을 감고 있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 안에 있는 여자의 검술 실력이 궁금하십니까.”
새로 들어온 후작가 영식의 갑작스러운 발언에 모든 문지기의 시선이 쏠렸다.
그러던 중 문지기 하나가 속마음을 내뱉었다.
“켄드릭 경, 당연한 거 아닙니까? 우리도 못 가르친 황녀님을, 어디서 굴러먹다 온 지도 모를 여자가 가르치고 있는데요.”
켄드릭은 그를 냉담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이렇게 말했다.
“그럼 제가 직접 도전해 보겠습니다. 그 여자한테.”
그가 철문 앞으로 저벅저벅 걸어가더니, 문을 쿵쿵 두드렸다.
저자가 대체 뭘 하려는 거지. 문지기들은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켄드릭을 쳐다보고 있었다.
쿵쿵.
석실 문에서 둔탁한 소리가 한 차례 더 울렸다.
누군가가 단단한 장갑을 끼고 두들기는 느낌이었다.
그 시각 발레리는 프리다에게 ‘무릎 대고 팔굽혀펴기’ 자세를 잡아주고 있었다.
요즘은 황녀에게 하루에 한 시간 이상 근력운동을 시키던 참이었다. 프리다는 팔을 후들거리면서도 그녀가 알려주는 대로 정자세를 유지하려 노력했다.
“황녀님, 누가 온 것 같은데요?”
“음, 이 시간에 오는 거면 오빠는 아닌데. 잠깐만요.”
프리다가 바닥을 짚고 일어서더니 철문 쪽으로 다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거기 누구죠?”
“켄드릭 유진 프레이저입니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응? 켄드릭 경? 들어와요.”
그녀가 출입을 허하자마자 켄드릭이 석실 안으로 힘차게 걸어 들어왔다.
그는 프리다에게 먼저 깍듯이 경례한 뒤, 발레리 쪽을 쳐다봤다. 도전적인 눈빛으로.
“뭐야, 너? 볼 일이 나한테 있는 거야?”
발레리가 휘둥그레진 눈으로 저 자신을 가리키며 물었다.
켄드릭은 다시 황녀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황녀님, 제가 혹시 발레리하고 겨루기를 좀 해도 되겠습니까?”
“발레리랑…. 겨루기요? 지금?”
“허락하신다면 발레리에게 도전하고 싶습니다. 문지기들도 다 보는 앞에서요.”
발레리와 프리다는 잠시 말을 잃었다.
프리다는 대답을 미루고 고민했다.
켄드릭 경이 왜 이럴까. 예고도 없이 불쑥 들어와서는 난데없이 발레리에게 대련 신청이라니.
그것도 모두가 보는 앞에서.
하지만 딱히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프리다는 두 사람의 대결을 허용하기로 했다.
어차피 한 번쯤은 이들이 맞붙는 장면을 보고 싶었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