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태자한테는 관심 없는데요 (19)화 (19/173)

19화

“그때 그 냇가에서의 일은….”

테렌스가 드디어 용건을 꺼냈다. 발레리는 다시 의자에 털썩 앉았다.

“냇가라뇨?”

“그때 일은 내 실수였다.”

“뭔 말씀인지 이해가 잘… 안 가는데요.”

“보안에 한참 신경 쓰다 보니 대응이 과도했어. 정말 널 죽일 생각은 없었다. 체포는 하려고 했지만….”

그때 일을 사과하는 듯했다.

냇가에 쭈그려 앉아있던 발레리의 목에 다짜고짜 칼을 들이밀었다가 역으로 제압당했던 그 사건.

“아아, 그때 그 일요? 참으로 불미스럽긴 했죠.”

발레리는 당시 긴박했던 상황을 떠올리며 억양을 배배 꼬았다. 그게 테렌스의 죄책감을 더 자극했다.

“미안하다. 그 뒤로 법정에서도 널 그렇게 몰아세웠으니.”

정식으로 하는 사과였다. 테렌스의 눈동자는 호수 표면의 물안개처럼 착 내리깔려 있었다.

후회의 빛이 짙게 서린 그의 얼굴을 보며, 발레리는 내심 당황했다.

저렇게 진심으로 뉘우치는 표정도 지을 줄 아는 사람이었다니.

남겨서 잔소리나 할 줄 알았는데, 이렇게 갑작스러운 사과를 받게 될 줄은 전혀 몰랐다.

발레리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망설이다가 이렇게 답했다.

“에이, 뭐 다 지난 일을 가지고 그러세요.”

대범한 척 손사래까지 쳤다.

그녀에게 황태자에 대한 응어리가 남아 있던 건 사실이었다. 차가운 감옥에 갇혀 병아리처럼 성별검사를 당하며 곤욕을 치렀고, 재판에서도 궁지에 몰려 그대로 옥살이를 할 뻔했으니.

다행히 발레리는 증오심을 그리 오래 간직하는 편이 아니었다.

테렌스의 진심 어린 사과 한마디에, 그간의 악감정이 슬며시 녹아내렸다.

“음, 그래도 시비를 걸어주신 덕에 제 검술 실력을 알게 되셨잖아요? 황녀님 검술 선생으로도 채용해 주셨고요.”

발레리는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씁쓸하게 웃었다.

‘오히려 내가 황태자 너한테 고마워해야 하는 것도 있지…. 내 표적인 황녀님 앞에 친히 데려다주기도 했으니까.’

“네가 그렇게 생각해 준다면 다행이지만….”

“괜찮아요. 감옥에서 불편했던 만큼 지금은 편해요. 황녀님 가르치는 일도 보람 있고요.”

그녀의 입에서 괜찮다는 말이 나오고서야 테렌스의 표정이 약간 풀어졌다.

“그래. 저번에 말했던 그 보상은, 네 이번 달 월봉에 합산하도록 일러두었다.”

“우와 진짜요? 고맙습니다! 헤헤….”

수중에 돈이 떨어진다는 소리에, 발레리는 대놓고 히죽거렸다.

마냥 즐거워하는 그녀의 모습은 사탕을 받아 든 어린아이 같았다. 당연한 반응이었다. 애초에 발레리는 돈의 논리에 따라 움직이는 도적이었으니까.

테렌스의 입에선 가벼운 한숨이 새어 나왔다.

‘돈 싫어하는 자가 어디 있겠냐만…. 정말 속이 투명하게 다 비치는군.’

“그리고 또 전달사항이 있다면.”

“또요?”

“황제 폐하께서 널 보자고 하신다. 제대로 채비하려면 며칠이 걸릴 테니 네 방으로 사람을 보내겠다.”

“예에?!”

발레리는 용수철처럼 의자에서 번쩍 튀어 올랐다. 이런 중요한 얘길 왜 마지막에 하는 걸까.

‘너희 아빠, 그러니까 황제가 날 왜!’

***

다음 날, 검술 수업을 마치고 퇴근한 발레리의 방 앞으로 웬 여자 두 명이 찾아왔다.

“누구시죠?”

“황태자 전하 명으로 왔어요. 메리, 치수부터 재자.”

두 여인이 그녀의 방 안으로 난입하더니, 대뜸 몸에 줄자부터 들이밀었다.

“잠깐 팔 좀 들어보세요.”

발레리는 어리둥절하며 양팔을 들었다.

메리라는 여인이 발레리의 가슴둘레를 재고, 다른 여인은 품에서 수첩을 꺼내 숫자를 써넣었다.

“키가 엄청나게 크시네. 침방에 있는 옷들은 다 짧겠는데? 원단 길게 뽑아서 후딱 새로 만들자.”

“그래. 색깔은 뭐가 나으려나?”

“피부색이 어두우니까, 차분한 녹색으로.”

의복 전문가로 보이는 두 여인 사이에는 금방 합의가 이뤄졌다.

이번에는 허리에 줄자를 두르고 치수를 잰다.

“볼륨이 조금 없으시지만…. 목이 길고 허리가 가느시네. 가슴은 적당히만 파고, 상체는 딱 붙게 만들자.”

“팔근육이 뭐 이렇게 크시지? 볼록 소매로 가릴까?”

“아냐, 건강해 보여서 좋은데 뭘. 그냥 딱 맞게 처리하면 될 것 같아.”

발레리는 볼륨이 없다는 말에 입을 삐쭉 내밀었다가, 팔근육 칭찬에 다시 입꼬리를 씩 올렸다.

무슨 상황인지는 대강 짐작이 됐다.

‘뭐야, 근사한 정복이라도 하나 맞춰주려고 그러나? 근데 정복에 가슴을 왜 파지…. 볼록 소매는 또 뭐냐.’

***

테렌스는 매번 집무실 책상에 앉아 아침을 먹었다.

메뉴는 간단한 샌드위치 정도였다.

집무실엔 일곱 시 정각부터 결재할 서류가 서너 다발씩 밀려들었다. 관리들이 바삐 오가는 가운데 정찬을 들 시간은 없었다.

이렇게 된 원인은 황제 엘리엇이었다. 나이가 들어 눈이 침침하다는 이유로, 웬만한 사안은 결재권을 아들에게 내려보냈다.

“폐하도 참 너무하십니다. 일을 자꾸 떠넘기시네요. 손도 불편한 아드님한테.”

레이븐은 서류 더미에 파묻힌 테렌스를 안쓰럽다는 눈으로 내려다봤다.

테렌스는 결재서류에 왼손으로 서명하고 있었다. 깃펜이 지나간 자리에 글씨가 제멋대로 휘날렸다.

“…프리다 일로 마음이 심란하시니 이해해야지. 이젠 왼손 서명도 제법 익숙하다.”

“글씨가 예전보다 나아지긴 하셨네요. 그땐 정말 뭐라고 쓰시는지 못 알아볼 정도였는데.”

“시간 날 때마다 연습하니까.”

“참 알아주는 노력파십니다.”

그의 서명 장면을 계속 지켜보던 레이븐은 문득 잊고 있던 게 떠올랐다.

“아 맞다, 전하.”

“또 지팡이 빼놓고 왔나?”

“아뇨, 그 아가씨 말인데요.”

“로빈슨?”

테렌스가 즉시 발레리를 언급하자 레이븐은 콧잔등을 벅벅 긁었다.

“…이제 아가씨 하면 그 아가씨밖에 안 떠올리시네요. 아무튼, 그 아가씨 문제가 좀 있어요.”

“무슨 문제.”

“기밀 유지 서약서, 인증 마법이 안 걸리더라고요.”

서약서에 인증 마법이 안 걸리는 이유는 하나였다.

서명자의 실제 이름과 서명란에 적힌 이름이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발레리가 서약서에 대충 휘갈긴 ‘발레리 로빈슨’은 그녀의 본명이 아니었다.

테렌스는 며칠 전 그녀가 서약서를 앞에 두고 켄드릭과 씨름하던 모습을 떠올렸다.

“철자가 틀려서 그런 것 같은데. b와 d를 잘 구분하지 못하더군.”

“찍찍 긋고 다시 썼던데요? 그렇게 해도 웬만하면 걸리는데…. 글씨가 워낙 개판이라 그런 걸까요.”

“흠….”

“아무래도 서명 다시 받아야겠죠?”

레이븐이 의사를 묻자 테렌스는 깊은 고민에 잠겼다.

흰 종이 위에 깃펜이 우뚝 멈춰 섰다. 잉크가 천천히 새어 나왔다. 펜촉 끝을 축으로 한 검은 원이 점점 커지고 있었다. 

잠시 후, 테렌스는 종이 표면에서 깃펜 촉을 뚝 뗐다.

그 자리엔 잉크가 꽤 넓은 면적까지 번져 있었다.

종이 위의 커다란 점을 내려다보며 테렌스는 나지막이 대답했다.

“그냥 둬.”

레이븐은 기가 차서 입을 쩍 벌렸다.

“아니, 전하…. 서류만큼은 칼같이 챙기시는 분이 왜 이러십니까?”

“글을 제대로 못 배운 자다. 서명했다는 것 자체에 의의를 두지.”

“거참 편의 되게 봐 주시네.”

레이븐은 눈알을 되록 굴렸다. 테렌스는 그의 반응을 무시하며 벽시계를 쳐다봤다.

중앙궁 지하 안보회의 전까지 한 시간이 남는다. 지금부터 결재에 속도를 내면 석실에 들를 짬이 난다.

“이따 40분에 출발하자.”

“석실 들렀다 가잔 말씀이시죠? 흠, 왔다 갔다 하는 시간 빼면 5분밖에 못 보실 텐데.”

“그 정도면 충분해.”

“이제 그냥 둬도 되지 않을까요? 그 아가씨가 어련히 알아서 할….”

“귀찮으면 나 혼자 가고.”

“아, 아뇨. 저도 가겠습니다.”

레이븐은 작은 소리로 혀를 차며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어디서 집착의 향기가 솔솔 나는데….”

바쁜 와중에도 테렌스는 일주일에 세 번씩은 오전에 짬을 내서 석실의 검술 교육 현장을 관전했다.

워낙 일정이 빡빡하니 오래 볼 순 없었다. 길어야 20분, 짧으면 2~3분만 있다가 나왔다.

레이븐은 그와 함께 길고 긴 나선형 계단을 오르내리는 게 참 번거로웠고, 가끔 짜증도 났다.

하지만 웬만하면 따라다녔다.

일 9할에 운동 1할로 구성돼 있던 상관의 단조로운 일상에, 나름대로 큰 변화가 찾아온 것 같아서.

그 변화를 지켜보는 일은 생각보다 흥미로웠다.

***

며칠이 흘렀다.

메리라는 여인이 방으로 또 찾아와서는 발레리에게 커다란 상자를 안겨주고 돌아갔다.

발레리는 방바닥에 주저앉아 상자에 묶인 리본을 쓱 끌렀다. 덮개를 여니 낯선 형태의 물건이 나왔다.

“잉? 이게 뭐야?”

진한 녹색 엠파이어 드레스였다.

특별한 장식은 없었지만, 원단 자체가 꽤 값나가 보였다.

“녹색이라고 해서 좀 멋있는 정복 하나 맞춰주나 했는데. 이걸 언제 입으라고 주는 거야. 설마….”

그 설마가 맞았다. 드레스 밑에 뭐가 서걱거리는 게 있어서 봤더니, 쪽지였다.

「네 노고에 대한 보상이다. 착용 후 내일 저녁 7시, 황태자궁 후문 앞으로. ─테렌스」

“…선물이구나. 황태자 얘는 글씨를 나만큼이나 못 쓰네. 오른손잡이가 오른손을 못 쓰니 어쩔 수 없는 건가.”

발레리가 테렌스의 쪽지를 한 글자씩 짚어 읽으며 중얼거렸다.

쪽지 위에는 친히 약도까지 그려져 있었다. 저녁을 나타내는 달 모양과 7시를 나타내는 시계 그림도 있었다.

그림도 글씨만큼 삐뚤빼뚤했지만, 알아볼 만은 했다.

“이 정도 글은 읽을 줄 아는데. 그림은 또 왜 그렸대. 그림도 진짜 더럽게 못 그리네.”

상자 맨 구석에는 보랏빛 벨벳 천으로 친친 감긴 물건이 있었다. 풀어보니 두꺼운 책 한 권 크기의 딱딱한 상자가 나왔다.

“…뭐야. 이거 귀금속 상자 같은데. 설마?”

줄이 굵은 백금 목걸이였다.

발레리는 기름등에 목걸이를 가까이 대고 자세히 들여다봤다.

엄지손톱 크기의 칠흑같이 새카만 보석 펜던트가 찰랑거리며 빛을 은은히 반사했다.

동글납작하게 세공된 모양을 보니 검은색 오닉스였다. 그녀의 눈동자를 똑 닮아있었다.

“오닉스 이거 요즘 비싼데. 잘 뒀다가 나중에 돈으로 바꿔야지.”

***

드디어 약속 당일.

드레스를 챙겨 입은 발레리는 황태자궁 쪽으로 저벅저벅 발걸음을 옮겼다.

“아우, 입는 것도 겁나 힘들었는데 입고 밖에 다니려니까 어색해 죽겠네. 치마를 입어봤어야지.”

걸음걸이가 영 부자연스러웠다. 옷상자에 함께 들어있던 갈색 납작구두가 좀처럼 발에 익지 않은 탓이다.

멀찍이 걸어오는 그녀를 먼저 발견한 건 레이븐이었다.

“평생 치마라곤 안 입어본 걸음걸이인데요. 그쵸, 전하?”

테렌스는 기다렸다는 듯 얼른 그쪽을 바라봤다.

“…….”

“요즘 따라 제 말을 자주 씹으시네요.”

휘적거리며 가까이 다가오는 발레리를, 테렌스는 한마디 말도 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처음 보는 드레스 차림이었다.

남다르게 쭉 뻗은 키와 늘씬한 자태가 시선을 압도했다.

드레스의 상체 부분은 그녀의 탄탄한 몸에 꼭 맞게 처리됐다. 그 덕에 어깨의 잔근육과 잘록한 허리선이 돋보였다.

귀밑에서 끝나는 짧은 머리칼 아래로, 갸름한 턱과 기다란 목이 유려한 곡선을 그렸다.

그 밑에 가지런히 놓인 일자형 쇄골에서는 은근한 관능미가 풍겼다.

발레리는 드디어 테렌스의 바로 앞까지 이르렀다.

“기다리고 계셨네요. 아, 근데 이거 신고 중앙궁까지 걸을 수 있으려나.”

그녀는 상체를 숙여 신발 뒤꿈치를 매만졌다. 길고 매끈한 목선이 더 깊숙이 드러났다.

테렌스는 그 부분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