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프리다의 갑작스러운 제안에 네 명은 석실에서 저녁을 들게 됐다.
식사 인원이 평소보다 많아서, 로저 경의 음식 서빙을 레이븐도 함께 도왔다.
자리 배치는 이랬다.
일단 발레리의 옆자리. 아직 초보지만 열정 가득한 검술 제자. 그리고 장기적으로 납치에 성공해야 하는 임무 표적.
맞은편. 이틀 전 이별주까지 나눠 마신 뒤 떠나보낸 데다, 이번엔 꼭 정리하리라 다짐했던 짝사랑 상대.
그리고 대각선. 감옥에 처넣을 땐 언제고 대뜸 꺼내주더니 여동생 검술 좀 가르쳐보라는 이상한 놈. 여기서 제일 종잡을 수 없는 인간.
기괴한 조합이었다.
길거리 출신인 발레리는 스스로 비위가 좋다고 자부했지만, 이번만큼은 살짝 체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켄드릭의 얼굴도 계속 보게 생겼고….
황태자는 계속 감시하는 듯한 인상을 줬다. 저 서슬 퍼렇고 날카로운 눈동자로.
이 상황에서 기분이 들떠 있는 사람은 프리다 하나밖에 없었다.
“켄드릭 경, 발레리랑 아는 사이였어요? 신기하네요.”
“네, 발레리와는 어릴 적부터 검술 수련을 하며 친해졌습니다.”
“우와아, 그럼 둘이 대련하는 것 보여줄 수 있어요?”
프리다는 손뼉을 치며 발레리와 켄드릭을 번갈아 바라봤다.
발레리는 황녀의 말에 흔쾌히 응했다.
“물론 언제든 보여드릴 순 있는데, 검술 자체는 켄드릭이 더 잘해요. 저도 얘한테 배운 거라. 보시면 선생을 얘로 갈아치우고 싶어 하실 수도 있어요.”
“아냐, 발레리. 난 문 앞을 지켜야지. 그래도 승률은 비슷했습니다. 얘가 워낙 약삭빨라서, 조금만 틈을 보이면 무섭게 치고 들어오거든요.”
“약삭빠르다니. 상황 판단력이 좋다고 하면 되는 걸 굳이 그렇게 표현하냐.”
발레리는 켄드릭을 째려보며 볼멘소리를 했다.
테렌스는 발레리가 약삭빠르다는 표현에 조용히 공감했다.
냇가에서 빨래하던 발레리에게 역습을 당한 것도 같은 이유였다. 잘 쓰지 않는 왼손으로 싸운다는 약점을 빠르게 간파당했고, 무참히 패배했다.
“헤헤, 두 사람 정말 친해 보이네요. 켄드릭 경, 앞으로 종종 들어와서 식사 같이해요.”
“감사하지만 조금 곤란합니다, 황녀님. 다른 문지기들은 끼니도 보초 서면서 때우는데, 저 혼자 호사를 누려서야 되겠습니까.”
켄드릭이 번드르르한 거절 멘트를 날렸다.
발레리는 그의 태도가 영 느글거려서 속으로 진저리를 쳤다.
‘와, 사회생활 잘하는 건 알았지만 조금 역겨워지려고 하네.’
저렇게 예쁘게 거절하는 것도 일종의 기술일 터였다. 남부럽지 않게 자란 영주 아들이 저런 화법은 어떻게 익힌 건지 신기했다.
“그건 그렇겠네요. 조금 아쉽네. 그래도 여기 온 거 정말 환영해요!”
프리다는 얼굴 가득 함박웃음을 지었다.
테렌스는 여동생의 상태가 여느 때보다 좋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일단 프리다의 앞에 놓인 스테이크의 크기가 이전과는 달랐다. 무려 절반이나 사라져 있었다.
“프리다, 먹는 양이 많이 늘었구나.”
“응 오빠. 요즘 발레리하고 움직이다 보면 막 배가 고파져서, 밥도 빨리 먹고 싶고 그래.”
“그거 아세요? 요즘은 황녀님 배꼽시계가 제 거보다 먼저 울려요.”
“아잇, 발레리! 그건 내가 더 많이 움직이니까 그런 거잖아요!”
프리다는 곁에 있는 발레리의 팔뚝을 찰싹 때리며 까르르 웃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이전보다 한 옥타브쯤 올라가 있었다.
테렌스는 입가에 엷은 미소를 띠었다.
4년 내내 고요하고 적막했던 석실에, 점점 숨통이 트이는 것 같아서.
프리다는 10대 시절의 활기찬 모습을 조금씩 되찾아가고 있다.
저 독특한 여자를 스승으로 들이고 나서부터.
그때 발레리는 테렌스가 식사하는 장면을 관찰하고 있었다.
그는 접시 위의 스테이크를 건드리지도 않았다. 숟가락으로 떠먹을 수 있는 수프, 그리고 포크로 찍어 먹을 수 있는 감자만 입에 넣었다.
채식주의자인가 싶었는데, 수프에 고기가 들어있으니 또 그건 아닌 듯했다.
식사 내내 나이프 없이 포크와 숟가락만 사용하는 이유는 뭘까.
그것도 왼손으로만.
‘아, 음식 먹을 때도 왼손밖에 안 쓰네. 황태자 쟤, 오른손을 아예 못 쓰는구나?’
그녀는 이제야 알게 됐다. 황태자가 검을 왼손에 들고 싸웠던 이유를.
***
식사가 끝났다.
황녀의 석실에서 총 네 사람이 빠져나왔다.
테렌스가 앞장선 가운데 발레리와 켄드릭, 레이븐이 차례로 그를 뒤따랐다.
그들은 문지기들이 있는 복도를 지나 출구로 통하는 나선형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넷은 묵묵히 길고 긴 계단을 올랐다. 조용한 가운데 테렌스는 문득 전달사항이 떠올라 뒤를 돌아봤다.
“아, 켄드릭 경. 내일 오전에 집무실로 올 수 있겠나? 기밀 유지 서약을 받아야 하는데.”
“네. 아침 일찍 찾아뵙겠습니다, 전하.”
문지기들은 발령 직후 황태자 집무실로 불려가 기밀유지 서약서에 서명해야 했다.
대외적으로는 황태자궁 산하 조직에 편성됐고, 기밀 발설 시 처벌 조항을 숙지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로빈슨에게도 서약을 받아야 할 것 같군. 너도 와라.”
“흠, 전 기사도 아닌데 굳이 해야 해요? 그동안 비밀 잘 지켰는데.”
발레리는 기밀 유지 자체에는 자신이 있었다.
애초에 황궁 내에 유일한 친구라곤 석실 문지기가 된 켄드릭 하나뿐이었다.
일상적으로 만나는 사람은 프리다와 문지기들밖에 없었다. 일요일에 채플 보초를 설 때도, 발레리에겐 아무도 말을 걸지 않았다.
하지만 서약서에 서명하는 게 문제였다.
어릴 적 그녀는 켄드릭에게 글을 배우긴 했다. 읽는 데는 큰 문제가 없었지만, 여전히 철자를 잘 쓰지 못했다.
그나마 수월하게 쓰는 건 고작 제 이름 일곱 글자였다.
일단 새로 생긴 가짜 성 ‘로빈슨’을 어떻게 쓸지부터가 막막했다.
“안 하면 안 되나요? 발설할 친구도 없는 거 아실 텐데.”
“흠….”
켄드릭은 황태자의 눈치를 살피며 발레리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발레리, 그래도 절차라는 게 있으니까. 내일 같이 찾아뵙자.”
안 그래도 발레리가 황태자를 대하는 말투에 예의가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한편으로는 의아했다. 엄격, 근엄, 진지의 표본인 황태자가, 발레리 특유의 되바라진 말씨를 아무렇지 않게 넘어가고 있었다.
어느덧 바깥은 해가 완전히 지고 어둠이 깔려 있었다.
가장 먼저 발레리가 방으로 돌아갔고, 켄드릭 또한 깍듯이 경례한 뒤 기사단 숙소로 복귀했다.
테렌스는 레이븐과 함께 한참을 더 걸어 황태자궁 앞까지 다다랐다.
레이븐은 경쾌한 휘파람을 불며 정문 앞 계단을 올랐다.
“황녀님, 오늘 참 많이 웃으시던데. 아무래도 젊고 잘생긴 문지기가 새로 들어와서 그런 거겠죠?”
“…켄드릭 경 말인가. 그자가 잘생겼나?”
“어휴, 잘생기기만 했습니까? 풍채도 아주 늠름하니 바람직하잖아요. 아, 안타깝게도 전하보다는 쪼끔 못생겼습니다.”
“쓸데없는 소리 마라.”
테렌스는 이런 농담을 받아주는 법이 없었다.
레이븐은 그의 눈치를 살피다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황녀님, 정말 신탁의 주인이시긴 한가 봐요. 때마침 그 아가씨처럼 도움 되는 사람이 나타났으니 말이에요.”
“그래. 이것도 운명이라면 운명이라고 할 수 있겠지.”
“저대로만 계속해 주신다면 정말 성공하실 것 같아요.”
“당연한 말을.”
테렌스는 고개를 살짝 숙였다.
그리고 가죽 장갑이 끼워진 오른손을 가만히 쥐었다 폈다.
날카로운 통증은 여전했다.
***
다음 날 아침 이른 시간.
켄드릭이 발레리를 데리고 황태자궁 집무실로 찾아왔다.
테이블에 앉은 두 사람에게 레이븐이 두꺼운 양피지를 한 장씩 내밀었다.
기밀유지 서약서였다. 황녀의 석실에 근무하는 사람으로서 발설해선 안 되는 사항들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자, 여기다가 정자로 이름을 적으시면 됩니다. 다 적으시면 제가 인증 마법을 걸 거예요.”
레이븐이 서약서 맨 아랫부분을 가리키며 설명했다. 그는 어쩐지 켄드릭 쪽으로 밀착해 있었다.
켄드릭은 단번에 서명을 마쳤다.
옆을 보니 발레리는 아직 헤매고 있었다.
뭘 쓰긴 한 것 같은데. 맞는지 틀리는지 긴가민가한 것 같았다.
발레리의 서약서 하단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Valerie Rodinson’
글씨체는 괴발개발 엉망진창이었다. 켄드릭은 철자가 맞는지 살펴보려고 미간을 확 좁혔다.
풋. 역시나 철자가 틀렸다. 켄드릭이 웃음을 터뜨리자 발레리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야, 나 틀렸지? 어디 틀렸는지 빨리 말해. 지금 고치게.”
“나이가 몇인데 b랑 d를 아직도 헷갈리냐….”
“아씨, 나 d라고 썼네. 그러게 좀 제대로 가르쳤어야지.”
“야, 나는 제대로 가르쳤어. 네가 10년 동안 공부를 안 한 거지.”
발레리가 뾰로통한 얼굴로 d에 줄을 찍찍 긋더니 b로 고쳤다.
테렌스는 아웅다웅하는 둘의 모습을 무표정으로 지켜보다 입을 열었다.
“다 썼나?”
“네.”
“예, 전하.”
발레리와 켄드릭이 거의 동시에 대답했다.
“그럼 켄드릭 경은 석실로 복귀하고.”
“예, 알겠습니다.”
“로빈슨.”
“네?”
“너는 남아라.”
왜 나만 남으란 거지. 황태자의 뜬금없는 지시에 발레리는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먼저 가보겠습니다, 전하.”
켄드릭은 기다렸다는 듯 경례한 뒤 바로 석실로 떠났다.
“아 맞다, 그러고 보니 지팡이를 안 가져왔네? 저는 제 방에 좀 갔다 올게요.”
이윽고 레이븐까지 휘파람을 불며 자리를 떴다.
발레리는 문밖으로 나가는 레이븐을 흘겨보며 속으로 쯧쯧거렸다.
‘에휴, 저 뺀질이. 명색이 황태자 호위 마법사인데 지팡이를 두고 출근하다니. 정신머리가 있는 건지 없는 건지.’
다 나가고 나니 집무실에는 발레리와 테렌스 둘만 남았다.
“…지내는 데 불편한 건 없나?”
그녀의 안색을 찬찬히 살피던 테렌스가 드디어 운을 뗐다. 안부를 묻는 말씨는 퍽 부드러웠으나 발레리에겐 전혀 달갑지 않았다.
‘지금 바로 여기, 너랑 단둘이 남겨진 상황이 불편하다고 말하고 싶다. 하지만 그럴 수 없지. 넌 내 고용주니까.’
“글쎄요. 딱히 없는데요?”
“…….”
용건이 뭔지 말해야 빨리 나가든지 할 텐데.
침묵이 자꾸 길어지고 있다.
발레리는 테렌스의 입을 쳐다보며 말이 나오길 기다렸다.
입술이 살짝 벌어져 있긴 한데, 소리가 도통 안 나오니 답답했다. 엉덩이가 근질거려 참을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 배가 고파오기 시작했다. 빨리 석실로 출근해서 황녀와 함께 아침을 먹고 싶었다.
‘에라 모르겠다. 할 말 없는 것 같으니 그냥 나가야지.’
“말씀 다 하셨으면 전 이만.”
“그때 그 냇가에서의 일은….”
멋대로 몸을 일으킨 게 통했다. 테렌스의 입에서 용건이 바로 튀어나왔다.